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81화. >
SKY그룹의 본사 사옥.
그곳의 최상층은 나 혼자 사용하는 내 전용 집무실이나 다름이 없었다. 물론 탕비실부터 시작해 커다란 회의실과 스크린이 달려있는 전용 관람실도 따로 존재했다.
대부분 그 관람실에서는 영화따위의 문화생활 보다는 여러지사들의 영상을 주로 시청했다. 편안한 좌석에서 보고 듣는 맛이 있달까? 어쨌든, 오늘도 나는 그 관람실을 찾았다.
“그럼 한번 볼까요?”
호석이 작은 단상위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리모컨을 눌러 SKY가 만들어낸 빔프로젝터를 조작한다. 리모컨과 연결된 빔프로젝터, 그리고 그 빔프로젝터는 다시 SKY의 랩탑과 연결되어 있었다. 리모컨 하나로 랩탑과 빔프로젝트 두가지를 동시에 조작할 수 있었다.
미래에서 살다 온 내가 가져온 가벼운 첨단기술이라 할 수 있었다. 사용자의 편의성을 극도로 생각하는. 이런 소소한 부분에서 SKY 전자의 인기는 날로 상승하고 있었다.
사용자 편의.
별 것 아닌 노력으로도 같은 스펙을 가진 전자제품을 훨씬 압도하는 마케팅 전략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타사 대비 SKY전자의 제품은 당연히 비싸다.
그러나, 누구도 비싼 가격에 의문을 품지 않았다. SKY는 그만큼 고객들에게 서비스를 하니까, 전 세계 대부분 어디에서든 주문하면 3일 이내에 물건이 배송된다. 그거 하나로도 충분히 칭찬을 받아 마땅했다.
스크린 가득, 현 일본의 정치인들의 사진이 빼곡하게 자리잡는다.
“어우, 많다.”
툭 튀어나온 말처럼 정말 많은 인물들의 사진이 지나갔다.
“참 특이한 나라네요.”
“예, 회장님. 뭐 어느 나라던 원로는 대우받는 세상이라지만 일본은 특히나 그 문화가 더 깊이 박혀 있습니다.”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전삶에서도 일본의 장인문화는 우리나라도 배워야 할 점 중에 하나로 꼽았으니까 말이다. 물론, 언제나 그 문화가 좋은 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실전되지 않은 기술을 오래도록 유지하는 것 역시 중요한 일일 것이다.
근데 그 문화가 굳이 정치계에도 필요한가 싶었다.
정치란, 세상이 변화함에 따라 그 어떤 것보다 빠르게 변화해야 했다. 전자제품보다도 느린 변화를 가지고 있다면 그 정치는 실패했다 할 수 있었다.
아직도 정치인들이 군주론을 맹신하는 놈들도 있고, 공자의 말씀을 따르는 놈들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 참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성인의, 성현의 말을 따르고 가슴깊이 새기는 것은 좋았다. 그런데 그것을 현대에 어떻게 적용하느냐는 개개인에 따라 다를 것이다.
“저 많은 사람들이 대단한 영향력이 있는 인물들이다?”
“예, 회장님.”
“저 중에 고키부리와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은 몇이나 됩니까?”
호석이 고개를 저었다.
“한명도 없다고요?”
“예, 회장님.”
“어째서죠?”
“제국주의, 군국주의 따위를 맹신하던 사람들이라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이 아직도 권력을 손에 쥐고 있고요.”
“잃어버린 30년인지 지랄인지가 괜히 온 게 아니군요.”
일본역시 과거 성현의 말을 버리지 못한 모양이다. 이러니 도태될 수 밖에.
물론, 일본 젊은이들이 정치에 관심 없는 것 역시 큰 문제중 하나가 될 것이다. 당장 그들의 피부에 와닿는 삶의 변화가 없다고 생각하니까. 그래서 문제인 것이다. 현 대한민국은 나의 할아버지.
그러니까 천혁수 대통령이 임기를 시작하면서 젊은 층의 정치참여도가 매우 높아졌다. 할아버지가 대한민국 정치계에 젊은피를 억지로 우겨넣었기 때문도 있었지만, 그들의 니즈를 정확히 파악했다는게 더 옳았다.
어쨌든.
일본은 가능하면 일본의 국민들이 정치쪽에 시선을 돌리지 않기를 바라는 놈들이었다. 끼리끼리 해처먹는데 만족을 하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지금 고키부리는 젊은층 사이에서 지지율이 높죠?”
“예, 회장님.”
“일본도 꼰대 문화가 심하죠.”
