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404화. >
같은 자리에 오래 머물기 지루했을까 아니면 길어지는 대화에는 역시 적당한 알콜이 필요했을까.
우리는 결국 내 전용기를 이용해 평양으로 날아가 김은정의 사택에서 그가 잔뜩 기대하라는 표정으로 준비한 술상을 받았다.
지금부터도 제법 길게 대화가 이어질 것 같으니 술과 맛있는 안주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호오, 맛이 좋구나··· 고향의 맛이야.”
게 중, 할아버지가 가장 좋아하셨다.
원래 이북이 고향이셨기에 고향 음식을 맛본다는 생각으로 하나하나 천천히 음미하시며 흡족한 표정을 짓는 할아버지만 보아도 나는 배가 불렀다.
어째서인지 내가 효도를 한 것 같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의 눈도 더 없이 따뜻하게 날 바라보고 계셨다.
“네 놈 덕분에··· 이 핼애비가 고향의 맛을 다시 느끼는구나.”
“이제 언제든, 도보로도 오가실 수 있습니다 할아버지.”
“오냐··· 장하다 내새끼.”
한번도 하신 적 없는 칭찬이 입에서 터져나온다.
항상 속으로만 칭찬하시고 까칠하게 말씀하시던 할아버지가, 세상 더 없이. 마치 증손주인 태양이와 별이, 루나를 대하듯 날 대해주시고 계셨다.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부드러워졌음을 깨달았는지 김은정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두손으로 할아버지에게 술을 권한다.
“이거이 함경도 지방에서 나오는 전통방식으로 만든 술입네다.”
“호오, 그래?”
“예전엔 어려서 맛을 못 보셨겠지만, 지금은 보실 수 있지 않갔습네까?”
“하하하, 그때도 맛은 봤네, 몰래몰래 홀짝였지.”
“드셔보시라요.”
“후룩. 호오, 그래··· 이런 맛이었어. 분명 이런 맛이었을 거야.”
할아버지는 지금 추억을 마시고 계셨다.
최연장자이기도 한 할아버지. 그리고 그런 할아버지에게 깍듯한 나. 단번에 자리에 모든 사람들은 이 자리의 최고 권력자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는지 할아버지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정상의 자리를 마음껏 누리시고, 만끽하시라고 나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는게냐?’
할아버지가 눈으로 말씀하신다.
‘시가 한대 태우러 다녀오겠습니다.’
‘커험, 그래.’
‘일 얘기는 다녀와서 하시죠.’
‘오냐, 실컷 즐기고 있으마.’
내가 움직이자 자연스럽게 호석이 빠르게 다가온다. 다행히 술자리 근처에는 많은 숫자의 발코니가 있었으니 게 중 하나를 골라 바깥으로 나갔다.
품에서 스윽, 눈치껏 시가를 내미는 호석.
“어휴, 찌뿌둥해.”
“하하, 고생하셨습니다 회장님.”
“오랜만에 야근하시네요?”
“하하하, 꼭 야근이 나쁜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누가 유부남 아니랄까봐.”
호석이 픽 웃으며 곁에서서는 작은 시가를 입에 문다. 내게 내밀었던 시가 역시 아주 작은 녀석이었다. 30분 정도 태우면 없어지는 그런.
“참, 세상 좋아졌어요 그쵸?”
“예, 회장님. 어떤 대한민국 사람이 평양의 밤하늘을 보며 시가를 태울것이라 생각했겠습니까.”
“그러게요, 생각보다 하늘이 맑네요.”
“서울 하늘과는 많이 다르죠, 그게 북한의 현실이기도 하고.”
“아름다우면서 안타까운 얘기네요.”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다 불쑥 호석이 물었다.
“동북아 연합이라. 어떻게 진행하실 예정이십니까?”
“당연히 높은 자리에는 대한민국이 앉아야겠죠?”
“예, 회장님.”
“대한민국의 찬반 의사가 33퍼센트의 지분을 갖는 정도면 충분하겠군요.”
“50퍼센트가 아니고요?”
“굳이 타국의 경계심을 늘릴 필요는 없겠죠, 나는 아직 젊고,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는 기간도 길테니까요.”
“그렇죠··· 회장님은 젊으시죠, 제가 가끔 회장님 나이를 잊습니다.”
“하하하, 놀라지마세요. 저 아직 20대입니다.”
“어이쿠야 깜짝 놀랐네.”
“하하하하.”
호석과 동시에 시가 연기를 내뱉었다.
“후우, 이제 2008년이 시작이네요.”
“예, 회장님. 유라시아 횡단철도 처럼, SKY는 앞으로도 쭉쭉 뻗어나가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래야죠.”
“동북아 연합 혹은, 아시아 연합이 될 기구는 2008년 1월 1일에 정식으로 출범시키는 게 어떻습니까?”
“1월 1일이요?”
“예, 회장님.”
“호, 나쁘지 않네요. 새해에 새롭게 출범하는.”
