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57화. >
SKY LINE의 항공기가 아니라 나의 전용기에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는 어린 아이들.
청소년 시기의 아이들부터 이제 막 유치원에 들어가야 할 아이들이었다.
내 전용기에 저렇게 많은 아이들이 탑승하는 것 자체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정말··· 뭐라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빅토르가 아주 공손한 자세로 고개를 살짝 숙이고 곁을 지키고 있었다.
손을 뻗어 빅토르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 주었다.
“나도 좋은 아버지이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그러셨습니까?”
죽음을 각오하고 러시아로 왔던 빅토르의 눈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아이들이 안전하게 비행기에 오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의 두 눈에는 행복이 가득해 보였다.
저 두 눈동자만 보더라도 내가 한 일이 잘 된 일이라고 느껴졌다. 전혀 아깝지가 않았다.
“푸틴에게 어떤것을 주신것인지 모르나···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빅토르의 말에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좋은 사람을 얻었으니 됐습니다. 잃은 것 보다 얻은 것이 더 크니까요.”
빅토르는 뭐라 말 하지 못하고 입술을 벙긋 거렸다. 과연 내가 포기한 것이 무엇인지 짐작도 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
아이들이 클 때까지.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인재에게 투자하는 것, 그것은 리스크 역시 가지고 있었다.
허나, 투자가 성공만 한다면 어지간한 기업을 사들이는 것 보다 더욱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실제로 천가 키즈들의 능력으로도 벌써 입증되지 않았는가. 내 할아버지 천혁수 대통령의 방식이 이미 대한민국에서 어떤 영향력을 키우게 해 줬는지 증명되지 않았는가 말이다.
물론, 할아버지 곁에 내가 있었기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걸 부정할 순 없었다. 그러나, 나 홀로 모든것을 했다 생각하지 않는다.
당장 곁에 있는 호석, 그리고 할아버지 곁에 있는 철웅을 비롯한 수많은 천가 키즈 출신의 장학생들.
그들이 있기에 조금 더 수월했고, 더 쉬웠으며, 지금 역시도 원할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이었다.
어디하나 기댈때도 없고, 믿을 놈들도 없는 세상. 그래도 천가 키즈라면 조금이나마 마음을 놓고, 조금 더 신뢰하고 맡길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신뢰라는게 아주 날카로운 유리와 같아서 조금만 삐끗해도 찔리고 깨지기 일수였다.
그러니 내게 물질적인 가치보다는 물질로 형용할 수 없는 그 ‘신뢰’라는 가치가 더욱 크다 할 수 있었다.
물론 압도적인 돈 앞에서 없던 ‘신뢰’도 생기는 경우가 있을테다. 그러나, 돈에는 더 ‘큰 돈’이라는 항상 위험한 선택지가 있다는 걸 알아야 했다.
나는 아직 세상에서 가장 많은 돈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세상에서 가장 큰 돈을 가진 사람도 아니었다.
“우리도 갑시다.”
호석과 빅토르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뒤를 따라 비행기에 오른다. 북적거리는 전용기를 보고 있자니 어쩐지 웃음이 새어 나온다.
“이 녀석들, 얌전히 자리에 앉아 대기한다!”
빅토르의 명령 한 번에 조용해지는 아이들.
이익이 뭐고, 손해가 무엇이랴.
한명, 한명.
아이들의 행복 가득한 저 웃음을 지켜준 것 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털썩, 자리에 앉으며 옆자리에 앉는 호석에게 말했다.
“오늘은 루시한테 칭찬을 받을까 봐요.”
“하하, 예. 그러셔도 됩니다. 자랑스러운 아버지셨습니다.”
“그래요?”
“예, 저도 오늘은 자식들에게 자랑을 해볼까 합니다.”
호석의 팔을 툭툭 두들기며 말했다.
“SKY가 이런 회사라고 자랑하셔도 됩니다. 누구나 ‘와!’ 할 거에요.”
“예, 그럴겁니다.”
“역시, 복잡한 계산 같은 것 보다는, 마음가는대로 움직이는 게 때로는 더 현명한 선택 같습니다.”
호석이 부드럽게 입가에 호선을 그린다.
빅토르의 성난척 하는 두 눈동자에 잔뜩 움츠러든 아이들을 둘러보며 난 외쳤다.
“와! 음료랑 음식이 공짜래! 엄청 시켜 먹자!”
아이들의 동공에 지진이라도 난듯 파르르 떨리는게 느껴진다.
내 외침에 승무원들은 눈치껏 카트에 아이들이 좋아 할 만한 간식들과 음료들을 가득 싣고 나타났다.
아이들이 떼구르르, 눈알을 굴리며 빅토르의 눈치를 살핀다.
빅토르가 나를 힐끗 바라보기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커험, 욕심부리지 말고. 먹을 수 있는 만큼만 허락한다.”
