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409화. >
시간은 유수와 같았다.
흘러가는 물을 손으로 잡을 수 없는 것 처럼.
시간 역시 마찬가지.
그러나 그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한 사람의 인생은 180도 다른 결과를 맞이 할 수 있었다.
누군가의 시간과 또 다른 누군가의 시간의 상대적인 가치가 다르다는 얘기였다.
2008년의 여름.
궤도에 오른 유라시아 횡단 철도는 드디어 수익이라는 것을 내기 시작했다.
‘유라시아 횡단철도! 전 세계로 뻗어 나가나? SKY LINE 연일 인력충원!’
‘유라시아 횡단철도 여객사업 활황! 1분기 관광객 82만명!’
‘SKY 여객, 초호화 철도여행 사업안 발표! 오리엔탈 특급의 명성도 옛말. 이제는 오리엔트(동양적인) 특급 여행에 전 세계 여행자들의 귀추가 주목된다!’
‘부산을 시작으로 유려한 한반도를 지나, 백두산을 보고 중국의 장가계와 만리장성까지? 동양의 신비가 가득한 오리엔트 특급 열차!’
‘유통 혁신! SKY그룹의 구름폰, 동북아일대는 모두 같은 가격! SKY전자의 제품을 쇼핑하기 위해서 전 세계인들이 동북아에 모인다.’
“이야, 기사들이 뭐 거의 작정하고 쏟아지는 수준인데요?”
차를 마시며 신문을 보던 내가 입을 열자 호석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동북아가 SKY의 편이니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이 놈아, 자만하지 말아라.”
할아버지의 날카로운 핀잔에 피식 웃음이 터져나왔다. 이건 뭐, 내가 따로 자랑을 하지 않더라도 남들이 알아서 SKY의 자랑을 해주는 데 굳이 자만까지 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곧 PMC 대원 한명이 다가와 호석에게 조용히 보고를 하자. 호석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할아버지의 안전띠를 점검한다.
“대통령님, 회장님. 곧 착륙할 예정이니 준비해주십시오.”
“벌써 도착했나?”
“하하, 일본이니 가깝습니다.”
굳이 대통령 전용기가 아닌 내 전용기를 탑승하신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편안하고 안전한 좌석에 몸을 묻는다. 나 역시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조용히 착륙을 기다렸다.
나와 할아버지가 일본으로 향한 이유는 별 게 아니었다.
오늘 해저터널의 착공식이 열리기 때문.
번갯불에 콩을 구워먹듯, 2달여 만에 공사계획부터 방법까지, 한국과 일본의 전문가들이 달라붙어 계획한 한일 해저터널.
자동차가 지나갈 수 있는 해저터널은 아니고, 전철이 지나가는 해저터널이지만 그것 자체로도 어마어마하게 난이도 높은 공사임은 틀림 없었다.
이번 공사를 수주한 SKY중공업과 SKY건설의 입장에서도 이 공사는 꽤나 중요했다.
“별 일 없겠지?”
할아버지의 질문에 나는 자신감 넘치는 얼굴을 하고는 말했다.
“SKY입니다.”
“흥, 처음 시도하는 것 아니냐.”
“그래서 돈도 무진장 깨지고 있어요.”
“어차피 왜놈들 곳간 아니냐.”
“에헤이, 앞으로 우리께 될 일본한테 너무 뭐라고 하신다. 그런 편협한 사고방식은 옳지 않습니다. 할아버지.”
“이제는 핼애비도 가르치더냐?”
“크큭, 왜놈이라는 말은 그만 쓰시라는 얘기죠.”
“커험, 네놈은 모른다. 그 생지옥을 경험해보지 않은 놈들은 몰라.”
과거의 트라우마가 확실히 할아버지에게도 있는 모양이다. 일제 시절을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내가 알 길이 없으니 뭐라 드릴 말씀은 없었다.
“노력은 해보마··· 요즘 보면 그때의 일본 같지는 않으니.”
“그때의 일본인같은 마인드를 가진 놈들은 진즉에 다 손가락을 잘랐습니다.”
“모가지는 안 잘랐고?”
“글쎄요, 요즘들어서 정치인들 의문사가 많던데, 고키부리에게 한 번 물어보시죠?”
“이 놈이 무서운 말을 쉽게도 하는구나.”
할아버지의 표정은 말과 다르게 전혀 무섭다는 표정이 아니셨다. 오히려 후련하다, 속시원하다라는 감정이 더 적합한 표정이셨다.
실제로 고키부리는 ‘극우’의 성향을 가진 정치인들을 빠르게 배제하고 있었다. 일본 정치인들의 기본적인 성향이 ‘우파’에 치우쳐 있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 고키부리도 그런 인물 중 하나였고.
