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하아…….’
난 착잡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창문 밖을 바라봤다.
분명히 아카데미를 떠나면서, 변수를 걱정할 필요도 없었고, 비효율적인 일을 되풀이하게 될 일도 없어졌고.
또 마력 제어력을 올릴 수 있다는 쾌거에 기분이 좋아야 하건만.
[돌발 이벤트 발생!]
눈앞에 아른거리는 이 글자는, 내 기분을 완전히 망가트렸다.
‘시발…….’
마력 제어력이 오른 건 좋다.
너무 좋다.
그런데 실패하면 죽여 버리거나 아예 2를 깎아 버린다니?
이미 내 마력 제어력은 소수점 대다.
사실상 0 이하는 더 이상 마력이 내 몸을 ‘육체’로 인지하지 않고, 벗어나야 하는 공간으로 인지하기 때문에.
벗어나기 위해 모든 걸 박살 내려고 할 것이다.
당연히 나는 죽을 거고!
운 좋게 이벤트에서 살아남는다고 해도.
어차피 끝은 ‘죽음’이 예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내가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도 진행한다고 하지만.’
이건, 아무리 봐도 로우리스크 하이리턴이다.
뭐, 막말로 깨면 된다. 그럼 리스크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긍정적으로 보면. 오히려 내게 위협이 있다는 걸 미리 알려준 꼴이야.’
하지만 문제는.
‘이 상황이 강제적이라는 거지.’
내 의견이나 내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지 않았음에도, 강제적으로 취해지는 상황이라는 것.
난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내가 마음에 드는 것만 할 순 없겠지.
하지만.
내게 힘이 생기고, 더 이상 이렇게 당하고만 있지 않는 순간이 된다면.
‘이딴 시스템을 박살 내 버릴 것이다.’
아마도.
나를 이곳에 빙의시킨 것들과 깊은 연관이 있을 것이며.
어쩌면…….
‘라온의 이 저주와 깊은 연관이 있을지도 몰라.’
마력 제어력을 올릴 수 있는데도, 올리지 않는다는 건.
그건, 그저 라온의 고통을 보고 즐거워하는 꼴일 테니까.
만약, 정말로 그런 거라면.
‘반드시 부숴버리겠다.’
시스템을.
라온을 그렇게 설정한 제작자들을.
반드시 으깨버릴 것이다.
* * *
마차 안은 조용했다.
라온은, 마치 잠에 든 듯이 눈을 감은 채 벽에 기대고 있었고.
아벨라 또한, 잠시간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도련님이 가문으로 돌아가시면…….’
그녀도 집이라 할 수 있는 곳으로 돌아간다.
보통 ‘집’이라 하면 안락한 안식처, 포근한 방 같은 이미지를 상상하지만.
그녀에게 있어서, 집은 결코 편안한 곳이 아니었다.
‘……선배들이나, 시녀장님이나 집사님께서 뭐라 하시겠지.’
아벨라는 모두가 기피하는 라온의 하녀를 맡고 있고.
의도하던, 의도치 않던 라온의 총애를 받고 있다.
사실 총애고 자시고 할 게 없는 게, 시녀도 없고 하녀도 한 명밖에 없으니 관심이 몰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은, 그녀의 처지를 구슬프게 생각하기는커녕, 비록 쓰레기로 취급받는다고는 하나- 직계인 라온을 유일하게 모시는 그녀를 질투했다.
그건 그녀들이 라온이 받는 취급을 제대로 모르고, 목숨조차 위협받는 상황인 걸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또한, 라온의 하자를 일개 하녀와 시녀들이 알 수 없으며, 그로 인해 일어날 일을 전혀 모르기에.
하녀와 시녀는 질투심을 숨기지 않고 아벨라를 무시하고 홀로 고립시켰다.
그렇게 모두에게 왕따당하는 아벨라에게는.
라온에게 아벨라가 유일한 친구이듯이.
아벨라에게도 라온이 유일한 친구인 것이다.
‘돌아가고 싶지 않아…….’
만일 돌아간다면, 어떻게 될까.
도련님은 그녀를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겪고 있는 저주로부터 버티는 것조차 힘들 테니까.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몸에 심고 있는 이상, 그가 그녀를 신경 쓸 리가 없었다.
‘헬레나 님이 도련님이 바뀌었다고 했지만…….’
-그는 강해졌어.
-네?
-말 그대로의 의미일세. 예전의 그 날카로움은 그대로이지만. 안을 지탱하는 정신력이 강해졌어. 그 아까운 육체를 더 이상 낭비하지 않더군. 아무래도 무슨 일이 계기가 된 모양이야.
갑작스레 라온이 바뀐 이유엔, 대충 추측되는 이유가 있긴 했다.
‘납치된 날.’
비록 스스로 나간 것이긴 하지만.
하필이면 양아치들과 엮인 탓에, 뒷골목이라는 질 나쁜 곳에 납치되었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때부터, 그는 바뀌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을 납치한 마법사를 제압하여, 아카데미로 돌아왔고.
