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56화. >
빅토르를 노려보면서 푸틴은 보좌관이 건네는 전화를 받아 들었다.
“전화 받았소.”
나름 예의를 갖춘 푸틴의 영어.
-그런것 같군요.
“내게 더 볼 일이 남았나? 피차 공사가 다망한다 안부 전화는 아닐 것으로 보이고.”
-듣기로는 빅토르 최를 잡아가셨다고.
“글쎄, 감히 우리 연방의 명예를 실추 시켰다기에, 아랫사람들이 처리하려 할까 싶었소만.”
-풀어 줍시다.
푸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빅토르는 무슨일인지 몰랐지만 그 통화 내용이 너무 궁금했다.
“지금 내게 명령을 하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이오?”
-에이 설마, 일개 기업인이 대 러시아의 대통령에게 명령이라니? 가당치도 않죠?
“어째서 그렇게 들렸을까?”
-거래를 합시다.
“거래?”
-관심 있다면 어떻게? 약속 잡을까요?
푸틴이 히죽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언제나 그대는 자신감이 과하군, 이 러시아에 당신이 두 발을 딛고 살아 나갈 수 있을거라 생각하오?”
-러시아 만큼 관광하기도 좋은 나라가 없죠.
“하하하, 관광이라.”
-아시아와 유럽의 절묘한 만남, 터키도 그렇지만 러시아도 제법 볼 게 많습니다.
“그럼 그 시간 동안은 적어도 빅토르 최의 죽음은 늦춰지겠군.”
빅토르가 자신의 이름이 나오고 ‘죽음’이라는 단어가 흘러나오자 흠칫 몸을 떨었다.
-거래 물품이니까 멀쩡해야겠죠?
“좋아 그 거래, 한 번 듣기나 해 보지.”
-좋습니다. 그럼 그곳으로 내가 가죠.
“뭐?”
-지금 모스크바의 사택에 있는 거 아닙니까?
푸틴이 와락 얼굴을 찌푸렸다.
자신의 이동, 자신의 거처는 언제나 비밀리에 붙여져 있어야 했다. 시대를 풍미 했던 러시아, 미국과의 오랜 냉전을 치뤘던 러시아.
미국도 그렇겠지만 러시아에서 역시 ‘정보’란 매우 중요한 것이었고, 언제나 대통령의 이동경로와 거처, 잠을 자는 곳 등은 탑시크릿이어야 했다.
그런데 자신의 거처를 그리고 지금 있는 곳을 천우진은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그가 미국의 CIA라도 등에 엎고 있다면 이해 못할 것도 아니지만, 천우진이 제 입으로도 말했듯 일개 기업인이 아니던가.
-마침 근처였네요 운이 좋게도.
다시 한 번 와락 인상을 찌푸리는 푸틴.
그는 아직 천우진이 러시아에 방문했다는 보고를 들은 적 없었다.
“근처라고?”
-방금 비행기가 모스크바 공항에 착륙했거든요.
“그렇군··· 기다리지.”
전화를 부술듯 끊어버린 푸틴이 보좌관에게 휙 하고 던졌다. 푸틴의 기분이 매우 언짢아 졌다는 것을 깨달은 보좌관이 침을 꿀꺽 삼켰다.
“바딘, 불러.”
“예, 각하.”
보좌관이 빠르게 자리를 빠져나가고 푸틴이 묘한 눈으로 빅토르를 바라보았다.
“네 놈 목숨이 무엇이기에, 어떤 이득이 있기에 천우진이 움직였을까?”
궁금하다는 듯 질문을 던지는 푸틴.
빅토르는 그도 알 길이 없는 질문에 고개를 푹 숙일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럼 다시 보자고.”
푸틴이 맞은편 의자에서 일어나 방을 빠져 나가자 빅토르는 저도 모르게 ‘휴우’하고 안도의 한숨을 뱉어냈다.
죽기를 각오하고 왔지만 막상 그 죽음이 눈 앞에 닥치니 손과 발이 벌벌 떨렸다. 천우진이 앞에 있을때도 마찬가지로 손과 발이 벌벌 떨렸었건만 이 느낌은 도무지 익숙해지질 않는다.
“그런데 어째서···”
빅토르 최는 의아했다.
어째서인지 푸틴이 앞에서 자신의 목숨줄을 좌지우지 하던 순간보다 천우진이 자신의 앞에서 목숨줄을 좌지우지하던 순간이 더 두려웠을까?
그 의문을 쉽게 지울 수 없기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
탁.
차량의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푸틴이 머무르고 있다는 사택의 정문에서 소총으로 무장한 경호원 둘이 바깥으로 나온다.
저벅저벅 시퍼런 총구를 자랑하며 나타난 경호원들이 어설픈 영어로 묻는다.
“SKY, 천우진?”
고개를 끄덕이니 옆으로 비켜서며 턱짓으로 출입구를 가리킨다. 제법 고압적인 태도에 어깨가 움츠러들만 하지만 나와 호석이 고작 이정도 위협에 어깨를 움츠러뜨릴만큼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었다.
