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화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녀는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들었다.
언제 눈물을 흘렸냐는 듯, 눈물 자국이 조금도 남지 않은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럼 많이 바쁘겠구나.”
“예. 아마 그러겠죠.”
“그럼 이제 가 봐야 하지 않겠니?”
보통은 조금 더 시간을 보내지 않겠냐고 하지만.
그녀는 내게 죄책감, 그걸 넘어서 죄악감까지 품고 있었다.
그걸 떨쳐 내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했다.
원래의 게임에선 손쓸 틈 없이 이미 망가진 채로 만나게 되지만.
아직은 그 정도는 아니니 괜찮겠지.
‘나중에 만났을 땐 더 멀쩡하시려나.’
속으로 중얼거리며.
나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다음에 또 오겠습니다.”
“……그래.”
잠시 흠칫한 그녀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내 뺨을 쓰다듬었다.
“몸조심하렴.”
* * *
끼이이이이이익…….
녹슨 문을 열고 나오자, 상쾌한 공기가 우릴 반겼다.
조금 인위적인 느낌을 지울 순 없지만, 그래도 탑 안의 공기가 워낙에 퍽퍽하다 보니 이 정도로도 충분히 상쾌함을 느꼈다.
“킁…… 훌쩍…….”
“킁…… 코… 막혀….”
근데 나는 멀쩡한데 이 둘은 왜 훌쩍거리는 거야?
난 진심으로 이해가 가지 않아 둘을 돌아보며 물었다.
“둘이 왜 우는 거야?”
“그냥…… 슬퍼… 서….”
“저도… 훌쩍….”
둘 다 감수성이 너무 풍부한 거 아닌가?
난 고개를 저으며 주머니 안에 넣어 둔 휴지를 둘에게 던져 주었다.
둘은 자매라도 되는 것처럼 동시에 휴지를 잡아채고는 코를 휑! 하고 풀었다.
아유 시원해라.
“이제 좀 진정됐냐?”
“……한 장만…… 더…….”
“저도…….”
“둘 다 감기 걸린 것도 아니고.”
난 혀를 끌끌 차며 휴지를 건넸다.
둘은 휴지를 아예 동나게 하겠다는 의지가 보일 정도로 코와 눈물을 닦았다.
절그럭, 절그럭.
갑옷의 이음새 부분이 부딪히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언제나 탑의 문 앞을 지키던 문지기가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
[선물이다.]
기사는 내게 검 하나를 던져 주고는, 다시 본래 자리로 돌아갔다.
방금까지 기사가 차고 있던 검이었다.
다른 검을 꺼내어 허리춤에 거는 걸 보면, 여러 자루 들고 있는 듯했다.
‘이걸 왜?’
한 번도 이런 건 받아 본 적이 없는데.
아니, 아예 기사가 검을 바꾼다는 소리조차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나름 오랜 시간 써 왔을 검이며, 성장을 함께했다면 손에 익고 업적이 고스란히 스며들었을 터.
이런 걸 그냥 넘겨준다니…….
‘어머니를 일찍 만나서인가?’
검집에서 조심스레 검을 꺼내어 보았다.
스르르릉-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검이 뽑혔다.
슬쩍 드러난 검날에 햇빛이 반사되어 번쩍였다.
“……좋은 검이네.”
귀족들의 성처럼, 대대로 주인이 쌓은 업을 물려받는 ‘명검’의 수준은 아니지만.
대장장이가 혼신을 다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충분히 훌륭한 검이었다.
검날도 충분히 날카롭고 단단하며, 손잡이의 촉감도 훌륭하다.
‘어머니가 쓰던 검은 아닌가.’
그녀는 평민들이 오를 수 있는 한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높은 경지에 올랐다.
이는 그녀의 스승이 선대로부터 이어져 오는 혈통의 도움 하나 없이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었고.
그녀 또한 그런 스승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음과 동시에, 스승의 업이 고스란히 담긴 검을 물려받았다.
