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2. 외전 6화, 아산댁. >
외전 6화, 아산댁.
대통령의 자리에서 내려와 요즘 여유를 즐기고 있는 천혁수. 항상 피에 절어서 살던 삶에서 웃음꽃이 만발한 증손자들을 보고 있자니 절로 힐링이 되는 것 같은 느낌에, 인상은 계속 펴지고, 입가에 미소는 지워지지 않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아이들이 집 마당에서 모래놀이를 즐기는 것을 바라보며 한가롭게 차를 마시던 그는, 다과를 내온 아산댁을 바라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늘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지만 그녀의 삶이 녹록치 않았음을 알기 때문.
“순희야.”
흠칫 놀라 몸을 떠는 아산댁.
천혁수의 입에서 그녀의 이름이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네, 어르신.”
“이제 너도 네 이름으로 살아도 되잖으냐?”
아랫입술을 꾹 물며 오만가지 감정을 참아내는 아산댁.
“아니에요, 전 지금도 좋아요.”
“쯧쯧, 그놈에 최씨 고집은 도통 사라지질 않는구나.”
벌써 10년전부터.
천우진이 천혁수의 집에 들어오기 전부터, 천혁수는 아산댁에게 자유를 주고자 하였다. 그녀가 가진 채무라는 것이 제 아비를 비롯해 얻은 것이고, 다 갚았다 생각했기 때문.
그러나 그녀는 한사코 천혁수의 제안을 거절 해 왔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 그때라도 움직여야 후회가 없어.”
“아니요··· 이제는 아산댁이라는 이름이 더 친숙한걸요.”
천혁수는 바보가 아니었다.
아산댁 최순희가 자신을 키다리 아저씨처럼 생각하며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이차이.
“순희 네가 올해 쉰 둘이던가?”
“네.”
“아직 늦지 않았으니 자유로이 살았으면 싶구나.”
“지금도 충분히 자유로워요.”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천혁수.
어찌 저리 고집불통일까, 자신에게 가진 은혜가 무어라고, 그리 대단치도 않은 은혜인데 아산댁은 제 온몸을 자신에게 바치고 있었다.
“앉거라, 이제는 아랫사람들에게 일을 좀 물려 줘.”
앙 다문 입술을 풀며 고개를 끄덕인 아산댁이 슬그머니 천혁수의 옆 자리에 앉았다.
스윽.
루시의 몫으로 나온 찻잔을 아산댁에게 밀어준 천혁수.
“쉬자꾸나, 저런 모습을 보면서.”
아산댁은 거절하지 않고 차를 한모금 들이켜며 모래놀이에 흠뻑 빠져서 방긋, 방긋 웃고 있는 천우진의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그 단란한 모습이 어찌나 행복해보이고 흐뭇한지 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그러나 그 입가의 미소 끝, 씁쓸함이 얼핏 엿보이는 듯 했다.
“너도 일찍 아이를 놓았으면, 손주가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그 정도는 아니여요 어르신.”
“나고 죽는데는 팔자라지만··· 우리네 팔자는 참 기구하구나, 그렇지 않으냐?”
아산댁 최순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팔자도 참, 평범한 여인네의 삶을 살아도 좋았을텐데, 물론 지금도 나쁘진 않지만 그래도 아쉬움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순희 네가 나를 오라비라 부르던 때가 생각나는구나. 벌써 30년이 지났던가?”
아산댁이 과거를 회상하듯 좋으면서도 싫은, 싫으면서도 좋은 얼굴로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
약 30년전
군부세력이 대한민국 땅 위에 독재를 하던 그런 시절. 절대권력이라 해도 좋을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르던 독재자의 눈 밖에 나는 것은 곧, 패가망신의 지름길이라 해도 좋았다.
당시 20대 초반의 최순희의 집 역시 독재자의 눈 밖에 난 집이었다.
“순희야··· 순희야··· 네가 나를 도와다오.”
금지옥엽 최순희에게 그녀의 아비가 건네는 요청은 거부할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아들이 없으니, 군부에 의탁할 힘이 없는 늙은 아비에게는 하나 있는 딸이 기회인 듯 했다.
“제가 군인이 되라고요?”
“그래··· 그렇게 해서라도 도와주렴, 저 놈들은 우리를 절대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
대한민국이 급속도로 발전하던 시절, 운과 때가 좋았기에 성공 할 수 있었던 최순희의 아비. 그러나 독재자에게 굴하지 않고 민주주의를 외치는 사람들을 돕고자 여기저기 돈을 뿌리고 다니니, 독재자의 눈에 눈엣가시 같은 사람이 되었었다.
