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물론 내가 구르기 싫다거나, 지루하다거나와 같은 개인적이고 사소한 이유로 아카데미를 벗어나려는 게 아니다.
애초에 나는 보상만 확실하다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는 인간이니까.
그런 내가 아카데미를 벗어나려는 건, ‘전혀 보상이 없기’ 때문이다.
예전에 라온 리그벨토로 게임을 시작한 한 유저가 내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라온 리그벨토로 아카데미 스토리 어떻게 밀어요?
내 대답은 간단했다.
-밀지 마세요.
-네? 아카데미가 메인 배경인데……?
-네. 근데 라온한텐 도움이 안 돼요.
-???
라온 리그벨토가 망캐인 이유.
그건 게임의 메인 배경이자, 메인 스토리인 아카데미에서 성장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성장을 아예 안 하는 건 아니지만….’
라온에게 필요 없는 방향이라고 하는 게 옳겠다.
아카데미는 여러 보상을 준다. 일명 혜자라고 불리기까지 할 정도로 듬뿍 준다.
무기, 마법, 스킬, 능력치까지.
다만.
‘나한테 쓸모가 없다는 게 문제지.’
무기? 쇠사슬 때문에 못 쓴다.
마법? 마력 쓰다가 죽는다.
스킬? 마력을 못 쓰면 끝이다.
능력치? 다른 데서도 올릴 수 있다. 여기서 올리는 건 쓰레기 같은 효율이었다.
라온에게 필요한 건 오로지 아카데미 밖에서만 구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아카데미는 라온에게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곳이다.
‘이걸 몰라서 한참 고생했지…….’
나중에 알고 나서도 아카데미를 벗어날 수 있는데 제한이 빡센 탓에 동선 낭비가 심했다.
‘하지만 자퇴한다면 동선을 효율적으로 줄일 수 있다.’
반드시 자퇴한다!
“도련님? 혹시 목을 다치신 건가요?! 왜 말이 없으신……!”
“시끄럽다.”
넌 좀 떨어지고.
&
“다행히 안면에 상처가 생긴 것 말고는 문제가 없네.”
돌아오는 나는 보건실에서 치료받았다.
사실 말이 보건실이지, 웬만한 의료 시설만큼 훌륭한 시설을 갖춘 곳이다.
유명 귀족가의 자제들이 다니는 곳인데, 이 정도는 당연한 일.
더군다나 보건실의 교수는 상당히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래도 이번엔 얼굴 하나만 다쳤네? 지난번처럼 심장이 터지기 직전에 온 것보단 낫네.”
가슴까지 내려올 정도로 기른 검은 머리, 사제 특유의 황금색 눈동자.
보건교사 마드리.
상당히 인기가 많은 캐릭터다. 미형은 물론이고 그녀 특유의 친근하고 포근한 분위기 때문이다.
‘이 설정은 달라진 게 없군.’
그녀의 친화력은 모든 학생이 기피하는 라온조차 거르지 않아, 고양이처럼 모두를 경계하는 라온의 살벌한 가드마저 뚫었다.
쓸데없는 대화를 싫어하는 라온에게 저런 농담을 던질 정도로 말이다.
난 게임 속과 같은 농담에 안심을 느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소리세요!!”
아니, 깜짝아. 난 뒤에서 갑자기 소리를 지른 아벨라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무슨 남자친구에게서 ‘사실 나는 고자야’하는 소리를 들은 여자친구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일 귀중한 얼굴이 다치신 건데!”
“아, 네네. 그러시구나. 그런데 어디서 다치고 왔니? 또 실종 기간 동안 어디에 있었고.”
“…….”
절대 범죄자로 오인되어서 일개 양아치들에게 끌려갔다곤 말 못 한다.
애초에 그런 걸 말할 성격도 아니고.
내가 침묵을 택하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그녀가 품을 뒤적거렸다.
“뭐, 말 안 할 거지? 알고 있었어. 그럼 오늘 바로 수업에 들어갈 거니?”
“……아니.”
“그래? 그럼 오늘은 푹 쉬어. 자, 이것도 먹고. 오늘도 파이팅!”
-마력 흡수 사탕!
그녀가 내민 건 상당히 귀한 사탕이었다.
당연했다. 어느 누가 마력을 흡수하는 음식을 먹겠는가?
수요가 없으니 공급도 없는 법. 하지만 그녀는 용케도 이런 물건을 찾아와 라온에게 건네주었다.
스토리를 어느 정도 진행하고 나서 왜 이런 귀한 걸 챙겨주느냐 물어봤을 때 들은 그 대사란.
-보건교사라도, 나는 사제야. 아픈 사람을 두고 지나칠 순 없지. 그러니 꼭 챙겨 먹으렴.
내 심금을 울린 ‘명대사 TOP 10'에 올렸었지.
‘저걸 직접 못 듣는다는 게 아쉽네.’
꿀꺽.
한 번에 사탕을 삼킨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다음에 오지.”
“그래. 근데 언제 내게 존댓말 해줄 거니?”
“…….”
라온의 컨셉이 깨질 때까지요.
