제50화
후드 사이로 보이는 뾰족한 귀와 특이한 빛을 뿜어내는 눈, 까무잡잡한 피부.
내가 게한 영지에 온 두 번째 목표.
‘찾기 어려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훨씬 빠르고 쉽게 만났다.
더 호재인 건 그녀가 내게 관심이 있어 보인다는 것.
물론 이성적인 관심은 아니겠지만.
째깍-
난 품에 넣어 둔 시계에서 울리는 소리에 달릴 준비를 했다.
지금 당장 중요한 건, 그녀가 왜 내게 관심이 있느냐가 아니었다.
얼마 남지 않은 제한 시간.
이 안에 빠르게 여길 벗어나야만 했다.
째깍-
혹여 그녀가 날 따라오지 않는 건 걱정할 필요가 없다.
저런 적의를 보이는 경우는 대부분.
타탁-!
절대 적이 도망치지 않게 내버려 두지 않은 말이다.
싫어도 알아서 따라올 것이다.
내가 뛰기 시작하자, 그녀가 빠르게 나를 따라 뛰기 시작했다.
그녀의 신체 능력은 중급 기사 수준에 그쳤지만, 역시나 신체 능력이 뛰어난 이종족, 그중에서도 단연 ‘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엘프족답게 빨랐다.
하지만 난 지금 그녀와 마라톤을 하는 게 아니다.
탁!
‘아슬아슬했다.’
타이머가 0을 가리킨 순간, 마약촌을 벗어났다.
아마 이 이상 있었다면 암왕이 이질감을 느끼고 찾아왔을 터.
하지만 벗어났으니 문제없다.
암왕은 결코 자신의 구역을 벗어나지 않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나마 상대하기 쉬운 거지.’
이제 다음 문제는 저기 위에 숨어 있는 엘프다.
대체 왜인지 모르겠지만, 엘프는 조심스레 무기를 꺼내 들고 있었다.
일단 대화하기 전에 조금 상대해 주어야 할 듯하다.
‘무기는 활. 내가 기억하던 무기와는 조금 다르지만 비슷하다.’
그럼 상대하는 법도 간단하다.
난 그녀를 눈치채지 못한 듯, 근처를 두리번거리다 천천히 골목길을 빠져나왔다.
낡은 건물들이 주르륵 정렬된 길거리. 마차가 한 세 대는 지나갈 수 있을 법한 넓은 도로였다.
난 손가락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그 순간.
패애애앵!
허공에서 수십 개의 화살이 쏟아져 내렸다.
난 빠르게 쏟아지는 화살의 개수와 움직임을 파악했다.
‘오른쪽보다 왼쪽의 수가 확연히 적다. 일부러 움직임을 의도하는 거야.’
그건 내가 바라는 바다.
캉!
난 품에서 단검을 꺼내 들어 화살을 최소한으로 쳐 내고 낡은 건물 안으로 뛰어들었다.
생각 이상으로 낡고 좁으며 움직임이 상당히 제한될 수밖에 없는 장소다.
더불어 위로 올라갈 길은 막힌 상태.
뻥 뚫린 창문 사이로, 엘프가 눈을 빛내며 활시위를 팽팽히 당기는 게 눈에 들어왔다.
난 그녀의 팔 움직임에 집중했다.
팔의 근육이 꿈틀거린 순간.
쏘아지는 소리조차 없이 날아온 화살이 한순간에 내 왼쪽 눈동자 앞에 다다랐다.
핏!
급히 몸을 틀었으나, 내 바로 왼쪽 눈을 스치고 지나갔다.
“칫.”
짧게 혀를 차는 소리.
그와 함께 엘프로부터 마력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다시 그녀가 활을 쏠 준비 자세를 취한다.
당장이라도 빛줄기나 그런 마법으로 막아낼 수 있지만.
난 막아내지 않았다.
패애애애앵!
활대가 크게 요동치며 화살이 쏘아졌다.
이번에는 두 발.
단검을 역수로 쥐고 한쪽 팔에 휘감아 두었던 쇠사슬의 일부분을 풀어내어 휘둘렀다.
캉!
화살과 쇠사슬이 충돌한다.