아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정말이냐는 듯 카트와 빅토르를 번갈아 쳐다본다. 용기있어 보이는 앳된 소년이 승무원을 올려다보며 어설픈 한국어로 묻는다.
“아무거나 막 먹어도 되나요?”
“저분이 말씀하셨죠? 먹을 수 있는 만큼.”
“와아, 잘 먹겠습니다.”
그제야 아이들이 여기 저기서 카트로 달려든다.
내 눈치를 살피던 빅토르가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나는 고개를 저었다.
빅토르 역시 잠시 아이들을 바라보다 피식 웃더니 자리에 앉았다.
***
전 세계에 생중계 되고 있는 아이티의 대한민국 자치령에 대한 국민들의 의견을 묻는 투표의 개표방송.
찬성과 반대.
두가지 중 택1을 하는 상황.
21세기의 식민지배라는 세계인의 우려속에 시작된 개표방송은 더 보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싶을 만큼 찬성표로 점철되어 있었다.
파란색 찬성, 붉은색 반대.
압도적으로 그래프는 푸른색 막대가 치솟고 있는 상황이었다.
“현재까지 682만표 개표되었고, 찬성이 91퍼센트에 달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과반을 넘었다는 얘기네요.”
내 말에 할아버지의 곁에 서 있던 철웅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이티를 활성화 시키려면 많은 국민들이 이주를 해 줘야 할 겁니다.”
할아버지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SKY가 먼저 가 있으니, 많은 국민들이 따라가겠구나.”
“부디 그러길 바라야죠.”
“공항을 확대하고, 해군력을 증강시켜야겠어.”
“예, 넓은 규모의 항구를 만들 생각입니다. 이미 중공업에서 그쪽에 나가 있기도 합니다. SKY항공우주기술의 조선부도 옮겨 갈 생각이고요.”
“전투기는 되었으니, 이제는 전함이더냐.”
“바쁘게 움직여야죠, 군사력이 국력 아니겠습니까.”
“쯧, 아이티를 지키는게 여간 쉬운일은 아닐 것이다. 항공기로도 지나가야 할 나라가 많고, 뱃길로도 쉽지 않을 테니.”
“그러니 자치령이죠.”
할아버지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벌써부터 쿠바와 미국, 남미의 국가들과 마찰을 생각하면 골이 울리는 것 같구나.”
“에헤이, 또 약한척을 하실까.”
“이놈아, 쿠바 문제로 미국도 골치를 썩어, 그런 미국보다 아이티가 더 가깝다. 이제는 우리나라가 된 그곳이 말이다.”
“걱정하지 마십쇼, 별 일 없을겁니다.”
“그래야지···”
고급 위스키도, 와인도 아닌 막걸리를 걸쭉 하게 들이켠 할아버지가 열무 김치에 파전을 싸서는 입안 가득 집어 넣어 씹어 삼키고는 날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네놈 계획은 무엇이냐?”
“대서양에 항공모함.”
“뭐?”
“SKY가 직접 만든 항공모함을 띄워볼까 합니다. 당연히, 대한민국의 함선이겠죠.”
“어디서 돈이 무진장 깨지는 소리가 들리는구나.”
“예, 제 주머니에는 돈이 무진장 들어오는 소리가 들립니다.”
탁.
젓가락을 거칠게 내려놓은 할아버지가 날 빤히 바라보고는 말씀하셨다.
“이놈아 국민들 혈세다.”
“그러니 더욱 옳은 곳에 쓰셔야죠? 엄한 도로공사나 보도블럭 뒤집어 까는 것 보다. 그런 곳에 쓰는게 더 유익할 것 같은데요.”
“커험.”
“오는길에 보셨죠? 멀쩡한 보도블럭 뒤집어 엎는 거, 하여간 계절만 바뀔때가 되면 아주··· 쯧.”
지랄을 한다 라는 말을 아꼈다.
그래도 할아버지 앞인데 욕을 할 수야 있나.
“그놈에 예산 배정이 뭔지, 뻘짓을 어찌나하는지.”
할아버지 역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대화를 하는 사이, 아이티의 개표방송은 800만표가 넘어가면서 80퍼센트 이상의 아이티 인들이 총 93퍼센트의 비율로 대한민국 자치령이 되는 것에 찬성하는 표를 던졌다는 방송으로 시끄러웠다.
아까도 사실상 대한민국의 자치령이 된 것이나 다름 없었지만, 이제는 확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또한, 국제사회에서 보내준 선관위가 직접 개표에 참여 했으니 ‘부정’이라는 얘기또한 나올 일이 없었다. 무엇보다, 아이티 현지인들이 ‘아이티’라는 독립국가가 되기 보다, 대한민국의 자치령이 되는 것을 더욱 찬성하는 상황.
“완벽한 명분은 되었구나··· 허, 정말로 아이티를 통째로 가져왔어.”
할아버지가 새삼스럽게 놀랍다는 얼굴로 날 바라보신다.
“연말에 열릴 UN안보리. 대한민국이 상임이사국이 될 겁니다.”