사실 지금도 영혼에 남은 미약한 유교 사상과 죄책감에 심장이 쿡쿡 찔리지만, 컨셉은 유지해야 하니까.
난 속으로 그리 대답하며 밖으로 나왔고, 뒤에서 아벨라가 쪼르르 따라오며 내 쇠사슬을 들어 올렸다.
“하루 동안 제가 안 들어 드려서 무거웠죠? 다시 제가 열심히 들어 드릴게요!”
난 그녀의 손에서 쇠사슬을 잡아당겨 쇠사슬을 뺏어 왔다.
“아니. 필요 없다.”
“!!!”
내 말에 아벨라가 충격 받은 표정을 지었다.
“호, 혹시 화나셨어요……?”
본래 라온의 쇠사슬은 아벨라가 자주 들어 주었다.
상당히 무거웠으니까.
하지만 이젠 필요 없는 일이었다.
‘쇠사슬을 장착하고 있으면 능력치가 오른단 말이지.’
따지자면 무거운 물건을 등에 지고 다니는 행위이니, 능력치가 오른다.
대신 그녀의 보조를 받으면 능력치가 성장하지 않는다.
절대 나는 그걸 용납할 수 없었다.
능력치 성장이 1순위가 아니라고 해도 미룰 필요는 없었으니까.
‘몸이 조금 찌뿌둥하긴 하지만…….’
이건 마력의 영향으로 하룻밤 자고 나면 낫는다.
물론 이런 사정을 설명할 순 없으니, 말없이 그녀를 노려보자.
“죄송해요…….”
그녀는 잔뜩 시무룩해진 채로 물러났다.
여기서 이대로 두면 그녀의 스트레스 지수가 쌓이고, 호감도가 깎여 나중에 암살자가 되는 루트를 타게 되지만.
선택지만 잘 고른다면, 오히려 그녀의 호감도를 살 수 있다.
“……그냥 내가 들기에 익숙해졌을 뿐이야. 네가 들어 줄 필요 없어.”
좋아. 선택지와 완벽히 똑같은 대사였다.
슬쩍 아벨라를 보자, 내 말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아벨라는 바보처럼 헤헤 웃음을 흘렸다.
“헤, 헤헤…….”
난 속으로 숨을 골랐다.
‘딱 이 정도 선.’
원래 라온이 그녀를 대하는 것처럼 대한다. 물론 조금 부드럽게.
아직은 솔직히 좀 거칠게 대하고 무시하는 감이 있긴 하지만…….
‘조금씩 강도를 낮추면 돼.’
그렇게 한다면 아벨라를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다.
암살자 루트만 안 탄다면 유능한 캐릭터니까.
사실 나도 그녀에게 몇 번 뒤통수만 안 맞았다면 좋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 루트를 타는 이유가 라온의 업보이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부모는 자식이 죄를 저질러도 감싼다고, 열심히 키운 라온을 갑자기 뒤에서 푹! 하고 찌르는데 안 미워할 수가 없었다.
‘일단 거리를 적당히 두고 대한다.’
나는 그리 속으로 계획을 정리하며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도, 도련님! 거긴 기숙사 방향이 아닌데…….”
“안다.”
“네?”
난 벽에 걸린 지도를 확인하며 무심한 말투로 말했다.
“교장을 만나러 갈 거다.”
“무슨 일로…….”
“자퇴.”
난 기쁜 마음을 숨기고 무심한 눈으로 아벨라를 바라보았다.
“오늘부로, 이 아카데미를 자퇴한다.”
“……네????!?”
&
“향이 좋군요.”
“감사합니다.”
탁.
아카데미 교장은 부드러이 미소 지으며 눈앞에 찻잔을 내려놓은 여인을 바라봤다.
글라스크 가문의 상징인 강렬한 붉은 적발, 귀족다운 당당함과 오만함이 얼핏 보이는 귀족의 눈.
헬레나 글라스크. 현 아카데미 내에서 압도적인 성적을 갖춘 수석이자, 동년배가 아닌 졸업을 앞둔 선배들보다도 뛰어난 실력을 가진 천재 중의 천재.
그뿐이랴. 그녀의 가문은 현 제국에서 황제를 제외한다면 명예와 명성, 역사까지 모든 걸 갖춘 훌륭한 가문이다.
혈통, 재능, 외모까지. 모든 걸 가진 그녀는 부드러이 미소 지으며 차를 칭찬했다.
“여전히 훌륭한 향이에요. 하나도 변하지 않았군요. 아니, 지난번보다 더 짙어진 것 같네요.”
“하하, 보잘것없는 재주이지요. 직접 나서서 사건을 해결하신 헬레나님의 재주에 비하겠습니까.”
‘내가 한 일이라 생각하고 있군.’
헬레나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느껴지는 교장의 눈을 보며 깨달았다.
분명히 보고서에는 자신이 아닌 ‘라온 리그벨토’가 해결한 일이라고 올렸건만, 그는 자신이 해결했다고 받아들였음을.
“정말 고생하셨…….”
“아뇨.”
그녀는 단호히 교장의 말을 끊었다.
“제가 한 일이 아닙니다.”
“……?”