화살이 위로 치솟으며 천장에 틀어박혔다.
이어 2번째로 날아온 화살을 단검으로 쳐 내어, 천장에 틀어박힌 화살과 충돌시켰다.
쿠쾅쾅!
두 화살에 담긴 마력이 폭발하며 위에 구멍을 만들어 내었다.
지금이다.
내 팔찌가 빛을 뿜었다.
<연기>
푸스으으으!
근처에 먼지가 가득 피어오르거나 연기가 있거나, 그런 경우에만 쓸 수 있는 보조 마법이다.
먼지 사이로 몸을 숨기며 위로 올라갔다.
그녀가 날 저격하지 못하도록 판자 뒤에 몸을 숨기고, 그녀가 올라올 법한 자리를 쳐다보았다.
‘저기서.’
정확히 10초 뒤.
하나, 둘, 셋.
정확한 순간에, 쇠사슬을 휘둘렀다.
“!!!”
건물을 타고 올라온 엘프를 향해 쇠사슬이 휘둘러졌다.
뛰어난 신체 능력을 바탕으로 한 반사 신경으로 반응한 듯, 그녀가 한순간에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이 또한 내 계산 이내.
<빛줄기>
“!!!!”
강한 빛줄기가 그녀가 피하려는 위치를 정확히 지나갔다.
실제론 아무 살상력 없는 빛줄기에 불가하나, 강한 마법이라 판단한 그녀는 차라리 살상력이 부족한 쇠사슬에 맞겠다는 듯 두 팔을 방어 태세로 들어 올렸다.
쇠사슬이 사정없이 그녀의 몸을 후려갈겼다.
퍽!
“큭!”
짧은 단말마와 함께 쇠사슬에 얻어맞은 그녀가 튕겨 나갔다.
튕겨 나간 그녀는 아무것도 붙잡지 못한 탓에 건물 아래로 추락했다.
하지만 추락하던 와중에도 날 정확히 응시하며 활시위를 당겼다.
‘이번이 마지막 패턴.’
<응축>
난 바로 머리 위에 마력을 일부 뽑아내어 응축시켰다.
작은 구를 본 그녀가 급히 나에서 마력 응축구로 표적을 변경한다.
화살이 쏘아지며 응축된 구를 정확히 명중시켰다.
콰아아아아앙!
터지는 소리와 함께 연기가 피어올랐다.
당연하지만 난 조금도 데미지를 입지 않았다.
애초에 마력 응축구는 살상력 없이 마력이 모여 있던 것에 불가하니까.
[마력 폭주도 : 86%]
이건 그녀의 움직임을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하기 위한 수단에 불가하다.
탁.
발이 바닥에 닿는 소리.
난 그녀가 움직이는 루트를 떠올리며 그녀가 있을 방향으로 쇠사슬을 휘둘렀다.
촤라라라락!
“!!!”
그녀가 반응하려 했으나.
연기를 뚫고 정확히 그녀를 노린 쇠사슬을 막아내기엔 아직 역부족이었다.
휘리리릭!
쇠사슬은 그녀를 후려치는 대신 팔과 몸통을 단단히 휘감아 버렸다.
팔과 몸통이 휘감긴 그녀가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으나.
궁수의 목숨이나 다름없는 팔이 묶인 채로 마력이 빨려 들어가는 이상, 그녀가 더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큭…….”
난 그녀의 몸을 완전히 구속하고 눈을 마주쳤다.
당혹감과 분노로 얼룩진 눈을 보며 웃었다.
“왜. 마력이 없어지니까 당황스러워?”
“너…… 대체 내게 무슨 짓을……!”
“입이 아직 무겁진 않네. 덜 데었나 봐.”
난 그녀의 후드를 잡았다.
“자, 잠……!”
“어차피 일부러 조금씩 보여 주고 있었잖아. 신비주의인 척하지 말지? 저기 범죄자 소굴에 던져 버리기 전에.”
휙!
강한 저항력을 무시하고 후드를 젖혔다.
엘프의 맨얼굴이 제대로 드러났다.
