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60화. >
워싱턴의 록펠러 가문의 대저택.
“응애, 응애, 응애.”
“허허, 고놈 참 울음소리 한번 우렁차구나.”
데비 할아버지가 아주 흡족한 얼굴로 셋째이자 현재까진 막내 딸, 루나를 얼러주고 계신다.
“그렇게 예쁘세요?”
“그럼~ 딸 아이로 태어났어도, 울음소리가 쩌렁쩌렁한 게 어지간한 사내놈들 못지 않겠어.”
“손자였으면 하셨어요?”
데비 할아버지가 격하게 고개를 젓는다.
“그럴리 있는가? 성별이 뭐가 중요하겠나? 바쁘게 변하는 세상에 그까짓거 중한게 아니지, 아직도 영국은 여왕을 모신다고?”
“하하, 그렇죠.”
“인간은 유전적으로 부계보다는 모계유전자를 더 많이 받아들이게 되어 있지, 그러니까 좋은 사내가 대를 이어야 한다는 발상은 과학적으로 아주 구시대적인 발상이란 얘기야.”
“오호, 역시 사내자식 키워봐야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더니, 과학적으로 입증된 사실이었군요?”
“크큭, 그렇지. 자네와 나를 보라고, 남자 새끼들은 키워봐야 소용이 없는거야, 아주 불효 막심한 놈들이라고.”
픽 웃음이 흘러나왔다.
말은 그렇게 하시면서 스스로의 두 눈에 뿌듯함이 가득하다.
‘아버지, 이 정도면 저도 괜찮은 아들놈 아닙니까?’하고 꼭, 지금은 돌아가셨을 데비 할아버지의 아버지에게 묻고 있는 듯 보였다.
“그렇죠, 불효막심. 이제는 거의 반 한국인 되신 것 같습니다.”
“손주 녀석들이 이제는 한국인인데, 할애비도 반 한국인 되야지.”
“하하, 증조 할아버지신건 아시죠?”
“음? 하하하, 증조라는 말이 들어가니 내가 너무 늙어보이는 군, 쯧. 역시 은퇴할 때가 되었나?”
나는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조금만 더 참으시죠?”
“음? 은퇴하지 말라고?”
“장인어른이 대권을 잡고 나서 은행을 운영할 경영자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쯧쯧, 가문에게 사업체를 물려주는 것 역시 구시대적인 발상이지, 유능한 놈들을 월급을 주며 부려먹는게 더 효율적이야.”
“호오.”
“우진이 너도 그렇게 하고 있잖으냐?”
미국 사람이라 그럴까? 마인드가 한국의 재벌과는 차원이 달랐다. 물론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자면 한국보다 더 고지식한 뿌리깊은 사상이 자리잡고 있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확실히 깨어있는 경영자의 마인드를 갖췄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럼요, 능력없는 사람이 자리를 차지하는 것 보다. 조금이라도 더 능력있는 사람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게 좋은 법이죠.”
“그러니, 나는 은퇴를 해도 돼.”
그래도 역시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전문경영인이 자금을 움직이는 것 보다. 오너가문의 오너가 자금을 움직이는 게 더 자유로우니까요.”
“쯧쯧, 결국은 로비나 하라는 얘기구나.”
“상징적인 의미도 있잖습니까? 현 록펠러 가문의 가주시니까요.”
“쑤처럼 이 할애비도 부려먹겠다는 소리구나.”
“에헤이, 한참 청춘이신 분들이 왜 자꾸만 엄살이실까.”
“이 놈아 비가 오면 온몸이 쑤셔.”
“풉.”
이제는 정말 한국인 같은 소리를 하신다.
영어로 저런 단어를 구사할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데비 할아버지와 웃고 떠드는 사이, 몸도 불편할텐데 루시가 굳이 바깥으로 나와 데비 할아버지의 옆 자리에 턱 하니 앉는다.
“나만 빼고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하고 있었어?”
데비 할아버지가 세상 부드러운 눈으로 루시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묻는다.
“몸은 괜찮고?”
“그럼, 누구 손녀인데? 튼튼하지!”
과장되게 힘을 주고 얘기하지만 루시의 눈매에는 피로가 엿보였다.
“하하, 들어가서 더 푹 쉬지 않고.”
“방 안에만 있으면 답답해서요.”
“그래, 그럴수도 있지.”
“무슨 대화 하고 계셨어요?”
“별 얘기 하지 않았다. 아마 이제부터 본론이었지 싶은데.”
데비 할아버지의 말에 피식 웃으며 내가 마시고 있던 시원한 아이스티를 루시 앞으로 주욱 밀어 주었다.