“하하 오랜만에 제 의견을 수렴해주시네요.”
“에이, 무슨 말씀이세요? 보통 의견을 잘 안내시는 분이.”
호석이 픽 웃으며 연기를 뱉어내고는 슬쩍 곁으로 다가와 작게 속삭인다.
“그래서 그, 비밀은 아직입니까?”
“하하하하하하.”
오랜만에 호석 때문에 크게 웃었다.
이 양반, 그게 참 궁금했던 모양이다.
“왜 이렇게 궁금해하세요? 평소랑 다르게?”
“돈을 벌겠다고 공공연하게 말씀하신분이, 자꾸 돈 들어갈 궁리만 하시니 궁금해서 그렇습니다.”
“어허, 돈 들어갈 궁리라니요, 그것들이 나중에 더 큰 이익으로 돌아올겁니다.”
“예, 그건 믿습니다. 알고있고요 그런데 회장님이 ‘돈 번다.’라고 할때마다 놀라운 수익율, 천문학적인 금액을 벌어들이셨단 말입니다.”
“그랬던가요.”
“요즘엔 제가 수백억 달러라는 말에도 별로 감흥이 없습니다.”
하긴.
요즘 SKY가 만지는 금액의 단위가 상상을 초월하니 호석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계속 말 하라는 뜻으로 나는 말 없이 시가만 태웠다.
“이번에 회장님께서 돈 얘기를 꺼내셨으니 최소한 조단위 달러는 벌어들이실 것 같다는게 저와 강기태 본부장, 그리고 찰리 박의 의견입니다. 오랜만에 셋의 의견이 완벽하게 합치했습니다.”
“호오, 나 몰래 세분이 좋은 시간이라도 가지셨나보네요.”
호석이 구름폰을 꺼내 살짝 흔든다.
“이 요물에 단체 톡방을 창설할 수 있더군요.”
“아아, 그런 기능이 있었지.”
“예, 그런데 도대체가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방법을, 그런 천문학적인 금액이 오고갈 사업이라는게··· 회장님 말씀을 들으면 일단 달에 있는 헬륨3인가를 가져오는게 아니고, 그 과정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행위로 보였으니까요.”
호석과 강기태 본부장, 찰리 박이 머리를 맞대고 구름폰 자판을 누르며 회의를 했을 생각을 하니 자꾸만 웃음이 터져 나오려 했다.
“그래도 제가 회장님 최측근 아닙니까?”
“오, 갑자기요?”
“힌트좀 주십시오 회장님, 그래야 제가 좀 면이 살지 않겠습니까?”
픽 웃으며 시가 연기를 내뿜다 힐끗 호석을 바라보았다. 잔뜩 기대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그.
“흠, 힌트를 드리죠.”
“예, 회장님 귀 담아 듣겠습니다.”
“우리는 돈 계산을 뭘로 하고 있죠?”
고개를 갸웃거리는 호석.
“정확히 조금전에 정대표님은 내게 얼마를 벌어올것 같다고 말씀하셨죠?”
“최소한 조단위 달러?”
“예, 그렇게 말씀하셨죠?”
“통화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난 어깨를 으쓱였다.
“언제까지 세계의 기축 통화가 ‘달러’일 것 같습니까?”
눈을 부릅뜨는 호석.
“서, 설마 원화가!”
“글쎄요?”
난 어깨를 으쓱이며 태우던 시가를 재떨이에 버렸다. 호석이 우둑 서서는 멍하니 있는 것을 뒤로 하고는 다시 일 얘기를 위해 술자리가 무르익은 테이블로 향했다.
언제 온 것인지 아름다운 여인들이 공연을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아마도 그녀들은 과거 북한의 온상이라 할 수 있는 기쁨조의 일원들이지 싶었다.
조용히 자리에 앉으니 김은정이 말을 걸었다.
“아름답지 않습네까?”
“아름답네요.”
“아바이 동무가 만들어낸 슬픈 동무들입네다.”
“기쁨조.”
“예. 맞습네다.”
“아직도 활동하고 있었군.”
“곧 자유를 찾을 겁네다.”
“오, 풀어주겠다고?”
“내레 최고지도자가 되고 당장 없애버리고 싶었던 거이 기쁨조디만, 그러디 못했디요··· 어쨌든 명목상 우리 공화국의 군인들 아입네까.”
복잡한 사정이 있었던 모양이다.
“어쨌든 이제 그녀들에게 자유를 주겠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이제 세상이 변하디 않았습네까? 저들은 나를 칭송하겠지만, 나는 천우진 동무를 칭송하디요.”
픽 웃으며 김은정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그녀들의 무대가 끝나고 할아버지가 일어나 박수를 치셨다. 선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춤사위였다. 철저하게 교육받고 통제 받으며 자신들의 몸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모습이라고 봐도 좋았다.