결국 온갖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 충청도 만석꾼의 자제였던 최순희의 아비의 오래된 부를 빼앗았고, 친일파라는 명분으로 가문을 모욕했다.
힘 없는 최순희의 아비는 그렇게 놈들에게 갉아먹혔고, 이제는 딸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처지가 되었다.
“콜록, 콜록.”
최순희가 고개를 돌려 마른 기침을 쉴새없이 쏟아내는 어미를 바라보았다.
가세가 기울며 결핵이라는 병을 앓기 시작한 어미를 제대로 된 치료조차 하지 못할 형편에 놓였다. 민주주의를 부르짖으며 집에서 돈을 받아간 놈들은 최순희가 달려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도 그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기만 했었다.
자신의 아비가 온 가산을 탕진하며 도왔던 민주주의 선동자들은 그런 놈들이었다. 그저 아비의 자산을 노린 사기꾼들.
정치 한다는 놈들 중 어디 제대로 된 놈들이 있을까.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는 그딴 말을 지껄인 사람을 찾아가 곤죽을 만들고 싶은 순희였다.
“갈게요.”
“고맙다. 고마워.”
아비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순희의 손을 맞잡았다.
그렇게 순희는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군인이 되었다. 매일, 자신을 이렇게 만든 세상을 저주하고 원망하며 독하게 훈련에 임했고, 어느순간 여성으로 이루어진 특전사 부대의 에이스가 되어 있었다.
독거미 부대의 에이스가 된 최순희가 오랜만에 집을 방문했을 때.
“콜록, 콜록.”
여전히 기침을 하고 있는 노쇄한 어미를 볼 수 있었다. 과거의 미모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쇄한 어미의 모습에 최순희는 눈을 크게 떴다.
“엄마, 다 치료 받은 거 아니었어?”
“그, 그럼··· 이제 괜찮아, 엄마는 괜찮아.”
“아버지는?”
“자, 잠깐 친구를 만나러 나가신 모양이구나.”
이상했다.
적더라도 매달 순희의 봉급이 전달되었을텐데, 결핵이라는 작은 병을 치료 못할 금액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
아산에서 가장 큰 병원으로 향한 순희는 원무과로 향해 물었다.
“김명자 환자 치료 받고 있나요?”
“아, 그 결핵 환자분이요?”
“네.”
“아니요, 도통 내원하라고 해도 오시질 않네요··· 병원비도 조금 밀려 있으세요.”
“네?”
“듣기로는 그 집 아저씨가 도박에 빠졌다나 뭐라나, 마누라 치료비도 민화투로 날려먹는다고 하는 것 같던데.”
원무과 여직원의 쓸데없는 소리에 순희는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아산바닥을 샅샅이 뒤져 유명한 도박장을 들쑤시고 다니다 저 멀리, 자신의 아비의 얼굴 탈을 쓴 괴물을 마주할 수 있었다.
“에이씨! 이거 사기 아니야? 어떻게 나보다 계속 한끗이 높아?”
“최씨, 하루이틀 해? 어제는 최씨가 돈 좀 만졌잖아? 원래 딴 놈 있으면 잃은 놈 있고 그런거지.”
“제기랄.”
“오링 난 것 같은데, 이걸로 국밥이라도 한그릇 해.”
저벅저벅.
도박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군복의 여인 순희가, 자신의 아비 앞으로 걸어갔다.
“수, 순희야.”
잔뜩 인상을 찌푸린 순희가 아비에게 물었다.
“아버지··· 이게 뭐에요?”
“잘 왔다. 우리딸! 우리 대들보!”
주변의 도박쟁이들이 순희를 바라보곤 한마디씩 내뱉는다.
“이야, 효녀딸 드디어 얼굴 보네!”
“최씨가 날려먹은 봉급 찾으러 온거 아니고?”
“어이구야, 군인 하기에는 너무 곱네.”
“최씨, 오링난 것 같은데 얼른 일어나 봐, 오랜만에 딸내미랑 회포 풀어야지?”
도박쟁이들이 건네는 개평을 받아 챙긴 순희의 아비가 순희에게 물었다.
“순희야, 돈 좀 있냐?”
바사삭.
순희의 머릿속에 무엇인가가 부서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느꼈다.
