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86화. >
부들부들 떨고 있던 고키부리가 뭔가 결심했다는 듯 빠르게 오른손을 내리쳤다.
툭.
“끄으으읍.”
“호오.”
나는 놈이 끝내 제 손가락을 자르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분명 할복이 두렵고 싫어서 우리에게 복종했던 고키부리였다. 그런데 제 놈의 몸뚱이에 칼질을 하다니 각오가 대단하구나 싶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제 왼손을 꼭 쥐고는 날 뚫어지게 바라보는 고키부리.
“저는 천상과 천가를 믿습니다. 평생 충성을 다할 것이라 맹세합니다.”
놈의 몸뚱이에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짙은 초록색 아우라. 그것으로 놈의 말이 진심이라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돈에 붙은 놈은 돈 때문에 다시 옮기기도 하는 법이지.”
“아닙니다. 단순히 돈 때문이 아닙니다. 천가가 대한민국을 변하게 하는 것을 봤습니다. 천상께서 SKY를 성장시키는 걸 봤습니다. 우리 일본도 그렇게 만들어주시리라 확신합니다.”
마치 일본이라는 나라 전체를 내게 바치겠다고 얘기하는 것 같았다.
픽 웃으며 호석을 바라보았다.
“고키부리가 언제 후진다오라도 만났던가요?”
호석이 피식 웃으며 피가 묻어있는 대검을 슥슥 손질하고는 대검집에 넣고는 대답했다.
“만나지 않아도 통하는 게 있는가 봅니다.”
“광신도 한명 추가된 것 같네.”
“정말 단지 동맹이라도 결성되는 거 아닐까요?”
난 픽 웃으며 대답했다.
“독립투사들은 목적이 뚜렷했죠. 그럼 고키부리가 만들 단지동맹의 목적은 뭘까요?”
“음, 회장님에 대한 충성맹세?”
“하하하, 농담은 됐고, 고키부리 치료해주세요.”
“예, 회장님.”
툭툭.
호석이 운전석에 사인을 주자 차량이 스무스하게 멈추었다. 이어서 무전기로 의료진을 요청하자 멈춘 차량 안으로 빠르게 탑승하는 나의 개인 의료진들.
빠르게 고키부리의 출혈을 멈추고는 응급처치를 하며 잘린 손가락을 얼음통에 넣는다.
“병원으로 이송해 접합 수술 진행할까요?”
그러라고 대답하려는 순간 고키부리가 의사의 손목을 꽉 붙들더니 한국어로 말했다.
“아니무니다. 이건 증거입니다.”
“예?”
“나의 단지충성맹세의 증거.”
그러고는 날 뚫어지게 바라보는 고키부리.
나 역시 의사에게 고개를 끄덕여주며 되었다는 신호를 보냈다. 의사는 알겠다는 듯 빠르게 치료를 마무리 하고는 손가락을 양손 엄지와 검지로 들어올려 고키부리에게 말했다.
“따로 보관하시겠습니까?”
“처리해서 주시겠스무니까?”
“그러죠, 냄새가 나지 않도록 특수처리를 해 드리죠.”
“감사하무니다.”
고키부리가 생각지도 않게 애교를 부리니 보답을 해주는 게 인지상정.
휙 고개를 돌려 호석에게 말했다.
“정여사가 지금 자민당 원로를 만나고 있다고 했죠?”
“예, 회장님.”
“그쪽으로 갑시다. 길게 끌 것 없이 오늘 결판내죠.”
“예, 움직이겠습니다.”
***
자민당의 원로이자 현재는 당 대표로서 총리보다 더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이시다와 요시가와.
그는 눈 앞에 미녀가 내미는 007 서류가방 내부를 살피고는 떨리는 동공을 감추지 못했다.
흐뭇하게 들어올린 입꼬리가 그의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것 같았다.
“커험, 그래서 이 돈으로 내게 요구하는 게 무엇입니까?”
“고키부리 도쿄 도지사를 아십니까?”
“하, 그 망할놈이라면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 놈 덕분에 내가 이 자리에 올랐으니··· 도움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겠군.”
원래 일본의 정치 판도는 고키부리의 장인인 원로 자민당 대표가 거의 독재 하고 있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고키부리가 할복을 거부하고 도주했으며, 오히려 자민당과 일본의 정치 성향에 완전 상반된 정치 매커니즘을 들고 새롭게 나타나면서 그의 장인이었던 원래의 자민당 원로는 힘을 잃었다.
