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가주가 직접 사람을 보낸다고 한 이상.
이 이후의 수업들은 굳이 참가하지 않아도 됐다.
언제 가주의 사람이 도착할지도 모르고.
이미 대련에서 큰 파장을 일으킨 이상, 나가봤자 수업에 방해만 될 테니까.
‘누가 올까.’
보건실에서 방으로 옮겨진 나는 침대에 누워서 곰곰이 각했다.
지금 이 이벤트는 본래 게임엔 없는 이벤트다.
두각을 드러내어 가문의 관심을 받고, 그에 대한 형제들의 반응은 이미 어느 정도 예상을 했지만.
가주가 직접 의견을 보내어, 이렇게 사람을 보내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아마 비밀리에 진행했을 테지만, 그래도 이건 나름 리스크를 감수한 것이었다.
‘아직 후계자 다툼이 본격적으로 심화되지 않아서 가능한 건가.’
지금은 초반부에 불가하지만.
중반부에 가까워지고, 그나마 아카데미를 벗어나 가문으로 갈 수 있을 시기가 되면.
그때엔 형제들이 라온을 죽이려 든다.
직계를 한 명이라도 더 제거해서 후계자 다툼에 유리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이 다툼에서 벌어지는 참혹과 죽음은, 가주가 막을 수 없다.
만약 가주가 한 자식을 편애하여, 자식의 죽음이나 세력이 줄어드는 걸 막는다면.
그건 직접 후계자의 경쟁에 참가하게 되는 것이며.
다른 세력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역설적으로.
자식을 괴롭힘이나 무시로부터 보호하지 않아야, 자식을 보호할 수 있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아직 심화가 되지 않았고, 만일 들킨다고 해도 어느 정도 명분도 있고… 하긴. 지금이 딱 좋은 타이밍이군.’
아비로서 역할을 하지 못한 자가, 그나마 자식을 보살필 수 있는 순간이.
‘그나마 올 사람은…….’
가문 내의 세력 다툼에서 멀면서도 가주의 말을 충실히 이행해줄 사람.
‘…떠돌이? 늙은이?’
이상한 이름이지만.
실제로는, 본인이 직접 지은 이름이며.
자기 자신을 특정할 수 없다는 것에 만족까지 한 이름이다.
‘둘 중 누구라도 상관없어.’
비록 아카데미에 묶여 가문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지 못했지만.
후반에는 그래도 밖을 나갈 수 있고, 가문 관련 이벤트를 진행해야 하므로, 그들과 친분을 쌓고 캐릭터 분석도 마쳤다.
초반부라 한들, 캐릭터들의 성격이 180도 바뀔 리 없으니, 어떻게 행동할지 대충 예상이 간다.
‘그 전에 보상부터 확인해야지.’
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책상 아래에 달린 서랍을 열었다.
드르륵!
서랍 안에는 평범한 크기의 반지와 가죽 장갑이 들어 있었다.
평범하지만, 직계라는 이유로 온갖 고급스러운 잡화가 들어서 있는 방 안에 비하면 한참이나 싸구려로 보이는 물건.
난 곧바로 반지와 장갑의 정보를 확인했다.
[마력 흡수 반지(하급)]
체내의 마력을 일부분 흡수하며, 사이즈 조절이 가능하다.
한계 흡수량 : 마력(5)
[쇠사슬 보호 장갑(하급)]
쇠사슬로 인해 육체에 상처가 나지 않도록 보호해준다. 단, 외부의 공격으로부턴 보호해주지 않는다.
‘나쁘지 않아.’
반지를 낀 순간, 아주 티끌만큼의 마력이 빨려 들어가는 게 느껴졌고.
장갑을 낀 채로 쇠사슬을 잡자, 맨손으로 잡을 때보단 더 여유롭고 쫀쫀하게 잡히는 게 느껴졌다.
[마력이 0.2 흡수됩니다.]
[쇠사슬로부터 손을 보호해 줍니다.]
나쁘지 않는 성능이지만.
딱 이 정도만 있다는 게 아쉽긴 하다.
하급에게 이 이상을 바라는 게 조금 양심이 없는 건가 싶긴 하지만.
‘이걸 보면 허리띠가 성능이 좋긴 좋아.’
