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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가 망캐 마법사로 살아가는 법-28화 (28/124)

제28화

“아, 저, 그리고 도련님…….”

“왜.”

눈가의 눈물 흔적을 깔끔하게 지운 아벨라가 말했다.

“아까, 마벨 도련님이 직접 찾아오라고 말씀을 전하셨어요.”

“그래?”

하긴.

현재로선 개인적으로 만남을 가진 유일한 형제이자.

‘나는 후계자 경쟁에 참여할 생각이 없다’라는 의견을 유일하게 아는 형제이기도 했으니.

‘이제 내가 권한을 되찾았으니, 한 번 더 나를 살펴보고 싶겠지.’

“언제 만나자는 말이 있었나?”

“아뇨. 그냥 알아서 찾아오시라고…….”

“그럼 나중에 가지.”

하지만 지금은 그 형제보단 다른 일이 더 중요했다.

“밖에 볼 일이 있으니까.”

“…밖에요?”

“그래. 따라오기 싫으면 따라오지 마.”

“아뇨! 갈게요!”

아벨라는 내 옆에 찰싹 붙으며.

“헤헤.”

바보처럼 헤실헤실 웃음을 흘린다.

난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으며,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떠나기 전에 서둘러 찾아가야 했으니까.

‘뭐, 찾는 건 어려운 건 아니지만.’

그는 언제나 그렇듯,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으니까.

워프게이트를 타고 리그벨토 영지에 도착해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로 향했다.

그러니, 키가 멀대처럼 크고 신사 같은 복장을 입은 남자와.

그 아래에서 꺄악거리고 있는 여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진짜 모델 같으셔요!”

“하하, 고맙네. 예쁜 아가씨들이 그리 칭찬해주니까 이거 몸둘 바를 모르겠군.”

“제, 제 그림 한 장만……!”

“허허. 그림 정도야 얼마든지 해줄 수 있네. 자. 이 이쁜 아가씨를 어떻게하면 더 이쁘게 그려줄 수 있을까?”

“저기… 저도….”

“미안하지만 예약이 가득 차 있어서.”

“…네?”

다가오는 남자는 쳐내면서 말이다.

‘저놈의 여자 밝힘증.’

뭐, 차라리 저런 게 나으려나.

빙의하기 전 현실에서는.

별 걸 가지고 다 오해하거나, 아닌 걸 알면서도 일부러 엮어버리는 시대였으니까.

남자는 멀리하고 여자는 가까이하라- 라는 철학을 가진 푸슈엘은 여자에 미친 놈이라는 소리를 들을지언정 이상한 오해는 받지 않을 테니 말이다.

“아, 이제 슬슬 가봐야겠군.”

여자들을 쓱쓱 그려준 푸슈엘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림이 마음에 든 듯, 여자들은 그림을 품에 꼭 안은 채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꼭 건강하세요!”

“허허, 고맙네. 좋은 시간 보내시게.”

푸슈엘은 여자들에게 손을 살랑살랑 흔들어주고, 이내 내게 다가왔다.

챙 넓은 모자를 쓱 들어올려 눈을 드러낸.

푸슈엘이 씩 웃었다.

“오늘 만나서 다행이군. 내일이면 떠나려고 했는데 말이야.”

* * *

우리는 인적이 드문 공원의 벤치에 앉았다.

“자. 마시게. 거기 아가씨도.”

“아뇨… 괜찮아요….”

아벨라는 푸슈엘이 내민 음료수를 거절했다.

어차피 나도 목이 안 말랐으니 굳이 받지 않았다.

“흠. 그럼 나 혼자 마셔야겠군.”

결국 3잔을 혼자 비우게 되니 푸슈엘이지만.

별로 기분이 나쁘진 않은 듯, 단번에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던 도중, 공원에 들어오던 한 여인이 조심스럽게 푸슈엘에게 다가왔다.

“저기……!”

“미안하네만, 잠시 손자와 이야기할 게 있어서.”

“아, 네. 네!”

