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65화. >
프랑스 대통령과 협상 아닌 협상은 싱겁게 끝이났다. 그들이 내게 내어주는 것이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만큼 쉬울 수 밖에 없었다.
아직 SKY의 아프리카 진출이 어떤 의미인지 크게 와닿지 않는 모양이다. 얼마전 아이티라는 하나의 국가가 대한민궁 땅이 되었는데도 말이다.
어쩌면 대항해시대 때부터 여기저기 문어발식 확장을 했던 프랑스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쉽고, 싱겁게 끝난 만큼 내게는 이득이었다.
터벅, 터벅.
굳이 이런 서비스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얘기하는데도, 전용기에서 내리는 길에 레드카펫이 깔려 있었다. 아이티나 대한민국에서 해주는 게 아니라 전용기의 승무원들이 직접 하는 일이었다.
비행기 계단을 밟을 때 쇳소리가 싫은가보다.
"아이티는 역시 이맛이죠."
저 멀리 어디선가 약간의 짠내가 붙은 바람이 머릿결에 흩날린다. 한국의 여름만큼 덥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그 습하고 꿉꿉함, 그리고 뙤약볕.
이곳은 뭔가 선선함이 있는 여름날씨랄까? 습도가 조금 적은 것이 이렇게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내가 향할 아프리카 국가에 언질을 넣어두는 기간, 최소한 7일이라는 시간을 필요할 터 였다. 거기에 대한민국이나 중국에서 출발해야 할 물류선도 준비가 되어야 하니, 당장 아프리카로 향하는 것은 아니었다.
7일 뒤, 몸이 가고 두어달 안에 적절한 위치에 건설사업이 시작 될 테다. 그 안에 나는 적당한 부지의 국가에게 허가를 받아내야 할테다.
허가야 쉽다. '돈 준다' 한 마디면 쌍수를 들고 나를 환영할테니.
"아빠!"
태양이가 날 발견하고는 엉거주춤 달려온다.
"오냐~ 내새끼."
태양이를 번쩍 안아 들었는데 어느새 다가온 별이가 바짓가랑이를 잡아 당긴다. 오빠만 안아주지 말고 저도 안아달라는 뜻이다.
누가 딸내미 아니랄까봐 새침한 것이 귀엽기 그지 없다.
"오냐~ 우리 딸."
"아빠 왜 늦게 와?"
"어이쿠, 아빠가 늦었어? 일 끝내고 바로 왔는데?"
"늦어쪄! 한 밤이나 지나쪄!"
"아구구 미안해요~ 아빠가 우리 태양이, 별이 행복하게 해줄려고 열심히 일 하느라 그런거야, 별이랑 태양이가 아빠 봐줘야 돼? 응원도 해주고?"
"응원?"
"응, 아빠 하는일 잘~ 되라고 응원 해 줘."
"알게쪄, 아빠 빠이팅!"
태양이와 별이에게 신나게 볼을 부비는데 저기 입구에서 루나를 꼭 껴 안고 흐뭇하게 웃고 있는 루시가 보였다.
성큼성큼 루시에게 다가가 아이들이 보고 있음에도 가벼운 키스를 나눴다.
"나도 할래! 나도 뽀뽀!"
"나두나두!"
태양이와 별이가 나와 루시의 볼에 마구 입술을 부빈다. 별 것 아니라면 아닌 일인데, 이런게 행복인가 싶었다.
"으이구, 좋아 죽지."
루시의 말에 픽,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럼, 내가 왜 열심히 일하는데?"
"좋은 아빠?"
"그니까, 지금 딱 좋은 아빠의 온상 같잖아?"
"글쎄~ 모르겠는 걸?"
픽 웃으며 어느새 근처로 다가온 유모들에게 태양이와 별이, 루나를 안겨 보냈다.
부부는 부부나름의 회포가 있는 것 아니겠는가.
"내 새끼들 보는게 행복이지, 그렇지 루시?"
유모들에 손에 이끌려 해맑게 웃으며 저기 놀이방으로 사라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루시의 허리를 감싸쥐었다.
"나는 이제 뒷전입니까?"
이상한 한국어로 묻는 루시.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들었어?"
"베이비시터 언니들이 얘기 해 줬습니다."
"무슨 소리야, 뒷전이라니 앞전이지."
"정말?"
루시의 허리를 세게 꽉 끌어 안았다.
전 세계 어디를 가도 그녀보다 아름다운 여자를 본 적이 없다. 숨어있는 나의 야수성을 그대로 드러내게 만드는 여인이다.
"궁금하면 확인 시켜 줘?"
어느새 한쪽 손은 사랑스러운 와이프의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넷째 가즈아!"
"꺄악."
확 들쳐엎고 방으로 달렸다.
뒤에서 호석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
전쟁같은 흔적이 너저분한 방 안.
대충 치울 것들만 의자 위로 정리를 하고, 완전히 지쳐 잠든 루시의 볼에 살짝 뽀뽀를 해주고는 바깥으로 나왔다.
