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438화. >
할아버지와 장인어른의 승인이 떨어졌다.
사실상 원래부터 두분의 '가부'는 필요 없었다. 내가 정했으면 그대로 밀고 나가면 될 일이었다.
허락을 하던, 허락하지 않았던.
내가 뜻한 바를 위해 움직였을 것이란 뜻이다.
그러나 이왕이면, 그래도.
평생을 나와 함께해야 할, 그리고 전 삶에는 없었던 내 삶의 아주아주 소중한 가족들에게 허락받고 싶었다.
산 넘어 산이라 했던가?
나는 세상에서 가장 나의 안위를 걱정하면서, 영원한 나의 편일 한 사람에게 또 허락을 요구해야 했다.
가장 편안하면서 가장 어려울 사람.
와이프.
반려.
평생의 동반자.
전 삶에서는 누리지 못했던 과분한 행복을 내게 전해주는 그녀에게 나는 허락을 구하고자 했다.
서울의 전경이 내려다 보이는 것도 모자라 꼭대기 층은 멀미가 나지 않을 정도로 천천히 회전하는 통유리로 이루어진 잠실 SKY타워의 레스토랑.
오늘 그곳을 특별하게 전체 렌탈을 했다.
특별한 날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오셨습니까 회장님."
"와이프는 아직입니까?"
SKY 타워의 지배인이 작게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린다.
"예, 회장님. 사모님께서는 도착 전이십니다."
"좋네요, 가장 아름다운 밤을 만들어 주십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회장님."
SKY는 돈이 많았고, 나는 돈이 더 많았다.
여기저기 투자를 하던 강기태 본부장은 부동산에도 손을 뻗었고, 그 부동산 중 일부를 SKY건설이 초호화 건물들을 짓는데 사용했다.
그 결과가 전 삶에서는 잠실 데롯타워로 유명하던 이곳이 이제는 SKY타워가 되었다.
전 삶보다 더 높게, 전 삶보다 더 고급스럽게.
현재 이 타워는 총 101층의 층계가 있으며 101층 관리탑을 제외하고는 100층에는 회전식 레스토랑이 있으며, 99층에는 전망대가 위치해 있었다.
그 밖에 98층부터 80층까지는 초호화 주거공간이 자리 잡아 있었다. 물론 98층의 주인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였다.
실 거주하는 인원은 없었지만, 매일 관리인들이 열심히 관리를 하고 있으니 가끔 호텔처럼, 때로는 편안한 술자리를 위해 이용하곤 했다.
97층의 매매가가 얼마전 421억을 달성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현재 98층이 얼마인지는 알 수 없었다. 관심도 없었다. 수백억 수천억도 이제는 크게 감흥이 없는 그냥 '돈'일 뿐이니까.
"진짜 안 쓰면서 살았구나."
이것저것 갖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전 삶보다 더 검소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상대적으로.
지금은 사용하는 돈의 단위가 차원이 다르니 어디까지다 수입에 비례한 지출이 검소하다는 뜻이었다. 절대적인 총량이야 전삶에 비할 바가 되겠는가.
"쓰고 살려면..."
얼마남지 않았다.
오늘 와이프라는 큰 산을 넘고 난다면 정말 얼마 남지 않은 시기에 내가 쌓은 부를 이롭게 쓰며 여생을 보낼 수 있을지 모른다.
사실 앞으로 쌓일 부가 더 클지도 모른다.
나는 달 탐사와 달 테라포밍을 '장담'하고 있으니까. 시간의 문제지 '돈'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이미 전 세계가 인정하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또각, 또각.
달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때.
걸음 소리만 들어도 사람을 설레게 만드는 여인이 입구에서 걸어오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양쪽 입꼬리를 잔뜩 들어올리고는 세상 포근만 얼굴로 그녀를 맞이했다.
"왔어?"
"웬일이야 허니? 이런 로맨틱한 이벤트를 다 준비하고, 우리 워커홀릭이 오늘 날 잡았네?"
넷째를 임신해 어느새 배가 볼록한 루시의 배를 부드럽게 쓰다듬고는 말했다.
"오늘 우리 와이프한테 아주아주 중요한 허락을 받고 싶어서."
"흐음, 허락하기 싫어지는 걸?"
앙증맞게 윙크를 하며 내가 빼준 의자에 앉는 루시.
이세상 단 하나뿐인 나의 와이프.
"오늘은 여왕처럼 모실테니까 루시는 즐기기만 해."
"정말? 기대 되는데?"
루시는 소녀라도 된 듯, 반짝이는 눈으로 무알콜 샴페인 잔을 들어 올린다.
쨍~
기분 좋은 건배 소리와 함께 우리의 즐거운 식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듣도 보도 못한 진귀한 재료로 스페셜한 조리법을 통해 나온 요리들은 눈과 귀, 입과 코를 호강시키기에 충분했다. 이 한끼를 위해 얼마가 들어갔던 돈이 결코 아깝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에대한 증거로, 이제 내 어깨에 기대 서울의 야경을 내려다보고 있는 루시의 눈은 그 어떠한 별보다 반짝이고 있었다.
