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화
벨 리그벨토.
현재 후계자 경쟁에서 선두로 달리고 있는 형제이자.
형제들 중, 가장 강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아버지인 가주의 피를 가장 짙게 물려받은 이다.
‘그러면서 제일 인성도 괜찮은 편이었고.’
성격이 무뚝뚝하긴 하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귀족으로서 배움을 받았기에 명예를 알고 기품이 있으며.
자신이 언젠가 가주가 될 것이라 확신하기에 수하라 해도 절대 무시하지 않고 하대하지도 않았다.
비록 자신이 혐오하는 종류인 귀족답지 못한 자에 내가 들어있어 존중을 받지 못했지만.
‘지금은 좀 다를 거 같은데.’
적어도 지금의 그가 보이는 눈동자는.
절대 나를 무시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빠르게 나왔군.”
“예.”
우우우웅-
벨 리그벨토의 몸에서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한순간에 뭉쳐 있던 사람들이 마치 홀린 것처럼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하고.
푸른 막은 밖에서 흘러들어올 밖과 안의 소리를 모두 차단하여.
우리 둘만을 세상으로부터 격리시켰다.
“어떻게 네가 던전이 열릴질 알고 대비했는지, 어떻게 클리어했는지, 어떤 방법을 썼는지 묻지 않겠다.”
둘만이 남은 세상에서.
벨 리그벨토가 가주를 닮은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단 하나.”
“…….”
“이 하나에 대답 여부에 따라, 너에 대한 처우를 결정하겠다.”
“예.”
“묻겠다, 라온 리그벨토.”
벨 리그벨토에게서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쿠구구구구우……!
땅거죽이 뒤엎어지고 공기가 사납게 변할 정도로 거칠게 휘몰아치는 마력!
마치 폭풍이 휘몰아치는 것 같다.
폭풍을 불러낸 벨 리그벨토가 말했다.
“너는, 네가 ‘리그벨토’의 혈통이라 당당히 말할 수 있느냐?”
‘시련.’
이건 그의 시련이다.
지금 이 던전을 없앤 이유.
그리고 클리어해낸 방법을.
‘귀족’답게, 그리고 ‘혈통답게’ 당당히 클리어했는지에 대해 묻는 것.
“제 몸에 흐르는 피는 바뀐 적이 없습니다.”
처음 봤을 때처럼 당돌하게 형제들을 무시하는 투로 대답해선 안 된다.
진짜 귀족처럼 당당하게.
그리고 고귀하게.
“제 몸에 흐르는 피는 언제나 고귀하고 위대했으며. 저 또한 그 피를 이어받은 몸.”
나는.
라온은 당당히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이때까지 제가 증명하지 못했을 뿐, 저는 한 번도 직계이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네 혈통을 의심하면 어떡할 것이냐.”
“그럴 일이 없도록 만들어야죠.”
“…….”
“그런 의심을 받는다면 제가 부족하다는 것이니. 그러니, 누구든 제가 직계라는 걸 알아볼 수 있도록. 그리고 인정하도록. 그리고 당당히 설 수 있도록.”
라온이 언제나 바라왔던 것처럼.
허리도 움츠리지 않고 어깨를 당당히 펴면서.
머리 두 개가 차이 날 덩치의 벨 리그벨토 앞에서도.
“그렇게 나아가려고 합니다.”
나는 따박따박 대답했다.
“지금의 정도론 당신에겐 부족합니까?”
얼마든지 더 시련을 내려보라는 당당한 자신감까지.
“……좋다.”
벨 리그벨토의 기운이 가라앉았다.
언제 폭풍처럼 휘몰아쳤냐는 듯이 잔잔해진 바람 속에서.
“라온 리그벨토.”
벨 리그벨토의 등 뒤에 책 한 권이 떠올랐다.
오로지 리그벨토의 혈통만이 볼 수 있는 책이며.
‘직계’로 인정받은 이의 이름만이 오를 수 있는 명예의 책.
책이 열려 드러난 페이지에.
“너의 자리를 돌려주겠다.”
사각, 사각-
뚜렷한 ‘라온 리그벨토’라는 이름이 새겨졌다.
* * *
리그벨토 영지는 순식간에 잔잔해졌다.
언제 도시에 고위 던전이 열리기라도 했냐는 듯이.
사람들은 금세 활력과 분위기를 되찾았고.
벨 리그벨토가 떠난 후, 나는 나를 기다리고 있던 아벨라와 만날 수 있었다.
“도려니이이이이임!”