‘그 검이야말로 명검이었지.’
백작가 이상의 가문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검의 수준은 아니더라도.
한 인간이 선조의 도움 없이 높은 경지에 올랐다는 것에 찬사를 보내어, 웬만한 명검보다 뛰어난 성능을 가진 검이었다.
한 번 휘두른 순간 어떤 마법이든 베어내고 멀리 있는 적이라고 한들 벨 수 있다.
그 검을 받아내려면 최소한 소드 마스터 혹은 대마법사의 경지는 되어야 하리라.
‘그 정도는 되니까 가주랑 결혼했겠지.’
다만, 지금은 심마에 빠져 경지가 많이 무뎌졌을 것이다.
수명이 잔뜩 늘어나고 건강한 육체가 유지되는 하는 그녀의 몰골이 엉망인 것만 봐도 유추가 가능했다.
‘심마라…….’
내가 그걸 낫게 할 수 있을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결국은 정신적인 영역이라, 내가 직접적으로 해결해 줄 방법이 뚜렷하지 않았으니.
‘……일단 그 건은 나중에.’
난 울음을 거의 멈춘 아벨라와 스칼라를 불렀다.
그리고 스칼라에게 검을 내밀었다.
“자. 네 거야.”
“내… 거…?”
“어.”
스칼라는 믿기지 않는 듯, 바로 검을 받지 않고 이리저리 살폈다.
냄새도 맡아 보고, 살짝 쿡쿡 찔러도 보고, 살짝 멀리서 빤히 바라보기도 하고…….
그녀 나름의 경계를 보고 있으니, 아벨라가 내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마법사 아니었어요?”
“둘 다 잘할 거야. 그리고 속삭이지 마.”
“네에…….”
그녀는 몸 전체가 코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몸 전체를 이용하여 마력을 다루는 특이 체질.
이건 그녀가 마력으로만 에너지와 영양분을 얻을 수 있는 돌연변이라서 가진 체질이었다.
그래서 나도 살짝 탐내긴 했었지만.
방법이라곤 그냥 죽었다가 환생하는 것밖에 없어 포기했었지.
“……잡아도… 돼……?”
“어. 칼 안 뽑히게 조심하고.”
스칼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검을 두 손으로 받았다.
상당한 길이의 장검인지라 그녀의 키랑 비슷할 정도로 컸다.
한 가슴까지 올 정도로?
그녀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무거… 워….”
“좀 들다 보면 익숙해질 거야.”
난 칼자루를 만지작거리는 그녀에게 말을 덧붙였다.
“내가 이걸 네게 주는 이유는. 네 몸 하난 스스로 지킬 줄 알아야 해서야.”
아벨라는 평범한 하녀이니, 비교적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작았지만.
그녀는 고양이 수인.
심지어 수인들이 혐오하는 돌연변이였다.
같은 종족을 만난다면, 그녀를 죽이려 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끄덕끄덕.
이를 알고 있는 건지,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귀를 쫑긋거렸다.
경청하는 자세.
난 말을 이었다.
“내가 널 지켜 주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일은 늘 있는 법이야. 그러니 이 정도는 익혀 두는 게 좋아.”
“……알겠…… 어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난 가벼이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참 이럴 땐 귀여운데 말이지.
이런 애가 나중에 가서 사고치고 말 안 들을 걸 생각하니…….
머리가 다 아프네.
난 살짝 머리를 털며 근처에 굴러다니던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왔다.
“자. 그럼 다루는 방법을 알려 줄게.”
“!”
그녀는 귀를 쫑긋 세우며 내 자세를 따라 했다.
아직 팔에 힘이 없어서 자세를 제대로 잡지 못하고 휘청이는 게 귀여웠다.
난 반지에 저장된 마력을 사용했다.
[빛줄기.]
“자. 이 빛처럼, 네 체내의 마력을 움직여 봐.”
내 기억 속에는 그녀의 전투 방식이나 특유의 마력 흐름이 모두 담겨 있었다.