“예 그렇습니다. 도제식 문화가 삶 전반에 팽배하기 때문에 윗사람을 과하게 따라야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게 꼭 나쁜것만은 아닌데 젊은 층의 불만이 터져나오는 것도 이해가 안 되는건 아니네요.”
호석이 애매한 눈으로 날 바라본다.
“왜요?”
“회장님도···”
말을 흐리는 호석.
“꼰대라는 겁니까?”
“커험.”
“내가 무슨, 직원들이 얼마나 편하게 대하는데요? 오늘도 구내식당에서 제 옆에서 밥을 먹은 신입사원들이 많았는데?”
“일종의 통과의례 같은 것입니다 회장님.”
“예?”
“신입사원들만 주변에 앉아 있는게 이상하지 않으셨습니까?”
“음? 전혀요?”
“그렇군요.”
“내 옆에서 밥을 먹는게 무슨 과제입니까?”
호석이 픽 웃음을 흘린다.
“회장님은 모르시겠지만 회장님 곁에 앉아 있는 것 만으로 많은 사람들이 심적 부담을 느낍니다.”
“그래요? 왜 그렇죠?”
“회장님이 몹시 도도하고, 고고해 보여서 그렇습니다.”
“좋게 표현하신 것 같은데요?”
“그냥 무섭다는 얘깁니다. 제 목숨줄을 쥐고 있는 사람이 옆에 있는데 편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픽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긴, 나 역시 전 삶, 이건과의 식사자리에서는 자주 체하곤 했으니까.
“언젠간 편해지겠죠 뭐, 그게 중요한게 아니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그럼 저기 저 영감탱이들한테 어떻게 하는게 효과적이겠습니까?”
호석이 방긋 웃으며 OK와 비슷한 손 모양을 취한다.
“돈이죠.”
“돈이라, 그거 좋죠.”
“마침, 아주 적합한 인물이 또 일본에 있습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호석을 바라보았다.
“누구죠?”
“정인숙 사장, 아니. 이제는 여사인가요? 그녀가 고키부리의 곁에 있잖습니까? 역사바로알기재단의 부이사장으로서.”
“그렇게 대단한 분이셨나요? 정인숙 여사님이?”
“회장님 곁에 있던 분입니다. 명동 사채시장에서 그 드세다는 직업여성들을 관리하던 사람이죠.”
할아버지는 특이한 게, 직업 여성에게도 돈을 빌려주었다. 그녀들이 빌려가는 돈은 별로 큰 액수는 아니었다. 다만, 엄청나게 많은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녀들을 총괄해서 관리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녀가 바로 정인숙 사장이었다.
그녀의 얼굴만 봐도 침을 흘리는 남정네가 많았다. 그만큼 정인숙 여사는 과거에 끗발 난리던 마담이었고, 직업여성들의 삶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불법 사채를 끌어다 쓴 여인들의 말로가 어떤 것인지 잘 알기 때문에 알아서 관리를 했다.
정인숙 여사의 한 마디면 전국에 있는 유명한 주점들이 들고 일어날 것이다. 전국구 조직들이 관리를 하고 있어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말 보다 더 절대적인게 정인숙 여사의 말이었다.
어쨌든, 그 여인이 지금 일본에 있다는 것은 나 역시 알고 있었다.
“믿을만 한가 보죠?”
“노인네들 마음 구워 삶는데는 구미호가 제일인 법입니다.”
“호오, 그래요? 그럼 정 여사님께 맡겨보죠.”
“실망하지 않으실겁니다.”
픽 웃음이 흘러나왔다.
나는 애초에 실패를 걱정하지 않았다.
“누군가 SKY의 돈을 거절했다?”
“예?”
“그건 SKY와 뜻을 함께 할 생각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나와 호석은 마주보고 씨익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돈이 부족해서죠.”
“돈이 부족해서이군요.”
“10억이 안되면, 100억, 100억이 안되면 1000억을 주면 됩니다. 그럼 일은 해결 되요,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주면 됩니다. 그럼 노예로 만들 수 있죠.”
***
전 세계의 주요 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UN총회. 이례적으로 이번 UN총회는 대한민국에서 열렸다.
다름아닌 가장 중요한 안건이 바로 대한민국이 상임이사국의 자격이 있느냐 하는 안건이었기 때문이었다.
비상임이사국 몇 곳이 입에 거품을 물고 달려들 안건이었지만 어째서인지 상임이사국 5개국은 조용하기만 했다.
어쨌든 대한민국 언론은 연일 들썩였다.
금일 열릴 UN총회에서 대한민국이 상임이사국이 되느냐 아니냐가 결정나기 때문.
할아버지가 거울 앞에서 수트의 매무새를 다듬으며 나를 힐끗 바라보았다.