엘프라는 이미지와 달리 태닝한 듯한 그을린 피부, 황금빛에 가까운 노란 눈동자, 뾰족한 귀.
내가 기억하는 이미지와 일치했다.
오른쪽 귓불에 이상한 문양의 피어싱이 박혀 있다는 점까지 같다.
“따라와.”
난 그녀의 목에 단검을 가까이 댔다. 살짝 피부가 베여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안 따라오면 죽인다.”
“……내게 무슨 짓을 할 셈이냐.”
“글쎄.”
난 잔뜩 경계 어린 눈을 보며 웃었다.
“네 친구 좀 만나자고. 사막 엘프, 어디에 있는지 알지?”
“……!!”
* * *
버둥버둥!
구속한 엘프는 남는 보따리에 집어넣은 채 이동했다.
소리를 죽이고 조심스레 여관으로 돌아와, 뒷문으로 들어갔다.
내 얼굴을 본 직원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편하게 내 방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쿵!
“나 왔어.”
“오, 오셨어요……?!”
“왔…어…?”
왜인지 모르겠지만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은 둘이 날 반겼다.
뭐야. 여기 안은 시원한데?
난 의문을 가졌지만, 일단 나중에 알아보기로 하고 보따리를 내려놓았다.
쾅!
“그건 뭐예요?”
“일거리. 그리고 둘 다 나가 있어.”
“네?”
“방 하나 더 예약해 뒀으니까 거기에 있으라고.”
지금부터 할 일은 아이가 보기엔 너무 격한 일이니까.
내 말에 아벨라와 스칼라는 잠시 가기 싫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내 분위기를 느낀 건지, 별말 하지 않고 일어나 방을 나섰다.
난 보따리를 풀었다.
안에서 묶인 채 버둥거리다가 보따리가 풀린 걸 알아차린 듯, 잠시 움직임을 멈춘 그녀의 안대와 재갈을 풀었다.
입에서 침을 뚝뚝 흘린 그녀는 빠르게 근처를 훑다가.
여기가 어디인지 알아차린 듯,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귀족이었나……!”
그녀는 잔뜩 혐오하는 표정으로 내게 으르렁거렸다.
“귀족이 명예를 모르고 나를 겁탈하기 위해 여관까지 끌고 오는……!”
퍽!
“시끄럽다.”
난 개소리를 지껄이는 그녀의 복부를 발로 걷어찼다.
복부가 걷어차인 그녀가 마른기침을 토해 내며 몸을 꺾었다.
“친구야.”
난 그녀의 앞에 쭈그려 앉아, 턱을 움켜쥐고 억지로 눈을 마주했다.
선명한 공포와 두려움이 담긴 눈에 내 얼굴이 비친다.
난 조금의 미소도, 웃음기도 머금지 않고 있었다.
“네가 자꾸 내 성격을 건드린다면, 네게 어떤 짓을 할지 몰라.”
덜…… 덜덜…….
두려움에 살짝 떨리는 턱을 붙잡은 손에 힘을 줬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으스러질 정도로 힘을 주며, 난 웃어 보였다.
“네 손가락을 꺾은 다음에 빈민가에 던져둘 수도 있고, 아니면 팔다리를 잘라 놓은 다음에 아주 좋은 향수를 뿌린 채 범죄자 소굴에 던져 줄 수도 있어. 어떤 삶을 원해?”
“……시, 시끄럽다! 네게 차라리 그렇게 될 바에 나 스스로-”
“아니면 네가 그리 좋아하는 동족들한테 마약을 퍼트려도 좋겠네.”
“!!!”
“그것도 싫으면.”
난 그녀에게 아주 작게 속삭였다.
“너와 암왕 사이의 계약을 깨트리든가.”
“……!!!”
방금 전까지 크게 소리치던 그녀가 꿈틀거렸다. 누가 보면 당장이라도 공격해도 이상치 않을 모습이나.
턱을 놓아주자, 그녀는 내게 고개를 조아리며.
아까까지만 해도 거칠게 반항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온 몸을 덜덜 떨었다.
“제발……. 제발……. 계약만은…….”
