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3. 외전 7화 아산댁(2) >
압도.
순희, 아산댁이 처음 천혁수를 만났을 때 느꼈던 감정이었다. 무엇인가에 압도된다는 느낌. 그것을 처음 받았었다.
십수명의 사내들에게 둘러쌓인 천혁수.
그는 우아하고 아름답게 피 튀기는 상황 속에서도 특유의 백색 더블버튼 수트를 더럽히지 않으며 싸웠다.
일격에 한 명.
천혁수의 손이 닿은 건달들은 마치 무협속 추풍낙엽이라는 표현이 적절하다 싶을 정도로, 속수무책으로 쓰러져 나갔다.
덜덜덜.
순희는 자신의 머리끄덩이를 움켜쥐고 있던 건달 두목의 손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예전부터 천혁수라는 인물을 알고 있는 듯 보였다.
퍽.
“끄읍.”
구둣발에 사정없이 사타구니를 맞은 사내를 마지막으로 다시 뒤를 돌아본 천혁수.
“더 있나?”
“······”
드르르륵.
의자를 끌고와 순희의 머리끄덩이를 잡고있는 건달 두목 앞에 척, 앉은 천혁수.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고는 물끄러미 건달 두목을 내려다본다.
“내가 내어준 고리 만큼은 내가 처리 할 수 있게 도와주십쇼.”
천혁수가 피식 웃는다.
“대한민국에서 감히 내 허락 없이 고리를 놓고도 당당 하다라.”
“내 돈이었소!”
그래도 두목이라고 천혁수의 신위를 보고도 목소리를 내는 놈.
천혁수가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찾으셨습니까 형님.”
“찾으셨습니까! 형님!”
덩치가 도저히 한국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커다란 근육질의 사내와, 상대적으로 마른 체형을 가진 사내 둘이 순식간에 나타났다.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는지 그들의 존재를 눈치 챈 사람들은 없는 모양.
“백 가, 정 가······”
두목은 둘이 누구인지 대번에 알아본 모양이지만, 순희는 몽롱한 정신으로 당최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
“칼.”
“예!”
천혁수의 짧은 명령에 마른 사내의 품속에서 번개처럼 시퍼런 단도 하나가 나왔다.
천혁수는 그것을 건달 두목의 앞에 툭 하니 던졌다.
“감히 내 허락 없이 고리를 놓은 대가는 받아야겠다. 그렇다면 네가 원하던 대로, 네가 뿌렸던 고리는 회수하도록 허락하지.”
“대, 대가?”
“손, 발, 귀, 눈, 혀도 좋겠지.”
꿀꺽 침을 삼키는 건달 두목.
“그 정도 각오도 없이 이 땅에서 고리를 놓았나?”
“병신이 되면 어떻게 고리를 받아 내겠소!”
“그거야 네가 알아서 할 일이지.”
“이익!”
“다시 묻지, 손, 발, 귀, 눈, 혀. 무엇을 택할테냐?”
“조옷까!”
천혁수가 씨익 입꼬리를 들어 올리고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백호야.”
“예! 형님.”
“저 놈이 고르기가 어렵다니, 네가 알아서 가져오거라.”
“예!”
백호라 불린 사내는 덩치가 큰 사내였는데, 그런 덩치로 어찌나 민첩하게 움직이는지, 그의 이름이 백호인지 아니면 정말 호랑이인지 모를 일이었다.
순식간에 천혁수의 뒤쪽에서 튀어나간 백호의 커다란 손아귀에 한 덩치 하던 건달 두목의 목이 붙잡혔다. 이내 그대로 높게 들어올리고는 백호는 천천히 두목의 눈, 귀, 입, 손, 발을 바라보았다.
“흐음.”
백호란 사내가 발로 천혁수가 던져 놓은 단도를 차 올렸다. 그대로 위로 올라온 칼을 왼손으로 쥐더니 칼날이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휘둘렀다.
서걱. 쿵!
“끄아아아아!”
두목의 오른쪽 귀가 사라져 있었다.
백호는 두목 놈에게서 돌아서서는 천혁수를 바라보며 고개를 숙인다.
‘명령을 완수 했습니다.’하는 태도였다.
천혁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두목 놈에게 물었다.
“칼을 저놈에게 주거라.”
“예!”
백호가 오른쪽 귀를 꼭 쥐고 있는 두목의 손을 떼어내고는 그 손에 칼을 쥐어주었다.
“이제 네가 선택해 보아라, 눈, 혀, 손, 발. 남은 한쪽귀도 좋겠지.”
두목이 부들부들 떨리는 입으로 말했다.
“이미 귀 하나를 가져 갔잖아!”