와락!
아벨라가 내 품에 와락 안겨들었다.
그녀는 내 품에 안긴 채 팔을 더듬더듬 만지더니, 상처가 없는 걸 확인하고 왈칵 울음을 터트렸다.
“흐어엉…… 기다렸어요…….”
“왜 울어.”
“훌쩍… 안 다친 게 다행이라서….”
한참을 훌쩍이던 아벨라는 눈이 퉁퉁 붓고 나서야 뒤로 물러났다.
난 잠시 아벨라를 보고 눈을 의심했다.
“볼이 홀쭉한데.”
“도련님이 없으시니 입맛이 없어서…….”
그리 많이 먹던 입맛이?
하루 식비만 (한국 기준으로)10만원이 넘게 깨졌는데?
심지어 디저트로만 깨진 게 이 정도인데?
“…….”
뭐, 그럴 수도 있지.
난 아벨라의 볼을 쿡 찔러보려다가 말았다.
괜히 캐릭터 컨셉 깨질라.
휙-
“앗! 도련님! 어디 가세요!”
“집.”
피곤하다.
오늘 받은 보상을 정리하고 앞으로 에피소드에 쓸 방법을 생각하고 또 따져야 할 게 많지만…….
그래도 지금 당장은 쉬고 싶었다.
“배 안 고프세요?”
“안 고파.”
“하루 동안 아무것도 못 먹으셨을 텐데…….”
내가 던전에 있는 동안, 밖에선 하루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아벨라는 한숨도 안 자고 나만을 기다리고 있었고.
“넌 잠이나 자.”
“헤헤…….”
내 말에 아벨라는 실실 웃음을 흘렸다.
그 모습을 잠시 가만히 바라본다.
그녀는 왜 그러냐는 눈으로 날 보지만.
지우지 못한 다크서클과 피곤해 보이는 안색. 그리고 울음으로 퉁퉁 부은 눈가를 보니.
‘……아무래도 내가 조금 잘못 생각한 거 같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잠시 나와 눈이 마주치던 그녀는 뭔갈 떠올린 듯 품에서 무언갈 꺼내었다.
“참! 도련님! 혹시 이거 읽어보실래요?”
“?”
“요즘 인기인 로맨스 소설인데……! 표지도 검정색이고, ‘달’이라는 글자밖에 없는데 인기가 많다고 하니까…… 저도 한 번 읽어보려고 이렇게 가져왔……!”
난 소설의 설명이 이어지자, 망설임 없이 그녀에게서 책을 빼앗아 갈기갈기 찢었다.
북북!
“갖다 버려.”
“앗……. 네에…….”
게임에서도 아벨라가 가끔 날 달래주기 위한 용도로 가져오는 책이기에 어떤 내용인지 알고 있다.
‘시발 역겹게.’
왜 멀쩡하게 생긴 것들이 같은 성별끼리 부비적거리는 지 이해가 안 된다.
“잠이나 자러 갈 거야.”
“네에….”
“그러니까 너도 자.”
내가 절대로 가져오지 말라는 의지를 내비쳐 보이자.
아벨라는 잔뜩 침울해졌다.
“아직 못 읽었는데…….”
“읽지 마.”
“네엡…….”
그 깨끗한 머리를 더러운 걸로 더럽히지 마.
* * *
잘 잤다.
오랜만에 푹 잔 기분이었다.
라온에게 빙의한 이후로.
조금의 뻐근함도 느끼지 않고 잠에서 깨어났다.
‘재생 아티팩트가 좋긴 좋아.’
언제나 몸이 삐그덕거리는 건.
전날 열심히 움직인 후유증과 자는 사이에도 쇠사슬을 차고 있어야 해 부담되는 무게 때문이었으나.
재생 아티팩트가 생긴 이상, 이제 그런 뻐근함에 고통받을 일이 사라졌다.
덕분에 나는 편안함 속에서 오늘 할 일을 정리할 수 있었다.
‘오늘 할 건…….’
우선 ‘직계’로서의 권한이 돌아왔으니.
중후반부에서나 할 수 있던 일을 진행시킨다.
‘설마, 직계의 권한까지 전부 돌려줄 줄은 몰랐지만.’
라온의 몸에 흐르는 피는 분명한 리그벨토의 피였고, 그러하기에 밖에서는 힘을 쓸 수 있었다.
그러나 가문 내부에서는 피를 이은 사람에 불가했다.
