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53화. >
만족스러운 얼굴로 호석에세 손을 내밀었다. 내 손위에 전화기를 올려주는 호석.
“연결 됐나요?”
“곧, 연결 될 것입니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전화기를 귓가에 가져갔다.
-전화 받았습니다.
강한 악센트의 러시아어가 귓가를 어지럽힌다.
히죽 올라간 입꼬리로 말했다. 물론 러시아어가 아닌 영어였다. 나는 러시아어를 할 줄 모르니까.
“천우진이다.”
-뭐라고?
“러시아어를 못하니 영어로 부탁하지.”
-당신이 SKY그룹의 천우진 회장이라고?
“그래. 푸틴과 대화를 나누고 싶군.”
수화기 너머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린다.
아마 전화를 받았던 보좌관이 다급하게 푸틴을 찾는 것이리라.
빅토르가 침을 꼴깍 삼키며 날 바라보고 있다.
주변에 있던 각국의 주요 인사들, 선관위의 목적으로 이곳에 왔으나 푸틴과 직접 통화를 연결하는 내 모습에 무척 놀란 모양이다.
특히나 미 상원의원의 얼굴은 흑인이 맞나 싶을 정도로 벌겋게 익어가고 있었다. 매우 흥분한 모습.
“그 놈들은 대화가 통할 놈들이 아닙니다. 미스터 천!”
열변을 토해내지만 그의 말은 깡그리 무시했다.
푸틴의 보좌관이 수화기 너머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사이, 호석과 SKY PMC의 대원들 역시 바쁘게 움직여서 장비들을 준비한다. 언론인들도 침을 꼴깍 꼴깍 삼키며 호시탐탐 취재를 하고자 나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커다란 스피커와 기계장치들이 요란하게 연결되고 전화기를 호석이 준비해 온 테이블에 내려 놓았다.
-나를 찾았다고?
거친 발음의 영어가 스피커를 통해 세어나온다. 자리에 있던 모드가 들을 수 있는 크기의 소리였다.
“그래, 보내준 선물을 잘 받았다고 얘기해주고 싶군.”
-보내준 선물? 글쎄? 난 그런 기억이 없는데?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빅토르라는 인물을 모른다?”
-글쎄, 어떤 빅토르를 얘기하는지 모르겠군.
별것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는 푸틴.
“재미있군, 오리발이라.”
-한 국가의 정상에게 매우 무례하군 미스터 천, 그대는 가끔 보면 제 스스로를 너무 과신하는 것 같은데?
“과신하는 게 누구일까? 내가 확실할까?”
-자신감 넘치는 군, 이것은 나와 우리 러시아를 향한 모욕이라고 받아들여도 좋은가?
“지금 이 자리에는 미국의 상원의원, 프랑스 국무부의 차관급 인사 등,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있지.”
-······
“또 세계 유수의 언론인들 역시 함께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
-매우 큰 결례를 범하고 있군, 미스터 천.
“우리는 너희 러시아가 보낸 특수부대의 총성에 이자리에 모였다.”
-글쎄, 난 그런 적이 없는데?
피식 웃으며 호석에게 턱짓 하자 호석이 빅토르를 일으켜 세우더니 마이크가 있는 곳으로 가까이 데려온다.
빅토르가 눈을 질끈 감는다.
내가 원하는 바를 이제 완벽하게 깨달은 것.
“살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대답없는 빅토르가 뚫어지게 마이크를 쳐다보았다.
“아, 말을 정정하도록 하지. 살고 싶은게 아니라, 살리고 싶겠지?”
휙 고개를 들어 날 바라보는 빅토르.
그의 떨리는 동공에는 분명, 살인기계로 훈련을 받은 고려인 아이들을 살리고 싶은 욕망이 가득해 보였다.
“나는 그저 너에게 길을 알려주는 것 뿐이다. 아마 내가 아니더라도 러시아 쪽에서 저 아이들을 먼저 죽이려고 달려들테니까.”
“약속 할 수 있습니까?”
“SKY는 기업이지, 기업은 신용을 잃어서는 안 되고, 그 신용은 약속에서 나오지.”
어떤 굳은 결심이 보이는 빅토르.
그의 입에서 러시아어가 흘러나온다.
“각하, 빅토르 최 소령입니다.”
-글쎄, 그게 누구인지 난 모르겠군. 우리 군의 소령계급중에 빅토르 최라는 사람이 있던가?
딱.
엄지와 검지를 부딪히고는 빅토르에게 말했다.
“모두가 알아 들을 수 있게 영어로 부탁하지.”
고개를 주억거린 빅토르가 다시 영어로 입을 열었다.
“각하, 빅토르 최 소령입니다.”
-글쎄, 난 그게 누군지 모른데도?
“당신의 명령에 따라 이곳 아이티의 SKY PMC훈련소를 급습했으나, 이들의 전투력이 정보총국장 바딘의 예상을 상회하고 있었습니다. 3개 분대의 전투력으로 그들의 1개 분대조차 상대할 수 없었습니다.”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고 있군, 미스터 천, 이건 나에 대한 도발로 보이는데 맞나? 선전포고라도 하는 것인가?
난 UN과 미국이 보내준 공정선거관리위원회의 인사들이 보란듯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했다.
“글쎄, 판단은 여기 있는 UN의 선관위가 해주겠지.”
-흥, 다시 한 번 얘기하지만 러시아는 이 일과 전혀 무관하다.
“그럼 감히 우리 PMC를 공격한 이 테러리스트들을 내 뜻대로 처리해도 되겠군?”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는게 당연한 것 아닌가?
“그렇군.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지.”