덕분에 그 책임을 물어 당대표를 뒷방으로 물러나게 만들고는 지금의 요시가와가 그 자리를 차지 한 것이었다.
평생 요원할 줄 알았던 최고의 자리를 운 좋게 탈취한 상황.
“그놈 얘기는 왜 꺼냅니까?”
“이번 총리 선거에, 우리는 고키부리가 다시 정궈을 잡았으면 합니다.”
눈을 부릅 뜬 요시가와.
쿵!
007가방을 닫고는 스윽 밀어서 다시 정인숙 여사에게 돌려주는 그.
“그럼 나는 이 돈을 받지 않겠습니다.”
“이유가 있습니까?”
“고키부리를 다시 총리자리에 앉히자? 그건 내 정치 생활이 끝나는 거와 같습니다. 이제 이 자리에 앉았습니다. 아직 꿀과 기름이 흐르고 있는 물을 한모금도 마시지 못했어요, 이제 시작이란 말입니다.”
“고키부리가 다시 총리가 된다면 당신의 입지가 흔들린다?”
“그렇습니다. 다시 총리로 만들기도 어려워요, 일본의 원로들이 그를 곱게 볼리 없으니까.”
“얼마면 되겠습니까?”
요시가와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오늘 정인숙 여사가 내민 돈은 한화로 약 100억원이었다.
“원래 자민당의 당대표 자리에 앉아있던 고키부리 장인의 재산이 얼마인지 아시오?”
정인숙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명품 핸드백에서 서류뭉치를 꺼내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그것은 바로 고키부리 장인의 비자금과 공식, 비공식적으로 추산된 재산 내역서였다.
“부동산··· 차량··· 현금··· 조세피난처의 유령회사··· 까지 해서, 총액 820억엔 정도가 되겠군요.”
한화 약 8천500억에 가까운 액수.
“그런데 고작 100억으로 이 자리를 내 놓아라? 흥, 어림도 없지.”
“월.”
“뭐요?”
정인숙 여사가 부드럽게 입가에 호선을 그리며 말했다.
“월에 10억엔, 10년간 지급하도록 하죠.”
눈을 부릅뜬 요시가와.
“워, 월에 10억엔?”
“그 정도면 당신이 일본에 이바지한 것에 대한 연금 정도로 충분할 거 같은데요.”
“10, 10년간 정말 10억엔을 지급하겠다는 거요?”
“믿기 힘드신가요?”
“무엇으로 보증할 수 있겠소?”
정인숙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굳이 쉬운길을 놔두고 어려운 길로 돌아가시려 하시네요?”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냐는 얘깁니다.”
툭툭, 자신의 명함을 두들기는 정인숙.
“역사바로알기재단 부 이사장 정인숙. 그게 저에요.”
“알고 있소, 우리 보좌관들 역시 그정도 정보는 알아보고 날 이 자리에 내보냈겠지.”
“그런데 못 믿으시겠다?”
“부 이사장이란 자리가 그렇게 영향력 있는 자리라고 보이지 않소이다.”
“결국은 수장을 직접 보셔야겠다?”
“그렇소.”
“후회 할 일이 생길수도 있는데 괜찮겠어요?”
요시가와가 눈을 부릅 뜨고는 ‘커험!’하고 거칠게 헛기침을 한다.
“나 자민당 최고위원, 당대표요!”
제 세상에서는 제 놈이 최고인 법.
지금 눈 앞에 눈꼴 사나운 요시가와 역시 그런 부류였다. 덕분에 정인숙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아마도 내 제안을 거절 한 것을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흥, 사무라이에게 후회는 없소.”
“확실한가요?”
“확실하지!”
요시가와가 고개를 주억거리는 찰나.
드르륵, 쿵!
미닫이 문이 강하게 열리며 한 사내가 입꼬리를 들어올리고는 서 있었다.
힐끗 뒤를 돌아본 정인숙 여사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하게 허리를 숙인다.
“회장님을 뵙습니다.”
“아, 정여사님 고생 많으시네요.”
요시가와는 저 어린 사내가 누구인지 알아챘는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켰다.
“처, 천우진!”
***
저벅, 저벅.
호석이 그대로 내게 삿대질을 하고 있는 요시가와의 손가락을 꺾어버렸다.
우득.
“끄으으윽, 이, 이게 무슨?”
“회장님께 예의를 갖춰라.”
사회에서 나이가 무엇이 중하겠는가.
