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철혈의 재벌-355화 (355/458)

< 제 355화. >

모스크바의 푸틴 관저.

“뭐?”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듯 다시 한 번 얘기해보라는 표정으로 보좌관을 바라보는 푸틴.

“고려인 특전단 빅토르 소령이 아이티 발, 모스크바 도착행 비행기에 탑승했습니다.”

“하, 죽을 자리를 알아서 찾아온다?”

푸틴의 혼잣말에 보좌관은 그저 고개를 약간 숙인 모습으로 그의 지시를 기다렸다.

“뭘까?”

“어떤것을 말씀하시는 지.”

“빅토르 최의 마음 말이야, 무엇일까?”

푸틴이 모르는 것을 그의 보좌관이라고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분명 놈은 러시아에 오면 죽는다. 그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야, 내가 SKY그룹의 천우진에게 ‘아니다’라고 대답하는 순간 그의 운명은 결정된 것이나 다름 없지.”

“그렇습니까?”

“그래, 놈이 다시 고려인 특전단의 소장을 맡는다면 내가 거짓말을 한 꼴이 되고, 놈을 살려둔다면 내가 거짓말을 한 게 발각될지도 모르니 난 불안에 떨어야겠지.”

“정보총국장 바딘을 불러올까요?”

고개를 젓는 푸틴.

“바딘에게 지시만 하면 그만인 일이야, 우리 땅에서 우리 전사 하나 죽이는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궁금해··· 그저 궁금하군, 도대체 어째서 사지로 기어오려는 것인지.”

“생포할까요?”

푸틴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생포라··· 그것마저 쉽군, 그저 공항에 경찰 몇을 보내면 될 일이니까.”

“최정예 훈련을 받은 빅토르 소령입니다. 경찰들을 피해 도망갈 수 있습니다.”

“그런 멍청한 짓거리를 할 리 없어, 놈이 무엇을 원하던 날 보고 싶어 할 테니까.”

“그럼, 경찰을 몇 보내 맞이 할 준비를 하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소피아 리를 데려 와.”

“예.”

보좌관이 바깥에 나갔다가 얼마 뒤, 한 명의 고려인 여인을 푸틴의 집무실로 데려왔다.

그녀는 몸에 딱 달라 붙는 제복을 입은 상태였다.

그녀의 잘 단련된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그런 제복이었다.

“소피아.”

“네, 각하.”

푸틴의 손짓에 기계처럼 움직인 여인.

어느새 푸틴의 옆자리에 앉은 여인의 허리를 뱀처럼 휘감는 푸틴.

“빅토르 최를 알고 있지?”

“예, 각하. 훈련소장이십니다.”

“그래, 너희들의 아버지이기도 하고?”

그녀가 떨리는 동공을 애써 감추며 작게 ‘예’ 하고 대답한다.

“그가 받은 임무는 너 역시 잘 알고 있겠지?”

“네.”

“그가 임무에 실패했다.”

“흡.”

소피아는 숨을 집어 삼키다 멈추고는 떨리는 동공을 감추지 못했다. 고려인 특전단의 임무 특성상, 임무 실패는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나 진배 없기 때문.

“명예로운 임무 실패로 보기도 힘들군, 적들에게 사로잡혀 자신의 신분을 그대로 실토했으니까··· 게다가 내 지시가 있었다는 헛소리까지 늘어 놓더군.”

푸틴의 손길이 노골적으로 허리를 지나 그녀의 둔부로 향했다. 아랫입술을 질끈 깨무는 소피아.

“그런 빅토르가 지금 모스크바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는 군.”

“아아.”

남자의 손길을 받아들인 교성이 아니라 절망의 절규가 소피아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감정이란 걸 배제한 듯 보이던 여인의 입에서 노골적인 감정이 튀어나오니 그것이 재미있는지 푸틴은 히죽 입꼬리를 들어 올린다.

“굳이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오는 이유가 뭘까?”

“아버지···”

“뭐?”

“그는 우리들의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푸틴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소피아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운 모양.

눈치를 살피던 보좌관.

소피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푸틴의 앞에 선다. 그러고는 양 손을 뻗어 푸틴의 양 손을 잡더니 자신의 허리에서 엉덩이로 떨어지는 골반 어림에 푸틴의 손을 올린다.

“절 완벽하게 지배하고 싶다고 하셨나요? 각하.”