자연스럽게 다가온 사람을 쳐낸 푸슈엘이 씨익 웃었다.

“왜 이리 이 늙은이에게 인기가 많으니 궁금하지?”

“?”

안 궁금한데.

하지만 그는 자신의 TMI를 잔뜩 풀고 싶은 듯,

“신을 믿는 자에겐 언제나 순수한 이들이 끌리는 향기가 풍기는 법이라네. 순수한 여인들이라면 더욱더 그러하지. 그들은 호기심이 아주 많거든.”

그의 말에 아벨라의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아무래도 자기는 조금도 끌리지 않는데, 설마 순수함이 없기 때문인가- 하고 생각하는 듯해보였다.

‘생각이 너무 잘 읽히는데.’

표정 관리 좀 가르쳐야 하나.

나처럼 그녀의 생각을 읽은 듯.

푸슈엘은 짧게 웃음을 터트리며 그녀를 다독여주었다.

“이미 따르는 자가 있는 자에겐 안 통하지만 말일세.”

물론, 저건 정확한 게 아니었다.

내가 아는 정확한 정보로는.

푸슈엘이 뿜어내는 자연스러운 기운에도 영향이 있지만.

그의 나이를 향한 존경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 세계의 인간 평균 수명은 그리 길지 않다.

귀족들이야 마법이나 아티팩트, 사제들의 치료 등 여러 방면으로 병이나 상처를 치료할 수 있지만.

평민은 그런 걸 접하는 게 어려우며.

먹고 살기 위해 몸을 혹사시키거나, 마법사나 검사들의 싸움에 휘말려 비명횡사하는 등.

여러 죽음의 요인이 많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늙은이라는 것 자체만으로 시선이 끌리고 주목을 받는다.

그런데 푸슈엘은 가진 힘으로 흉하지 않게 늙었고, 머리도 풍성하며, 모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몸을 가지고 있었으니.

인기가 없는 게 이상한 것이었다.

“난 그런 이야기를 하러 온 게 아닌데.”

쓸데없는 이야기는 여기까지.

내가 단칼에 잡설을 자르고 본론으로 들어가려 하자,

푸슈엘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궁금한 게 있어서 날 찾아온 거겠지.”

“던전은 어떻게 찾아냈지?”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푸슈엘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 늙은이가 오래 살면서 얻은 능력…… 이라고 생각해주면 좋겠군. 말하기가 참으로 어려운 능력이라 말이야.”

“그럼 찾는 이유는? 안은 망자들이 가득했어. 무슨 연관이라도 있나?”

“원래라면 말해주지 않겠지만…….”

푸슈엘의 눈에 호의가 담겼다.

“난 자네가 참 좋아. 자네 같은 눈을 가진 사람을 정말 오랜만에 보거든. 그러니 특별히 말해주겠네.”

내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푸슈엘이 말을 이었다.

“난 누군가를 찾고 있네.”

“누군가?”

“그래. 이름이나 그런 건 알려줄 수 없지만……. 내게 무엇보다 소중한 사람이지.”

당연하지만.

나는 푸슈엘이 누굴 찾는지 알고 있었다.

‘잊혀진 신.’

푸슈엘이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건.

아직 나에 대한 신용도가 그리 많이 쌓여 있지 않은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본인도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점이 컸다.

‘누가, 어떻게 없앤 건지 모르지만.’

토속 신앙이나 작은 마을에서나 내려오는 설화 같은 것도 아니고.

수많은 사제를 이끌고, 한때는 대륙을 호령했던 초월적인 존재의 이름을.

직접 모시던 사제의 머릿속에서조차 지워버린다니.

같은 ‘신’이라 해도 과연 가능할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푸슈엘 본인은 그걸 모르지.’

이미 오랜 시간이 흘러 바스려졌어야 할 푸슈엘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이 충격적인 진실을 모르기 때문이기도 했다.

초월적인 존재, 그것도 신에 대한 모든 정보를 지워버린 자를 대항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아버린다면.