“제가 아닌, 라온 리그벨토. 그 혼자서 한 일이죠. 아주 훌륭하게 완수했더군요. 그는 훌륭한 실력자입니다.”
그 말에 교장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라온 리그벨토 님을, 인정하신 겁니까?”
“인정까지는 아니죠. 다만, 그가 직접 해결한 건 확실하다고 말씀을 드린 것뿐입니다.”
귀족의 인정이란 ‘잘했네~’ 같은 가벼운 말이 아니다.
상대방이 충분한 실력과 격식을 갖추고, 푸른 피가 흐르는 고귀한 혈통이 인정할 만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뜻.
비록 헬레나가 정확히 ‘인정’이라고 하지 않았지만….
‘충분히 가능성을 보았다는 것.’
‘실패자’ 라온이 충분한 능력만 보인다면, 곧바로 인정을 할 수 있다는 충분한 여지를 주는 말이다.
교장은 꿈틀거리는 미간을 조절하고 차분히 말을 이었다.
“…믿을 수가 없군요. 설마 ‘그’ 라온이 헬레나 님에게 그런 평을 받다니.”
하지만.
헬레나는 교장의 말속에 들어 있는 작은 가시를 느낄 수 있었다.
‘여전하군.’
교장은 평민 출신이다.
지금은 준귀족으로 취급받으며, 말년에는 황제에게 직접 영지와 직위를 하사받을 것이라 평가받지만.
푸른 피를 타고나지 못해 타고난 콤플렉스는 지우지 못했다.
그는 말년에야 마지못해 치하받는 직위가 아니라, 지금 당장 자신에게 걸맞는 높은 위치를 원했으니.
‘그래서 라온 리그벨토를 여기에 진학시키는 데 힘을 썼지.’
헬레나의 가문인 글라스크 공작가와 동격, 제국을 지탱하는 네 개의 기둥 중 하나인 리그벨토 가문.
리그벨토 가문은 교장이 원하는 푸른 피 중에서도 고귀했다.
그래서 교장은 ‘권력에 굴하지 않는다’라는 암묵적인 규칙을 깨고 리그벨토의 후원을 받으며 라온을 이곳에 진학시켰다.
‘하지만 그건 내 관심사가 아니지.’
헬레나는 그런 점에 관심이 없었다.
그녀가 궁금한 건.
과연 그녀가 그에게 봤던 가능성을, 그도 그에게서 가능성을 보았는지 궁금해서였다.
‘내 일방적인 착각이 아니었으면 좋겠군.’
강한 누군가와 친분을 쌓는 일이란 그만큼 즐거운 일이니까.
똑똑.
그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여전히 얼굴에 미소를 띤 교장이 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죠?”
문을 열고 들어온 교감은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저… 교장 선생님. 라온 리그벨토가 찾아왔습니다.”
“라온 리그벨토 님이?”
“예.”
“무슨 일로…….”
“본인이 직접 만나서 말하겠다고…….”
“좋습니다. 불러오세요.”
‘문책하려는 건가?’
라온 리그벨토가 실종된 대에는 아카데미의 책임도 있다. 아카데미가 학생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 것이니까.
하지만…….
‘이제 와 갑자기?’
본래 라온이 보이던 태도는 아니다.
언제나 무기력하게 숨죽여 살던 그가, 갑자기 여기까지 찾아오다니…….
‘숨기고 있던 실력을 드러내려는 건가?’
아니면 일방적인 착각인가?
그녀는 작은 기대감을 느끼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네가 뭘 하기 위해 직접 찾아온 걸까?’
“들어가시죠, 라온 리그벨토 님.”
때마침 문이 열리면서 교감이 라온을 데리고 들어왔다.
끼익, 끼리익… 끼드윽…….
쇠사슬이 질질 끌리고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라온이 밝은 방 안으로 들어왔다.
흠칫.
라온을 본 교장은 자신도 모르게 흠칫거렸다.
앞이 보일까 싶을 정도로 긴 머리카락과 힐끗 보이는 탁하게 물든 눈동자, 온몸에 두른 흉악한 쇠사슬도 문제였지만.
교장에게 영향을 준 건, 작은 체구에서 뿜어지는 사나운 기운의 마력 때문이었다.
분명 그의 체구가 작음에도 거대한 거인처럼 보일 정도로 강렬한 기운!
‘여전히 불쾌한 놈…….’
만약 저것이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기운이었다면 찬사를 받았을 테지만.
저건 통제할 수 없는, 폭탄일 뿐이다.
그런 것에 잠시 겁을 먹었다는 것에 교장은 불쾌했다.
매일 어깨를 늘어트리고 근처의 눈치를 보는… 전혀 귀족의 위엄이라고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무능한.
리그벨토 가문의 지원이 없었다면 절대 쳐다도 보지 않았을 실패자.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그래서.
그는 라온이 입을 열었을 때.
“……예?”
순간 귀를 의심했다.
“…제가, 잠시 잘못들었-”
“아니. 제대로 들었다.”
언제나 실패자처럼 축 늘어져 있던, 라온이 어깨를 당당히 펴고 두 눈으로 그를 바라보면서,
마치 산책하러 간다고 말하듯이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
“아카데미를 자퇴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