그에 따라 빛줄기를 움직였다.
스칼라는 끙끙거리며 자세를 잡은 뒤, 내가 빛줄기를 움직이는 걸 자세히 보고 천천히 따라 해 본다.
“끄응…….”
마력을 다루는 게 상당히 어려운 듯, 끙끙거리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이건 스스로 해야 하는 일이다.
그냥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그녀의 체내에 담긴 마력이 꿈틀거렸다.
두근.
‘됐다.’
그녀의 마력이 조금씩 움직인다.
그동안 배가 빵빵해질 정도로 내 마력을 빨아들인 탓에, 상당한 양의 마력이 그녀의 몸에 있는 마력이 흐르는 통로를 따라 움직였다.
그리고 제대로 개봉되지 않아 뻑뻑한 통로를 억지로 넓혔다.
스칼라는 아예 눈을 감은 채 움직임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 순간부턴 그녀 스스로가 해야 했다.
난 빛줄기를 거두고 가만히 그녀의 흐름을 봐주었다.
“…….”
“…….”
한 30분이 흘렀을까.
마력은 혈관처럼 온몸에 이어진 마력 회로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남은 건, 심장 부근에 자리 잡은 최종 목적지 하나.
한 번에 뚫기 위함인지, 심장으로 마력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두근, 두근, 두근.
심장 소리가 여기까지 들릴 정도로 울려 퍼졌다.
“침착하게 해.”
이번에는 내가 도와주어야 한다.
자칫하다간 저대로 심장이 터져 죽을 수도 있으니까.
“내가 옆에 있어. 불안해하지 말고 차분히. 그리고 다급하게 하지 말고. 네가 확신을 가졌을 때. 그때 뚫는 거야.”
내 말에 마력의 움직임이 조금씩 느려진다.
그러나 착실히. 그리고 확실하게 마력이 모여들며, 제대로 자리를 잡고, 심장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잘하고 있어.”
내 칭찬에 그녀의 입가에 작게 미소가 지어진다.
그리고 보다 완벽하고 깨끗해진 움직임으로 심장 부근에 마력이 모여들었다.
오로지 한 번에, 목적지에 다다르기 위해 마력이 잠시 멈춰 섰다.
그리고.
……으직!
심장으로 향하는 통로를 가로막고 있던 벽을.
단번에 부숴 버렸다.
‘좋아! 깔끔해!’
리타이어만 100번 했을 때 겨우 성공했던, 가히 ‘완벽’이라 할 수 있었던 때와 똑같이, 깨끗하고 완벽하게 통로가 개통됐다.
‘이러면…….’
속성까지 열 수 있다. 이대로 눈을 뜨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다면…….
이런 내 바람이 통한 것일까.
……화르르륵.
그녀의 검 끝에 작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동시에 그녀가 눈을 떴다.
“!!!”
불을 보고 깜짝 놀란 그녀가 살짝 뒤로 튕겨 나왔다.
다행히 뒤에 있던 아벨라가 잡아 주어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검 끝에 피어오른 마력을 본 스칼라가 날 빤히 바라봤다.
“부…… 불……?”
“그게 네 속성이야.”
난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네 마력이 가진 성질. 색은 붉은색이네. 제일 무난한 색이야. 다루기 좋은 색이기도 하고.”
“…….”
그녀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불꽃을 바라보았다.
사실 붉은 불꽃은 의외로 사람들에게서 선호되지 않았다.
푸른 불꽃이나, 검은색 불꽃이나, 하얀 불꽃이나…….
‘화’ 속성이라고 한들, 모두 같은 색은 아니며.
색에 따라 미묘하게 성질이 다르다.
검은색 불꽃은 불길함을 상징하며, 신수 같은 고귀한 존재를 상대하는 데에 특화되어있고.
푸른 불꽃은 붉은 불꽃보다 단순히 위력이 50%가량 더 강한 대신 통제가 어려우며.
