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휘청!
긴장이 풀린 탓일까.
두 다리에 힘이 풀려 순간 휘청거리자, 날 부축해 주고 있던 아벨라가 급히 날 단단히 잡아 주었다.
“괜찮으세요?!”
“신경 꺼.”
“파, 팔에 멍이…… 오, 온몸이 엉망이잖아요!”
“신경 쓰지 말라고 했어.”
“이, 이걸 보세요!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아벨라는 울먹이며 내 팔을 가리던 로브를 휙 걷었다.
팔에 가득한 피멍!
팔만이 아니었다.
내가 널찍한 로브를 입고 있어서 망정이니, 아니었다면 다친 게 다 드러났을 정도로 온몸에 멍이 가득했다.
‘무겁긴 무거웠지.’
게임에서야 어느 정도 통각을 낮춰주는 기능이 있어 유용하게 사용했지만.
지금은 현실이다 보니, 더럽게 아팠다.
허리띠를 통해 몸이 강화되지 않았다면 그대로 뼈가 으스러졌을 거 같은 고통이었으니까.
‘그래도 충분히 감당할 만했다.’
그걸로 얻은 이득은 충분했으니까.
“싸우지, 훌쩍. 그냥 마시지…… 왜 싸우셔서…….”
“그러면.”
난 훌쩍거리는 그녀에게 눈을 부라렸다.
여기서 조용히 침묵하거나 넘어가는 건 라온의 성미에 맞지 않았으니까.
“나보고, 날 또 병신 취급하는 놈들을 두고 가만히 있으라고?”
잔뜩 으르렁대는 목소리를 내자, 아벨라는 당황하던 표정을 지으면서도 입을 꾹 다물었다.
“난 이제 그딴 짓을 하지 않을 거다.”
“도, 도련니임…….”
“시끄러워!”
그녀는 날 걱정스럽고 구슬픈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나를 의심하진 않는다.
당연하다. 이런 고집 센 성격은 라온의 특징 중 하나였으니까.
특히나, 라온이 결핍이 있다는 건 그녀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런 태도를 보여도 전혀 이상하지 않아.’
“도, 도련님! 그쪽 길이 아니에요! 우선 치료부터 하셔야……!”
“그래. 괜한 고집 부리지 말고 우선 치료부터 하지.”
난 어느새 내 앞을 막아선 헬레나를 바라보았다.
“……뭐야?”
“너무 날카롭게 굴지 말게.”
“네가 뭔데?”
어째서인지 몰라도.
나를 바라보는 그녀는 너무나도 환하게 웃고 있었다.
마치, 그토록 원하던 걸 목격한 사람처럼.
“자네의 친구.”
&
결국 헬레나와 아벨라에게 질질 끌려 보건실에 처박혔다.
분명히 헬레나도 정석 루트인 데다가 나와 같은 초기 상태일 게 분명했지만.
이상하게 힘이 강력했다.
최소한 중반부 정도로 되어 보이는 강함.
내가 제압이 가능한 초반부 수준인 필립과는 완전 다른 상태였으니.
덕분에 X밥 라온 리그벨토인 나는 저항도 하지 못하고 질질 끌려왔다.
사실 온몸이 으스러질 것 같아서 저항하고 싶어도 못 한다는 게 맞았지만.
“……또 왔구나? 우리 아까 인사한 거 같은데. 그런데 누구한테 맞은 거니?! 온몸이 왜 이래!”
“그냥 가벼운 대련을 했을 뿐입니다.”
“가벼운 대련으로 애 뼈가 금이 가고 피멍이 들어? 혹시 헬레나 네가 했니?”
“오해십니다, 교수님.”
“자, 누우렴. 이번엔 절대 나가는 걸 허락하지 않을 거야. 넌 하루 동안 입원이야.”
“…….”
“그런데 너희 강의 시간 아니니?”
“아.”
난 보건실에 눕혀진 채, 가만히 내 머릿속에 있는 루트를 정리했다.
‘지금 조금 낭비한 걸 감안해도, 전체적으로 속도가 훨씬 빨라졌다.’
원래라면 고구마를 먹고 답답한 루트를 경험했어야 했다.
기껏 튜토리얼을 끝내고 돌아왔지만, 무시당하고, 수업에서 제대로 참가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째고 싶지만, 째는 순간 불이익이 발생하는 X 같은 이벤트.
‘너무 많이 달라졌어.’