집 앞 마당을 산책이라도 하듯, 산뜻한 걸음걸이로 커다란 정문을 통과해 내부로 들어갔다.
타닥타닥.
벽난로 안에서 타들어가는 장작불과 함께 그 앞에 ㄷ자 모양의 소파에서 불멍을 떼리고 있는 푸틴의 뒤통수가 보였다.
“왔나?”
자연스러운 하대가 푸틴의 입에서 튀어나온다.
이곳이 제 세상이라 생각하는 놈이니 그러려니 하고는 적당한 자리를 찾았다.
말했다 시피 ㄷ자 모양의 소파이기에, 그를 마주볼 수 있는 자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자리가 없으면 만들어야 하는 법.
나는 푸틴이 술잔을 놓는 테이블로 걸어가 술잔을 발로 대충 밀어 넣고는 테이블에 엉덩이를 붙였다.
“크크크큭.”
잠시 당황하던 푸틴이 미친듯이 웃는다.
“재밌군, 재미있어.”
“자리가 별로 마음에 안 들어서.”
“젊음 때문이오? 그 패기.”
“자신감이라고 해 두죠.”
“좋소, 그대의 뜻은 알았으니 예의를 갖추리다.”
먼저 한 발을 물러서니 나 역시 한 발을 양보해주는게 맞다. 나는 테이블에서 엉덩이를 떼고 적당한 소파 위에 엉덩이를 붙였다.
“둘이서만 오셨소?”
“못 올데를 온 것도 아니고, 비즈니스로 왔는데 곁가지가 많아서야 되겠습니까?”
푸틴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보좌관이 내어온 크리스탈 잔에 동그란 얼음을 넣고는 묻는다.
“보드카? 럼? 위스키?”
“온더락 말고, 샷잔에 보드카 좋겠네요.”
“오, 술을 아는 친구군.”
보좌관이 샷잔 가득 보드카를 한잔 따라준다.
잔을 들어올려 푸틴과 눈을 맞추고는 단숨에 들이켰다. 용암같은 것이 목구멍을 지나 식도를 가득 적시고 위장으로 사라지는게 느껴지는 느낌이다.
“독하네요.”
“제법 독한 놈이오.”
고개를 끄덕이고는 샷잔을 벽난로에 던져버렸다.
퍽, 쨍그랑.
“비즈니스 할 때 술은 안 하는 편이라.”
“크크큭, 좋아 좋아. 어디 봅시다. 거래 물품이 뭔지.”
곁에 서 있던 호석이 서류가방의 버클을 딱 소리나게 풀자 경호원들이 흠칫 놀라며 총구를 들어올리려 했다.
“그만, 무례를 삼가라.”
푸틴의 명령에 다시 부동자세를 취하는 그들.
긴장이 될 법도 하지만 나는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저들은 절대 총을 쏠 수 없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푸틴이 아무리 미친놈이어도 대놓고 이곳에서 내게 총질을 할 순 없을테니까.
그 순간 세계 3차 대전은 시작되는 것이나 다름이 없을테다. 나는 그만큼 이제 국제 정세에 아주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호석의 서류가방에서 나온 서류를 스륵, 테이블 위로 푸틴에게 밀었다.
“무엇이오?”
“읽어보면 알 겁니다.”
고개를 주억거린 푸틴이 서류뭉치를 들어 올려 천천히 살피기 시작했다.
“아아, 고비와 타클라마칸 사막에서의 태양광발전소에 대한 정보군.”
마치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는 푸틴.
딱히 위성상에서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기에 나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우리 러시아는 에너지가 부족한 국가가 아닌데 말이오.”
그럴 것이다.
산유국이기도 했고, 유럽에다 가스를 내다파는 국가니까 에너지가 부족하다고 볼 순 없었다.
나 역시 러시아에 태양광발전기술을 팔겠다고 온 게 아니었다.
“서류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우리 SKY 에너지와 SKY 화학은 비약적인 태양광발전시설의 연구성과를 거뒀습니다.”
“그래 보이는군, 기존 대비 2배 이상의 발전률 향상이라 쓰여져 있으니.”
“이제 태양광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전기를 얻어낼 수 있다는 것이죠.”
“생활 전기 수준이라면 충분해 보이긴 하는 군.”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태양광 발전시설로 생산하는 전기로 커다란 공장을 돌리거나 군사시설, 병원시설등의 전기를 감당하기에는 분명 무리가 있었다.
그런 대규모 전기 소비지역에 모든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커다란 규모의 발전시설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비효율 적’이라는 계산에 도달 할 수 있었다.
충분한 면적에서 충분한 양의 태양에너지를 흡수해야만 발전이 가능하다는 태양광 발전시설의 단점을 꼬집는 말이었다.
“앞으로 기술은 계속 발전 해 나갈테니, 언젠가는 그런날이 올 지도 모르죠.”
“그렇겠지, 당장 지금은 아니지만.”
난 순순히 푸틴의 말에 인정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생활 전기를 충당하는데는 무리가 없죠.”
“그래, 그래보이오.”
“내 거래 조건은 이렇습니다.”
“들어보지.”
“나는 향후 5년간 유럽의 그 어떤 국가에도 SKY의 태양광 발전 기술을 공개하지 않겠습니다.”