스스로 바스라질 가능성이 높았으니.

폭주를 하던, 스스로 숨통을 끊던.

혹은 홀로 신전에 쳐들어가던 말이다.

“그래서, 찾았나?”

“아니.”

푸슈엘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안타깝게도, 이번 던전도 아닌 것 같더군.”

“그 사라진 사람은 던전 근처에만 돌아다니나?”

“아니. 그건 아닐세. 아마도…… 던전 안에 있을 걸세.”

“그럼 안에 들어가서 찾지.”

“난 던전 안에 들어갈 수 없거든.”

그리 말하는 푸슈엘의 목소리엔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씁쓸함, 무능함, 슬픔…….

온갖 감정이 뒤섞인 것을 직접 두 귀로 들으니.

‘…기분이 좋진 않네.’

비록 게임 내에서 ‘캐릭터’로서의 만남이라도.

나름 친분을 쌓여 친우라 부르던 이가 저런 감정을 보이는 게, 썩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티 내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었나?”

“그렇네. 안에 들어갈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가 찾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있거든.”

이와 관련된 이야기는 더 나누고 싶지 않은 것인지.

푸슈엘은 말을 더 잇지 않고 주제를 돌렸다.

“안엔 누가 있었지?”

“허주.”

“허주…… 허주…… 흠, 허상의 존재인가.”

푸슈엘은 수많은 던전을 조사해왔기에 던전 내의 정보에 대해서 해박한 편이었고.

이 세계에서 없는 단어인 ‘허주’를 듣고도 곧바로 이해했다.

“그자가 자네에게 무어라 저주를 하지 않던가?”

“내 몸을 탐내고, 자기가 죽을 뻔 하자 자기처럼 쓸쓸히 죽을 것이다, 너 같은 괴물의 삶은 뻔하다, 뭐 그런 소리를 하더군.”

“신경 쓰지 말게. 그들은 평범한 삶을 산 게 아닌, 인과율과 업보가 쌓여 ‘죄’를 받는 이들이었으니 말일세.”

내게 작은 위안을 던진 푸슈엘에게 물었다.

“그자가 당신이 찾는 자일 수 있다는 가능성은 없나?”

“없네.”

푸슈엘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분은 그러실 분이 아니거든.”

하긴.

애초에 신이었다면 내가 처참히 발렸을뿐더러.

신은 우주의 힘을 담았다는 설정의 최종 보스까지 다다르는 순간까지도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궁금한 건 다 해소가 됐나?”

“그래.”

“다행이군. 오늘 만나면 또 언제 만날지 모르니 말일세.”

푸슈엘은 자리에서 끄응 일어났다.

“난 다시 던전을 찾아 떠날걸세. 이 늙은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서둘러 그분을 찾고 싶거든.”

난 고개를 끄덕였다.

뭐…….

사실 푸슈엘이 찾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몇 회차는 아예 푸슈엘이 말한 신만을 찾아다녔으나.

어디에서도 신에 대한 정보는 찾을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와 별개로 응원은 해주고 싶었다.

“화이…….”

“참.”

작게 응원의 말을 건네려다가.

푸슈엘이 무언갈 떠올린 듯 품을 뒤적거리며 말하자.

난 말한 적 없다는 듯이 입을 꾹 다물었다.

“자네에게 한 사람을 소개해주고 싶네.”

“?”

“혹시, 영웅이라고 아는가?”

“사람 이름?”

“아닐세. 말 그대로 ‘영웅’이지. 비록 역사에 기록되지 못한 비운의 영웅이지만.”

비운의 영웅?

……그런 게 있었나?

“한 번 만나볼 생각이 있나?”

……이건 처음 보는 루튼데.

* * *

‘3일 이내로 여기로 가게. 자네에게 도움이 되는 영웅이 잠들어있을 테니. 아, 깨우는 건 자극이 되지 않냐고? 걱정말게. 아무런 자아 없이 잠들어있던 거니, 별문제는 없을 거야. 단. 3일이란 시간은 꼭 지키게.’