허리띠엔 아이템 등급 표기도 없었다.
즉.
현재 등급이 더 이상 올릴 게 없을 정도로 최상의 등급이라는 뜻.
초반부에 구할 수 있는 아이템치고 상당히 혜자인 아이템이다. 물론 그 대가로 마력을 많이 잡아먹기는 하지만.
‘그래봤자 나한텐 티끌만 한 양이지.’
이거 하나하나가 모여서 내 목숨을 살려주니, 아이고 감사합니다. 하고 쓰는 수밖에.
‘그런데 안 차고 있던 걸 갑자기 차고 있으면 아벨라가 이상하다고 느낄 거 같은데.’
라온인 걸 들키지 않으려면, 그의 평소 활동 범위 안의 행동을 보여야 했다.
벨트야 평소에 옷이 헐렁하다고 차고 다니니까 괜찮지만, 이런 싼 반지나 장갑은…….
‘아.’
그 방법을 써야겠다.
* * *
“도련님! 저 왔어요!”
아벨라는 활기찬 에너지를 뿜으면서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몸을 회복하는 데에 도움이 된 비싼 음식들이 들려 있었다.
난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시끄러워.”
“앗… 죄송해요….”
잠시 시무룩해졌지만, 금세 다시 기운을 찾아 싱글벙글 웃으며 음식들을 탁자 위에 세팅했다.
“제가 도련님을 위해서, 몸을 회복하는 데에-
“난 어디 다치지 않았어.”
“알죠, 알죠! 하지만 몸을 격하게 쓰셨으니까 든든하게 먹어야죠. 또, 가문에서 사람이 왔는데 그러고 있으면 또 다른 도련님들이 뭐라 하실걸요?”
난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 앞에 앉았다.
내가 자리에 앉자, 아벨라는 싱글벙글 웃으며 금세 숟가락과 젓가락을 세팅해주었다.
난 젓가락을 쥐려다가, 쇠사슬을 세게 쥔 탓에 손가락이 찝힌 부분을 매만지다가 말했다.
“아벨라.”
“네?”
“장갑 있나?”
“어… 장갑이요? 잠시만요?”
아벨라는 내 요청에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향했다.
그리고 내가 미리 살짝 열어두었던 서랍을 열고,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어? 이건 뭐지?”
“…….”
일부러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아벨라는 조심스럽게 안에 있는 걸 꺼내 들었다.
장갑과 반지.
처음 보는 물건인 듯, 당황한 표정을 짓는 그녀에게 난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건 뭐지? 왜 싸구려 반지가 내 방에 있는 거지?”
내 말에, 아벨라는 잠시 곰곰이 각하다가.
마치 개연성이 추가되듯이.
그녀는 뒤늦게 기억이 났다는 듯, 살짝 말을 더듬었다.
“아, 이건……. 아마 지난번에 선물로 온 반지 같은데… 무슨 영애분께서 주신 걸로…….”
“이름은?”
“저도 잘… 그냥 소포로 온 거라….”
‘이런 식인가.’
물론, 쓰레기로 낙인찍힌 내게 영애가 저런 반지와 장갑을 준다는 게 이상하지만.
저 반지와 장갑이 싸구려라는 점, 그리고 반지가 마법사에게 독인 ‘마력 흡수’라는 걸 가졌다는 걸 생각하면.
저건, 긍정적인 의미가 아닌 조롱의 의미로 준 선물이었다.
‘개연성은 나쁘지 않네.’
난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조용히 있는 걸 잘못 해석한 것인지, 아벨라의 안색이 하얗게 질리더니 장갑과 반지를 두 손으로 꽁꽁 싸맸다.
“버, 버릴까요?!”
‘미쳤나.’
“아니. 이리 가져와.”
아벨라는 엉거주춤 내게 장갑과 반지를 가져왔다.
난 장갑과 반지를 보며 일부러 크게 혀를 찼다.
“쯧. 싸구려 같으니.”
그 말에 아벨라가 당장이라도 버릴까요?!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미리 말하지만.”
휙!
난 그녀에게서 물건을 뺏듯이 낚아채며 으르렁거렸다.
“내 물건엔 마음대로 손대지 마라.”
“…네, 네에.”