천혁수가 씨익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백호를 바라보았다.
“아직 선택하기가 어려운 모양이구나, 선택지를 줄여 주거라.”
“예! 형님!”
백호가 두목의 오른손을 억지로 움직여 남은 한 쪽귀에 가져갔다.
“자, 잠깐! 잠까아아안! 포기, 포기하겠습니다 어르신. 고리의 권리 역시 모두 내어놓겠습니다. 살려만주십시오.”
두목이 공손히 무릎을 꿇고는 바닥에 이마를 찌으며 빌고 빈다.
슬쩍 고개를 돌린 천혁수가 곁에 서 있던 탄탄하게 마른 사내를 바라보았다.
“정용아.”
“예, 형님.”
“어찌하랴?”
정용이라 불린 사내의 눈과 두목이 눈을 마주쳤다.
감정이라고는 하나 없는 눈과 마주친 두목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본을 보이시는 것이 옳다고 생각됩니다.”
“그래?”
“예, 이제 막 고리를 장악했습니다. 도박장의 꽁지들이 암암리에 허락없이 고리를 놓고 있으니, 본을 보이셔서 알아서 고개를 숙이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보입니다.”
“일리 있다.”
다시 고개를 돌린 천혁수가 백호를 바라본다.
“호야.”
“예, 형님.”
“용이와 함께 처리해라.”
“예!”
“용이는 저 놈 장부들 다 가져오고.”
“예, 형님.”
천혁수는 조용해진 장내에 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더니 물끄러미 순희를 바라보았다.
“여군이라.”
순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세상을 압도하는 사람의 눈이 자신에게 닿아 발가벗겨진 기분을 느꼈다.
보통의 남자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과 다르게 그의 눈에는 어떠한 욕망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아산의 촌구석에서 나고 자랐다지만 순희는 바보가 아니었다.
아산 최고의 만석꾼 밑에서 옳게 교육을 받았고, 당시 시대의 여자들보다 훨씬 고등 교육을 받을 수 있었으니까 남자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무엇인지는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저 사내, 천혁수는 여타 다른 사내들과는 다른 눈을 하고 있었다.
“여기있습니다. 형님.”
허름한 가죽장부 하나를 내온 정용.
천혁수가 샤락샤락, 천천히 장부를 살폈다.
“네가 아산 만석꾼의 딸이더냐?”
불쑥 순희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던진 질문.
“네? 네···”
“네 아비는 이제 사람이 아니다.”
순희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는 이내 고개를 주억거린다.
“너는 네 운명이 어떻게 흐를것이라 보느냐?”
순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유복하게 자라다 가세가 기울어 대학을 졸업하지 못하고 군에 들어갔다. 아비를 위해서, 어미를 위해서.
세상 물정을 모르기에 뭐라 대답 할 말이 없었다는 뜻.
“너는 창부가 되었을게다.”
와락 인상을 찌푸린 순희.
“그 얼굴이 독이 되었겠지.”
천혁수가 정용 고갯짓으로 신호하자, 정용이 순희에게 차용증 한 장을 건낸다.
자신의 아비의 이름과 성모라 불리던 두목의 이름, 그리고 금액과 이자까지 상세하게 적혀있는 차용증.
“네 아비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멍청한 사람이었지···”
도박장 한켠에 두목에게 맞아 기절해 있는 아비를 바라보는 천혁수의 눈에는 안타까움이 걸려있었다.
“백호.”
천혁수의 부름에 다시 어디선가 번개처럼 나타난 커다란 덩치 백호.
“최 형을 모셔라 형수님 가시는 마지막 길, 상주는 있어야지.”
“예, 형님!”
천혁수의 입에서 흘러나온 충격적인 말에 순희가 아픔도 잊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게 무슨 말씀이죠?”
“이곳에 오기전 형수님을 먼저 뵈었다. 이미 세상을 떠나셨지만.”
와장창.
순희는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
순희 어미의 장례식은 초라했다.
장례식장 자체는 성대했지만 그 집을 찾는 사람들이 없었다. 오직 천혁수와 그의 부하들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쯧쯧.”
순희 아비는 하루종일 술을 마시고 또 마셨다.
덕분에 상주 노릇은 순희와 천혁수가 도맡아 하고 있었고, 천혁수는 장례 내내 한 숨을 자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작은 동네 몇 사람들이 들렀고, 멀리 사는 친지들이 조문객의 전부였다.
장례가 끝나자 마자, 순희 아비는 부조금 통부터 들어 올리고는 바닥에 쏟았다.
그러고는 게걸스럽게 봉투들을 모아서는 히죽 웃으며 길을 나섰다.