“걱정되서 왔더냐?”
난 어깨를 으쓱였다.
“그럴리가요? 개회지가 SKY호텔이라서 왔는데요.”
“에라이, 말이라도 예쁘게 하면··· 쯧.”
픽 웃으며 할아버지에게 다가가 넥타이를 만져드렸다.
“걱정하지 마세요, 러시아도 찬성할거고, 프랑스도 찬성 할겁니다. 미국이랑 중국은 뭐 당연한 얘기고요.”
“영국이 문제라는 소리냐?”
“그 부분은 제가 따로 해결 하겠습니다.”
“네가?”
“옙!”
“확실하더냐?”
“그럼요?”
난 거울속 멋들어지게 수트를 차려입은 나를 가리켰다.
“왜 빼 입고 왔겠어요?”
“사전에 약속이 있는 모양이구나.”
“예, 콧대높은 영국 귀족놈 만나려고요.”
“오냐 알았다. 어쨌든 4개국은 우리쪽에 호의적이라니 그리 알고 있으마.”
“호의적은 아니고요, 미국, 중국, 프랑스는 호의적이지만 러시아는 호의적이진 않을 겁니다. 애초에 우리가 한 거래가 있으니 약속은 지키겠지만요.”
“푸틴과 거래를 했단 말이더냐?”
“옙.”
할아버지가 고개를 갸웃 거리며 물었다.
“무슨 거래였더냐?”
“유럽에 에너지 공급 관련된 산업을 5년 늦춰주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에너지 공급?”
“예.”
“어떤 에너지 말이더냐?”
“전기죠.”
“전기?”
“러시아가 유럽에 가장 강력하게 할 수 있는 제재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가스?”
“예, 가스죠. 그게 없다면 유럽이 마비 될 정도로 말이죠.”
“흐음, 확실히.”
“지금 SKY는 신재생 에너지 개발 산업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가스를 대체할 새로운 에너지원이 필요하죠. 그리고 그 에너지 중 많은 것이 ‘전기에너지’를 만드는데 소모될겁니다.”
할아버지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발전시설에 투자를 많이 하더니, 그쪽으로도 성과가 있는 모양이구나.”
“예, 소말리아에서 진행될 해양 플랜트 사업이 성공하게 된다면 그때쯤에 전 세계적으로 발표를 할 생각입니다.”
“그렇구나.”
“그 밖에 배터리 기술 역시 개발중에 있습니다만, 뭐 이건 차차 말씀드리기로 하고. 중요한 건, 전기 에너지입니다. 전기 에너지는 많은 가스 에너지로 구동하는 것들을 대체할 수 있게 만들어주죠.”
“확실히 그렇겠지, 당장 냉, 난방기부터 그럴테니까.”
“현대인의 삶의 질에서 ‘전기’는 빼놓을 수 없을 겁니다. 유럽역시 마찬가지고요, 그리고 가스가 없어도 그걸 어느정도 대체 할 에너지가 있다면 러시아의 유럽에 대한 영향력은 자연스럽게 줄어들 것이고요.”
할아버지가 완벽하게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으셨다.
“러시아는 우리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겠구나.”
“예, 하지만 반대는 하지 못할겁니다. 푸틴은 멍청한 놈이 아니거든요.”
“겨우 5년 보급을 늦추는 조건으로 그런 결정을 내렸다니 신기하구나.”
“그게 전부는 아니었으니까요, 아이티에서 러시아가 좀 치사한 짓거리를 많이 했거든요.”
“그것마저 이용했구나.”
“예, 어쨌든 푸틴은 처리 되었으니 이제 영국만 처리하면 되겠네요.”
“영국에게는 어떤 조건을 걸 생각이더냐?”
“유럽연합은 ‘전기’가 필요합니다. 전 그 ‘전기’를 가지고 있고요.”
“또 에너지로 굴리겠다는 뜻이구나.”
할아버지가 피식, 피식 웃으며 중얼거린다.
“에너지로 여기저기서 두들겨 맞는구나. 그들의 지형이 참으로 억울하겠어.”
“특히나 영국은 바다가 많거든요.”
“이놈, 해양 플랜트. 그것을 무조건 성공할거라 장담하고 있구나.”
“그럼요, 다른 누구도 아니고 SKY가 하는 일인걸요.”
“자신감은 네 놈이 대한민국 제일이다.”
나는 손가락 하나를 들어올려 좌우로 흔들었다.
“에헤이, 깨어난 잠룡이 얼마나 무서운데요? 겨우 대한민국 제일이겠습니까? 세계 제일정도는 되야죠.”
“오냐, 네 놈 잘났다.”
< 제 381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