더운 나라라서 별 거부감 없이 편안한 파자마 바지만 입고 바깥으로 나와 옥상으로 나갔다.
"모기 뜯깁니다 회장님."
옥상의 휴식처에 선객이 있었다.
"안 주무셨어요?"
"별 보고 있었습니다. 도심에서는 보기 힘든 하늘이지요."
호석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업무시간이 아니니 내가 먼저 예의를 차렸다.
"삼촌은, 숙모가 뭐라고 안 해요? 그러고보니 그걸 안 물었네요."
"하하하, 이제 그게 걱정 돼?"
"숙모도 출산하신지 얼마 안 됐잖아요?"
"저번에 첫 돌 했잖아? 우진이 네가 강릉에 별장을 줬고. 그게 벌써 8개월 전이야."
"시간 겁나 빠르네. 애기들 얼굴도 잘 못보시고, 저 때문에 바빠서 죄송하네요 삼촌."
"아니야, 내가 고맙지."
"예?"
슬쩍 내 뒷쪽을 힐끗 거린 호석 삼촌이 말을 이었다.
"육아는 지옥이잖냐."
"풉."
부정 할 수 없었다.
나도 가끔 판도라의 상자인 놀이방을 열고는 후회하곤 하니까.
"인정."
"크큭."
저쪽 한 곳에 불이 꺼지지 않은 훈련소의 연병장이 보였다.
"훈련소는 오늘도 불야성이네요."
"안 그래도 빅토르 교관이 회장님을 찾았었습니다."
다시 업무 모드로 들어간 호석삼촌.
"그래요?"
"예, 아마도 자신과 고려인 특전단 아이들의 입지를 걱정하는 것이겠죠, 벌써 1년이 넘게 놀고 있으니."
"흐음, 놀진 않았잖아요?"
"그들 입장에서 경비 일은 노는 것으로 판단한 모양입니다."
"오케이."
"또, 특전단 아이들의 수준 때문에 더욱 그렇게 생각 할 겁니다."
"수준이 어떤데요?"
"1급 대원 정도 입니다. 물론 경험이 3회 이상 있을 때를 가정해서."
"2급보다는 윗줄이지만 1급은 아니다?"
"예, 회장님."
SKY PMC에는 급수가 있었다.
정확히는 SKY 시큐리티&PMC지만 편의상 우리는 PMC라 통칭한다.
어쨌든, 그 급수는 무엇이냐면, 3급 대원들과 2급 대원들은 대부분 경비, 방어, 보안의 업무를 맡는다. PMC가 아니라 시큐리티의 업무를 담당한다고 보면 된다.
1급부터는 PMC의 업무를 담당한다.
요인 경호, 해외 파견, 전시 작전.
고급 임무를 담당하는 만큼 그들의 능력은 대단했다. 대한민국 특수부대 출신들이 PMC에 입사했을 때 가장 먼저 받는 등급이기도 했다. 물론 최소 3년 이상의 경력이 필요했다.
3년 이하는 2급 대원과 1.5급의 대원으로서 훈련과정을 걷쳐 1급 대원으로 탈바꿈 된다.
"특수부대원들과 동급이라."
"분명 훈련은 받았고, 그 능력도 갖췄습니다. 최소 4년 이상 훈련을 받은 인원이 대부분이니 1급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겁니다. 아쉬운 것은 역시 경험입니다."
"그렇군요."
"좋지 않은 장비, 좋지 않은 여건에서 훈련했기에 오히려 생존력 측면에서는 1급대원보다 윗줄에 있는 아이들이 많다는 보고입니다."
"잠재력이 좋다는 얘기네요."
"그렇습니다 회장님."
1급 대원을 지나 특급 대원이 있었다.
특급 대원부터는 우리 PMC의 정예였다. 총인원 400명으로 구성된 특급 대원들. 그들은 PMC의 기둥이고 대부분의 매출을 담당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상시 가동 100여명의 특급대원들은 한국과 아이티 등지에 나누어서 주둔한다.
나머지 300여명의 대원들은 모두 해외로 파견되어 있었다. 요인경호의 팀장등과 같은 직급으로.
"그리고 또 몇몇은, 코드를 받을 자격이 있어 보였습니다."
"오, 그렇게까지요?"
"예, 세명입니다. 여성대원 두명, 남성대원 한명입니다."
코드 대원.
그것은 특급 대원보다 더 윗줄로 나의 친위대라 할 수 있으며 PMC의 거의 대부분의 비밀문서와 비밀임무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다.
능력에 따라 숫자가 적으며, 이재형이 코드원이며 그 위로는 단 2명의 대원이 존재한다.
대원이자 PMC의 총괄, 백철웅, 정호석 두 대표가 코드 제로의 지휘에 위치한다.
PMC의 핵심이라 할 수 있고, 코드는 헌드레드까지 존재한다. 102명의 최정예 대원들이 존재한다는 뜻. 그들은 보통 평시에는 훈련소 교관등으로 활동하지만 매일, 매주, 매월 단위로 임무에 들어가며 로테이션 된다.