영웅(英雄). 대체로 세상을 구하거나 나라를 구하거나, 큰일을 저질러 많은 이들을 구원한 이들에게 붙는 칭호다.

대체로 영웅이란 칭호엔 긍정적인 이미지가 많아, 선망을 보내는 이도 많지만.

‘나한텐 아니란 말이지.’

워낙에 많은 소설이나 웹툰에서 영웅은 정의로운 존재보다는 탐욕스러운 존재로 많이 소모되기도 했고.

이 게임에서도 영웅이란, 위대하고 대단한 인물보다는.

그저 능력이 뛰어나고 괴물 같은 힘을 가진 이들에게 붙는 경우가 많았다.

조금이라도 그들에게 족쇄를 걸기 위해서 준 것이라는 눈물 없인 들을 수 없는 이유 때문이었다.

‘비운의 영웅이라고 해도.’

말이 비운이지, 실제론 거지 같은 성격 때문에 잊혀졌을 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나마 내가 아는 영웅들은…….’

이미 모두 죽은 걸 넘어, 모두 시체 형태로도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오랜 시간이 지나.

더 이상 ‘이름’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으니.

그래도 혹시 머릿속으로 최대한 영웅과 관련되거나 비슷해 보이는 정보들을 끄집어냈다.

촤르르르-

벽에 내가 가진 수많은 공략과 보스에 대한 정보가 쭈르륵 나열되는 환상이 보인다.

하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푸슈엘이 언급한 ‘영웅’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흠…….’

이걸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 위치면 한 번 가야 하긴 하는데…….’

반드시 거쳐야 하는 루트 중 하나인 ‘노예 시장’.

문제는 지금 내가 찾는 사람이 과연 지금 있는가였다.

내가 노예 시장을 가는 시기는 대체로 게임 스토리상 반년 후, 아카데미 스토리를 억지로 3분의 1 정도 진행했을 시기 즈음이었다.

‘반드시 만나긴 해야 하지만.’

그 당시의 동료들은 상당히 어린 나이였고, 상처도 문제도 별 없던 걸 보아 노예가 된 지 얼마 안 된 걸로 추정됐었다.

즉.

지금 가도 만날 가능성이 없다는 것.

또한.

‘그 영웅이란 게 내게 도움이 될까?’

푸슈엘의 눈은 확실하다.

오랜 시간을 살았을뿐더러 신을 가장 가까운 데에서 모시며, 다른 사제들마저도 이끌었던 ‘사도’였으니.

다만.

‘저 양반의 좋다의 기준점은 이해할 수가 없단 말이지.’

강해지는 데에 좋은 거라고 해서 받았더니, 영약이나 아티팩트가 아닌 영물 반열에 들어간 문어이질 않나.

힘을 키우는 데에 좋다고 해서 받았더니 그 힘이 몸의 힘이 아니라 어른의 힘이질 않나…….

암튼, 눈은 확실한데 기준점이 좀 이상한…… 그런 양반이었다.

‘그래도 가서 나쁠 건 없으려나.’

만일 동료가 없다고 해도.

동료가 나중에 노예가 되었을 때, 고통받거나 스트레스 받지 않도록 환경을 개선해줄 수도 있고.

애초에 노예가 되지 않도록 만들어버릴 수도 있었다.

정확한 시기는 모르지만, 대충 어디에 있을지는 추측 가는 곳이 여러 군데 있었으니까.

영웅도 과연 내게 이득이 될지는 모르지만.

겪어보고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 판단하는 게 낫지, 안 겪어보고 후회하는 것보단 낫다.

‘3일이란 시간을 생각하면…… 바로 가야겠지.’

난 잠시 고민하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간제한이 있기도 하고.

이런 정보는 상황이 미뤄질수록 어찌 변할지 모르니.

최대한 빠르게 확인하는 게 좋을 것이다.

‘뭐, 내가 딱히 준비해야 하거나 하는 건 없으니까.’

정해진 루트도 없으니.

