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400화. >
나는 굳이 장소를 이동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벨라루스가 좋아서라고 표현하겠다. 순박한 동유럽의 정서도 나쁘지 않았지만 뭐니뭐니해도.
“하이.”
“$%^#$”
수줍게 웃으며 러시아 말로 뭐라 중얼거리며 곁을 스쳐가는 미녀들.
“커험, 회장님. 그것도 일종의 바람입니다.”
나는 날카롭게 호석을 쏘아보았다.
“그러는 대표님도 표정이 너무 좋으싶니다만.”
“저는 그냥 눈으로만 보고 있습니다.”
“나도 인사만 하는 겁니다. 인사. 목소리가 어떤가 싶기도 하고.”
노천카페에서 티타임을 즐기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인사를한다. 이 얼마나 전 지구적인 사회생활인가. 어째서인지 모르지만 내가 인사를 건네는 여인들이 다들 얼굴을 붉히며 지나간다.
나쁜 의미의 얼굴 붉힘이 아니라 쑥스러움이라는 게 느껴질 정도. 분명 미래의 벨라루스라는 나라의 여인들은 먼저 대쉬도 한다고 들었는데, 아직은 4차 산업혁명이 체감될 시기는 아닌가보다.
“그나저나, 구름폰 사용자가 정말 많네요, 이 나라에도 들고 다니는 사람이 보이고.”
“예, 확실히 대단한 것 같습니다.”
“그거 아십니까?”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벨라루스의 ‘의사’라는 직업의 평균 월급.”
호석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시기라면 대략 180만원정도 되겠네요.”
호석이 눈을 크게 뜨고는 되물었다.
“그 정도 밖에 안됩니까? 의사인데요?”
“그런데 우리 구름폰의 최저가가 119만원이죠.”
“허.”
다시금 새삼스럽다는 듯 지나가는 사람들의 손에 들린 휴대폰을 유심히 관찰하는 호석.
분명 어렵지 않게 구름폰을 찾을 수 있었다.
“이것 참.”
다시 고개를 돌린 호석의 눈에는 존경이 담겨 있었다.
“구름폰의 영향력은 갈 수록 막대해 질 겁니다. 그러니까, 대표님도 틈날 때마다 익혀두세요 미래의 자제분들과 원할한 소통을 하고 싶다면.”
“예··· 그래야겠네요.”
손목을 들어 시계를 확인했다.
그러고 보니 미래엔 스마트 워치라는 것도 존재했었다.
“스마트 워치라.”
아직은 기술력이 안되겠지만, 그것도 꼭 구현이 어려운 건 아닐 것이다.
“괜찮은 아이템이네.”
“예?”
“아닙니다. 약속시간 다 된것 같은데 보리스가 늦는군요?”
호석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답했다.
“정시에 딱 올겁니다. PMC정보부의 정보에 의하면 그는 그런 성격이니까요.”
“그런가요?”
마침 바라보던 시계의 분침이 12라는 숫자를 가리켰다.
정확히 오후 2시가 된 시점.
“정말, 당신이 말한대로 됐군요.”
불쑥 뒤쪽에서 들려온 보리스의 목소리.
둔탁한 그의 영어에 히죽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별 것 아니지만 PMC정보부의 예측력이 그리고 정보의 신뢰성이 올라가는 것이니까. 그가 정확히 정시에 도착한 것이 말이다.
“앉으시죠.”
“이제 당신이 내 고용주가 되는 것입니까?”
“당신이 귀화를 하고, SKY항공우주국의 직원이 된다면 그렇게 되겠죠.”
기분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나쁜것인지. 애매한 표정의 보리스가 쓰게 웃는다.
“어젯밤 난 정말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가 뭔가를 회상하듯 아무것도 없는 푸른 하늘을 바라본다.
***
호로록.
보리스가 쿨러가 요란하게 돌아가는 컴퓨터 앞에서 로켓의 궤도를 계산하며 커피를 들이켰다.
똑똑똑.
아까부터 계속 누군가 바깥에서 노크를 하고 있었지만 모니터에 거의 들어갈 듯 집중하고 있는 보리스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궤도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재진입해서 착륙한다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도대체 무게는 얼마여야 하는거야?”
홀로 궁시렁거리며 계속해서 어떤 프로그램을 조작하고 있는 그.
그의 머릿속에는 분명 천우진의 목소리가 각인되듯 떠나질 않았다.
‘이 착륙이 가능한 로켓을 제작하고 싶습니다. 우주 궤도에 목적한 물건을 가져다 놓고, 다시 지구로 착륙할 로켓을요. 이왕이면 발사체의 역할까지 할 수 있으면 더 좋겠죠, 그만큼 휴대성도 높아질테니까.’
