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화
라온 리그벨토의 몇 없는 장점 중 하나.
그건 바로 대륙 어딜 가던 돈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달칵!
“후우…… 배부르다…….”
10번째 그릇을 싹 비운 아벨라가 배를 통통 두들기며 그릇을 내려놓았다.
옆에서 그릇을 치워주던 주인 아저씨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10인분인데…….”
“앗. 혹시 제가 제대로 값을 안 드렸나요?”
귀신 같이 중얼거림은 들은 아벨라가 묻자.
주인 아저씨는 절대 아니라는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니. 그건 아닐세. 오히려 넘치게 주었지. 다만…….”
그는 아벨라 앞에서 바로 말하기 좀 그런지.
큼, 작게 헛기침을 하면서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평범한 사람 뱃속엔 들어갈 양이 아니라 말이지…… 허허…….”
“아하…….”
물론 아벨라는 들어버렸지만 말이다.
주인 아저씨가 완전히 멀어지자, 아벨라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물었다.
“제가… 좀 많이 먹었나요?”
“어.”
주로 용병이나 노동 관련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오는 주점인만큼.
웬만한 음식들의 양이 평균치를 상회할 정도였는데, 그걸 혼자 10인분이나 먹었으니…….
흑심을 품고 다가오려던 남자들도 질색한 표정을 지으며 물러났으니 할 말은 다 했으리라.
‘원래 나도 저 정도는 먹었는데.’
이 거지 같은 몸뚱아리는 절반은커녕 10분의 1이나 겨우 먹었다.
이거 설마 치킨 반마리도 다 못 먹는 거 아니야?
“살은 안 찌는데….”
“나도 안 쪄.”
아벨라의 중얼거림에 가벼이 대꾸해주면서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슬슬 가자.”
“네!”
아벨라도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몸이 무겁지도 않은 지 의자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읏쌰.”
나도 의자에서 내려왔다.
아벨라는 뽈룩 튀어나온 내 양 옆구리를 보며 물었다.
“안 불편하세요?”
“딱히.”
그녀가 말하는 건 양 옆구리에 칭칭 감아둔 쇠사슬을 말하는 것이었다.
한 옆구리에만 모아두는 걸론 부족해서 양옆으로 감아둔 탓에 움직임도 불편했고 무게도 상당했다.
“불편하면 언제든 들어드릴게요!”
“필요 없어.”
리그벨토 영지라면 모를까.
엄연히 ‘남’의 영지에선 쇠사슬을 대놓고 끌고다닐 순 없었다.
내 신분을 들이내밀면 뭐가 불가능하겠냐만은, 그런 신분 남용을 다른 형제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을 뿐더러.
‘너무 눈에 띈단 말이지.’
범죄자로 오인되어 또 뒷골목에 끌려가는 건 사양이다.
뭐, 그래도 혹시 모르니 언제든 싸울 수 있도록 풀리기 쉽게 묶어두긴 했지만 말이다.
“…….”
“…….”
우리들의 대화를 듣기라도 한 듯, 남자들이 날 빤히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여자애가 남자의 짐을 드는 모습이 아주 아니꼬운 모양.
저거 보니까 인터넷에서 온갖 스윗한 척하던 새끼가 떠오르네.
난 소매 사이로 뻐큐를 날려주고 몸을 휙 돌렸다.
“저, 저, 저새끼가……!”
“저 쓸데없이 무섭게만 생긴 새끼가……!”
“저기요. 혹시 저희 도련님한테 뭐라 하셨어요?”
“헉! 네, 네? 아닙니다! 절대 아니고 말고요!”
‘병신들.’
난 병신들을 지나쳐 주점 밖으로 나왔다.
휘이이잉-
슬슬 저녁이 되어가는 탓에 쌀쌀해진 바람이 뺨을 스쳐지나간다.
살짝 눈이 따가워 감았다가 뜨자, 게임 속에서나 보던 영지가 눈에 들어왔다.
리그벨토 영지 이후로 두 번째 보는 영지.
‘에이드 영지.’
백작가인 에이드 가문이 직접 다스리는 곳으로, 정통과 유서가 깊은 영지…… 라는 설정으로 기억한다.
‘유저들 사이에서도 꽤 평가가 좋았지.’
깨끗하게 포장된 도로나, 드문드문 설치된 마법 아티팩트, 백작가가 관리하는 영지답게 잘 조성된 인프라는.
비록 리그벨토 영지만큼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쾌적한 플레이가 가능케 해주었고.
특히 노을이 진 바닷가는, 현실에서는 보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운 광경이라 관광 명소 중 하나로 꼽혔었다.
‘덕분에 연인으로 플레이하는 애들도 많이 왔었고.’
어우 옆구리야.
아무튼.
에이드 영지의 ‘대외적’인 이미지는 좋았던 곳이라는 얘기다.
‘다만…… 뒤로 가면 좀 구리지.’
사실 어두운 면이 없는 데가 어디에 있냐 싶겠냐만은.
아무튼 나처럼 오랜 시간을 플레이해온 사람만 알 수 있는 에이드 영지의 어두운 면이 있다.