그 이후로는, 형제들의 압박이 있었음에도 아카데미를 자퇴한다고 굳게 결심했을 뿐만 아니라.
필립 오스큘라까지, 압도적인 실력으로 꺾었다.
‘…어떻게 강해지신 건진 모르겠지만.’
인간에겐 ‘각성’ 버튼이라는 것이 있다.
그게 어디에 있고, 어떻게 누르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어떤 계기로든, 그 버튼이 눌린 이후엔 사람이 바뀐다고 했다.
라온도 그런 부류인 듯했다.
언제나 줏대없이 휘둘리고, 상처만 받언 아이는, 어느새 어른이 되어 자기 자신을 단단히 치켜세웠고.
스스로 길을 선택하고, 꿋꿋이 나아가려고 하고 있으며.
조금이나마 그녀를 신경 써 주려고 하는 게 느껴졌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느끼지 못하겠지만.
오로지, 라온 리그벨토라는 한 인물만을 바라보는 아벨라였기 때문에 그걸 인지할 수 있었다.
마치, 사람이 바뀌어 버린 것 같았다.
‘……그래도 도련님은 도련님이야.’
요새 도플갱어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가 많지만, 그녀는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눈 위까지 가리는 앞머리와 어깨 아래까지 내려오는 긴 뒷머리, 상당히 살벌한 눈매, 밖을 잘 나가지 않아 새하얀 피부라는 외형적인 특징 때문이 아닌.
그가 가진 저주는,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것이니까.
쇠사슬을 다루는 것도… 그의 혈통인 리그벨토 가문이라면 드물게 보이는 재능이니, 이상하지도 않았고.
‘…달라진 모습을 유지하신다면.’
과연 나는, 더 이상 집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까.
‘그러니 나도……’
이후로, 바뀌는 라온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면서.
그가 더 이상, 과거로 돌아가지 않도록.
적어도 자신만은 그녀를 믿어주어야 했다.
흠칫!
“!”
그러다 눈이 마주치자, 아벨라가 조심스럽게 눈을 깔았다.
색이 바랜 눈동자. 회색에 가까운 눈동자에 모습이 비치자, 왠지 모를 불경함과 미안함 등의 감정이 휘몰아쳤으니.
“뭘 봐?”
그의 말에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오랜만에 돌아간다니까… 왠지 기분이 묘해서…….”
“그래.”
라온은 겨우 그런 거였냐는 듯, 눈을 그대로 감아버렸다.
“…….”
“…….”
다시 마차 안이 침묵이 감돈다.
아벨라는 불안한 듯, 손가락으로 무릎을 톡톡 두드렸다.
그의 성격은 참으로 변덕스러운지라, 이런 걸 마음에 두고 나중에 무어라 할 수도 있었다.
‘어, 어떻게 하지?’
화나신 건 아니겠지?
불안한 표정을 지은 아벨라가 최대한 머릿속에 재밌는 이야기를 떠올리며 입을 연 순간.
“도련…….”
“멈춰라!”
그때, 밖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아벨라의 목소리가 묻혔다.
걸걸하고 거친 목소리.
한 명뿐만이 아닌 듯, 여러 발소리와 드문드문 대화 소리가 들렸고, 마차가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 게 느껴졌다.
“…….”
라온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지고, 그의 손에 잡힌 쇠사슬이 절그럭- 소리를 냈다.
그 모습에.
그녀는 왠지 모를 두려움을 느꼈다.
마차 밖에서 떠돌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키십시오. 통행료는 지불하겠습니다.”
“통행료? 아암! 통행료, 좋지! 근데, 아무리 봐도 댁들이 의심스러워서 말이야! 그러니까 내려주셔야겠어! 이왕이면 가진 보물들이나 재산도 좀 내놓으시고!”
“…지금, 이 마차가 누구의 것인진 압니까?”
“알고 있지. 암, 그럼. 이런 험악한 산길을 혼자 걸어가고 있는 멍청한 귀족 나으리들 아니신가.”
“낄낄낄!”
“큭큭큭! 역시 우리 대장이야!”
“…….”
대화 내용만 들으면 대충 정체가 짐작이 갔다.
병신들 같긴 하지만.
그건 직업이 아니니 제쳐둔다면.
‘산적.’
지금의 장소나 수준 낮은 대화까지.
‘마력을 가진 이도 크게 느껴지지 않아.’
몇몇은 수준 낮은 마법을 다룰 줄 아는 듯, 미약한 마력이 느껴졌지만.
저 정도의 흐름으로는, 현재 마력 제어력이 오른 이상 별 위협이 되지 않았다.
‘……이놈들로부터 살아남으라는 건가.’
비록 라온이 망캐이긴 하지만, 현 능력치들로는 겨우 이런 산적들로부터 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런 이벤트가 떠올랐다는 건.
‘연기이거나… 혹은 숨겨진 힘이 있다는 거겠지.’
그런 변수가 있을 터.
‘아직 나갈 때는 아니야.’
라온은 나가지 않고 창문을 통해 밖을 바라보았다.
아직 정보가 확실하게 많지 않다.
