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54화. >
내기를 하자는 말에 알렉세이는 고민도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미 러시아에게서 버려진 상황이란 걸 잘 아는 그.
내기라는 적절한 핑계를 줌으로써 그는 당분간이지만 SKY에 충성을 하게 될 것이다. 글로벌 시대에 맞춰 PMC역시 글로벌하게 변할 필요가 있었다. 다인종의 직원과 대원들을 모집하는 것 역시 중요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자 그럼, 당신은 대충 해결된 것 같고.”
고개를 돌려 연병장 중앙에 망연자실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빅토르를 바라보았다.
“이봐.”
스륵.
고개를 들어올려 날 바라보는 빅토르.
“고려인 특전단의 소장이라지?”
“정확히는 훈련소장입니다.”
“그래, 푸틴에게 버림을 받았으니 이제 어디 갈 때도 없을 것 같은데 맞나?”
안타깝다는 듯 입술을 씹는 빅토르.
“저런 아이들에게 살인 기계의 삶이라니 너무 슬프지 않나?”
“··· 러시아에서 고려인의 삶이 어떤지 아십니까?”
어깨를 으쓱였다.
“백인우월주의가 팽배한 러시아에서 동양인의 대우가 좋을리가 있을까? 과거 유명했던 락커 조차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천대를 받았다지?”
“겨우 천대라는 단어로 우리의 삶을 이해하는 듯 말하지 마십시오.”
“잘 됐네.”
“뭐요?”
빅토르의 두 눈에서 불이 일렁인다.
너무 쉽게 얘기한다 생각했을까?
“러시아가 아니라, 대한민국에서 다시 시작해보는 것은 어때? 정확히는 SKY의 품에서.”
두 눈을 부릅 뜨는 빅토르.
“네가 잘했으니, 나는 너희들을 살려줄 생각이야. 애초부터 저 어린아이들을 죽이고 싶지도 않았고, 나는 미친 살인마가 아니니까.”
“그게 정말입니까?”
“러시아에서 너희 고려인들이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는지 좋은 대우를 받으며 살았는지 그딴 과거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크윽.”
“사람처럼 살게 해주지.”
빅토르의 두 눈에 희망이 떠 올랐다가 이내 굳은 결심이 느껴지는 얼굴이 되어서는 말했다.
“고맙습니다··· 우리 아이들을 잘 부탁드립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네 놈은? 나는 네 놈 역시 SKY의 품으로 받아 줄 의향이 있다.”
고개를 젓는 그.
“아직 훈련소에는 많은 고려인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 아이들을 위해 본국으로 가겠다?”
“예.”
“그곳이 네가 죽을 자리라는 것을 알고 있나?”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제가 가야 합니다. 내 목숨 하나로 그 아이들의 미래가 보장된다면, 걸어볼 가치가 충분하잖습니까?”
“그렇군.”
멋있는 말이었다.
하나의 목숨을 아주 귀중하게 사용하는 것이기도 했다.
“제법 마음에 드는 말이야, 저 아이들에게는 네놈이 잘 얘기 하도록.”
“예.”
“훈련소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면 돼, 당분간 머물기에는 충분할테니까.”
“감사합니다.”
***
짹, 짹.
절망스러웠던 밤이 지나고 언제나 그렇듯 아침 해가 밝았다.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던 빅토르가 부스스한 모습으로 일어나는 부관을 바라보며 말했다.
“부관.”
“예, 소령님.”
“단원들을 모여주게.”
“부상자가 있어 어려울 수 있습니다··· PMC측에서 허가해주지 않을 수 있고요.”
“허가 해 줄 거야.”
“그렇습니까?”
“그래.”
부관은 잠시 안타까운 눈으로 빅토르를 바라보았다.
“소령님, 아이들에게 아직 아버지는 필요합니다.”
쓰게 웃은 빅토르가 말했다.
“아버지이기에 해야 할 일이지.”
“그렇습니까.”
“그래, 훈련소에 남아 있는 아이들이 더 아버지가 필요할 나이가 아니던가.”
“후우··· 저 역시 소령님을 따라서 본국으로······”
“닥쳐.”
“소령님.”
“자네는 남아, 남아서 PMC가 우리 아이들을 사람대접 하지 않는다면, 함께 이기고 버텨낼 구심점 역할을 해 주게.”
“그럴 깜냥이 아닙니다.”
“아이들에게 삼촌도 필요하지 않겠나?”