“멋대로 버리지도 말고.”
즉. 이건 그냥 가진다는 뜻이다.
내 말에 아벨라의 표정이 모호해졌다.
‘좋아하시면서 티를 안 내시네.’
라고 생각하면서도.
‘저런 건 모욕의 의미인데… 모르고 좋아하신다니….’
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예전처럼 그냥 말풍선이나 그런 게 보인다면 참 좋을 텐데.’
그래도 워낙에 많이 리플레이를 했기에, 이 정도 생각이나 패턴 정도는 훤히 보였다.
이게 라온인 척 연기하면서 생기는 장점이다.
다른 캐릭터들의 성격이 훤히 보이니까.
“이제 앉아.”
“네엡….”
아벨라가 조심스럽게 내 앞에 앉았다.
원래라면 귀족과 같은 탁자에 하녀가 앉는 건 말이 안 되지만.
외로움을 타는 라온의 성격상, 그냥 묵인하며 넘어가 주었고.
그걸 아는 아벨라는 얌전히 자리에 앉아 주었다.
난 숟가락으로 스프를 떠서 입에 가져다 댔다.
‘맛있네.’
그래도 조금 더 매웠으면 좋겠는데.
아, 로제 떡볶이나 마라탕이나, 치킨이나, 피자, 막 먹기만 해도 살찔 거 같은 자극적인 음식들이 먹고 싶었다.
이런 고급스러운 건 내 입맛에 안 맞아.
똑똑.
“라온 리그벨토 님.”
그때, 누군가가 내 방문을 두드렸다.
아벨라는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나 조심스레 방문에 다가갔다.
“무슨 일이세요?”
“가문에서 보내신 사제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벌써?’
난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이렇게 빨리 온 거면…….
“드, 들어오세요!”
“그럼 잠시.”
끼익.
문이 열리면서, 한 남자가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새하얀 로브를 뒤집어써,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으나.
힐끔 보이는 눈동자와 머리카락만으로도 그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도련님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찾아온 사제, 떠돌이라고 합니다.”
중반부 이후에나 볼 수 있는 캐릭터.
떠돌이의 등장이었다.
* * *
떠돌이.
그는 말 그대로, 어느 신전에도 소속되지 않고, ‘주신’을 믿을 뿐인 사제였다.
신전에 소속되지 않는다는 건, 자유로우나 보호받지도 못한다는 것.
사고로 죽을 뻔한 위기에 처했던 그는 우연히 길을 지나가던 가주 덕분에 목숨을 구했고.
떠돌이의 재능을 엿본 가주는 그의 자유를 존중하되 한 가지 제안을 내밀었다.
‘너를 우리 가문 소속의 사제로 임명하되, 너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는다. 하지만, 네가 받는 헤택에 따라 나의 요청을 몇 가지 들어주어야 한다.’
‘받아들이겠습니다.’
귀족과 대척점에 선 사제만큼이나 목숨이 위험한 게 없었다.
아무리 신을 믿고 사랑하는 사제라 한들.
신이 그 사제를 사랑하지는 않으니 말이다.
떠돌이는 그렇게 리그벨토 가문의 소속이 되었고.
계약 조건에 따라, 자유로이 대륙을 돌아다니던 도중.
가주의 요청에 따라 직접 아카데미를 찾아왔다.
‘자식의 상태를 보아달라 했지.’
명분은 그가 악마와 손을 잡은 것이 아닌지, 혈통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닌지 확인해달라는 것이었지만.
‘아버지의 마음이란 건가.’
가주의 좌측근 중 하나인 그는 이미 가주의 마음을 꿰뚫고 있었다.
그의 마음은.
마음속 깊은 곳에선 신을 사랑하고 믿고 있으나, 현실이란 벽에 막혀 드러내지 못하는 이들과 같았으니까 말이다.
다만.
‘성격이 엄청나게 더러울 텐데…….’
몇 번 만나 보진 못했지만.
라온을 둘러싼 배경과 상황, 그리고 애절 결핍으로 인해 그의 성격이 더러운 건 알고 있었다.
더불어 그가 겪고 있는 병도.
‘마력을 사용할 수 없다.’
병명조차 없는, 이 희귀한 병은.
라온의 육체와 영혼을 갉아먹었으며.