지금 당장은 무식하게 나서는 게 아닌, 상황 파악이 우선이었다.
‘분명히 깃발을 달고 왔다.’
그럼에도 덤벼든다는 건…….
‘가문과 연관이 있거나, 혹은 그걸 무시할만한 세력에서 보냈다는 거지.’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것인지 떠돌이가 마차 위의 깃발을 가리켰다.
“깃발을 보십시오. 이 마차는 리그벨토 가문의…….”
“깃발?”
화르르륵!
한 마법사의 지팡이에서 불덩이가 뿜어져 나와 무언갈 불태웠다.
산적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킬킬 웃었다.
“그딴 게 어디에 있다고?”
“…….”
저 반응으로 파악은 끝났다.
‘의뢰로 왔군.’
라온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살아남을 수 있는가?
예스.
죽일 수 있는가?
예스.
이제, 움직일 시간이었다.
“하하, 어이. 마부 양반. 우리가 원하는 건 하나야.”
한 산적이 마차로 성큼성큼 다가와, 문 부분을 퉁퉁 두드렸다.
“이 안에 있는 걸 내놓으라고. 그럼 목숨은 살려주겠다니까?”
“마부라서 머리가 안 돌아가나 보지!”
“크하하하핫!”
지금이 기회다.
덜컹!
문을 안쪽으로 열고, 힐끔 보이는 도적의 목을 잡아당겼다.
“크악!”
강제로 끌려 들어온 그가 뭘 하기도 전에, 목에 쇠사슬을 휘감았다.
그리고 저항하기도 전에-
“너, 너 뭐-”
우드드득!
쇠사슬로 목을 꺾었다.
목이 꺾인 산적의 숨이 끊어진 걸 확인했다.
옆에서 아벨라가 울먹거렸다.
“도, 도련님…….”
“쉬잇.”
라온은 검지를 입술에 올렸다.
“닥치고 있어.”
“…네, 넵.”
어차피, 아카데미를 벗어나면서 이야기의 흐름은 뒤틀렸다.
여기부턴, 전체적인 틀을 맞추지만 세세한 틀은 바뀔 수밖에 없다.
‘조심해야 하는 건, 내가 라온이 아니라는 걸 들키는 것 정도.’
“저놈들은 날 죽이러 왔어.”
그러니.
반드시 살아남는다.
그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그러니까 다 죽여야겠어.”
그게 설령 누군갈 죽이는 일이라 해도 말이다.
“아벨라. 그러니 가만히 있어라.”
“…알겠어요, 도련님.”
* * *
“…….”
“…….”
산적들 사이에선 침묵이 감돌았다.
방금, 동료 중 한 명이 문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그리고 으득, 하고 무언가가 부러지는 소리까지.
산적들은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설마…….’
‘죽은 거야?’
한두 명 정도는 죽을 수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설마, 제대로 저항도 하기도 전에 한 명이 죽어 버린다고?
정보와 다른데?
‘분명히 안엔 그럴 힘조차 없는 꼬맹이가 있다고…….’
‘분명히 안엔 도련님이랑 아벨라, 둘뿐일 텐데…….’
떠돌이와 산적들이 마차를 바라보고.
끼이이익…….
기괴한 마찰음과 함께 마차 문이 열렸다.
꿀꺽.
산적 중 한 명이 마른침을 꿀꺽 삼킨다.
마치 죄수처럼 쇠사슬을 몸에 걸친 소년이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절그럭.
쇠사슬이 한 가닥 흘러내리면서 소리를 내고.
몇몇은 압도적인 분위기에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며 숨을 참는다.
마치 돌덩이가 어깨 위에 얹혀진 기분이다.
라온은 진정한 강자처럼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저놈들은 날 모른다.’
솔직히 말해서, 라온의 첫인상은 결코 좋은 편이 아니었다.
야생스러운 느낌을 주는 울프컷 스타일의 머리카락과 더러운 눈매, 그리고 흉악한 분위기를 뿜어내는 쇠사슬까지.
그리고 방금의, 그 상황까지 포함한다면.
자기도 모르게 압도당하거나 공포를 느끼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더불어 몸에서 통제되지 않고 뿜어지는 마력은 그들을 은연중에 짓눌렀으니.
‘그리고 나는 저놈들을 알고.’
사이드 이벤트, 분량조차 거의 없는 이벤트이긴 하지만.
저들은 가문에서 필요시에 운용할 수 있도록 숨겨둔 산적이었다.
그리고 라온은, 저 산적들을 상대해본 적이 있었다.
지금 모든 상황이 그에게 유리한 흐름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래. 안에 있는 걸 원한다고?”
“…….”
라온이 손을 뻗어 안에 있는 걸 집어, 대충 휙 던졌다.
“안에 있는 건 이 시체뿐인데.”
철푸덕!
바닥에 널부러지는 시체.
뿜어지는 피.
그리고 그들을 내려다보는 압도적인 강자의 시선.
“……죽여!”
공포 속에서.
산적들은 임무를 제쳐두고, 오로지 라온을 죽이기 위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