이런 이벤트를 겪지 않은 것도 그렇지만.
문제는 예정에도 기억에도 없던 두 주인공급 캐릭터가 개입한 것.
그리고,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라온’의 인과관계에 스며들어있다는 것이다.
‘……차라리 이게 낫겠지.’
헬레나는 내게 호의적으로 보이고.
필립은 날 혐오하는 듯했지만, 이번 전투로 시선이 바뀔 것 같으니까.
만약 내가 아카데미를 계속 다녀야 한다면 골치가 아프겠지만.
‘어차피 아카데미에 없으니까.’
지금부터 내가 신경 써야 할 건, 이 캐릭터들보다는 앞으로 전투 도중에 몸이 터져 죽는 불상사를 방지하는 것.
‘이번 전투에서도 마력 폭주 기미는 보이지 않았지만…….’
내게 가장 위협적인 건.
압도적인 신체 능력이 아니다.
마력을 사용한 마법 전투.
마법사에 의해 방출된 마력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던, 상대 마법사에게 자극을 준다.
평범한 마법사라면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 수준이지만.
‘나 같은 망캐에겐 다르단 말이지.’
그 자극 때문에 내부의 마력이 폭주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필립과의 전투는 정말 다행스러웠다.
육체만으로 때울 수 있으니까.
‘그래도 대비는 해야 해.’
난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마력이 폭주하지 않게 하기 위해선.
체내의 마력을 상당수 빨아들여 안정을 되찾고.
외부에서 들어오는 마력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아티팩트를 차야 한다.
‘제일 먼저 얻을 수 있는 아이템 루트는…….’
머릿속으로 루트를 짜고 있을 때.
“들어오면 안 돼.”
“잠깐이면 됩니다! 잠깐이면!”
“잠-!”
밖에서 어수선거리며 투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헬레나의 목소리는 아닌가?
의문을 가진 채 슬쩍 한쪽 눈동자를 든 순간.
차악!
“……역시.”
처음 보는 녹색 머리 여자가 날 보며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있었다.
“몸이 멀쩡하지 않았어.”
……너 누구냐?
‘갑자기 몸이 멀쩡한 게 왜 나와?’
뭔가 생긴 게 좀 띨빵해 보이는 게, 어디선가 본 거 같기도 하고…….
덥석!
하지만 그 전에 마드리가 먼저 그녀의 어깨를 붙잡는 게 빨랐다.
그녀는 잔뜩 화난 표정으로 말했다.
“멜라. 지금 뭐 하자는 거니? 아무리 네가 오스큘라 가문의 방계라고 해도! 이건 엄연한 내 명예를 무시한 행위야!”
“잠시만요! 정말 잠시면 됩니다!”
“어서 나가. 이 아이는 환자야!”
“하나만! 딱 하나만 더 하겠습니다! 몸 상태가 멀쩡하지 않고 여기에 누워 있다는 것만 보여 주면 됩니다!”
“아니! 이 보건실의 담당은 나야. 내 명예를 더럽히지 마. 더 무례를 범한다면 네 명예를 조롱하고 여기서 강제로 끌어내리는 수밖에 없어!”
아, 기억났다.
멜리.
오스큘라 가문의 방계 출신으로,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아 필립을 보좌하는 역할로 이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다만…….
‘좀 지능이 많이 딸렸지.’
지능도 문제였지만, 모든 걸 필립을 중심으로 보는 사고 방식이 문제였다.
뭐든지 필립이 최고.
아니, 최고여야만 한다는 집착!
원래라면 처리해야 정상이지만.
‘단순한 게 다루기 편하겠지.’
…그런 안일한 판단은 나중에 아카데미를 뒤덮을 정도로 큰 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멜리. 마지막이야. 너의 명예, 그리고 여태 쌓아 온 친분을 보고 딱 지금까지만 눈 감아 주겠어. 당장 나가. 지금이 마지막 기회야.”
“자, 잠시만. 정말, 정말 잠시만이면 됩니다!”
“아니! 난 허락하지 않아. 3초 주겠어. 3. 2. 1.”
만약 마드리가 기본적으로 순한 성격이고 학생을 좋아하는 데다가 명예를 중시하지 않았다면.
멜리는 진작에 끌려나갔을 것이다.
아니. 만약 그녀가 원한다면 직접 재판에 회부되거나, 혹은 명예가 깎일 정도로 큰 문제로 번질 수 있었다.