푸틴이 히죽 입꼬리를 들어올리다 보좌관을 바라본다. 보좌관은 눈치껏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빠르게 집무실을 나섰다.

“조건은 역시.”

“제가 마음에 드셨다면, 부디 저를 생각해서라도 아버지를 살려주시어요.”

“글쎄, 네가 하는 것을 봐야 할 것 같구나.”

위 아래 한벌로 된 딱 달라 붙는 제복.

그것의 가운데 달린 지퍼를 스르륵 내리는 소피아 리.

“아버지는··· 특전단의 남은 아이들을 위해 오시는 겁니다 각하. 우리 연방의 전사들의 목숨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러 오는 것입니다 각하. 그의 충심을 헤아려주세요.”

배꼽 어림에 고정되어 있는 지퍼에 푸틴이 손을 가져가며 말했다.

“글쎄, 일단 너의 충심부터 한 번 볼까?”

소피아는 부르르 떨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

지이이익.

공무를 수행해야 할 집무실에서 들리기에는 어색한. 지퍼를 내리는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

공항에서 내리는 그 순간부터.

게이트 앞에 서 있던 연방경찰을 바라본 빅토르는 이미 자신이 러시아로 귀국한다는 사실을 푸틴이 알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들을 무시하고 지나쳐도 괜찮겠지만 빅토르는 굳이 그러지 않고, 그들 앞으로 다가갔다.

“내가 빅토르 최 소령이오.”

경찰들이 마치 ‘이 새끼 또라인가?’하는 얼굴로 그를 양쪽에서 연행하듯 팔짱을 끼우며 끌고갔다.

빅토르는 힘 없이 그들의 손에 이끌려 어딘가로 향했다.

고작 연방경찰이었다.

제압하고자 한다면 얼마든 제압 할 수 있는 힘이 빅토르에겐 있었다. 그들이 허리춤에 잘 차고 있는 권총 따위 순식간에 빼앗아서 이 출구 게이트에 가득찬 사람들의 머리통에 구멍을 내주는 일 따위는 식은 죽 먹기보다 쉬웠다.

그래도 그는 모든것을 포기 한 사람처럼 담담히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닥쳐!”

경찰 하나가 거칠게 대답했다.

마치 범죄자를 대하는 태도.

“난 자랑스러운 우리 연방의 전사요, 예의를 갖췄으면 좋겠는데.”

“뭐라는거야 앞은 보고 있는 건가?”

인종차별적 발언에 빅토르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애초에 자신을 발 아래 두고 있는 고압적인 태도가 경찰들에게서 느껴졌다.

차량의 뒷자리에 앉아서 차량 지붕을 올려다보던 빅토르가 무엇인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전사에 대한 예우가 부족한 친구들이군.”

“닥치라고.”

퍽, 퍽.

수갑을 착용했으나 양쪽에 앉은 경찰 둘을 제압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양쪽에 앉은 경찰들의 콧대를 뭉개버린 빅토르가 발로 앞 좌석을 찼다.

“이봐, 어디로 가는거지?”

콧대가 무너지며 피를 죽죽 흘리던 경찰 하나가 품에서 권총을 뽑으려 손을 가져가는 순간.

조수석에 앉아 있던 사내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멍청한 새끼들, 각하께서 조용히 모셔오라 했다. 전사의 예우를 갖추도록. 그가 입고 있는 군복이 보이지 않는가?”

코피를 죽죽 흘리면서 잔뜩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는 백인 두놈.

빅토르는 놈들에게 관심이 없는 듯 앞 자리의 사내에게 물었다.

“각하께서 어디로 날 데려오라 하셨나?”

“사택으로 모실겁니다. 얌전히 계시겠습니까? 상부에서는 크게 반항한다면 사살해도 좋다 하였습니다. 그 전까지는 예를 다 하라 했고요.”

픽 웃은 빅토르.

그런 명령이 있었으면서 앞쪽에 안자 뒷자리의 인종차별적 발언들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는 뜻이었다. 결국 앞 자리에 앉은 놈 역시 전형적인 고압적인 태도의 러시아 놈이라는 뜻.

이것이 현 러시아의 고려인의 단편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방증이리라.

빅토르는 씁쓸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옆에서 씩씩 거리는 백인 놈들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방인이었구나.’

그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고려인이라는 인종을 달리 부르는 단어부터가 존재하는 순간, 그는 언제나 러시아에서 이방인에 불과했다는 것을.

“그러니 더욱 가야지.”

“예?”