빅토르와 똑바로 눈을 마주친 부관은 결국 고개를 푹 숙이고는 예를 표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빅토르의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움직였다.
태어나 단 한번도 보지 못한 카리브해의 아름다운 풍경을 두 눈에 담던 빅토르가 활짝 웃었다.
“참 아름다운 곳이야.”
빅토르의 말처럼, SKY PMC는 고려인 특전단의 아이들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었다. 부상자 역시 종아리나 허벅지의 총상이 전부였기에 휠체어를 이용해 이동하니 그들이 식당에 모이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휠체어를 끌고 나타난 PMC소속의 의료진들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며 한국식 예의를 표하는 빅토르.
“아이들과 긴히 할 말이 있으니, 자리를 비워주시겠습니까?”
유창한 그의 한국어에 의료진은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식당 바깥으로 나갔다.
원래라면 식사를 해야 할 식당의 테이블 위에 똘망똘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들을 휙 둘러보는 빅토르.
“너희들은 앞으로 러시아 사람이 아니다.”
두 눈을 크게 뜬 아이들.
어린 아이들일수록 놀람 정도가 심했지만, 이미 성인식을 치루고, 그러고도 나이를 한 두살 더 먹은 아이들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러시아에서도 러시아인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한국에서도, 그리고 러시아에서도 이방인이겠죠.”
차갑고 쓸쓸한 말에 빅토르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너희들은 어느 집단에서도 이방인 취급을 받을 것이다.”
싸늘한 현실에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몇 아이들의 눈가에 습기가 맺힌다.
“그러나, 최소한 러시아보다 이곳 SKY PMC에서는 너희들을 귀하게 여길 것이다. 훌륭한 전투자원이고 앞으로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어린 나이이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우리는 SKY PMC의 대원이 되는 것입니까?”
“그래, 여기 부관 안토니오를 따라 앞으로는 SKY의 사람으로,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살게 될 것이다.”
큰 눈이 유난히 반짝이는 소녀가 물었다.
“아빠가 아닌 삼촌을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문 빅토르가 말했다.
“나는 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성인식을 치룬 아이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를 만류했다.
“안됩니다 아버지! 푸틴과 바딘은 가만히 있지 않을거에요! 우리의 임무 실패에 대한 책임을 반드시 묻게 될 겁니다!”
“맞아요, 거기에 간다면 죽음 뿐이에요!”
“그냥 우리와 이곳에서 지내요, 훈련소에서 그랬던 것 처럼 우리를 가르쳐 주세요!”
고개를 젓는 빅토르.
“안돼, 소피, 세르게이. 아직 우리 특전단의 훈련소에는 아이들이 많이 남아있잖니.”
“아아.”
“책임 질 사람이 없다면··· 아이들이 위험해.”
“어째서, 어째서!”
가슴 가득 억울함의 응어리가 느껴지는 아이의 말에 빅토르는 가까스로 눈물을 삼켰다.
“부탁한다. 이곳에 너희 선배들까지 불러올 생각이란다. 그러니, 그들과 여기 부관 안토니오 삼촌을 따라 완벽하게 SKY의 사람이 되거라, 이게 이 아버지의 마지막 부탁이야.”
“그냥··· 그냥, 평소처럼 명령을 하세요!”
고개를 젓는 빅토르.
“아니, 부탁이란다. 아버지로서 나의 자식들에게.”
“크흑.”
“흐윽.”
성인식을 치룬 아이들은 제법 버틴다 싶었지만, 끝내 그들 역시 눈물을 떨구며 몸을 잘게 떨었다.
한 순간에 눈물바다가 된 식당 안.
“이 놈들이! 아빠 가는길에 우는 모습만 보일거야?”
아이들이 순식간에 자리를 박차고 빅토르에게 안겨 들었다. 정신적으로는 성숙하지 못할지 모르나, 육체적으로는 성숙해진 아이들의 무게에 짓눌려 행복한 표정으로 아이들을 마구 끌어안은 빅토르.
“아버지, 부디 무사하세요.”
“동생들을 부탁해요 아버지.”
“행복할게요, 사람처럼 살게요.”
“항상 인정 받을 거에요, 대단한 사람이 될거에요.”
무슨 말이든 어떤 말이든.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예뻐만 보이는 아이들의 말에 빅토르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표정으로 아이들 한명 한명과 진한 포옹을 나누고는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
PMC 훈련소의 식당 건물.