‘그러니까 지금, 로켓을 발사대에서 발사 하는 것이 아니라, 로켓 자체가 발사대 역할까지 하면서 추진력으로 우주궤도에 올라가고, 물건까지 보내 준뒤 다시 돌아오게 만들겠다는 얘기입니까?’
‘예, 그러고 나서 연료를 충전하면 다시 발사될 수 있는 일종의 충전식 로켓이랄까요?’
‘맙소사, 그런 기술이 가능 할 거라 생각하십니까?’
‘그러니까 전 세계의 석학들을 모으는 것 아닙니까, SKY항공우주국이.’
쾅!쾅!
키보드가 아닌 나무로 된 테이블을 세게 두드린 보리스.
“제기랄 어째서 그 허무맹랑한 소리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것이냐!”
그는 벌써 3일 째, 천우진과의 만남 이후, 거의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고는 열심히 천우진이 말했던 로켓의 시뮬레이션을 만들고 있었다.
그가 자체적으로 개발한 프로그램을 통해서.
“망할 컴퓨터가 너무 느려! 돈! 돈! 염병할 돈! 거지같은 나라.”
누군가 이미 자신의 등 뒤에서 자신이 하는 양을 가만히 살펴보고 있다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입 밖으로 아무말이나 막 토해내고 있는 보리스.
“호오, 지금 그 말이 설마, 우리 연방을 일컫는 것은 아니겠지?”
뒤쪽에 들린 음성에 화들짝 놀란 보리스가 우당탕 자리에서 일어나며 황급히 컴퓨터의 전원을 내렸다. 행여나 자신이 개발한 프로그램이나 로켓의 기술이 저장된 하드디스크를 위협으로부터 지키기위한 행위였다.
“누, 누구야!”
“오랜만이군 보리스.”
“다, 당신은?”
그의 앞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사람은 현 러시아의 정보총국장 니콜라이였다.
“각하께서 찾으신다.”
“어, 어째서 나를 찾습니까?”
꿀꺽 침을 삼키며 자신이 긴장했다는 것을 역력히 드러내는 보리스.
그는 자신의 눈 앞에 있는 인물이 얼마나 무서운 인물인지를 익히 잘 알고 있었다. 항상 러시아라는 나라를 속으로 욕하고 있지만 함부로 바깥에서 입밖에 내지 않는 이유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었다.
현 러시아의 정상인 푸틴의 오른팔이자, 푸틴의 그림자. 옛 한국의 중앙정보부 일명 ‘중정’이라 불리던 남산의 부장들 처럼, 더러운 일을 처리하는 KGB의 후신인 정보총국장이기 때문.
그리고 없는 죄도 만들어내는 러시아의 암적인 존재들이었다. 푸틴의 권력을 공고하게 만들어주는 인물이기도 했고, 밝혀지지 않은 수많은 암살같은 것들을 주도한 인물이라는 뜻이었다.
“긴장하는 것으로 봐서는 죄를 짓긴 지은 모양이야?”
“난 국가를 배반하지 않았소!”
“글쎄, 그건 각하께 직접 변명 해보시지.”
“SKY그룹의 천우진 회장과의 만남 때문이오?”
“호오, 역시 그자를 만났었군, 예상은 했지만 진짜였어, 도대체 우리 정보총국의 정보망을 어떻게 빠져나갔지? 일단 그것부터 들어봐야겠군.”
니콜라이가 음흉하게 웃으며 등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몇 걸음 옮기던 니콜라이가 휙하니 뒤를 돌아서는 말했다.
“따라와, 살고 싶으면.”
서슬퍼런 그 말에 자연스럽게 보리스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컴퓨터를 힐끗 거렸다.
“네 집은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을테니 걱정하지 마라. 네가 가진 기술은 우리 러시아가 가지고 있다. 명심해.”
“알겠소.”
분명 그는 러시아의 우주국에 속해있을 때부터 가지고 있던 기술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가 개발한 기술들.
그리고 니콜라이는 지금 그 점을 말해준 것일 뿐이었다.
러시아가 작은 나라도 아니고, 푸틴을 만나러가는 2시간동안 보리스는 식은땀을 흘리며 니콜라이에게 자신이 정보망을 빠져나가 타국에서 천우진을 만난 방법을 설명해야 했다.
니콜라이는 잠자코 그의 말을 듣고 있을뿐 별다른 리액션도 없었다.
그의 임무는 그를 죽이거나 정보를 캐내는 것이 아닌, 그를 푸틴의 앞에 데려오는 것이었기 때문, 그걸 모르는 보리스는 지레짐작으로 긴장했을 뿐이고.
어쨌든, 푸틴의 앞에 선 보리스는 이제 자신은 끝났을까 하는 암담한 생각에 착잡함을 금치 못했다.