방대한 마력을 빨아들이는 지독한 아티팩트가 없다면, 언제 온몸이 터져 죽을지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 착한 성격을 유지하는 게 더 이상했으니.
“뭘 봐?”
‘이런 싸가지 없는.’
그래도 이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떠돌이는 로브 아래로 표정을 감추면서 말했다.
“반갑습니다, 도련님. 이번에 가주님의 명령에 따라 도련님의 상태를 확인하러 온 사제입니다.”
“……쯧. 빨리 하고 끝내.”
‘생각보단 순한데?’
그와 친분이 있는 원로가 말하길, ‘성격 더러운 고양이를 떠올리게’라고 하길래 더 반응이 격할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순순히 검사에 응했다.
가주가 직접 보냈다는 것에 힘이 실린 건가?
그런 의문과는 별개로 그의 손은 착실하게 움직였다.
<정화>
라온 리그벨토와 그의 몸에 묻은 먼지와 세균들을 제거하고, 근처의 공간을 청결하게 만든다.
“그럼. 확인하겠습니다.”
“…….”
라온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걸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인 떠돌이의 눈이 푸르게 빛났다.
‘개안(開眼).’
고위 사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신성술이 그의 몸을 훑었다.
라온의 몸 외부에는 여러 타박상이 있었지만.
이미 치료라도 받은 듯, 거의 아물고 있었다.
뼈 또한 타고난 덕분인지, 얇긴 하지만 충분히 튼튼했다.
문제는.
‘마력 량이…….’
겉으로 느낀 것에 비해, 양이 엄청났다.
저 작은 체구에 어떻게 모두 들어있는 거지? 하는 의문이 들만큼, 엄청난 양의 마력이 몸 안을 맴돌고 있었으며.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부글부글 끓고 격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만일, 크고 작은 세 강줄기 같은 통로로 마력이 빠져나가고 있지 않다면.
당장이라도 넘쳐, 거대한 해일이 되어 라온의 심장을 찌그러뜨려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더 놀라운 건.
‘말도 안 되는…….’
이런 격한 곳에서도.
마력이란 파도에 휩쓸린 그의 심장은.
마치 달빛이 내려앉은 호수처럼 잔잔하게 박동하고 있었다.
이미 익숙하다는 듯이 말이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라온이 덤덤하게 말했다.
말함과 동시에 마력이 작게 요동친다.
그것만으로도 마력이 빠져나가는 줄기들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심지어 상당한 크기의 줄기. 만일 다른 마법사에게 있다면, 진작에 탈진해 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큰 크기의 줄기마저도 말이다.
‘차고 있는 반지와 벨트, 그리고 저 쇠사슬인가…….’
웬만한 흉악범에게조차 사용하지 않을 아티팩트들이지만.
라온이 가진 마력에 비하면, 너무나도 작은 강줄기들이었다.
아무리 저런 걸 차고 있다고 한들.
마력이 빠져나가는 건 거의 느껴지지 않고, 여전히 터질 것 같은 불안감이 몸을 지배하고 있을 텐데.
이런, 평온한 감정을 유지하고 있다고?
“…없습니다.”
당연히, 악마의 기운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애초에 악마와 연결점이 있다면, 그의 눈동자가 몸 안을 꿰뚫어 보지 못했을 것이고.
방금 신성술을 사용했을 때, 격한 거부 반응을 보였을 테니까.
‘…정신력이 괴물이야.’
떠돌이는 미약한 두려움을 느꼈다.
인간이 이런 정신력을 가지고 있다니.
이게 말이 되는 건가?
아니.
‘이게, 쓰레기로 평가받는 자라고?’
저런 눈동자와 정신력이?
“언제 가문으로 돌아가지?”
그를 상념에서 일깨운 건 라온의 차분한 목소리였다.
자기도 모르게 공손한 태도를 취한 떠돌이가 대답했다.
“…다시 정비를 맞춘 후.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할 예정입니다.”
“내일?”
“…예.”
떠돌이는 그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방대한 마력이 일렁거리면서도 저 차가운 두 눈동자는.
그의 아버지인, 가주를 닮아 있었다.
“나도 함께 출발한다.”
당연하지만.
그에겐 거부권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