돈이 하나님이요, 권력이 장땡이지.
지금 요시가와는 몸소 그것을 경험하고 있을 것이다. 일본에서라면 절대 이런 대접을 당하지 않는 그가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아픈 손가락을 매만진다.
“처, 천왕께서도 내게 이러실 순 없다!”
“일왕이겠지, 천왕은 무슨.”
“가, 감히.”
“일왕의 수하인 척 그만하고, 일 얘기나 하지.”
털썩 자리에 앉아 상위에 올려진 시원한 녹차를 한모금 들이켰다.
요시가와가 물끄러미 날 내려다 보다가 ‘흥’하는 모습을 보이며 방을 벗어나려했다.
덥석.
호석은 그런 요시가와를 억지로 자리에 앉혔다.
“예의를 지켜, 다음에는 손가락이 아니라 모가지가 꺾일 수도 있으니까.”
“이익, 네 놈들은 야쿠자인가!”
호석이 휙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보며 품에서 군용대검을 꺼낸다.
의도한것인지 아닌지, 마침 고키부리의 혈흔이 아주 살짝 묻어 있는 군용대검. 아까전 분명 닦아내는 듯 하더니 아니었나보다.
꿀꺽.
침을 삼킨 요시가와.
“혀를 자를가요?”
과장되게 절도있는 모습으로 굳이 일본어로 내게 묻는 호석. 그의 장단을 맞춰줘야 하는데 자꾸만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웃음을 억지로 참느라 혈압이 오르는지, 내 얼굴이 아마도 뻘겋게 익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리고 그 모습에 분노를 참는 것 처럼 보였는지 요시가와가 헐레벌떡 자리에 앉았다.
“커험, 아, 앉았소!”
“어디까지 얘기했지?”
공손히 내 옆자리에 앉은 정인숙 여사가 보고했고, 시시각각 요시가와는 불편하다는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월에 100억을 거절하셨다?”
“예, 회장님.”
“돼지새끼가 배때기가 불렀군.”
적나라한 한국어 욕설에 정인숙이 부드럽게 입꼬리를 들어올린다.
“어머, 어르신이 생각나네요.”
“일본에서 고생이 많으십니다. 여사님.”
“아니에요, 마땅히 해야 할 일인걸요.”
다시 고개를 돌려 요시가와를 바라보았다.
“대한민국은 상임이사국이 되었고, 핵무장을 끝냈다.”
“커험, 알고 있소.”
“세번째 원자폭탄은 도쿄에 떨어뜨려줄까?”
요시가와가 눈을 부릅뜬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네놈때문에 열받아서라는 이유로, 어때? 우리나라의 대통령이시자 나의 할아버지이신 천혁수 대통령께서 성명문 하나만 내도 네놈의 입지는 겨울철 마지막 잎새처럼 위태로울 것 같은데?”
“그, 그게 무슨!”
“요시가와라는 자민당의 대표가 비공식적인 석상에서 대한민국에게 무례를 저질렀다.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하는 바이며, 그렇지 않는다면 선전포고로 이해하겠다. 대한민국의 ICBM 발사대 9개소에 핵미사일을 장착했다.”
“뭣?”
“이 정도 성명문이면 네놈의 그 당대표자리 보전할 수 있을까?”
정인숙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게, 내 말을 듣지··· 쯧, 멍청한 놈.”
정인숙의 말에 고개를 주억이며 말을 보탰다.
“분수에 맞지 않는 욕심은 화를 부르는 법이야 요시가와.”
똑똑똑.
노크소리가 들리고 드르륵, 미닫이문이 열리며 고키부리가 공손한 모습으로 안으로 들어왔다.
“너, 너는?”
고키부리를 보고 놀란 요시가와.
“요시가와 당대표, 오랜만이오.”
“이 매국노 같은 자식!”
고키부리가 픽 웃으며 어디서 가져왔는지 일본식 단도를 하나 들고 왔다.
그러고는 자신의 왼손을 들어올린다.
“단지 충성 맹세.”
“뭐?”
“회장님께 복종하시오, 그럼 그 자리도 부귀영화도 유지시켜 줄 테니.”
이것 참.
고키부리의 광기어린 눈을 보고 있자니 나라도 살이 떨리는 것 같았다. 제 놈만 손가락이 잘려서 억울했던 것일까? 의도치 않게 일본에 단지 동맹이 탄생하게 생겼다.
독립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속국을 자처하기 위해 말이다.
< 제 386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