“다 죽을 얼굴을 하고 있구만, 천우진은 왜 보리스 네 놈을 탐냈을까? 사내 놈이 가진 배포가 이리 작은데.”
푸틴의 직설적이고 직선적인 화법은 보리스의 가슴을 마구 헤집어 놓기에 충분했다.
자신이 어떻게 러시아에 충성해 왔는가, 어째서 충성해 왔는가, 어째서 수많은 타국의 회유에도 러시아를 고집했는가.
그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생존본능때문이었고, 눈 앞에 인물이 얼마나 잔인한 인물인지 간접적이나마 체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제 죽는 것이오?”
픽 웃음을 흘리는 푸틴.
“오, 이제 자랑스러운 연방의 인민같은 얼굴이 됐군.”
죽음을 각호 했거나 체념한 보리스는 긴장했던 얼굴은 사라지고 어느새 당당한 남자가 되어서 푸틴을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억울하군, 러시아를 위해 50년을 바쳤는데 말입니다.”
“자네가? 이 연방을 위해?”
“아니오? 내 업적을 내 입으로 얘기를 해야 합니까?”
“하하하, 됐다. 보리스 자네의 서류는 충분히 살펴 봤으니까.”
“그렇군··· 그럼에도 난 이제 쓸모가 없는 것이군.”
“네 전문분야는 우리 러시아에서 더 이상 개발하지 않을 생각이니까.”
“후회할겁니다. 우주의 신비는 아직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았으니까, 신비란 간절히 원하는 사람에게 닿는 법입니다.”
“정교회의 교도같은 소리를 하고 있군.”
보리스는 입을 닫았다.
자신이 어떤 소리를 지껄여도 푸틴은 눈하나 깜짝하지 않을 인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
“가라.”
푸틴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보리스.
“어딜 말이요?”
“한국에 귀화를 허락하지.”
눈을 부릅뜬 보리스.
자신이 죽는줄만 알았던 보리스에게는 믿기지 않는 상황이었다.
“스파이 짓이라도 시키려는 겁니까?”
픽 웃음을 흘린 푸틴이 고개를 젓는다.
“네 심장으로 스파이? 어림도 없지, 구태여 위험을 키울 필요가 있나. 알아서 자멸해주겠다는데.”
도통 알아 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푸틴 때문에 보리스의 얼굴은 와락 찌푸려졌다.
“죽여버리고 싶은 얼굴이군.”
섬뜩한 협박에 저도 모르게 표정을 푼 보리스.
“네 놈은 천상 과학자구나, 사업이나 정치는 영 젬병이겠어.”
“크흠···”
“네가 50년간 바쳤다는 충성 덕분에, 우리 러시아가 SKY에게서 제법 좋은 걸 얻어왔다 그 대가로 나는 너를 한국으로 보내주는 것이고.”
“맙소사.”
“내 아량이 놀라운가?”
보리스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을뻔 했지만 필사적으로 끄덕였다.
“평생 감사하면서 살아라. 한국의 음식이 입에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감사합니다.”
“마음에도 없는 감사는 필요 없다. 꺼져.”
***
웃음이 터져나왔다.
“하하하하, 그랬습니까?”
“도대체 어떻게 푸틴을 설득한겁니까? 아니 도대체 무엇을 준 겁니까? 나의 귀화조건으로?”
“아주 큰걸 줬습니다.”
“도대체··· 내게 그럴 가치가 있습니까?”
난 고개를 저었다.
“당신에겐 가치가 없죠.”
“그런데 왜?”
나는 아까전 그가 바라보며 회상했던 그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 위에는 그럴 가치가 충분하니까.”
“······”
“이제 내가 당신의 고용주가 될 것 같으니 부디 실망시키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군요.”
보리스가 침을 꼴깍 삼키며 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SKY에게 진심으로 충성을 다 하겠습니다.”
“러시아에서 처럼요?”
격하게 고개를 젓는 보리스.
“그 푸틴에게서 날 살려준 사람, 아니 회장님께 진심을 다해서 충성하겠습니다. 내 꿈을 이루게 해주실분이니까.”
“꿈이요?”
보리스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
“저 곳에 있는 꿈 말입니다.”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인재들을 구했으니 푸틴이 잔뜩 비웃었던 이유처럼 어마어마한 투자를 해야 할 것이다.
누군가 본다면 헉 소리날 금액의 투자가 계속해서 이뤄져야 할 SKY항공우주국.
“그럼 또, 돈을 벌러 가야겠군.”
호석도, 보리스도 고개를 갸웃거린다.
“지난번 알려드리지 않은 그 비밀로요.”
호석이 잔뜩 궁금하단 표정으로 날 빤히 바라본다.
“말씀은 안 해주시겠죠?”
“당연하죠?”
“쳇.”
< 제 400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