할아버지와 나에게는 코드 대원 20여명이 항시 배치되고, 가족들에게는 각 3명의 코드대원과 17명의 특급 대원이 배치된다. 나와 가족들의 안전은 걱정 없다는 뜻.
"좋네요, 이번 아프리카쪽에 고려인 아이들을 성인위주로 먼저 투입시키는 방안을 검토하세요."
"예, 회장님."
"그 부분은 빅토르 교관에게 권한을 일임해줘도 좋습니다."
"예, 그렇게 처리하겠습니다."
"내일쯤에 내가 따로 만나죠."
"예, 회장님."
***
아이티에서부터 대서양을 가로질러 세네갈에 착륙한 전용기.
바다를 건너 왔다고 기후가 확 바뀌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이티는 섬나라의 특성상 습도가 높은 편이었다. 그러나 아프리카. 아프리카 말만 들었던 이 대륙은 위성 사진에서도 보이듯, 건조하고 황량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푸쉬익.
밀폐된 공기의 흐름이 달라지는 걸 느끼며 열리는 비행기 문을 내다보았다.
"호오."
미국의 대통령이라도 방문한 듯, 혹은 프랑스의 대통령이라도 방문한 듯, 세네갈의 대통령 레오폴드가 땡볕 아래 서 있었다.
길게 깔려있는 레드카펫부터 양쪽으로 도열 해 있는 의장대와 그 뒤로 도열 해 있는 군악대.
"세네갈이 생각보다 발전했네요."
투르르륵.
작은 북을 두들기기 시작하는데, 어째서인지 그 속에 흑형들의 소울이 느껴진다. 이런게 재능일까? 절로 기분 좋아지는 환대에 레드카펫을 걸어 그대로 레오폴드 대통령이 내민 손을 잡아 끌어 그에게 포옹했다.
"환대에 감사합니다. 무슈 레오폴드."
잠시 흠칫 놀란 듯 하던 그가 이내 포근히 내 몸을 감싸며 답했다.
"방문을 환영합니다. 미스터 천."
굳이 무슈라는 얘기가 아니라 미스터라는 얘기를 한 이유는 아마도, 정치적인 문제가 엮여 있을 것이다. 일제를 기억하는 대한민국에서도 ㅇㅇ상 이라고 누군가를 호칭하지 않듯, 프랑스의 식민지 시절을 기억하는 세네갈은 무슈라는 호칭을 싫어하나 보다.
아프리카 전역에 프랑스로부터의 독립 열기를 불러 일으켰던 세네갈, 마냥 무시할 수 있는 나라는 아닌 모양이다.
"내가 실례를 한 모양입니다. 불어는 생략하도록 하죠."
빙그레 웃는 레오폴드.
특유의 허연 이빨이 유난히 밝아 보였다.
"이 황무지를 방문해준 귀빈께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가실까요? 여기 계속 이러고 있는 것도 민폐인 것 같아서요."
"하하하, 예, 움직이시죠."
호석이 보내는 눈빛이 따가웠다.
굳이 대통령의 차량에 오르지 않았으면 하는 분위기였다. 사전에 미리 세네갈에 도착해 있던 PMC의 대원들이 경호팀을 이동시킬 차량을 준비 해 놓은 상태일테다.
전용기에서도 전용차가 내려지는 중이었고.
"의전차로 리무진이 준비 되었으니 같이 타시면 되죠?"
"예, 알겠습니다."
탁.
차량의 문이 닫히고 부드럽게 미끄러지기 시작하자 레오폴드 대통령이 차량용 냉장고에서 샴페인을 꺼내 따라준다.
챙.
크리스탈 잔을 부딪히고 한 모금 마신 샴페인은 제법 맛이 좋았다.
"세네갈에서 만든 샴페인입니다."
"오, 맛이 좋네요."
고개를 주억거린 레오폴드 대통령이 어쩐지 내 눈치를 살피는 느낌이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대통령님."
"하하... 아시겠지만, 우리는 저 바다 건너 아이티를 알고 있습니다."
짧은 문장이었지만 난 대번에 그가 하는 걱정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독립의 역사가 길지 않은 세네갈.
그가 생각하는 우려가 무엇인지 모를래야 모를 수 없었다. 그리고, 그가 내 눈치를 살피는 이유역시 알 수 있었다.
"아이티가 대한민국이 된 것. 그게 걱정이신 모양이군요."
고개를 젓는 레오폴드.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나와 같을 순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대통령의 반대세력이 있다는 뜻.
"괜찮습니다. 큰 문제는 아니니까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그 모습에 레오폴드가 살짝 인상을 찌푸린다.
"SKY가 우리땅에서 하는 사업에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글쎄요, 내기 하나 하시겠습니까?"
"내기요?"
"예, SKY가 세네갈에서 목표를 달성 하는지, 못하는지. 어떠십니까?"
내 반응이 너무 장난처럼 느껴졌을까? 잠시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짓던 대통령이 말했다.
"자신감이 넘치시는군요."
"SKY사전에 실패는 없죠."
"내기라... 좋습니다. 하겠습니다."
난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 제 365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