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저벅, 저벅, 저벅-
침묵이 감도는 조용한 복도 안에서 걷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곳을 보고 있는 형제들은 ‘감히 허락도 안 했는데 걸어와?’ 하는 표정이었다.
‘하긴. 아주 건방져 보이겠지.’
자기들만 보면 꼬리를 내리고 쭈그러들던 모습을 기억할 테니까.
더불어, 나도 그들과 같은 직계이지만.
가진 힘이나, 쌓아 올린 인맥에서 그들은 명백한 내 상급자였다.
형제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난 아직 네게 걷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쿵!
말에 담긴 의지에 따라 대기의 마나가 움직인다.
언령(言令).
대마법사에 필적한 마법사만이 다룰 수 있는 마법.
이때까지 고고히 흐르고 있던 마력이, 나를 적대하며 나를 짓누르는 게 느껴졌다.
쿠우우우웅!
‘큭…….’
중력이 나를 짓누르는 느낌에 이가 악물렸다.
하지만 이미 예상했던 일.
난 이를 악물며 쇠사슬을 잡았다.
‘80%.’
[마력이 3 하락합니다.]
지이이이잉!
쇠사슬이 더욱더 많은 양을 빨아들이기 시작하며, 불안전하게 흔들리는 체내의 마력이 점차 안정을 되찾는다.
난 후들거리는 다리를 티 내지 않고 우뚝 섰다.
그리고 억지로 버틴 탓에 잔뜩 핏발이 선 눈동자로 그들을 노려보았다.
“호오. 이걸 버텨?”
언령을 사용한 형제가 호기롭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델 리그벨토.’
내 기억으로 셋째쯤이었을 것이다.
가장 호기심이 많고, 허물없어 보이는 태도를 유지하지만.
누구보다 ‘직위’에 집착하는 인물.
“……신기하네.”
내 기억상으로 둘째인 형제가 입을 열었다.
세르바 리그벨토.
연구에 미친 마법사.
“연구해보고 싶어.”
“…….”
넷째가 날 알 수 없는 눈동자로 바라본다.
마벨 리그벨토.
네 형제 중 막내.
“둘 다 그만.”
그리고, 끝까지 조용히 있던 형제가 입을 열었다.
이들 중 첫째.
마법사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탄탄한 체격과 키, 그리고 가주를 똑 닮은 딱딱한 얼굴.
벨 리그벨토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우리들과의 약속을 잊었느냐?”
“잊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돌아왔느냐.”
“증명하기 위해서.”
그들의 마력과 존재감, 뿜어내는 마력이 내 온몸을 압박한다.
하지만.
“제게 걸맞는 자리라는 증명하기 위해 찾아왔을 뿐입니다.”
겨우 이 정도에 짓눌리기엔, 앞으로 살아갈 길이 너무나 험했다.
난 조금의 미동도 보이지 않았고, 곧 그들의 기운과 위압감이 거두어졌다.
대신이라도 하듯, 벨 리그벨토는 여전히 딱딱한 눈동자로 나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라온 리그벨토. 네 혈통을 걸고 맹세하라. 넌 네가 리그벨토의 혈통을 이어받을 만한 자라는 걸 증명할 수 있느냐?”
“예.”
“그 어떤 시련이 있더라도?”
“예.”
그는 당장이라도 일어나 날 공격할 것처럼 위압감을 뿜어내었다.
쿠구궁!
쩌저저적!
천장이 흔들리고 바닥이 갈라진다.
그가 뿜어내는 마력에, 쇠사슬의 마력 흡수량을 90%까지 올렸다.
키이이이잉!
[마력이 2 하락하였습니다.]
자칫하면, 마력이 이대로 폭주해서 터질지도 모른다.
실제로 게임에서 이 상황에서 몇 번 몸이 터져 죽은 적이 있으니.
하지만, 이건 마음 먹기에 다르다.
‘저자는 나를 공격하지 못한다.’
지금이야 형제들의 계승권 다툼 때문에 개입하지 못하지만.