허나, 현재 고키부리는 비공식적인 석상에서 ‘우리는 한국의 속국.’이라는 말을 자주 하며, ‘신하된 나라로서의 도리.’라는 말도 자주 내뱉고 있었다. 뼛 속까지 내게 고개를 조아리고 있다는 뜻.
그런 그의 입장에서 ‘극우’성향을 가진 정치인들과 일본의 원로들이 달갑게 보일리 만무.
당연히 그는 암암리에 그런 이들을 처리하고 있다는 보고를 PMC를 통해 받았다.
“언론은 조용하던데···”
할아버지가 철웅을 바라본다.
“보고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진즉에 올리지 않고?”
철웅이 나를 슬쩍 바라본다.
그런 철웅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 듯, 내게 따가운 눈총을 보내는 할아버지.
“이 놈아, 아직 할애비 안 죽었어!”
“어허, 누가 들으면 손주가 고사라도 지내는 줄 알겠어요? 백 대표님.”
“예, 회장님.”
“할아버지가 원하시는건 뭐든 보고 올리셔도 됩니다. 왜 내 눈치를 보고 그러세요? 우리가 남입니까?”
내 말에 할아버지가 만족하신듯 고개를 주억거린다. 그러면서 한 마디 보태신다.
“아니지, 그래도 엄연히 업무가 다른 것을··· 쯧, 내가 SKY의 사람이라 할 순 없으니 저 놈에게 허락을 받고 보고를 하도록 해.”
“예, 백부님.”
흡족하게 웃으시며 말을 잇는 할아버지.
“이왕이면, 죽었다는 놈들 얼굴도 좀 보고싶구만. 어떻게 갔는지 말이야.”
섬뜩한 말씀에 철웅은 절도있게 고개를 숙여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곧 요란한 소리와 함께 착륙한 비행기의 문이 열리며 PMC대원들과 대통령 경호원들이 빠르게 바깥으로 나가 안전을 확보한다.
“가시죠.”
“그래.”
할아버지가 먼저 비행기에서 내리시고, 그 뒤를 내가 따랐다.
-빰 빠라 밤.
덜컥.
들려오는 팡파레 소리와 음악소리에 할아버지의 걸음이 멈췄다.
나 역시 마찬가지.
취재진과 함께 군악대가 요란한 환영인사를 해주고, 일본의 전통의상을 입은 여인들이 아름다운 춤사위를 선보이며 우리를 위한 환영 공연을 펼치고 있었다.
슬쩍 고개를 돌려 호석에게 작게 말했다.
“여기 일본 맞죠?”
“하하···”
“이거 실시간으로 생중계되고 있나요?”
“그렇습니다. 회장님.”
“어우, 쪽팔려.”
할아버지 역시 가까스로 표정관리를 하며 밝게 웃는 모습이었다. 한 달음에 달려온 고키부리가 얼른 할아버지에게 얼룩덜룩 아름다은 꽃으로 만든 꽃 목걸이를 걸어준다.
“환영인사가 화려합니다.”
카메라를 의식했는지 할아버지가 정중하게 묻자, 고키부리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우리 일본의 귀빈이신 대한민국의 대통령님과 SKY그룹의 회장님을 섭섭하게 모실 수 없어서 준비했습니다. 참여한 공연단 역시 스스로 참가의사를 밝혔으며, 많은 일본의 국민들이 이곳에 오고 싶어 했지만, 안전상의 이유로 공항 바깥에 대기중입니다.”
유창한 한국어로 얘기하는 고키부리.
나는 놀란 눈으로 그에게 물었다.
“바깥에도 환영 인파가 있다고요?”
누가 보면 올림픽 성화봉송이라도 하는 줄 알겠다.
“예, 회장님. 그렇습니다.”
공개적으로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는 중에도.
고키부리는 누가봐도 아랫사람인양 행동하면서 전혀 어색함을 느끼지 않는 모습이었다.
일본의 언론인들 역시 전혀 어색함을 느끼지 않는지 무리 없이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촬영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오히려 한국의 취재진들이 ‘이게 무슨 상황이야?’하는 듯한 얼굴을 하고는 어쨌든 취재를 하고 있었다. 해외의 다른 언론들은 오히려 아주 놀랍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카메라에 우리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그럼 가시죠.”
곧 길이 열리고 저 멀리, 커다란 오픈카가 모습을 드러낸다.
“에이, 설마.”
내 혼잣말에 호석이 작게 얘기한다.
“크흠. 안전은 확보 되었습니다. 회장님.”
“진짜라고요?”
“예.”
“얼마나 걸려요? 항구쪽까지.”
“본래라면 20분가량 걸리는 거리입니다만, 아무레도 퍼레이드를 하려면 1시간 가량은 걸리지 않을가 싶습니다.”
“하아···”
카메라가 있으니 가까스로 표정관리를 했지만.
오픈카 위에 서서 하는 카 퍼레이드라니, 이건 뭐 전쟁영웅이라도 귀환했나 싶었다.