‘노예 시장.’
게임 내에선 ‘악명’을 상당수 쌓아야만 들을 수 있는 비밀 장소다.
놀라운 점은 이곳이 제국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곳이라는 것.
‘불법으로 규제해서 범죄자들이 요리저리 피하는 것보다, 아예 합법으로 하는 대신 법을 빡세게 거는 게 낫다고 판단했었지.’
효과는 꽤 있었다.
다른 이종족의 심기가 거슬리지 않도록 노예를 거르는 게 가능했고, 상당한 수수료로 꽤 이득을 챙겼으며, 악질 높은 범죄자를 몰래 체포하는 것이 가능했으니까.
또한. 상당히 악명 혹은 명예가 높아야만 알 수 있는 고급 정보라는 것까지.
영지의 명성은 떨어지지 않되, 멋 모르는 귀족들에게 노예 시장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일을 담당한다는 축은함과 존경까지 받을 수 있으며 돈까지 얻을 수 있다.
‘리그벨토 가문이 이걸 얻으려고는 했지만.’
안타깝게도 한 가문에 너무 많은 힘이 몰아지면 안 된다는 이유로 공작가가 아닌 일개 백작가가 담당하게 되었으니.
‘뭐, 그래도 나한텐 상관없지.’
리그벨토 가문에 있던 에이드 가문에 있던 내가 갈 수 있는 장소였으니까.
‘지금 당장은 갈 필요는 없겠지.’
현 우선 순위는 용사를 만나는 것.
“아벨라.”
“넹?”
또 언제 샀던 건지, 도마뱀 꼬치를 물고 있던 아벨라가 날 바라봤다.
양 볼이 빵빵하게 아주 찔러주고 싶게 생겼다.
찔러볼까 하다가, 컨셉 유지를 위해 참기로 하고 손을 내밀었다.
“지도.”
“아, 네!”
아벨라에게서 받은 지도를 본 나는 대충 위치를 가늠했다.
‘노예 시장이랑은 완전히 반대편이군.’
그렇다는 건.
‘해변가에 있다는 건데…….’
이상하다.
분명히 혹시 모를 히든 피스나 히든 이벤트를 찾기 위해 돌아 다녀봤었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주로 정보 수집하던 애한테 의뢰했을때에도 마찬가지였고.
‘이런 데에 영웅이 있다고?’
아무리 기록되지 못한 비운의 영웅이라고는 하나.
분명히 영웅이라면 상당한 강함이나 독특함이 있을 텐데도 못 찾았다는 건.
‘던전? 뭐 그런 건가?’
뭐 아는 게 없으니 추측할 수가 없네.
……아니면 설마 금발 태양 양아치 그런 건 아니겠지?
‘형. 이런 더러운 정보는 필요없죠?’
‘그럼 있겠냐?’
‘모솔인 주제에 왜 이런 거에 예민…… 켁켁!’
‘뒤질래?’
‘죄송, 죄송! 악! 나 죽으면 사망 패널티 받아요!’
……이러한 이유로 금발 태양 양아치, 줄여서 금태양 따위의 정보는 전혀 수집하지 않았다.
게임에서도 금태양은 ‘3류 악역 같은 존재’라 직접 언급했으니 절대 중요 캐릭터로 나올 리 없다는 생각에 말이다.
설마 여기서 변수가 일어난 건가?
“앗.”
아벨라의 말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갑자기 지나간 마차에서 떨어진 종이를 집은 아벨라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도련님…… 에이드 가문의 가주님께서 직접 만나자고 하시는데요……?”
“나중에 만난다고 해.”
“네??”
그 늙은이는 지금 만나기엔 조금 껄끄러웠다.
또 내가 처음으로 그녀를 봤을 때와 달리 조금 젊을 때이니, 성격이 어떻게 다를 지 모른다.
그러니 충분히 대처가 가능할 때 가는 게 옳았다.
“아무리 그래도 가주인데…….”
“지금 난 직계로 방문한 게 아니니까.”
그래서 그 더럽게 긴 줄도 뚫고 왔다.
허리 아파 뒤지는 줄 알았지.
“그러니까 나중에 내가 직접 직계로 만난다고 전해.”
그리 말하면서.
난 근처 집의 지붕 위를 바라보았다.
분명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지만.
내겐 분명한 확신이 있었다.
‘그 변태 새끼라면 저기에 있겠지.’
&
“리그벨토 가문의 자제가 여기에 왔다고요?”
탁.
에이드 가문의 상징인 푸른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여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브루아이 에이드.
현 에이드 가문의 공식 후계자.
자연스레 그녀의 찻잔을 치워준 집사가 말을 이었다.
“예. 라온 리그벨토라고 합니다.”
“라온 리그벨토라면…… 제가 아는 그?”
“예. ‘쓰레기’로 유명한 그 작자입니다.”
라온 리그벨토에 대한 악명은 다른 가문이라면 모를 수 없을 정도로 높았다.
설마, 그 리그벨토 가문에서 그런 쓰레기가 나올 줄이야!
뭐, 언제나 찬란히 빛나는 불꽃은 없듯이 가끔씩 불길이 사그라들 때도 있지만.