다만.
명예를 존중해 준다는 이유로 이런 무례를 봐줄 기회를 주는 것이다.
그것도 선이란 게 있지만 말이다.
결국 마드리에게 붙잡힌 채 끌려나가는 멜라가 발악하듯이 외쳤다.
“인정하지 못한단 말입니다!”
“대체 뭘 말하는 거니?”
“겨우 이따위 놈에게, 제 주인이 패배한 것을!!”
그 말에 마드리가 날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엔 놀라움이 가득했다.
“……너, 무슨 일이 있던 거야?”
“신경 쓰지 마라.”
“참 까다롭네. 그래. 알았어. 사실 네가 말해주리라 생각도 안 했거든. 일단 난 잠시 자리를 비울게. 어디 가지 말고 얌전히 있어.”
“이익……!”
팔이 붙잡힌 채 질질 끌려나가던 멜리가 이를 악물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떨치고 내게 달려들 기색에 난 속으로 얼굴을 굳혔다.
‘저거 진짜 미친년이네?!’
생각이 없는 건 알았는데 저 정도라고?
하긴. 저 캐릭터 보고 ‘아니, 뭔 캐릭터를 이렇게 대충 만드냐?!’라고 항의가 들어왔을 정도라고 했으니까, 저것도 이상하진 않기 한데…….
‘시발, 진짜 개망겜 같으니!’
쇠사슬을 꽉 붙잡았을 때.
쾅!
“멜라!!!!!!!!”
분노 어린 목소리가 보건실 안을 쩌렁쩌렁 채웠다.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 필립이었다.
붉으락푸르락하는 얼굴을 본 멜라가 그제야 제정신이 든 듯, 말을 더듬었다.
“도, 도련님…….”
“……네가 막무가내인 줄 알았지만. 실망이구나. 날 위한 것이라면 더 조용히 있어야지. 지금 뭐 하자는 것이냐?”
으드득.
필립의 이가 악물리고 두 눈이 붉게 변했다.
“날…… 더 추하게 만들지 마라…….”
그가 분노한 모습에.
안색이 창백하게 질린 멜라는 급히 자리에 주저앉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 합니다.”
“죄송합니다, 교수님. 감히 제 수하가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아니야. 괜찮아. 우선 데리고 가봐. 난 환자를 돌봐야 하니까.”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멜라. 따라와라.”
나가기 전.
필립은 날 힐끔 바라보았다.
온몸에 멍이 든 내 모습을 보고도 똑같은 눈빛을 유지한 그가 한마디 말을 남겼다.
“……다음에 보지.”
쿵, 쿵, 쿵-
난 필립이 나가자마자 속으로 다짐했다.
‘빨리 나가야겠다.’
저 눈동자는, 분명히 나를 ‘라이벌’로 인식한 눈동자였다.
&
“……미안하군. 잠시 출석 처리를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군.”
“죄, 죄송해요…… 도련님…… 설마, 그 사이에…….”
잠시 잊고 있었지만.
우리는 강의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밖으로 나온 상태였다.
그 덕에 둘은 불가피하게 잠시 강의실로 돌아가야 했고, 그사이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난 관심 없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지만.
둘은 내가 이걸로도 화가 안 풀렸다고 생각한 것인지, 말을 덧붙였다.
“그자는 내가 따로 가문에 말해서 처벌을 가중시키겠다.”
“저, 저도 열심히 요청해 볼게요!”
“자네는 하녀이지 않나. 그런 권리는 없을 텐데?”
“그, 그치만…….”
아니, 대체 뭔 그런 쓸 데 없는 걸로 기싸움을 하는 거야.
“시끄러워. 그보다, 아벨라.”
“네, 네!”
“가문에서 온 이야기. 있나?”
아마 지금쯤이면 가문에서 따로 이야기를 보냈을 것이다.
아마 그들의 정보망이라면, 지금쯤 내가 필립 오스큘라를 꺾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테니.
“그…… 저, 도련님.”
내 예상대로, 잠시 주춤거리던 아벨라는 조심스레 품에서 편지를 꺼냈다.
“가주님께서 직접 편지를 보내셨어요.”
“……?”
가주가 직접?
난 아벨라가 내민 편지를 열었다.
편지 안에는 성격을 드러내듯, 딱딱한 문체로 세 문장이 적혀 있었다.
-진위 파악을 위해 사제가 곧 도착할 것이다.