직계라면 가져야 할 힘을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지금부턴 아니다. 직계 중에서도 직접 가주에게 ‘인정’을 받은 벨 리그벨토를 통하여 권한을 되찾았고.
이제, 가문 내에서 제대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봤자 다른 형제들과는 싸울 생각이 없지만.’
자살 행위나 다름없는 짓을 할 생각은 없다.
더불어, 만약 내가 이길 수 있다고 해도.
후계자가 되는 것부터 문제가 될뿐더러, 만일 가주라도 되어버린다면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팠다.
‘난 살아남기만 하면 돼.’
살아남는 데에 많은 옵션이 추가될 뿐.
내 최종 목표는 여전했다.
‘가문 내에서 영향력을 확장하려면….’
우선 가주로부터 떠봐야 한다.
나를 ‘라온’이 아니라고 의심하는지, 의심하지 않는지.
만약 의심한다면…….
‘골치가 아프지.’
정말 드물게 일어나는 것이긴 하지만.
‘라온 의심 루트’라 하여 가주가 라온을 라온이 아니라고 의심하는 루트가 있다.
내가 미쳐서 개떡같이 스토리를 진행하거나, 아버지의 심기를 건드린다면 절대 일어나지 않을 루트이긴 하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가주를 만나는 건 오늘 중이 낫겠지.’
오늘 안에 처리할 일이 많았다.
‘일어나서 아이템들부터 정리하고, 아벨라가 스트레스받을 요소와 내 권한을 정리하고, 다음에 나가서 그를 만나야겠어.’
‘그’가 언제 영지를 떠날지 모르니.
만날 거라면 서둘러 만나는 게 좋을 터.
그리 생각하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벨라. 어디 있…….”
“…….”
입이 턱 막혔다.
라온과 전혀 닮지 않은 색이 바랜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다.
회색빛의 눈동자.
마치 고귀한 늑대처럼 느껴지는 회색 눈동자가 날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다.
‘……가주가 왜?’
당신 잘 안 나타나던 양반이잖아.
갑자기 왜 나와?
“……가주님을 뵙습니다.”
하지만 그런 의문과는 별개로 내 몸은 빠르게 예의를 차렸다.
아무리 직계라도 보여야 하는 예의를 보이자.
가주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예의를 차리는구나.”
“이제 직계의 자리를 되찾았으니까요.”
가주가 말하고자 하는 건 ‘아버지이니 편하게 대해라’인 걸 안다.
하지만 그걸 무작정 따를 순 없다.
어디까지나 나는 가주, 아버지를 미원하는 ‘라온 리그벨토’였으니까.
‘원래라면 이런 태도도 의심을 살 수 있겠지만…….’
미리 가져다 놓은 예의범절 관련된 책이 도움이 된 모양이다.
저 양반 특성상, 내 방 안의 구조나 바뀐 점은 빠르게 알아차렸을 테니까.
“…그래. 그랬지.”
가주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래서. 던전 안에서는 많은 걸 얻었느냐.”
“예. 많은 걸 얻었습니다.”
“어떤 배경이었지?”
“죽은 자들이 떠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죽은 자들이라…….”
가주는 뭔갈 떠올리는 듯, 살짝 말끝을 흐렸고.
원래라면 조용히 있겠지만.
‘지금 떠본다.’
기회가 찾아와줬으니 먹는 게 인지상정.
나는 입을 열었다.
“예. 몇몇은 아예 인간의 행세를 하기도 했지만.”
“…….”
“티가 나더군요. 아무리 강력한 영혼을 가진 죽은 자라고 해도요.”
“그래. 죽은 자는 이미 죽은 것. 아무리 생자의 육체와 혼을 빼앗는다 해도 속일 수 없다.”
“예. 그렇지요.”
“그게 설령 ‘악마’ 급이라 해도 말이야.”
방금 가주의 말은 스스로에게 하는 듯해 보였다.
내가 바뀐 모습에 조금의 의구심을 품었을 자신에게.
절대 나는 ‘라온 리그벨토’가 아닌 다른 사람일 리가 없다고 말이다.
악마는 누군갈 속이고 농락하는 데에 뛰어나지만.
흉내낸 인간의 버릇이나, 성격까지 파악할 수는 없다.
몇 년 동안 그 사람으로 살아보지 않는 한 말이다.
‘내가 10년 차라서 다행이야.’
만약 내가 경력이 조금만 부족했더라면, 실수를 범하여 큰일이 났을지도 모르겠다.
“……다친 데는 없나.”
“예.”