“아버지!”
순희의 부름에 힐끗 뒤를 돌아본 순희 아비.
“아, 아비가 금방 돈 벌어서 오마. 우, 우리 마누라 좋은 묏자리는 봐 줘야지.”
순희는 아비가 어디를 향하는지 알 수 있었다.
저 망할 인간은 지금도 도박장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털썩.
순희는 자리에 주저 앉았다. 더는 아비를 말릴 힘도, 아비에게 쏟고 싶은 정성도 남아있지 않았다.
천혁수의 안타까운 음성이 들려왔다.
“네 아비는 사람이 아니다.”
순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비를 저렇게 만든 놈들, 형수님을 저렇게 가게 만든 놈들, 누구인 줄 아느냐?”
순희는 고개를 저었다.
툭.
순희의 앞에 검은색 두꺼운 노트 한 권이 놓였다.
“읽어 보아라, 그럼 네가 살아갈 길이 보일테다.”
***
천혁수가 민망하다는 듯 ‘커험’하고 헛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내가 그리 무게를 잡았더냐?”
아산댁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예, 오라비는 그때 그러셨습니다.”
“끌끌, 그 놈에 폼이 뭔지··· 순희 네가 고우니, 내가 폼을 잡았던 모양이다.”
“호호, 하나회를 때려잡던 오라비는 제법 폼이 나셨습니다?”
“그래? 하하, 그때는 그랬지··· 아직까지 그때 벤 피 냄새가 지워지지 않는 것 같구나.”
아산댁이 씁쓸하게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예···”
물끄러미 아산댁이 옷이라는 천에 둘러쌓인 자신의 몸을 내려다 본다. 평생 지워지지 않는 흉터들을 무던히도 만들었던 그 일.
아비의 복수이자, 어미의 복수이며, 자신의 인생을 망친 놈들에 대한 복수.
그리고 그 복수에 기꺼이 손을 보태준 천혁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참 고마워요 오라비.”
“다, 지난 일이지··· 더 말하지 말거라, 이제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생각하며 살자구나, 피 냄새 나는 일은 시황제이신 내 손자놈이 알아서 할테니.”
“호호, 예··· 그리 살아요. 우리.”
우리라는 단어에 천혁수가 흠칫 놀랐다.
그러나 이내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둘이 처음 만났을 때.
마음을 빼앗긴 것은 비단, 아산댁 순희뿐은 아니었다. 오십줄이 넘어간 나이, 그러나 지금도 아산댁은 그 본연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천상 여인이었다.
이제 여유가 생긴 천혁수.
더 이상 피비릿내 나는 삶을 살지 않아도 되는 천혁수. 자신의 손자가 이제는 편안한 노후를 보장해 줄 그럴 삶.
천혁수가 무엇인가 결심했다는 듯, 전화기를 들어올렸다.
-예, 할아버지.
“이놈아.”
-예, 말씀하세요.
천혁수가 천우진의 보챔에 아산댁을 똑바로 바라보고는 말했다.
“들어와서 네 할미한테 인사드려라.”
-예?
“그리 알아.”
-··· 당황스럽긴 한데, 잘 생각하셨어요, 남은시간 행복하게 사셔야죠, 한 30년은 행복하게 사실겁니다. SKY가 열심히 일 해서, 30년을 최대한 늘려보겠습니다.
“끌끌, 그래?”
-예, 그나저나 할아버지 베필은 역시, 아산댁··· 아니 우리 할머니시겠죠?
자신의 손자 역시 눈치가 귀신이니 이미 짐작하고 있던 모양이다.
“그래, 내가 분에 넘치는 베필을 얻었구나.”
천혁수가 손을 쭉 뻗어 아산댁의 손을 맞잡는다.
순희는 볼을 발그레 붉히며 고개를 푹 숙인다.
“이제 네 할미 고생 그만 시키고, PMC에서 전문적으로 가사 배운 아이들 좀 보내거라.”
-그래야죠, 결혼식도 준비하겠습니다.
“결혼식?”
순희가 손사래를 치며 크게 말한다.
“아니에요, 저는 괜찮아요 폐하.”
-에이, 할머니 우리끼리 계실때는 말씀 편하게 하세요, 그리고 우리 할아버지는 몰라도 할머니는 초혼이신데 성대하게 하셔야죠.
천혁수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오냐, 그럼 손주놈이 한 번 준비 해 보거라.”
-옙! 쉬십쇼!
순희의 두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오늘까지만 울어, 앞으로는 평생 웃게 해줄테니까.”
“예, 예. 오라비.”
< 453. 외전 7화 아산댁(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