아직 성인식조차 치르지 않은 나를 곧바로 죽이려 든다면, 가주가 직접 나서서 압박이나 불이익을 줄 수 있다.
머리가 좋은 저 첫째가 그걸 모를리가 없다.
즉.
이건, 그저 압박과 테스트에 불가하다는 것.
내 멘탈만 흔들리지 않는다면, 마력은 폭주하지 않는다.
게임에서조차 라온의 멘탈을 잘 구슬려 줄 선택지를 고르면 문제없이 이 상황을 넘어갈 수 있으니까.
“겨우 당신들에게조차 인정받지 못할 하찮은 혈통이라면,”
난 당당히 형제들을 향해 한쪽 입꼬리를 씩 올려 보였다.
“차라리 없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
“……!”
내 말에 셋째와 넷째의 눈을 크게 떠졌다. 둘째 또한 눈동자에 ‘흥미’가 담긴다.
“…….”
내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것일까.
일순간 굳은 듯 해보이던 벨 리그벨토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람이 아주 변했구나. 아주 다른 사람 같아 보여.”
“이제 당하기만은 질려서.”
나는 벨 리그벨토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좀 반격을 해보려고 합니다.”
반격으로 살아남는 걸 넘어서.
마법사로서 실패했다는 평을 받은 ‘라온’이 그토록 이루고 싶어 했던 대마법사의 경지.
역사에 발자취를 남길 위대한 위인.
그걸 목표로 하고 있기에, 이들은 그저 반드시 넘어야 할 ‘벽’에 불가하다.
“증명해내라. 만약 증명하지 못한다면-”
그렇기에.
“너를. 완전히 이 가문에서 추방하겠다.”
“예.”
살벌한 협박에도.
나는 웃을 수 있었다.
* * *
-시련은 2주 뒤 시작하겠다. 그때까지 대기해라.
형제들은 그 말을 남긴 뒤 사라졌고.
사태가 끝나고 나서야, 등 뒤에서 겨우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허억, 허억…… 허억…….”
뒤에서뿐만 아니었다.
양옆에서도 하녀와 시녀들이 거칠게 숨을 내뱉는 소리가 들린다.
형제들이 뿜어내는 기운은 오로지 내게만 뿜어진 게 아니었다.
근처의 시종인들에게조차 영향을 끼칠 정도로, 조금의 힘조절조차 하지 않은 무식한 방출.
‘그나마 첫째는 힘 조절을 했겠지만.’
그는 가주가 되고자 하는 욕심이 가장 강한 이이며.
약한 자를 혐오하나, 후계자에 걸맞는 가문에 대한 책임감이 있으니.
하지만 나머지는, 가주가 되고 싶어 하나 책임감은 없다.
그저 가주라는 자리와 가문의 비기를 탐낼 뿐.
‘모두 내가 기억하던 성격 그대로여서 다행이야.’
비록 내가 원래 짜 두었던 루트는 많이 흐트러졌지만.
캐릭터들의 성격이 그대로라면, 이미 행동 패턴은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루트를 다시 짜는 게 가능했다.
‘이대로라면…….’
어느 시련을 내릴지 훤히 보인다.
첫째부터 넷째까지.
아마도 대표적으로 한 명만 시련을 내리거나, 그걸로 부족하다면 전부가 시련을 내릴 가능성이 있었지만.
‘그건 상관없어.’
인정 따위, 받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형제를 죽이라는 소리만 아니라면 말이다.
[현 쇠사슬이 90%가량 마력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수치를 조절하시겠습니까?]
퓨수우우…….
쇠사슬에 90%가량 차 있던 마력을 천천히 빼내며 70%로 조절했다.
덕분에 수치상으로 5 정도 더 줄어들었던 마력이 다시 차오르기 시작한다.
잠시 빼 두었던 몸속의 돌멩이가 다시 무겁게 들어앉는 느낌과 함께 몸이 다시 묵직해졌다.
난 속으로 아쉬움을 삼켰다.
‘평소에도 더 줄이고 다닐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현재 쇠사슬은 70%가량 내 마력으로 채워져 있다.