“죽은 자들은 생자를 고통스럽게 만들지. 아무리 네가 마력이 방대하다고 해도 육신은 나약하다. 나중에 검사를 받도록 해라.”
“예.”
“…….”
“…….”
다시금 우리 둘 사이에 침묵이 감돈다.
‘라온 리그벨토’는 아버지에게 먼저 말을 거는 성격도 아니었고.
가주 또한, 아들과 수다스럽게 떠들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물어본 건 물어봐야겠지.’
“여쭤볼 게 있습니다.”
“뭐지?”
“가주님은 고위 던전이 열릴 걸 알고 있었습니까?”
흠칫.
내 질문에 잠시 가주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아주 잠깐이지만.
난 그가 당황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당황했다.’
아무래도 고위직들 사이에서 쉬쉬하던 사안인 모양.
“……그래. 이제 너도 ‘직계’로서 후계자 경쟁에 대해서 알 권한이 있지.”
가주는 생각을 끝낸 듯.
말을 이었다.
“그래. 알고 있었다.”
“어째서 막지 않으셨습니까.”
“그 또한 ‘후계자 경쟁의 일환’이었으니까.”
‘미친 것들.’
던전을 막는 것도 후계자 경쟁이었다고?
‘강한 놈들이 모인 거지 미친 것들만 모인 게 아닐 텐데.’
아니면 강한 자가 전부 미쳐버린 건가?
‘그래도 정보는 얻었어.’
왜 고위 던전이 열렸음에도 내가 제대로 정보를 얻지 못했는가.
그건 다른 가문에서도 후계자 경쟁으로 인정해주고.
입막음에 동의했기 때문이었다.
“…….”
“…….”
질문이 끝나고.
다시 우리 둘 사이에선 침묵이 감돌았다.
“……이만 가보지.”
결국 어색한 기류를 이기지 못한 가주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난 자리에서 일어선 가주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가주님은.”
회색빛의 눈동자에 내 모습이 비추어졌다.
“제가 아닌 것 같습니까?”
여러 의미로 해석할 수 있지만.
가주라면.
그리고 라온이라면.
‘내 바뀐 모습이 마음에 안 드냐?’라고 해석할 터.
“…아니.”
그는 내 예상대로의 답변을 내놓았다.
“넌 언제나 라온이었다.”
“예.”
저걸로 확실해졌다.
‘그는 날 의심하지 않아.’
가주의 입장에서, 나는 어떤 기연을 얻고 바뀌려 노력하는 아들처럼 보일 것이다.
이는 라온이 아카데미에서 짧지 않은 시간을 보냈고.
뒷골목으로 납치되는 사건과 아카데미 내에서도 왕따를 당하는 사건을 겪었으며.
직접 내가 바뀐 심경을 말했기 때문이다.
악마나 다른 귀신들은, 본래 생자의 ‘완전한’ 모습을 연기하려 들기 때문에 조금의 어색함으로 거짓말이 들통나는 거지만.
나는 그게 아니었기 때문에.
‘라온’이라는 사람에 몰입하여 연기하고, 또 일어나는 변수에 능숙하게 대처할 수 있을 만큼 캐해석에 능하기 때문에.
이제 가주의 의심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이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암튼 결과가 좋으면 된 거 아니겠어.
“라온 리그벨토.”
“예.”
“너의 활약을 기대하마.”
가주는 답지않게 응원의 말을 남기고 떠나버렸고.
나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팔에 걸린 팔찌와 반지를 확인했다.
이어 벨트도 확인하고, 몸에 착용한 아티팩트를 모두 점검한다.
‘점검은 이걸로 끝.’
그러니 이제.
‘아벨라에게 가봐야겠어.’
원래라면 굳이 가지 않고 바로 시녀장에게 찾아갔을 것이다.
그게 이 가문에서 하녀나 시녀 같은 것들이 건드리게 하지 않고.
제일 편하게 최소한의 영역을 넓힐 수 있는 방법이니까.
‘……하지만, 이번엔 다르게 간다.’
허주를 잡으면서 깨달은 것이다.
만약.
내가 죽어버린다면.
아니, 만약 내가 라온을 되살리고 본래 세계로 돌아가고.
후에 라온이 이 몸으로 다시 돌아와, 늙어 죽는다면.
과연 누가 무덤에 묻어주고, 위에 꽃 한 송이를 올려줄까?
나중에 영입할 동료를 제외하면?
‘……지금 당장은 한 명 밖에 생각이 안 난단 말이지.’
그러니.
이제 내 사람을 챙기러 갈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