“그래··· 아이티에서 대한민국이 아니라 러시아로 날아가더니, 푸틴을 구워 삶아서 왔구나.”
“상임이사국 되는데, 뭐 문제는 없죠?”
“문제라··· 독일, 일본, 브라질 정도가 아니겠더냐? 중국이나 북한은 조용하니 아무런 문제가 없고, 미국도 우호적으로 반응하니 문제가 없고. 다른 상임이사국들 역시 문제를 삼지 않으니 별 문제가 없지.”
“일본이라···”
슬쩍 고개를 돌려 호석을 바라보았다.
“요즘 고키부리 그 놈 어때요?”
“역사바로알기 재단의 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도쿄도지사가 된 후로, 제법 발 넓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알아서 잘 하고 있다?”
“예, 일본의 우파들에게 눈엣가시같은 존재일겁니다.”
다시 고개를 돌려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뭐, 정치적인 문제는 할아버지가 알아서 하시겠죠?”
“어휴, 또 한동안 잠 못드는 밤이 계속 되겠구나, 벌써 피곤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할아버지.
피식 웃으며 대화의 화제를 돌렸다.
“아이티에는 천가 키즈의 어린아이들을 보내볼까 합니다.”
“흐음, 아이들에게 가혹한 행위가 아니겠더냐.”
“선입견이 없는 아이들이 오히려 더욱 적응하기가 편할 겁니다.”
“자연재해에서 안전한 것이더냐? 삶의질이 결코 높다 할 수 없을터인데?”
“SKY가 직접, 빠르게 개선해 나갈 겁니다.”
“대한민국 아이티 자치령이 아니라, SKY 아이티 공화국을 만들 셈이더냐.”
픽 웃음이 흘러나왔다.
“대한민국도 사실상 SKY 대한민국 공화국 아니었습니까?”
할아버지가 도끼눈을 하고는 날 바라보신다.
꿈도 꾸지 말라는 얼굴.
“공권력을 너무 무시하지 말거라, 잘 쌓은 철옹성도 무너뜨리던 것이 공권력이니까.”
“운좋게 그 공권력의 꼭대기에 저를 가장 사랑하시는 분이 앉아 계시네요.”
픽 웃는 할아버지.
“아이들 위주로 옮긴다면, 역시 교육이 필요하겠구나.”
“예, 많은 사람들이 넘어가야 할 겁니다. 교육을 위해서요. 이주해간 한국인들을 위해서도 있지만, 거기에 있는 현지인들을 위해서라도 필요하겠죠.”
“아이티 공사에 아주 쎄가 빠지겠구나··· 당장 착수해야 할 공사가 한 둘이 아닐테니.”
“그 부분은 제가 한번 나서 보겠습니다.”
“네가 나서? SKY가 모든 자금을 대겠다는 것이냐?”
그럴리가있나.
뭐 빼먹을 게 있다고 그런 위험한 투자를 하겠는가.
SKY는 기업이었다. 기업은 사익을 최우선으로 한다. 대한민국에 뿌리를 두었다지만 국익을 위해 최선을 다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에이, 할아버지는. 손자가 그럴 놈으로 보이십니까?”
할아버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허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냐? 상수도부터 시작해서 해야 할 기본 공사들이 산재해있는데?”
“일 손이 부족하면 일 해줄 놈들을 데려와야죠.”
“허허.”
할아버지가 내 눈을 빤히 바라보시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신다.
“철웅아, 저놈 저 눈깔을 보니 뱀이 따로 없구나.”
“어허, 손자 용이라니까요?”
“저 뱀눈깔을 하고 또 힘 없는 전경련을 닥달하겠구나.”
픽 웃음이 흘러나왔다.
역시 눈치빠른 우리 할아버지.
“국책사업으로 둔갑시켜서 얘기좀 하겠습니다. 공사대금은 뭐, 한 20년에 걸처셔 갚아나가는 걸로.”
“쯧쯧, 네놈 때문에 전경련에 바람잘 날이 없구나, 그 놈들이 나쁜짓을 할 시간과 돈이 없겠어.”
“그래서 요즘 우리나라 뉴스가 심심하잖아요, 좋은 얘기밖에 없어서.”
“그러게나 말이다. 어색할 정도야. 계절마다 정치인 놈들 휠체어 탄 모습, 재벌가 회장놈들 휠체어 탄 모습이 검찰 앞에서 찍혀야 하는데 말이다.”
“이런게 바로 누이좋고 매부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참된 재벌의 모습으로 대한민국 국력 상승에 크게 기여하고요.”
“하여간 혓바닥은. 알아서 하거라.”
“옙! 맡겨만 주십쇼!”
할아버지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신다.
그런데 어쩌나.
대한민국의 재벌들은 영원히 고통받아야 할 것이다. SKY의 뿌리가 대한민국에 닿아있는 한.
원래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 방치하면 까먹는다.
제 놈들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말이다.
< 제 357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