그 이유는 당연히 내 전투 방식인 쇠사슬을 통한 마력 흡수를 활용하기 위함이고, 방금처럼 마력이 폭주할 수 있는 상황에서 대처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사실 여기서 더 늘려 봤자 5밖에 줄어들지 않지만.’
마력 수치는 단순히 1~100으로 나뉘지 않는다. 수치는 같더라도 순도에 따라 수준이 나뉘며, 순도가 높은 경우엔 같은 능력치 값의 마력이라도 실질적인 수치가 더 높았다.
쓰지도 못하는 내 마력은 순도마저 높았기 때문에 아티팩트로 제어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래도 마력이 폭주하려는 등의 상황에선 충분히 효과가 있으니 그럭저럭 만족했지만.
“후우…….”
다시 속에 들어찬 답답함에 길게 숨을 내뱉으며.
아직도 대부분이 일어나지 못한 상황에서 나와 유일하게 서 있던 떠돌이가 내게 다가오는 걸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그는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래.”
“수고하셨습니다, 도련님.”
마지막 말은 그의 진심이 가득 담겨있었다.
대충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이내 이곳을 벗어났다.
아마 이제 가주에게 상황을 보고하러 가겠지.
‘기다리라고 했으니.’
이젠 내가 할 일을 하면 될 터.
“아벨라.”
나는 겨우 자리에서 후들후들 일어서는 아벨라를 지나쳤다.
“가자.”
“자, 잠시만요 도련님!”
힐끗, 시녀와 하녀를 바라본 그녀는 다급히 달려와 내 뒤를 따라잡았다.
다행히도, 게임에서 몇 번이고 가봤던 탓에 라온의 방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본가의 건물 안에 있긴 했지만.
가장 끝자락, 가장 멀리, 그리고 존재감 없는 곳에 자리 잡은 방.
끼이이익.
오래 관리가 되지 않은 듯, 문이 삐그덕거리며 열렸다.
‘여기가 라온의 방.’
방 안은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그나마 있는 가구들 하나하나가 상당한 고급품이긴 했지만.
다른 형제들의 방에 비하면, 그냥 아예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수준.
그에 더해 먼지까지 가득 쌓여 있었으니.
보기만 해도 눈살이 찌푸러지는 광경이지만.
‘어차피 예상했어.’
이런 장면을 한두 번 본 게 아니었다.
어차피 먼지나 벌레가 가득해도, 통제되지 않은 마력에 의해 밀려나기 때문에 그냥 앉으려고 하자.
“잠시만요, 도련님!!!”
아벨라가 기겁하며 날 막아섰다.
“?”
“청소가 하나도 안 되어 있어서… 엄청 더러워요…….”
“상관없어.”
“아니에요! 잠시만, 정말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아벨라는 그나마 깨끗한 침대 위에 앉혀두고 청소를 하기 시작했고.
나는 머릿속으로 가문에서의 루트를 생각했다.
‘시기는 한참 앞당겨졌다.’
원래의 라온은 여기서 대략 1년쯤 뒤에 와야 했다.
최선의 루트로 진행한 것을 기준으로 하여.
아카데미 내의 평가는 어찌어찌 수습이 되었지만.
가문 내의 평가는 최악인 상태로 유지되던 시기.
그때의 형제들은.
‘그냥 나를 죽이려고 했지.’
그때도 시련을 치르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지금은 ‘달라진 걸 확인해 본다.’라는 느낌에 가까웠지만, 그때는 오로지 ‘죽이는 것’에만 집중한 시련이었다.
나이가 성인이 되었고, 이미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 판단이 들며 계승권 싸움이 심화된 그때.
더 이상 라온이 살아 있을 이유는 없기 때문이었다.
거기서 살아남아야 겨우 시선이 조금씩 바뀔 ‘기미’가 보이는 정도.
‘여기서 시련이 약해지면 약해졌지, 더 수준이 높아지진 않았겠지.’
문제는 어떤 시련으로 진행할지 모른다는 것.
그에 대한 불안감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괜찮아. 이게 나아.’