푸틴이 와락 인상을 구겼다.
그의 구겨진 인상을 보더라도 내 의중을 정확히 꿰뚫어 보았음을 알 수 있었다.
유럽은 서구 열강의 모임이라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그들에게 부족한게 있다면 역시 지하자원이었다.
한정된 대륙에서 많은 선진국들이 소비하는 지하자원은 어마어마 했기 때문이었다. 산업혁명 이후, 당연히 모든 서구 열강들은 제조업에 뛰어들 수 밖에 없었고, 그 제조업에는 많은 지하자원을 필요로 하는 기계들이 가득했다.
그것을 넘어 당장 생활에도, 발전시설들에도 지하자원 가스에너지 석유에너지등은 필수 불가결한 존재였다.
러시아는 옛 과거, 대단한 강대국은 아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넓은 면적에서 오는 막강한 지하자원들은 러시아를 강대국의 반열에 오르게 만들었으며 미국과 유럽을 넘보는 러시아의 광기는 지하자원을 바탕으로 어느새 G2라는 세계에서 가장 강한 국가의 반열에 오르도록 만들어 주었다.
항상 유럽을 쥐고 흔드는 러시아의 영향력 중, 언제나 천연가스가 첫번째 키 카드로 사용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5년이 지나면?”
푸틴의 말에 피식 웃었다.
“SKY도 먹고 살아야죠? 우리나라의 작은 땅덩이에서 태양광은 그렇게 실속있는 발전기가 아닙니다만.”
“크크큭, 재미있는 협박이군.”
“내 조건은 간단합니다.”
“아직 거래에 응할지 결정하지도 않았소만?”
나는 푸틴이 거래에 응할거라고 확신했다.
그에게는 동유럽 국가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길 중 하나인 ‘에너지’부분을 우리 SKY가 자극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러시아는 아주아주 척박한 환경의 땅이었다.
농사를 짓고 살기에 아주 엿같은 땅덩이라는 뜻이다. 언제나 식량문제가 거대한 땅을 가진 러시아의 발목을 붙잡아왔다.
그리고 그 식량문제를 해결 해 줄 가장 가까운 나라들 중에는 많은 동유럽의 나라들이 있었다.
넓게 펼쳐진 평야 지대에서 수확하는 농작물들은 러시아 전역의 식량을 책임진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러시아가 발칸반도 부근, 그리고 우크라이나에 집착하는 이유도 ‘식량’ 때문이라는 걸 모르는 국가는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푸틴의 말은 무시하고 내 할말을 이어나갔다.
“빅토르 최를 비롯한 고려인 특전단의 아이들 모두를 한국으로 데려가겠습니다.”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내 할말을 뱉어내니 푸틴이 잔뜩 언짢다는 표정을 짓는다.
“생각보다 거래 조건은 깔끔하군.”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그대는 지금 많은 이익을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인정했다.
푸틴의 눈에 나는 미친놈처럼 보일테니까.
“10년은 어떻소?”
푸틴의 역 제안.
향후 10년간 태양광 발전 기술을 유럽에 보급시키지 말라는 말이나 다름 없었다.
“손해가 큰데요?”
푸틴이 피식 웃으며 감수 할 수 있겠냐는 듯 날 바라본다.
딱.
중지와 엄지를 비벼 소리를 내니 호석이 가죽 케이스에 곱게 포장되어 있는 계약서를 꺼낸다.
“10년, 받아들이죠.”
되려 푸틴이 놀란 얼굴로 날 바라본다.
‘정말 이 조건을 받아들인다고? 그깟 고려인 몇명 때문에?’ 하는 표정이었다.
휘리릭.
나는 망설임 없이 계약서에 싸인을 하고는 스륵, 테이블 위로 계약서를 푸틴 앞에 내밀었다.
계약서를 살피는 푸틴, 틀림없이 우리의 대화 내용 그대로가 적혀 있는 계약서였다.
푸틴이 계약서 위에 놓인 만년핀을 집어들며 물었다.
“궁금한게 하나 있소.”
“뭡니까?”
“기업이 최우선으로 추구하는 것은 무엇이오?”
“당연히 사익이죠.”
“헌데 어째서 사익을 포기하는 것이지?”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SKY는 사익을 포기한 적 없습니다만.”
“고려인 아이들 몇을 살리고, 유럽에게 받을 전기세를 포기하는게 사익을 포기하는 게 아니다?”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어처구니가 없군.”
푸틴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사인을 끝내고는 탁! 소리가 나도록 계약서를 덮었다.
“도대체 그게 어떻게 사익을 포기하는 게 아닌 것이지?”
피식 웃은 나는 궁금증 가득한 푸틴에게 말했다.
“좋은 아버지가 되는 건 돈으로는 살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뭐?”
“SKY의 직원들도 좋아 할 겁니다. 아주 뿌듯할 걸요? 미래의 제 자식들에게 자신들이 이런 회사에 다니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 할 수 있을 만큼.”
“좋은 아버지?”
“좋은 부모가 되는 길이라고 해 두죠.”
< 제 356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