내가 가는 길이 곧 내 길이었다.

“아벨라.”

“네?”

“외출 준비해.”

“앗! 그럼 말씀드리고 올게요!”

아벨라는 곧바로 내 말을 이해하고 어디론가로 후다닥 뛰어갔다.

5분 후.

웬 가방을 메고 온 그녀가 해맑게 웃어 보였다.

“준비 끝났어요! 넉넉잡아 1주일 잡았는데, 괜찮을까요?”

“그래.”

난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리려다가, 힐끔 보인 가방에 발을 멈췄다.

…가방이 너무 가벼워 보이는데?

“짐은?”

“보세요!”

“?”

그녀가 그리 말하며 가방….

이 아닌 앞주머니를 쭉 내밀었다.

아벨라의 주머니 안엔 온갖 물품이 담겨 있었다.

……이거 아티팩트였어?

“준비 끝!”

“…가방은?”

“이건 혹시 모르니까!”

‘그냥 가방에 넣어두는 게 낫지 않냐?’

하지만, 헤헤 웃어 보이는 그녀를 보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한숨보다는 웃음이 나오려고 하는 거, 이거 정상이냐?

나는 꿈틀거리려는 입꼬리를 누르고 몸을 돌렸다.

“가자.”

“네!”

* * *

치이이이-

텅 빈 주전자 안에 물이 차오르며 끓기 시작한다.

마벨 리그벨토는 가만히 주전자를 바라보았다.

투명한 주전자 너머에는, 그 누구도 비치지 않았다.

‘감히…….’

마벨의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딸그락.

그의 손에 잡혀있던 찻잔에 반쯤 금이 간 채 탁자 위에 놓였다.

금이 간 사이로 흘러나온 물이 아래에 놓인 서류를 적신다.

마벨은 서류에 적힌 내용을 보며 입가를 비틀었다.

‘감히 날 무시하고 밖으로 나가?’

자신을 만나러 오라고 하고, 시간을 딱히 언급을 하지 않았지만.

그거야 ‘동등한’ 관계에서 편할 때 오라는 뜻이지, 이제 막 직계로서 자리를 되찾은 라온과 자신의 관계에선.

지금 당장 찾아오라는 말과 동일했다.

‘감히 내게 언질도 없이 고위 던전을 없앤 것부터 마음에 안 들었거늘.’

정 자신과 협력하고 싶었다면, 고위 던전 같은 훌륭한 아티팩트나 유물 수급처인 던전이 나타난 걸 곧바로 알려야 했다.

하지만 그는 무얼 했는가.

알리긴커녕, 나타난 문지기를 없애버리고 홀로 들어가 격파해버렸다.

‘대체 어떻게 그런 힘을 가질 수 있던 건지 모르겠지만.’

지금 그는 온몸으로 위험함을 뿜고 있었다.

이래선, 마벨이 원하는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가 원하는 건 명백한 상하관계. 서로 동등하게 힘을 나누는 형평적인 관계를 원하는 게 아니었다.

‘……너는 벨 리그벨토의 시련을 클리어했지.’

큰형님이자 가장 위험한 적인 벨 리그벨토의 시련은 고위 던전으로 대체되었고.

만족스러웠던 것인지, 곧바로 직계의 권한을 돌려주었지만.

‘아직 내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아직 자신의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이걸로 테스트하겠다.’

그가 후계자로서의 자리를 탐내는 건지.

아니면, 말 그대로 ‘직계’에서 멈출 것인지.

‘만약에, 내 자리를 탐낸다면.’

마벨 리그벨토의 눈에서 이글이글 경계심이 피어올랐다.

‘널 죽이겠다.’

지금 상황만으로 벅찬 이상.

그는 혹여나 모를 적을 만들 생각이 전혀 없었다.

돌아온다면 곧바로 호출하리라. 그리고 확인 후에, 적으로 판단된다면 죽이리라.

그리 생각하며 라온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래서 어디에 있다고?”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

일주일 동안 라온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마치 그를 농락하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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