88올림픽을 위해 보기 안 좋은 것들을 싹 밀어버린 그 대머리 아저씨가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설마 고키부리가 그러고 있는건 아니겠지 싶었다.
분명 PMC의 동북아 동향 보고에도 그런 내용은 없었다. 그렇다면 결국 이것은 일본인들이 순수하게 환영하는 의미라고 봐도 좋을 듯 싶었다.
할아버지 역시 예상하지 못했는지 딱딱하게 굳어서는 오픈카 위에 탑승했다.
“아, 이건 국가 정상들끼리 타셔야죠, 대통령님 저는 따로 가도록 하겠습니다.”
얼른 할아버지의 옆자리에 당황한 고키부리를 앉히고는 나는 사방이 다 막혀있는 칠흙같은 스프린터 차량에 올랐다.
할아버지의 눈썹이 꿈틀 거리는게 아마도 울컥 하신 모양.
커다란 음악과 함께.
개선 행진이라도 하듯 진행된 카퍼레이드.
놀랍게도 그 현장에 진심으로 눈물을 흘리는 일본인들은 물론, ‘한국 사랑해요’와 같은 작은 플랜카드를 들고 있는 일본인들도 곳곳에 많이 보였다.
‘우리 관계 영원히.’
‘전 세계 평화를 위해!’
‘전쟁없는 동북아!’
‘한국은 우리와 동맹국가!’
‘영원한 동맹!’
이게 실화인가 싶을 정도로 대한민국과 우호관계를 다지고 싶어하는 일본인들의 열망이 보일 정도였다.
스프린터 차량에는 나와 호석을 비롯해 PMC대원들만 탑승했기에 나는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일본인들이 바짝 쫄아있는 것 같은데요?”
호석이 ‘쩝’ 하더니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실 일본인들의 정치 참여도는 낮지 않았습니까? 애초에 한국에 대한 적대감을 가진 국민들도 별로 없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실제 보고도 그랬죠?”
“예, 한국과의 관계를 정확히 모르고 있던 일본인들이 훨씬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우리 SKY가 도쿄 상공에서 한 미사일 시험으로 터져버렸고요?”
“예, 회장님. 고키부리가 순순히 일본의 국력이 한국의 밑에 있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하면서 더욱 이슈가 되었고, 자민당의 약지동맹 역시 크게 이슈를 모았습니다.”
“고개 숙이지 않으면 일본이 망하기라도 한다 뭐 그런 느낌인가보네요.”
“거기에 고키부리는 과거 메이지유신을 가져와서 얘기하며, 이제 한국을 그때처럼 받아들여야 한다고 선전했습니다. 해저터널 공사 역시···”
대충 알아 들었다.
일본은 내가 생각하는 것 보다 더욱 쉽게 지배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이거 착공식이 아니라, 식민지배 공개 처럼 되버린 느낌인데, 기분탓입니까?”
“일본인들의 반발은 없을 겁니다. 저 플랜카드 보이십니까?”
호석이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SKY! 우리 일본을 지켜주세요!’
‘사랑해요 SKY, 저는 구름폰을 씁니다!’
‘세계 최고의 한국! 믿습니다 SKY!’
나는 양 주먹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보이시죠? 손가락 다 오그라든거?”
“크큭.”
비단 호석뿐 아니라 차량의 모두가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것은 오그라드는 것이지만, 어째서인지 한국인들에게 현재 일본인들의 반응은 흐뭇한 웃음을 짓게 만들었다.
약 1시간의 퍼레이드가 끝나고 드디어 착공식 행사장에 도착한 우리.
고키부리가 먼저 단상에 올라 마이크를 잡는다.
“오늘은 대한민국과 우리 일본이! 단절되어 있던 바다를 하나로 잇는! 이제는 육로로 연결된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 자랑스럽고 뜻 깊은 공사의 시작을 알리는 자리입니다!”
분명한 공식석상임에도, 고키부리는 굳이 한국어로 말을 하고 있었다.
“와, 일본인들이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네요. 진짜 만화 같은 나라네.”
슬쩍 고개를 돌리는데 어째서인지 할아버지의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설마 우세요 할아버지?”
“커험, 누가 운다고 그러는게야! 조용히하고 총리가 얘기하잖으냐? 경청하거라!”
할아버지가 감격에 마지않는 표정을 하신 것도, 눈물을 참으시는 것도 솔직히 어느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잖은가.
현재 돌아가는 꼴이 마치, 대한민국이 공식적으로. 그리고 일본이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사실적인 일본을 지배하는 그림이 펼쳐지고 있으니 말이다.
5년, 혹은 10년정도를 예상했던 그림이, 이렇게 급속도로 펼쳐질지는 나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하다는 일본에 대한 인식이 더욱 확고해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 제 409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