눈을 찡긋한 루시가 자연스럽게 빨대로 입을 가져가 호로록 하고는 아이스티를 마신다.
“장인어른 대선 계획을 이제 슬슬 준비 해야지 싶어서.”
빨대에서 입을 땐 루시가 작게 한숨을 내쉰다.
“휘유··· 미국 대통령 딸내미 피곤할 것 같은데, 꼭 해야 돼?”
“하하, 록펠러 가문의 숙명이지.”
루시의 질문에 한 내 대답에 데비 할아버지가 ‘그럼, 그럼!’하면서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신다.
루시가 못말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가능성은 있는거야?”
툭 던진 질문이지만 나와 데비 할아버지는 루시를 빤히 쏘아보았다.
“아이 따가워라, 얼굴에 구멍 뚫리겠네, 알겠습니다. 서방님, 할아버님 믿어요~”
데비 할아버지가 피식 웃음을 짓고는 날 바라보셨다.
“그래, 첫번째 스텝은 무엇이냐?”
“정확하고 확고한 당적을 확정짓는게 순서겠죠.”
“이미 민주당으로 확정된 것이 아니더냐?”
“맞습니다. 그러나 부쉬의 견제를 피하고자 공화당에도 살짝쿵, 발을 걸쳤다 할 수 있죠.”
“정치라는게 원래, 때마다 이곳에 붙었다 저곳에 붙었다 박쥐 짓을 해야 하는 일 아니더냐.”
“맞는 말씀입니다만, 대선을 위해서는 지금부터라도 확고하게 움직여야 합니다.”
“리스크가 크겠군, 실패한다면 주지사 자리는 내려 놓아야겠어.”
난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 대선에서 민주당과 공화당의 표차이는 그렇게 크지 않았습니다. 퍼센티지로 따져도 약 2퍼센트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죠.”
“실제 표 수는 더 적었고.”
“예, 미국의 투표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 덕에 워싱턴 주지사 자리에는 민주당의 인물이 앉을 수 있었습니다.”
“그게 주니어고?”
“예, 할아버지.”
루시는 슬그머니 데비 할아버지 품에 안겨있던 루나를 받아 들고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자연스럽게 데비 할아버지는 시가를 입에 무신다.
나와 즐기고 있던 티타임 시간동안 아마 시가가 생각나셨을텐데 오래 참으셨다.
“우진도 태워, 여기는 미국이니까.”
동방의 예의는 잠시 내려놓아도 좋다는 말씀.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데비 할아버지가 태우는 시가는 그 올드한 향이 일품이었다. 가끔 생각나는 시가랄까?
어쨌든, 나 역시 시가를 입에 물고 말을 이었다.
“공화당 입장에서 마냥 민주당을 지지해주기는 애매한 형국이었습니다. 자칫 주지사와 대통령의 뜻이 부딪힐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그 협의점이 어느쪽의 색도 짙지 않다 여겨지는 주니어가 적합했고?”
“그렇죠, 민주당인지 공화당인지 헛갈리지만 어쨌든 주지사 자리를 차지하기위해 민주당을 표방했으나, 이제는 확실히 민주당으로 돌아서야 합니다.”
데비 할아버지의 얼굴에 우려가 섞여 있었다.
“역대 공화당은 아주 튼튼했지.”
맞는 말이었다.
당장 부쉬도 재선에 성공하지 않았는가.
“전쟁이 오랫동안 진행되고 있습니다. 다행이 빈 라덴은 일찍 잡았으나, 이라크와의 전쟁은 억지라는 여론역시 존재하죠, 뭣 보다 희생되고 있는 미군들과 소모되고 있는 전쟁비용에 대해서 말이 많습니다.”
“거기에 더해 여러가지 경제상황 역시 겹치고.”
“예, 자연스럽게 공화당의 지지율이 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부쉬는 가까스로 재선에 성공했다 말 할 수 있지만, 아마 다음선거는 결국 민주당의 승리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당장의 공화당에게 이익이 보이지 않을테니, 시민들의 마음이 돌아선다라.”
정확했다.
“제 예상은 그렇습니다.”
“짧은 대화였지만, 충분히 신빙성이 느껴지는 군. 게다가 신뢰의 문제도 있겠지. 이곳에 붙었다 저곳에 붙었다 하는 인물보다는 유불리를 떠나 엉덩이가 무거운이는 결국엔 신뢰 받기 마련이니까.”
“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좋아 첫번째 스텝은 그럼 이미 밟은 것이나 마찬가지군.”
“음? 저기 마침 주인공이 오는구만.”