"뱃 속에 넷째만 없었어도, 오늘 우리 다섯째를 만들었을 거야."
"하하하, 그래?"
"응, 우진. 정말 멋진 하루야. 늘 오늘과 같이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러자,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행복하게."
"으응."
한 동안 말 없이 서울의 야경을 바라보며 루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느새 레스토랑 안에는 직원들도 사라지고, 나와 루시만 남은 상태.
조심스럽지만 바쁘게 움직이던 직원들이 없어졌음을 느꼈을까? 루시가 내게 기대어 있던 머리를 떼며 날 올려다 보았다.
"우진."
"응?"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이제는 분위기가 무르 익었음을 나도, 그녀도 직감했다.
"루시."
"응, 듣고있어."
"예전에, 내가 했던 말 기억나?"
"어떤 말?"
"세계를 정복할 거란 말."
"아아. 생각났어."
"이제 진짜 시작해야 할 것 같아."
고개를 갸웃거리는 루시.
"사실상 정복은 끝난거나 마찬가지 아니야?"
집에서 아이를 보고 있다고 해도, 록펠러가의 여식이었다.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결코 모르지 않는 루시.
"응, 하지만 전 세계 모두가 인정하지는 않지."
고개를 끄덕이는 루시.
"난 황제가 되려고 해."
"21세기에 왕정을?"
미국역시 민주주의에 너무 익숙한 국가였다.
현대인에게 민주주의, 그러니까 왕이 아닌 통치자가 존재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응, 새로운 국가를 건국할거야."
진심이냐는 듯 날 바라보는 루시.
나는 장난기 하나 없이 진지하게 얘기를 하고 있었다.
"너무 장난 같은 말인데... 우진의 눈을 보니 진심이겠네."
"진심이야."
"내게 허락 받을 게 그거야? 황제가 되고 싶다는 거?"
"응."
팍 인상을 찌푸리는 루시.
"혹시... 황제가 되면 일부 다처제 뭐 그런 법을 만들 생각이야?"
상상치도 못한 문제였다.
나는 빠르게 손사래 치며 말했다.
"맙소사, 전혀 아니야. 설마 그런 허락을 위해서 이렇게 준비했다고 믿는 건 아니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루시.
"그런데 나한테 허락 받을 일이 뭐 있어? 그런게 아니라면?"
"전 세계가 놀랄 만한 일을 벌일 거거든."
"전 세계가 놀랄 일?"
난 고개를 끄덕였다.
전 세계가 어떻게 놀라던, 사람들이 내게 손가락질을 하던 말던, 사실 그딴건 안중에도 없었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오로지 가족의 안위였으며, 루시의 심리 상태였다.
넷째가 루시의 뱃속에 있었다.
이제 안정기에 접어 들었지만 루시가 나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고 걱정하길 바라진 않았다.
"응, 아주 무섭도록 잔인한 일일 수 있어."
고개를 갸웃거리는 루시.
"뭔데?"
"새로운 나라가 건국되는 상황을 만들어야 해."
"그런데?"
"그러면 국제 정세가 매우 혼란스러운 게 유리하다고 생각하거든?"
"성동격서? 뭐 그런 느낌인건가?"
언제 사자성어까지 공부했는지 모르겠다.
동쪽에서 소란을 일으키고 서쪽을 공격한다.
비슷한 맥락이라고 생각했다.
"맞아, 그런 느낌이야. 아주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칠 수 있는 정말 끔찍한 일일지도 모르거든."
루시가 작게 입을 벌린다.
이제 내 의중을 눈치 챈 모양이다.
"맙소사 우진... 러시아의 전쟁을 키울 생각이구나?"
난 무겁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한 사람의 뜻에 의해 쉽게 결정될 문제는 분명 아니었으니까.
"핵전쟁까지 이어지지는 않겠지?"
더 진행된 상황까지 우려하는 루시.
"물론이지."
"SKY 항공우주국에 어마어마하게 투자하더니... 로켓 기술을 빠르게 발전 시킨 것도 다 이유가 있었네?"
"응, 철저하게 계획대로 움직인 거야."
"우진은 다 계획이 있었구나."
루시가 다시 내 품을 파고 들며 머리를 어깨에 기댄다.
"역시 내 남편, 대단해."
"하하, 허락하는 거야?"
"우리 가족은 안전 한 거지?"
"응, 세상 그 어떤 곳보다 우리 가족이 있는 곳이 가장 안전한 곳일거야."
"그럼 상관없어, 우진 뜻대로 해."
생각보다 순순히 뜻을 펼치라는 허락.
"정말?"
"응, 정말."
"이렇게 쉽게?"