난 그녀를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뒤에 있던 의자를 끌고 와 앉고서는 턱을 괴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부디…… 계약만은 건들지 말아 주십시오…… 당신이 하라는 거 전부 다 하겠습니다……. 제발…….”
암왕과 그녀 사이의 계약.
현재도 미래에도 나와 암왕, 그리고 이 엘프만이 알고 있을 계약이며.
암왕에겐 너무나 하찮은 계약이나, 그녀 본인에겐 무엇보다 소중하고 중요한 계약이었다.
“내가 어떻게 알게 된 건진 궁금하지 않아?”
“아, 아닙니다. 전혀, 전혀 궁금하지 않습니다.”
그게 깨지는 순간, 그녀는 중요한 모든 걸 잃을 것이다.
본인의 몸보다도 훨씬 소중한 모든 걸.
“그래?”
난 그녀에게 살짝 몸을 기울였다.
“그럼 사막 엘프에 대해 말해.”
“……어, 어떤 사막 엘프…….”
“데자트. 지금 그녀는 어디에 있지?”
난 여유로운 분위기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아주 잠시간 망설이는 듯하던 그녀는, 결국 입을 열었다.
“그는…….”
그와 마지막으로 연락한 위치와 장소, 그리고 특징까지.
모든 정보를 말한 그녀가 몸을 덜덜 떨며 말했다.
“그, 그러니 부디 자비를…….”
“그래.”
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턱을 쥐어 고개를 들게 했다.
훤히 드러난 그을린 목.
여유 있는 왼손으로 목을 움켜쥐었다.
이대로 힘을 주면 부러트릴 수 있다.
원래라면 이대로 목을 꺾어 죽여야 하지만.
‘쯧.’
스칼라와 함께 있으니, 이 방에서 죽이긴 좀 그렇다.
스칼라의 능력이 조금 더 일찍 개방된 만큼, 나름 중급 기사 수준인 엘프가 죽는다면 뭔갈 느낄 수도 있다.
죽이는 건 밤에.
“컥.”
뒷목을 쳐서 기절시킨 다음.
스칼라가 이놈에 대해서 느끼지 못하도록 손가락에 내가 끼고 있던 마력 흡수 반지를 끼워 주고, 보따리 안에 다시 넣었다.
작은 창고 역할을 하는 문을 열어 안에 처박아 두고, 문을 단단히 잠갔다.
‘이러면 모르겠지.’
혹시 모르니 청소 아티팩트까지 발동시켜 방 안을 깨끗하게 만든 다음.
문을 열고 나갔다.
아마 둘 다 옆방에 있을…….
“…….”
“…….”
복도에 남은 두 쌍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왜 둘 다 여기에 있어.”
“도련님이 금방 나오실 거 같아서…….”
“나도…….”
하아.
뭐, 상관없나.
난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둘에게 손짓했다.
둘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아벨라.”
“네?”
“배고파.”
“아……! 금방 가져올게요!”
이때까지 굶어서 그런가 배가 고프네.
난 몸에 누적된 피로감을 느끼면서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었다.
“…….”
스칼라는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내가 단단히 잠근 창고 방을 응시했다.
신기해서 그런가? 원래 여관에는 저런 문이 없으니까.
아니면…….
‘알아차렸나?’
문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스칼라는 조심스럽게 내게 다가왔다.
아.
생각해 보니까 나 피 묻어 있을 텐데.
“스칼라. 오지 마. 나 뭐 묻었…….”
꽈악-
그녀는 내 제지에도 불구하고 다가와 내 옷자락을 잡았다.
스칼라는 맑은 눈동자로 날 쳐다보며, 작은 입술을 열었다.
“저… 사람…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무슨 소리야?”
“저 안에 갇힌… 사람… 엄청… 싫어하고 있잖아…. 당신….”
……뭐야. 어떻게 알았어?
난 당혹감에 떨리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렸다.
그리고 뻔뻔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잘못 들은 거겠지.”
“……거…… 짓말…….”
하지만 그녀는 한순간에 내 거짓말을 간파하고.
옷자락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면서 날 조심스럽게 올려다보았다.
“거짓… 말… 말고… 나한테…… 사실을…… 말해 주면…… 안…… 돼……?”
“…….”