그 문 앞에 서서는 따가운 햇빛을 등으로 받아내며 시가를 입에 물었다.
-아버지, 부디 무사하세요.
-동생들을 부탁해요 아버지.
-행복할게요, 사람처럼 살게요.
-항상 인정 받을 거에요, 대단한 사람이 될거에요.
아이들이 또박또박 한글자씩 뱉어내는 한국어가 똑똑히 들려왔다.
호석은 어느새 출입구에서 등을 돌려 아무것도 없는 청명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누구 자식들인지 잘 컸네요.”
호석의 말에 씁쓸하게 웃으며 나역시 식당의 출임문을 등진 채 서서는 시가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이거 참, 안에 들어가서 비행기 준비됐다고 얘기하기가 민망하네요.”
“하하, 그러게나 말입니다. 항상 악역은 우리의 것이네요.”
“어쩌다 보니 말이죠.”
“제가 직접 전달할까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PMC의 대표가 악역이 되는 것 보다. SKY의 머리인 내가 악역을 하는 게 맞으니까.
“됐습니다. 양부까지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좋은 대표 정도는 돼 주십쇼.”
“후우, 장담은 못 하겠습니다.”
픽 웃으며 호석의 어깨를 두들기고는 시가를 입에 문 채, 벌컥 문을 열었다.
아이들의 충혈된 눈과 빅토르의 충혈된 눈이 날 향한다. 분명 슬픔으로 충혈된 눈이었지만, 어째서인지 저런 눈을 가진 사람들이 덤벼들면 꼼짝없이 죽겠구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잘 떨어지지 않으려는 입을 시가 연기로 감춰보고는 말했다.
“빅토르, 비행기가 준비되었다.”
“그렇군요.”
으아앙.
말도 필요 없이, 통곡을 이어 나가는 아이들이 곳곳에서 등장했다.
“동작그만.”
빅토르의 입에서 무거운 외침이 터져 나오자 아이들은 언제 울었냐는 듯, 울음을 그치고는 전방 15도 각도로 턱을 치켜 들고는 마치 잘 훈련된 군인 처럼 차렷자세를 유지한다.
“제군들의 안녕을 빈다.”
빅토르의 외침에 그의 부관이 아랫배부터 터져나오는 묵직한 목소리로 말한다.
“일동 차렷.”
촤라락.
멋들어진 차렷소리.
땅을 딛기도 힘들 부상을 입은 아이들조차 휠체어에서 엉거주춤 일어나 차렷자세를 취했다.
“빅토르 최 소령님께 경례!”
촥.
사람의 팔이 움직이는 소리가 이토록 멋있을 수도 있구나 싶었다.
“가능한 늦게 보고 싶구나, 천수를 누리도록. 안토니오.”
“예! 소령님!”
“지금부터 30분간, 경례자세를 풀지 말도록.”
“예···”
휙하니 고개를 돌린 빅토르는 터질듯한 붉은 눈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그가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눈치껏 뒤 돌아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탁, 탁.
나를 따라오는 빅토르의 발걸음 외에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작은 빗방울이 모래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와 비슷한 그런.
공항으로 향할 차량 앞에 멈춰선 나는 친절하게 문을 열어 주고는 내게 살짝 고개를 숙여보이고 차량에 오르는 빅토르에게 말했다.
“훌륭한 아버지였다.”
빅토르가 대답 없이 부르르 떨리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탁.
문을 닫아주고, 빅토르가 탑승한 차량은 그렇게 공항으로 떠나갔다.
“훌륭한 아버지. 멋진 말입니다.”
호석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나도 될 수 있을까요? 훌륭한 아버지가 말입니다.”
호석 역시 쓰게 웃으며 말했다.
“저 역시 훌륭한 아버지는 아닌 것 같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렇군요. 많이 어렵겠죠? 훌륭한 아버지가 되는 것은.”
“기준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다르지 않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든 어떤 목표, 어떤 기준을 세우느냐에 차이가 크니까.
내 목표, 내 기준은 저 먼 어드메에 있으니, 아직은 멀었나 보다.
“훌륭한 아버지라.”
호석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김장원 사장, 연결할까요?”
픽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렇게 내 마음을 잘 헤아리니 정말 핏줄이 섞인 것은 아닐까 가끔은 의심이 된다.
“뭐하세요? 전화기 안 꺼내시고?”
“하하, 알겠습니다.”
< 제 354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