툭, 가슴팍을 때리는 루시.
"날 어떤 여자로 보고 있던거야 우진은?"
"응? 아니, 세계 3차 대전... 무서운 말이잖아? 현대인이라면 모두가 두려워 할 법한."
픽 웃음을 흘린 루시가 말을 잇는다.
"여보."
한국말.
"응?"
"나 당신 여자야."
무슨 의미일까?
"대 SKY그룹 안주인이야. 록펠러 가문의 딸이기도 하고, 우리 태양이, 별이, 루나, 그리고 여기 축복이 엄마라고."
"그런데?"
"나도 여왕이 될 자격이 충분하다는 뜻이지, 전 세계가 인정하는 퀸 루시, 벌써 설레는 걸?"
"누군가는 피눈물을 흘릴지도 몰라."
피식 한쪽 입꼬리를 들어올리는 루시.
"자본주의 시장에서 살면서 그런 걸 걱정한다면, 록펠러가문은 많은 부를 쌓지 못했을 거야, 인간사회는 어쩔 수 없잖아. 승리한 사람이 있다면 패배한 사람이 있어야 하는 건."
"아."
난 오늘 또 새로운 것을 깨달았다.
철혈의 인간이 되고자 생각했던 나.
그런 내가 이 세상 누구보다 매력적이라고 느꼈던 여인.
그 여인은 나와 같은 피가 흐르는 철혈의 여인이었다.
"왕정이 다시 복구되면 좋지, 우리 아이들이 살기 좋은 세상이겠네, 난 엄마로서 매우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
그녀는 세상 누구보다 더 없이 훌륭한 어머니였다.
"그럼 허락 한 걸로?"
"일부다처제는 죽어도 안 되니까 그렇게 아셔."
"물론이지, 당신보다 매력적인 여자는 없으니까."
"흥, 역시 오늘 다섯째를 만들었어야 하는건데."
아쉽다는 듯 태명 '축복이'를 스윽, 슥. 쓰다듬는 루시였다.
나는 히죽 웃으며 루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서울 야경을 내려다 보았다.
앞으로는 오롯이 세상을 내려다 볼 나의 준비는 그렇게 끝이 났다.
내일부터는 세상이 시끄러울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
대한민국 광화문.
천혁수 대통령을 필두로 중국의 후진다오, 일본의 고키부리, 대한민국 북한 자치구의 김은정이 단상위에 손을 잡고 올랐다.
대표로 마이크 앞에 선 천혁수 대통령이 광화문을 꽉 채운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동북아연맹은 금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참전 할 것을 선포하는 바입니다!"
촤라라락, 촤라라락.
플래시가 미친듯이 터지고 사람들이 박수를 친다.
"또한, 중국, 일본, 대한민국 자치구들과 협의 한 결과 동북아연맹군의 사령관을 SKY그룹, 천우진 회장의로 귀결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웅성웅성.
한 국가의 통치자가 아닌 일개 기업의 회정이 동맹군의 사령관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 이유가 납득이 어려운지 고개를 갸웃거린다.
"동북아 연맹의 그 어떤 군사조직보다 강력한 군사조직이 형성 될 것이 분명하기에, 대한민국, 중국, 일본은 국방력 단합과 화합을 위해 위 같은 결정을 하였으므로, 동북아의 시민들께서는 우리를 믿고 뜻을 함께 해주시기를 희망하는 바입니다."
곳곳에서 대한민국의 대통령, 중국의 주석, 일본의 대통령, 자치구의 자치장들이 어째서 그런 결정을 했는지를 깨닫고는 입 밖으로 소리를 내었다.
"아아, 하긴. 그런 강력한 군대라면 통수권자가 뒤통수를 칠 수도 있겠지."
"아하, 그래서 오히려 연맹군의 사령관을 이익관계가 전혀 다른 이에게 맡겼군?"
"게다가 SKY의 로켓기술과 SKY PMC라면 전투력도 훌륭하지."
"실제로 대한민국의 모든 전투기는 SKY에서 만들지 않나?"
"전함은? 배도 다 SKY가 만든다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맡기는 했어."
"흥, 러시아 놈들 아마 발등에 불이 떨어졌을 걸?"
동북아연맹의 발표가 어떤 여론을 탄생시킬지, 현장에서 동북아연맹의 발표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으로 미리 알 수 있었다.
동북아연맹군이라는 동북아시아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군대의 수장의 자리.
그 자리를 별 잡음 없이 SKY그룹의 오너 천우진이 오르는 순간이었다.
"실패를 모르는 사람이 사령관이 됐으니까, 전쟁은 무조건 이기겠군."
"SKY의 로켓에 핵탄두를 장착했다고 생각해 봐! 이 전쟁은 절대 질 수 없다고!"
"미국은 참전할 필요도 없겠지."
사람들은 천우진에게 강한 신뢰를 보이고 있었다.
< 제 438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