얼마나 혹독한 수련을 거쳤을지가 눈에 보이는 느낌. 나 역시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박수를 쳐주었다. 이내 그녀들이 사라지고, 다시 술이 몇 순배 돌았다.
짝.
박수를치며 모두의 주목을 이끌어냈다.
“자, 다시 확정을 짓고 제대로 즐기시죠?”
모두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할아버지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알아서 하라는 듯 고개를 주억거려주셨다.
“자 이름은 추후에 알아서 짓기로 하고, 대충 동북아 연합이라고 치고, 의결권은 대한민국이 33퍼센트, 나머지 3국이 77퍼센트를 공평하게 나누는 걸로.”
“알갔습네다 동무.”
“예! 천자시여!”
“그렇게 하겠습니다.”
“다른 아시아 국가들 역시 천천히 점진적으로 연합에 가입시킬 생각이니까 알아서들 처신 잘하시고. 아직은 아니지만 훗날 북한이 대한민국에 완벽하게 흡수통일 되는 순간, 북한이 본래 가지고 있던 의결권 역시 대한민국이 갖는다. 불만 있으신 분?”
“없습네다 동무.”
“뜻대로 하십시오 천자시여!”
“예, 불만 없습니다.”
동북아 연합의 탄생과 내부조욜은 앞으로 전문가들이 할 일이니 자세한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1월 1일, 새로운 조약의 출범 소식을 알리기로 하죠, 당연히 언론과 각국의 정상들에게는 미리 소스좀 흘리시고.”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1월 1일이라, 좋구나.”
할아버지의 흡족한 표정.
어쨌든 새로운 조약의 우두머리가 되는 대한민국이었다. 벌써부터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할아버지의 이름을 연호하는게 느껴질 정도였다.
“새로운 연합이 탄생하는 만큼, 통일된 교육과 평화를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4개국이 통합 교육기관을 설치한다. 아주 좋은 명분이겠죠?”
모두가 동의를 표한다.
고개를 움직여 고키부리를 바라보았다.
“일본의 국민들 역시 거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일왕을 폐위 시키고, 왕조를 들어냈습니다. 또한 규칙과 규범을 깨는 걸 두려워하는 일본인들은 아마 순순히 받아들일 것으로 판단됩니다. 일부의 넷우익들이야 어쩔 수 없을 테지만···”
“그런 부분 해결하라고 당신이 그 자리에 있는겁니다. 고키부리.”
“크음, 죄송합니다.”
“자 어쨌든 별다른 문제는 없는걸로?”
“예, 천자시여!”
“문제없습네다.”
중국과 북한.
두 국가는 이런부분에서 일처리가 쉬웠다.
민주주의가 아닌게 이런 부분에서는 도움이 된다는 뜻. 게다가 이미 SKY의 영향력이 깊이 침투한 북한은 대한민국과 친해지면 친해질수록 자신들에게 이롭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언론이라는 게 제대로 존재하지도 않고, 인터넷 보급도 원활하지 않은 북한이었다. 열심히 SKY가 움직여서 완벽한 국가로 탈바꿈 시키는 과정에 있기에 북한은 당연히 대한민국의 의견에 찬성이었다.
사실상 이미 통일이 완료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국민들만 모를 뿐.
“중국은 확실히 문제 없습니까?”
“믿어주십시오, 이 놈이 반드시 천자의 명령을 수행해 내겠나이다.”
약간의 반발은 그냥 밀어버리겠다는 강력한 주장이었다. 현 후진다오의 지지율 역시 어마어마한 상태였다. 그를 천자라 칭송하는 중국인들도 많았다.
그도 그럴게, 중국 역시 SKY와 함께 하면서 굶어죽는 사람들의 숫자가 크게 줄었음은 물론이고 그들의 삶이 윤택해지고 있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후진다오가 팥으로 메주를 쓰겠다 해도 고개를 끄덕이며 환호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었다.
교육의 부재를 가진 중국.
그들속에는 나랏말이라면 철석같이 믿는 순진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니 전삶의 2020년이 넘은 시기에도 중국의 날조된 역사를 진심으로 믿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겠는가? 그들에게는 그 날조된 역사와 날조된 언론의 선전이 ‘팩트’였을 것이다.
“교과서에 한글도 보급 할 겁니다. 제2외국어와 같은 느낌으로.”
김은정은 별 다른 반발이 없었다.
그들 역시 한글을 쓰고 있기 때문.
후진다오와 고키부리가 흠칫 하는 모습을 보인다.
나는 둘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앞으로 세상은 SKY가, 대한민국이 지배할 것이니까. 미리미리 아이들에게 한글과 우리말을 가르치는게 좋을 거야,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면.”
난 진심을 다해 그들에게 경고를 날렸다.
후진다오가 침을 꿀꺽 삼키고는 외쳤다.
“감히 제가 천자를 의심했나이다.”
고키부리 역시 말을 더듬으며 크게 답했다.
“하, 하잇! 명심하겠습니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진행시켜.”
< 제 404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