하얀 불꽃은 불길함을 상징하는 것들을 상대할 대 유리했다.
물론 붉은색이 다른 색에 비해 가진 장점이 없는 건 아니었다.
‘범용성이 넓다는 거지.’
다만, 다른 캐릭들은 굳이 붉은색을 선택할 이유가 없었다.
범용성이 높아 봤자 검사든 마법사든 하나만 할 테니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다들 마법을 이해하고 익히기보다는 스킬로 저장해두고 사용하기만 했으니까.
하지만 스킬로 마법을 다루는 게 아니라 마력 통제와 술식을 외워 마법을 사용해야 하는 그녀에겐 유리하게 사용할 수 있고.
상황에 따라 검사가 될 수도, 마법사가 될 수도 있으니.
범용성이 높으면 높을수록 그녀가 가진 장점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내 속성…….”
작게 입을 달싹인 그녀는 굳게 입을 다물더니, 불을 보는 눈에 힘을 주었다.
불꽃이 작게 일렁거렸다.
하지만, 더한 변화를 보여 주기 전에.
픽!
갑자기 불꽃이 꺼져버렸다.
“……어?”
스칼라가 당황한 목소리를 낸다.
나도 그녀가 가진 마력을 확인해 봤지만, 마력은 아직 충분했다.
왜 꺼진 거지?
“괜찮아. 당황하지 말고 다시 켜 봐.”
“……끄으으응…….”
스칼라는 끙끙거리며 다시 마력을 운용했다.
이미 통로가 한 번 개방된 탓에 마력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심장에 닿기까지 아무런 문제도 없을 정도로.
하지만.
“……안… 나와…….”
이상하게도 그녀의 불꽃은 제대로 피어오르지 않았다.
마법의 기초는 속성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상당히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대체 왜 안 되는 거지?
‘너무 갑자기 열었나?’
원래는 한 1년 후에나 개봉할 수 있는 수준이긴 하다.
하지만 그 당시와 지금의 신체 능력치 같은 조건은 비슷하니 되는 게 정상인데…….
‘일단 지켜볼까.’
속성을 다루지 못한다고 당장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다.
다만, 마법사로서는 ‘경지’가 오르는 데에 한계점이 뚜렷해진다.
그녀처럼 초창기에 개방한 경우에는 반드시 속성에 걸맞은 수련을 해야 한다.
만약 다른 방식으로 수련한다면, 다시 갈아엎고 차분히 몸에 속성을 익혀야 하기 때문에 너무 비효율적이었다.
즉. 현재로서는 마법을 다루어선 안 된다는 뜻.
그럼 검사로 키우면 되지 않겠냐고 할 수 있지만, 검사도 마찬가지다.
검기나 강기를 만드는 건 물론, 신체를 강화하는 데에도 마력이 들어간다.
신체를 강화할 때, 얼마나 몸이 마력에 적응되어있고 잘 스며들었는지에 따라 효율과 성능이 좌지우지되니, 차라리 서둘러 익히기보다는 기다리는 게 나았다.
지금 익혀 봤자 말짱 도루묵이나 마찬가지인 상황.
‘기다리는 수밖에.’
나는 잔뜩 시무룩해진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 주고, 이마에 살짝 맺힌 땀을 닦아 주었다.
“나중에 필요할 때면 열릴 거야. 그동안 천천히 연습해 보자.”
“……알았…… 어…….”
“스칼라! 이리 와. 언니가 땀 닦아 줄게. 왜 이리 땀을 많이 흘려? 무서웠어?”
“……쪼끔…….”
“좀 쉬어. 잠은 나중에 여관에 가서 자고.”
“……여…… 관?”
“어.”
난 정원 너머를 바라보았다.
“이제 슬슬 나가야지.”
가문에서 얻을 건 모두 얻었다.
기껏해야 남은 건 마벨에게 요구한 검인데…….
지가 살고 싶으면 보내 주겠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