다시 타오르기 위해, 라온이라는 장작을 사용하지 않은 점은 더더욱이 라온에게 시선이 가도록 만들었다.
‘혹시 쓰레기가 아닌 게 아닐까?’
귀족들 사이에선 그런 음모론이 들 정도였으니.
그러나 평가는 결국 그가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난 이후로도 바뀌지 않았고, 라온에겐 쓰레기라는 낙인이 찍혀버렸다.
하지만.
그런 평가가, 요새는 조금씩 뒤바뀌고 있었다.
“요새는 조금 다르다고 들었는데.”
“이제 막 입수한 정보이지만. 이번에 아예 직계의 자리까지 되찾았다고 합니다.”
“음…….”
추방자를 체포하는 데에 큰 공을 올리질 않나, 아카데미를 갑작스레 자퇴하지 않나, 자퇴하기 전 필립 오스큘라를 대련에서 압도적인 실력으로 꺾어버리지 않나…….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되어버린 것처럼, 라온은 갑작스러운 변화들을 보였으며.
덕분에 식었던 관심이 조금씩 그에게로 다시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실제로 그가 다른 사람일리는 없으니, 아마도 라온이 바라는 바가 있을 터.
‘마치 모두에게 알리는 게 목적인 것처럼.’
나, 라온이 달라졌다고.
‘그래서 우리가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던 건가?’
원래라면 라온 리그벨토에 대한 정보는 쉽게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워낙에 라온 리그벨토가 쓰레기 수준이다 보니, 그의 수준이나 악명은 널리 퍼져있지만.
갑작스레 라온이 바뀌고 어떤 변화를 보였는지, 직계의 자리마저 되찾았다는 정보는 알려지지 않아야 했었다.
하지만 마치 누군가가 알아주길 원하듯이, 이에 관한 정보는 거의 숨겨지지 않고 있었다.
‘가주의 입김이 들어갔거나.’
그 얼음장 같은 냉혈안이 그럴 리 없지만.
‘아니면 슬슬 하락세를 걷는 건가?’
만약 그게 정말이라면 놓칠 수 없지.
리그벨토 가문이 단단히 움켜쥐고 있는 사업들 중 하나만 가져온다고 해도 에이드 영지의 1년 예산은 충분히 상회할 터.
앞으로의 기대 수익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흠흠! 아가씨?”
“아.”
생각에 빠져 있던 브루아이는 집사의 헛기침에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해요. 버릇이…….”
“이해합니다. 가주님께서 아가씨를 그리 가르치셨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알아요, 알아. 이거보다 더 중요한 거라는 거.”
그녀는 받아온 서류를 펼쳤다.
“라온 리그벨토. 그가 우리 영지에 들어와 있다는 게 중요하겠죠.”
“예. 맞습니다. 대체 무슨 목적으로 여기에 온 건지…….”
“이번에 직계가 되었다고 했으니, 후계자 경쟁에 참여할 게 뻔하네요. 저흴 경쟁에 끌어들이고 싶은 건가?”
“막말로 아가씨와 그자와 혼인이라도 한다면…… 그리고 라온 그자가 가주가 된다면.”
“저희 가문은 꽤 큰 힘을 얻게 되니까요.”
하지만.
그녀는 코웃음을 치며 서류를 넘겼다.
“아무리 바뀌었다고 해도 벨 리그벨토. 그 괴물 같은 작자를 넘을 수 있을 리가 없어요.”
“……동의합니다.”
벨 리그벨토.
리그벨토의 피를 현 가주만큼이나 짙게 이었다고 평가받을 정도의 실력과 명예를 보여주는 후계자이며.
다른 귀족들이 그와 경쟁하는 다른 형제들은 ‘절대 이길 수 없다’라는 생각을 품고 있을 정도로 뚜렷한 힘을 보여준 자다.
당연히 공식 후계자인 브루아이 에이드는 그를 직접 만나보았고.
단숨에 그에 대한 평가를 내릴 수 있었다.
‘절대로 적으로 돌리면 안 된다.’
그가 가진 건 힘뿐만이 아니었다.
오로지 ‘가주’가 되기 위해 쌓아온 명망과 명예, 그리고 인망.
그 힘은 아직 후계자에 불가한 그의 신분을 웬만한 고위 가문보다도 더 높다고 느끼게 만들어 주었다.
제아무리 라온 리그벨토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후계자 경쟁에 참가한다고 하더라도.
절대 그 괴물을 꺾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나는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리그벨토 가문과의 관계는 좋게 유지해야 하니 무시할 순 없지만.
자칫해서 벨 리그벨토의 심기를 거슬리게 된다면 어떤 불이익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가문이 사라지거나 하진 않겠지만, 상당한 큰 피해를 입겠지.
‘어떻게 해야 할까…….’
톡, 톡, 톡.
그녀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라온 리그벨토.
과연 그와의 관계가 내게. 아니, 가문에 도움이 될까?
‘차라리 지금 제거하는 게 옳지 않을까?’
만일 이걸로 벨 리그벨토의 호의를 살 수 있다면…….
드르륵!
그때.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