“도박이든 계집질이든! 그딴 건 상관 없어! 그런데 엄마는 살렸어야지! 엄마는 치료 했어야지!”
“그러니까 돈 있냐고! 내가 오늘 본전만 찾으면, 네 애미도 살리고! 너도 그 지긋지긋한 군대에서 나오게 해 준다니까!”
미쳤다.
이미 순희의 아비는 순희가 알던 아비가 아니었다.
어째서, 어째서 순희의 아비는 이렇게 변했을까? 만석꾼의 아들로 태어나 아산에서 유명한 인품을 가졌던 자신의 아비가 어째서 이렇게 변했을까.
그냥 돈 많은 집에서 태어난 철부지 어른아이였을까? 순희는 진정으로 자신의 눈 앞에 존재가 자신의 아비가 맞는지 의아했다.
“아버지··· 아버지 맞아?”
“그래! 내가 네 아비야! 돈, 그러니까 돈 좀 줘보거라!”
순희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이제 세상에 자신의 아비는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다.
“최씨 딸이 왔다고?”
뒤쪽에서 동네 건달들 수십이 나타났다.
“오, 듣던대로 아주 대단하네.”
순희의 외모에 감탄하며 다가온 사내가 순희 아비의 어깨에 척 손을 올리자 흠칫 놀란 순희 아비.
“최씨, 빌린 돈 갚을 때 됐지?”
“가, 갚아야지. 얼른 돈 따서 갚아야지!”
“텃네, 텄어.”
순희 아비의 눈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순희를 바라보는 건달.
“요, 요. 요런 눈깔 한 놈들은 절대 돈 못갚아.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와서 여기서 화투패나 만지면서 평생 사는거거든.”
혀를 날름 내밀어 아랫입술을 핥은 건달이 순희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우리 최씨 딸내미가 대신 갚아줘야겠는데? 우리 최씨가 빌린 돈이 원금이 3억, 이자까지 해서 총 6억. 어떻게 갚으실래?”
“무, 무슨 6억이야!”
놀란 순희 아비의 외침.
순희는 경멸에 찬 눈으로 아비를 바라보았다.
아무 말 없이 돌아선 순희.
그녀는 더 이상 아비와의 연을 이어나갈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하루 빨리 어미를 살릴 생각으로 가득찬 그녀는 빚 따위는 아비가 알아서 처리하길 바랐다.
“어허, 어딜 그냥 가시려고?”
건달의 말에 뒤쪽에서 대기중이던 어깨들 십수명이 순희의 앞을 막는다.
“캬, 저 군복 벗기면 볼만 하겠는데요 형님?”
“크크, 돈 좀 될 것 같지 않냐?”
저급한 희롱이 오가고, 순희는 본능적으로 군부에서 배운 전투자세를 취했다.
“오, 한가락 배웠나봅니다.”
“크큭, 그래봐야 계집이지. 뭐하냐? 끌고 와, 우선 저 눈깔부터 좀 바꿔놓자.”
“예! 형님!”
호기롭게 달려들었던 건달 서넛이 바닥에 쓰러졌을 때, 순희의 몸도 멀쩡하지 않았다. 맨 몸으로 주먹깨나 쓴다는 왈패놈들 십수명은 그녀로서는 불가능한 전력이었다.
권총은 바라지도 않고 군용 대검이라도 있었으면 또 모를까, 결국 그녀는 왈패들의 주먹에 질질 끌려 아비의 뒷목을 붙들고 있는 두목 놈에게 끌려갔다.
“이야, 뭐 여성최초 특전사니 뭐니 하더니, 대단하네, 너는 진짜 돈이 좀 되겠다.”
실실 웃으며 순희의 군복을 찢어버리는 찰나.
쾅!
도박장에 문이 거칠게 열리며 흰색 멋들어진 수트를 차려입은 사내가 들어왔다.
“뭐야 저건?”
두목 놈이 입구를 바라볼때, 그 사내가 뚜벅뚜벅 걸어와 순희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있는 두목 놈에게 물었다.
“네가 성삼만이더냐?”
부하 놈 하나가 흰색 수트를 입은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이 새끼가 형님 존함을 함부로··· 컥.”
사내의 주먹이 그대로 부하 놈의 목 울대를 때리고는, 사내는 뚫어지가 두목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명동의 천혁수다. 감히 내 허락이 없이 고리를 놓았다지?”
< 452. 외전 6화, 아산댁.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