“아니야.”

품어줄 어른이 없다면 아이들은 이 차가운 인종차별적 시선에서 커 나갈 수 없을터였다.

어떻게 보면 감옥같은 고려인 특전단의 훈련시설이지만, 그들에게는 그곳이 유일한 보금자리일테다.

***

모스크바의 궁전 못지 않은 고급스러운 사택. 그곳의 한 방에 빅토르는 얌전히 의자에 앉아서 푸틴을 기다렸다.

얼마 기다리지 않아 문이 열리며 들어온 푸틴.

“오랜만이군 소장.”

“오셨습니까.”

“예의를 차리지 않는 군.”

“버림받은 전사에게 조국이 있습니까.”

“흥.”

“애초에 버림받기 전에도 과연 연방이 내게 조국이었는지는 의문이 듭니다.”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푸틴.

이미 빅토르가 모든걸 포기한 상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때 보았던 그 전사의 눈이 아니군.”

“이 땅에 희망이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 너희에게만 해당되는 말인가?”

고개를 젓는 빅토르.

“아니요, 러시아라는 전체에 희망이 없단 소립니다.”

“감히, 내 앞에서 잘도 지껄이는 군.”

“그런 고압적이고 구시대적인 사고방식은 연방을 좀 먹게 만들 겁니다.”

“닥쳐라, 네 놈에게 배워야 할 만큼 교양이 떨어지지 않으니.”

푸틴이 시가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궁금한게 있다.”

“말씀하십시오.”

“왜 돌아 왔지?”

“특전단을 살리고 싶어서입니다.”

“임무에 실패한 고려인 특전단이 살 수 있을것이라 보았나?”

“전사로서 명예롭게 죽고 싶습니다. 다만, 그 명예를 우리 특전단 아이들을 살리는데 쓸 수 있게 부디, 허락해주십시오.”

“그런 놈이 오자마자 내 속을 잘도 긁는 군.”

“충심으로 말씀 드린 겁니다.”

“쯧쯧, 협상의 기본도 모르는 멍청한 놈. 동양인의 피는 숨길 수 없는 모양이야.”

대놓고 무시하는 태도가 느껴진 빅토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위에서부터 이렇게 고려인을 무시하고 사람취급을 하지 않으니, 아랫사람들이 무엇을 배우겠는가.

“소피아 리가 그러더군.”

푸틴의 말에 빅토르가 눈썹을 꿈틀 거렸다.

“네 놈이 아버지이기 때문에 돌아오는 것이라고, 제 년의 모든것을 지배하고, 부디 아비의 뜻을 헤아려 달라고.”

보지 않았으나 소피아가 겪었을 그 참담함을 느낀 빅토르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막 미모가 꽃필 나이의 소피아.

그녀의 순결이 앞에 있는 괴물에게 닿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헌데 어쩌지, 나는 고작 소수민족인 고려인들의 의중을 헤아려 줄 생각이 없는데? 대세에는 변함이 없으니까.”

너무나도 잔인하고 잔혹한 얘기였다.

놈에게 고려인 특전단은 그저 또 하나의 살인무기 그 이상, 이하도 아닌 것이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그저 수단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은 빅토르. 애초부터 그가 했던 약속이 지켜졌을지도 의문이었다.

고작 그런것에 죽어라 온 힘을 쏟아부었던 자신의 과거가 철저하게 배신당하는 기분이었다.

“네 놈의 운명은 이해했나?”

빅토르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아이들입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시길.”

“글쎄, 복수의 씨앗을 심어두는 것은 불편한 일이지.”

“부탁합니다.”

빅토르가 의자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었다.

콧방귀를 뀌던 푸틴이 시가를 입에 문채 거만한 자세로 박수를 치자 문이 열리며 몇 명의 사내가 들어왔다.

그들의 손에 들린 권총이 빅토르의 최후를 말하는 것만 같았다.

끝까지 제 손은 더럽히지 않으려는 푸틴의 이기심이 보이는 행동이었다.

한 사내의 손이 권총의 방아쇠에 다다랐을 때.

“각하, 전화가 왔습니다.”

보좌관의 목소리에 푸틴이 손을 들어올려 발포를 중지 시켰다.

“누구야?”

“SKY그룹의 천우진 회장입니다.”

푸틴이 눈썹을 꿈틀 거렸다.

빅토르 최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째서인지 마지막에 자신을 바라보던 천우진의 눈빛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 제 355화.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