-확인 즉시.
-가문으로 복귀하라.
난 속으로 피식 웃었다.
‘성격 숨기느라 고생이시네.’
정작 나는 가주의 성격이 어떤지 아는데 말이야.
&
라온 리그벨토의 평가는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다.
‘쓰레기.’
그 평가는 가문으로부터 시작된 것이기에.
가문 내에서도, 라온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평가하는 결과는 언제나 쓰레기로 낙인 찍혀 있었으니.
하지만.
그 평가는, 아카데미에 둔 정보통으로 전달된 한 줄기의 문장으로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대련에서 라온 리그벨토가 필립 오스큘라를 꺾었다.
쓰레기로 낙인찍힌 라온 리그벨토와 달리, 미래에 가주라는 직책을 넘어서 왕(王)에 도달할지도 모르는 가능성을 품은 천재.
어쩌면 개념만이 남은 황(皇)에 다다를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있었으니.
이미 대공자로 임명받아 미래에 가문을 물려받기로 되어있으며.
가주뿐만 아니라 황제에게까지 찬사를 받은 실력자 중 한 명인 필립이 일개 라온에게 꺾였다는 건.
단숨에 그의 평가를 뒤바꾸기 충분했다.
하지만.
뒤바꾼다 해서, 꼭 긍정적인 방향인 건 아니었다.
“라온, 그 머저리가 필립을 이겼다고? 요새 헛소문도 퀄리티가 참 좋군.”
리그벨토 가문의 원로 중 한 명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는 현 가주를 키워 낸 스승 중 한 명으로서.
그런 공로를 인정받아, 직접 직계를 가르칠 기회를 얻었었다.
당연히도 라온의 재능을 먼저 알아본 사람이기도 했다.
‘그 당시엔 엄청난 천재인 줄 알았지.’
인간이라곤 믿기지 않는 방대하고도 정순한 마나.
다룰 수만 있다면, 역대 최고라 불리는 천재들을 모두 찍어누를 수 있을 테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라온이 마력을 다룰 수 있을 때의 일이었다.
라온에겐 마력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그건 마법사로서의 무능함을 뜻하는 것이니.
‘곧 제거된다는 소문이라도 들었나 보군.’
이때까지는 나이가 어리기에 가만히 내버려 뒀지만.
이제 슬슬 라온의 나이도 성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1년 후, 열일곱 살이 되는 날.
성인이 되어, 가문의 일원으로 인정받는 날.
그날, 라온은 제거될 운명이었다.
드르륵!
“……가주님.”
문이 열리는 소리에 원로는 자리에서 주춤주춤 일어섰다.
인간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차가운 얼굴과 그와 대조되는 붉은 눈동자를 가진 남자가 들어온다.
리그벨토 가문의 가주.
현 가주들 중에서 최강으로 손꼽히는 남자.
‘…여전히 두렵군.’
그를 직접 가르치고 훈련시킨 스승이건만.
그는 그가 두려웠다.
그나마 믿음을 준 대상이라 할 수 있지만.
그의 강함은, 스승인 원로마저도 두렵게 만들었으니까.
“여긴… 무슨 일로.”
“라온 리그벨토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소름 끼칠 정도로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제를 보내라.”
“…….”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고, 혈통에 문제가 생기지 않았는지. 부정한 존재에게 힘을 빌린 건 아닌지 확인하라. 진위 파악 이후에 가문으로의 복귀를 허락한다.”
“…….”
“이 사실은 다른 가문에는 물론, 가문 내의 일원들에게도 들리지 않아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원로는 고개를 숙이면서도.
작은 의문이 들었다.
‘이 이야기를 왜 나에게?’
마치…… 누군가에게 이런 사실을 숨기기 위함이라도 되는 것 같지 않는가.
예를 들어.
같은 직계를 제거하여 조금이라도 경쟁력을 높이고자 하는 라온의 형제들에게서.
‘그리고 왜 굳이 ‘사제’를?’
만약 다치기라도 했으면 치료할 수 있게 해 주기라도 위함인 것처럼….
‘착각이겠지.’
설마, 저 냉철한 가주가 한 아이를 걱정할 리가 없다.
만약 정말로 걱정했다면, 그가 따돌림받고 배척당하며 무시당할 때…… 분명 손을 썼을 테니까.
원로는 뼛속까지 무를 추구하는 전사였기에.
그는 정치를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