장인어른이 민주당 특유의 푸른색 넥타이를 휘날리며 이쪽으로 걸어오고 계셨다. 자리에 털썩 앉으시며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 헤치고는 자연스럽게 테이블에 올려진 시가박스에 손을 뻗는다.
“끌끌, 갑갑하더냐?”
“에휴, 자원봉사를 할 때 웃고 다니던 것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그 순순한 아이들에게 미소를 보이는 건 쉬운 일이지, 잔뜩 때가 탄 놈들에게 웃는 얼굴을 보이는 건 고역이고.”
“예, 어찌나 꼴보기 싫은 놈들이 많은지 어휴, 성격 같아서는 확.”
이제 본격적인 정치를 하신지 1년이 조금 지난 장인어른. 말은 엄살을 피우면서도 어느새 장인어른의 얼굴은 정치인이 다 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엄살은 그만 부리고, 대통령 할 마음은 있는게냐?”
“시작을 했으면 끝을 봐야죠 아버지, 저도 록펠러입니다.”
“후후, 그렇다는구나 우진아.”
나는 빙그레 입꼬리를 들어 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장인어른께서는 첫번째 스텝을 아주 훌륭하게 밟으셨습니다.”
“음? 첫번째 스텝?”
“당적을 결정하신 일이죠.”
“상황상 민주당을 결정한게 아니었나?”
“다음 대선에서 민주당이 유리할것으로 분석했습니다.”
“그렇군, 그럼 두번째 스텝은?”
“민주당에서 다음 대선의 후보자로 나올만한 라이벌이 누구인가를 먼저 생각하셔야겠죠?”
장인어른이 고개를 주억거리셨다.
“오늘부터는 그걸 맹점으로 살펴야겠군.”
“예, 그래주시면 좋죠.”
나는 이미 어떤 후보자가 떠오를지 알고 있었지만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현재 장인어른의 민주당 내에서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우선 미국의 최대 금융재벌이라 할 수 있는 록펠러 가문이 든든하게 백업을 하고 있으며, 록펠러가문과 SKY가 함께 진행하는 많은 자선사업때문에 가만히 있어도 인지도와 이미지가 좋아지는 중이었다.
게다가 특유의 거침없고 털털한 모습은 많은 이들의 호감을 사기 좋았으며, 특히나 어린 아이들에게 스스럼 없이 다가가는 동네 아저씨같은 그는 어린 아이를 둔 부모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그러니까 나는 일종의 나비효과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과거와 같이 최초의 유색인종 대통령 버락이 대항마로 떠오를지 아닐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는 얘기였다.
대비는 해야겠지만, 아직 거론하긴 이르다는게 내 생각이었다. 아직 대선까지는 2년 하고도 대략 4개월정도의 여유가 남았으니까.
“이제 자네도 쉴 만큼 쉰 것 같은데? 날 생각하지 말고, 볼일을 얘기 해 보게.”
“아, 국무부 장관과 따로 얘기를 해도 됩니다 장인어른.”
“이런, 워싱턴의 주지사 자리로는 아직 자네를 돕기 부족한가 보군, 아쉬워. 능력있는 장인이 아니라서.”
“하하, 그럴리가요. 다만 현 국무부장관과 제가 아프간에서부터 인연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군.”
뭔가 아쉬워 하는 장인어른의 모습에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부탁을 얘기했다.
“그렇다면 부쉬 대통령과 국무부장관, 장인어른과 제가 같은 자리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오호, 그래. 내가 대통령께 얘기 해 보겠네, 아마 그 역시 흔쾌히 승낙 할 것으로 보이는군.”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내가 전화를 했어도, 내가 요청을 했어도 만남은 성사 되었을 것이다. 현재 내 영향력 아래에 있는 구골은 압도적인 성장세를 보이고 있었고 SKY전자 역시 세계 전자시장 점유율이 60퍼센트까지 끌어 올린 시점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제나는 전세계 부자 순위에 빼놓지 않고 얼굴을 내민다. 아직 전 세계의 그 누구도 내 재산의 가치에 대해서 정확하게 평가하는 사람은 없었다. SKY그룹의 지분구조는 복잡하지 않지만 베일에 쌓여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포브스에서 선정하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 30안에는 무조건 포함되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니 부쉬역시 내 만남 요청을 거절할 리 없었다.
마침 전화가 끝났는지 장인어른이 휴대폰을 내려 놓는다.
“내일 저녁에 한잔 하자는 군, 어떤가?”
“좋습니다. 거절 할 이유가 없죠.”
그렇게 자연스럽게, 현 미국의 대통령인 부쉬와, 국무부 장관 파월과의 만남이 성사 되었다.
< 제 360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