“무슨… 잘못을… 저질러서…… 그리… 싫… 어해…?”
‘무슨 짓을 저질렀냐라…….’
설마 이걸 너한테 들을 줄 몰랐는데.
나는 그녀에게 말하는 대신, 살짝 시선을 올려 천장을 쳐다보았다.
게임을 플레이한 지 2년째 되던 시점.
그때의 나는 아직 미숙했다.
라온이란 캐릭터에 대해 적응도 제대로 끝나지 않았고, 게임 자체도 명확한 방향성을 잡지 못하고, 계속되는 채치로 이곳저곳이 뒤바뀌는 혼돈의 시즌.
그 당시, 나는 처음으로 스칼라와 동료가 되었었다.
‘아저씨! 이거 봐!’
‘아저씨 아니라고 했지.’
‘그럼 오빠라고 할까?’
‘그건 싫어.’
‘그럼 아저씨지! 헤헤! 그보다 이 꽃 좀 봐! 되게 이쁘지 않아?’
스칼라는 라온이 처음으로 얻은 동료였다.
성장 가능성을 발견함에 따라 함께 전투해 나갈 수 있기도 하고, 특이 체질 때문에 라온을 살릴 수도 있는.
그만큼 나는 스칼라라는 캐릭터를 중요히 여겼고.
라온 리그벨토 또한, 그녀에 대한 호감도가 쌓여 그녀를 동생처럼 대했다.
라온 리그벨토가 유독 스칼라를 마음에 들어 한다는 걸 안 뒤로는, 나 또한 그녀라는 캐릭터에 몰입하여 상당히 아꼈다.
하지만, 아티팩트를 찾기 위해 게헨 영지에 온 날.
그날, 라온 리그벨토는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귀족 나으리.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나 본데, 내가 하나 알려 줄게. 여긴 여자아이가 살긴 너무 버거워. 왠지 알아? 나 같은 미친년은 이런 여자애만 보면 아주 눈이 돌아가거든! 꺄하하하하핫!’
툭.
스칼라의 잘린 목이 내 발치에 나뒹굴었다.
본래라면 눈동자가 박혀 있어야 할 곳에서는 피와 뇌수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몸뚱어리 또한, 천 쪼가리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엘프의 발밑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라온 또한, 그녀에게 살해당했다.
‘…….’
그 뒤로 그녀를 완전히 죽이기 위해 패턴을 분석하고 또 분석했다.
그리고, 모든 걸 분석하고 100번을 싸우면 100번 이기게 된 순간.
나는 몇 번이고, 스칼라가 죽은 모습 그대로 그녀를 죽이고, 또 죽였다.
그 과정에서 스칼라가 죽는 모습을 몇 번이고 봤다.
“글쎄.”
너는 이걸 모르겠지.
그때 내가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를.
게임 캐릭터에 애정을 가져, 그로 인해 느끼는 행복과 즐거움으로 삶을 유지해가던 내 심정을.
중독자라고 놀림 받더라도, 미친 듯이 게임에 몰입하고 또 몰입해야만 다음 날에 떠오른 해를 볼 수 있던 내 삶을.
아마, 그녀는 평생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해할 필요도 없었고.
이 과거는 누구도 알아선 안 된다.
오로지 나 혼자만이 알아야 하는 과거다.
그 누구도 듣지도, 알지도, 보지도 못해 사라져야 할 악순환.
“아무 일도 없었어.”
“……거짓…… 말…….”
스칼라는 눈가에 눈물을 매단 채 내게 다가왔다.
내 팔을 양쪽으로 쓱쓱 치우더니, 무릎 위로 폴짝 뛰어오른다.
내 가슴팍에 이마를 기대며 안기다시피 한 스칼라가 작게 말했다.
“슬퍼…… 하고 있잖아…….”
“기분 탓인데.”
“아니야…….”
고개를 도리도리 저은 스칼라가 날 조심스럽게 껴안았다.
“슬퍼… 하는 건…… 싫어…….”
이런 애가 말괄량이가 된다니.
기분이 묘하다.
이게 아빠가 된 기분인가?
“……그래.”
난 스칼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슬퍼하지 않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