비록 정보가 부족하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 단점을 상회할 정도로, 지금 루트가 훨씬 낫다.
적어도, 비교적 목숨은 안전하고. 더한 성장을 이룰 수 있을 테니까.
내게 공략집이란 내가 기억하는 루트를 적어 놓은 것이지, 반드시 걸어야 하는 이정표로 정한 건 아니었다.
‘2주 동안 할 수 있는 것.’
미래에만 일어나는 일이 아닌.
과거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을 중심으로 짠다.
‘정보를 조금 모아뒀던 것 같은데…….’
혹여나 아카데미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면 곧바로 할 수 있도록, 미리미리 가문에 대한 정보와 사건 등을 정리해둔 적이 있었다.
문제는 내 머릿속에 그게 있느냐지.
머리에서 최대한 쥐어짜내고 있는데, 밖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덜컥.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노크도 하지 않고 우르르 들어온 건 시녀들이었다.
“어? 자, 잠시만요 언니들-”
“비켜, 아벨라.”
“꺅!”
아벨라가 당황하며 무어라 하려 했지만.
그들은 아벨라를 대충 내팽개치며 우르르 방 안을 채웠다.
그건 아벨라가 평소에 그들에게 핍박받는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둘의 신분 차이가 컸다.
하녀들이란 청소나 그런 잡일을 하고, 시녀들은 조금 더 윗 반열… 주인의 몸이나 옷 같은 부분을 관리한다.
나름 귀족을 케어하고 관리해 주는 이들이기 때문에 낮다고는 하나 직급이 있는 귀족의 자녀들이 주로 하는 일.
일개 하녀인 아벨라가 그들 앞에서 눈만 뜨고 있어도, 왜 눈을 그 따위로 뜨냐고 뺨을 때릴 수 있는 직급 차이였다.
‘참내.’
물론 내겐 너무나 같잖게 보였다.
이들이 이러는 이유는.
결국에는 귀족임에도 누군가의 허드렛일을 하고 또 선배들에게 깎여나가는 자존심을 채우기 위함이었으니까.
“방 안이 너무 더럽군요.”
볼에 주근깨가 가득한 시녀가 말했다.
제대로 기억나진 않았지만, 이들 중 가장 자존심이 세고 질투심이 많았던 캐릭터 같았다.
아벨라를 가장 많이 괴롭히던 캐릭터.
‘흠. 근처 환경이 이따위니 타락할 만하네.’
그래도 100번 리트 만에 깰 뻔한 던전을 뒤에서 등을 찌른 탓에 실패해 버리게 했던 건 좀 미웠지만…….
“너희가 그동안 청소를 안 한 탓이겠지. 이 방의 청소 관리가 누구지?”
내 질문에 주근깨 시녀가 말했다.
“아벨라입니다만. 여기서 대기하여 방을 관리하라는 명령을 어겨서 아직 청소가 안 됐습니다. 죄송합니다.”
난 헛웃음이 나오는 걸 겨우 참았다.
저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리고, 일개 시녀 따위가 내 앞에서 이리 고개를 떳떳하게 들고 말한다고?
그 바뀐 모습을 보고도?
‘누가 시켰네.’
그렇지 않고서야 근본 없는 저런 행동이 나올 리가 없었다.
아무런 지시 없이 저런 행동을 한다는 건.
정말로 죽고 싶다는 거였으니까.
“아벨라.”
“네, 네. 언니.”
“당장 이불이랑 빨러 가야지, 뭐하는 거니?”
“죄, 죄송해요!”
아벨라는 급히 움직이려다가 발을 헛디뎌 먼지 구덩이를 굴렀다.
하지만, 조금의 불만도 말하지 않은 아벨라는 이불을 가득 쌓은 채, 내게 겨우 고개를 숙여 보였다.
“도, 도련니임. 나중에 봬요…….”
“빨리 안 가고 뭐 하니?”
쿠당탕!
넘어지는 소리까지.
급히 밖을 빠져나가는 아벨라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시녀들의 맨 뒤에 서 있던 늙은 여인이 걸어 나왔다.
가장 오랜 시간 시녀 생활을 해왔으며.
오랜 시간 일한 것을 인정받고 인정과 덕망이 높아야만 올라갈 수 있는 시녀장.
“그럼, 단정을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녀가 내 옷을 갈아입히기 위해 다가오며 손을 뻗었다.
탁!
난 다가오는 시녀장의 손을 쳐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이.”
“……?”
“시녀장.”
내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것인지 잠시 반응이 늦었다.
“…절 부르신 겁니까?”
“그래.”
난 늙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부터 직계 앞에서 일개 시녀장이 눈을 그리 떠도 됐지?”
시녀장의 눈이 놀라서 크게 치켜떠진다.
“늙어서 눈치도 다 빠져 버린 건가?”
그녀는 아무리 좋은 말로 말해도 아름답다거나 젊다곤 할 수 없는 외모였다.
그런 외모는 정신이 약한 라온에게 위압감을 주기 충분했고.
라온을 혐오하는 그녀는 외모를 활용하여 라온을 압박하고, 그가 핍박받는 데에 한 손을 더했다.
“깔아.”
“……무슨 무례를.”
“내 말이 안 들리나?”
평범한 가문이라면.
‘가주’가 아닌 이상, 일개 직계가 오랜 시간 시녀로 일하고 나름 귀족의 자제인 시녀장을 이리 무시할 순 없다.
하지만.
이 가문 내에선, 달랐다.
직계란 누구보다도 고귀한 존재이자.
가문의 영광을 떨치는 걸 넘어, 대륙을 뒤흔들 수 있는 대마법사의 혈통.
아무리 시녀장이 오랜 시간을 자리를 지키고 가문 내에서 나름 자리를 잡았다고는 하나.
직계보다 더 윗급의 존재는 오로지 가주와 원로뿐이었으니.
‘아무리 내가 직계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권한이 없다고 해도.’
그건 시녀장을 해고하거나 죽일 권한이 없다는 것이지.
시녀장이 내 앞에서 저리 눈을 치켜뜰 수 있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눈 깔라고.”
내가 가만히 바라보자, 이를 악문 시녀장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꿇어.”
“!!!!”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내 말에 입술에서 피가 흐를 정도로 거세게 이를 악물었지만.
결국 그녀는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니, 게임 내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라온이 마력을 다룰 수 없다는 평가를 받아 가문 내에서 배척당하고.
방에서 조용히 자라던 일곱 살의 라온을, 시녀장은 괴롭혔었다.
‘도련님은 머저리입니다.’
‘당신이 도움이 되고 싶다고요?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죽으세요. 그게 당신의 유일한 도움이니까.’
그때의 라온의 자세는.
그녀와 같이, 무릎을 꿇고 있는 자세였다.
‘그만. 그만해…….’
‘당신이 무슨 권한으로? 직계로서 모든 권한까지 빼앗긴 주제에? 당신이 지금 제게 명령을 하는 겁니까?’
과연 너는 이 장면을 보고 화를 풀 수 있을까.
이 장면을 본다면,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지워질 수 있을까.
아니.
아직 아니다.
‘화 풀지 마라.’
아직 한참 남았으니까.
“…….”
“…….”
충격으로 입을 틀어막고 있는 시녀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내 앞에서 무례를 허락하는 것도 지금 한 번이야.”
원활한 진행을 위해.
그리고 라온의 복수를 위해.
내가 참는 건, 이번 한 번의 무례뿐이었다.
“한 번 더 내 기분을 상하게 하면 다 죽일 거야.”
“……!”
“그리고.”
난 턱으로 아벨라가 나간 문을 가리켰다.
“내 거야.”
“네?”
“내 거라고.”
누구를 지칭하지도, 한 물건을 가리킨 것도 아니었지만.
시녀들은 내가 누굴 말하는질 알아차린 눈치였다.
그래. 알아차려야지.
“내 걸 건드려도 마찬가지야.”
“……!”
“알아서 잘해.”
못 알아차리면 죽는데.
“그 뻣뻣한 목이 꺾이고 싶지 않으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