-뭐지?
“언론에 공개해도 되겠는가?”
-글쎄, 우리 러시아는 반박 성명을 내고 SKY를 비난하겠지, 불명예를 얻은 우리 러시아 군의 장병들이 가만히 있을지는 두고 볼 문제지.
이런 상황에서도 보란듯이 협박을 입에 담는 푸틴.
과연 러시아 놈 아니랄까봐 대단한 공격성을 드러낸다.
“글쎄, 러시아가 자랑한다는 특수부대를 상대해 보니, 너희 병사들이 별로 무섭지가 않은데?”
-감히.
휙 고개를 돌려 주변에 있는 언론인들을 바라보았다. 내 눈빛에 그들은 눈치껏 근처로 다가와 자신의 소개를 한다.
“CNN의 찰스 애덤입니다.”
“BBC의 윌리엄 체드요.”
“월스트리트 저널의 에릭 슈밋입니다.”
“······”
“······”
약 10군데의 공신력있는 언론인들의 자기소개.
수화기 너머 푸틴은 한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너무 지루해서 혹시 잠이라도 들었나?”
-그대는 그 입을 조심할 필요가 있군.
“오, 다행이 잠에 들진 않은 모양이야, 당신의 노환이 걱정되었을 뿐이니 너무 노하지 말라고 친구.”
-쯧쯧··· 그래, 그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지?
푸틴이 결국 꼬리를 내렸다.
러시아는 아니라고 딱 잡아 떼겠지만, 전 세계 언론들과 여론, 그리고 세계 각국이 ‘그렇구나’하고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푸틴이었다.
물론 푸틴은 세계 정세 따위는 신경쓰지 않고 막무가내로 일을 벌리기도 하는 사람이었다. 제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무리한 군사작전과 전 세계적인 비난에도 흔들리지 않을 뚝심을 가진 그런 미친놈이었다.
“별 거 없어, 러시아에 바라는 것은.”
-말해 보지, 내가 하지 않은 일이라 억울하지만 그래도 국가적인 명예와 강대국의 아량으로 그대의 조건을 받아들일테니.
잘도 포장을 하고 있었다.
끝까지 빅토르와 고려인 특전단, 그리고 알렉세이에 대하여 인정하지 않는 자세였다. 어떻게 해서든 명분을 주지 않으려는 같잖은 술수였다.
그러나.
나 역시 푸틴에게 그런 얕은 명분으로 압박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얻을 수 있는 것만 얻어내면 그 뿐이었다.
“상임이사국에 대한 안건이 시끄럽다지.”
-그렇군, 상임이사국을 늘리자는 그 안건, 분명 나도 들은 바 있지.
“정기 안보리가 얼마 남지 않았지?”
-그래.
“그때 전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현 상임이사국 5개 국가보다 더 많은 상임이사국이 생겼으면 좋겠군.”
-요구조건은 그것이 전부인가?
“물론이지, 여기 이들은 당신이 보낸 사람들이 아니지 않은가?”
-크큭. 간단하군.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푸틴의 비웃음 같은 웃음속에 시퍼렇게 날이 선 비수가 숨겨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전혀 두렵지 않기에 어깨를 으쓱인 것 뿐이었다.
“하나 궁금한게 있는데.”
-뭐지?
“이들을 살려보내줘야 하는게 맞을까? 아니면 죽여야 할까?”
-글쎄,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과연, 살 수 있을까? 그들의 주인은 큰 상처를 입었을 것 같군, 마음에 말이야.
내가 죽이지 않아도, 그들은 어짜피 죽을 것이라는 말을 잘도 예쁘게 하고 있는 푸틴이었다.
빅토르와 알렉세이의 표정이 창백하게 상기 되었다.
-우리 러시아의 전사들이었다면, 진즉에 명예로운 죽음을 택했을테다. 놈들이 살아있는 것 만으로도 우리 러사이의 전사들이 아니라는 게 증명 된 것이나 다름없지.
“그렇군, 이해했어.”
-어쨌든 나는 우리 대 러시아연방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그대의 요구조건은 새겨 들었다고 말하고 싶군, 이만 끊지. 한가롭게 장사치와 통화를 나눌 정도로 한가한 공무가 아니니.
“편할 대로.”
뚝.
전화가 끊겼음을 깨달은 난 우선 공정선거관리위원회라는 명목으로 이곳에 온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모두 날 주목하고 있었다.
천천히 왼손을 들어올려 엄지와 검지를 맞닿게 하고는 오른쪽 입꼬리에서 왼쪽 입꼬리까지 일자로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해줬다.
그들은 잠시 눈을 크게 뜨다가 이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미 상원의원을 빼고는 나머지 국가에서도 정보요원을 아이티에 보냈다는 명분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었다.
그들은 러시아에게 똥물을 끼얹는 것 보다. 제 놈들의 국가에 구정물이 튀는 것을 경계하는 모습이었다.
불만이 많아 보이는 미 상원의원.
“이건 전 세계적인 독재나 다름이 없는 행태입니다! 세계평화에 대한 위협이라고요!”
나는 웃으며 미 상원의원에게 어깨동무를 하였다.
그러고는 천천히 그를 데리고 훈련소 연병장을 지나 해변가로 이어지는 산책로에 도착했다.
탁탁.
벤치 하나에 털썩 앉아 옆자리를 두들기고는 호석이 내미는 시가를 그에게 권했다.
“커험.”
시가를 입에 문 그에게 불을 붙여주며 말했다.
“현재 미국은 이라크 때문에 바쁩니다. 의원님.”
“그렇다고 해서 러시아의 저 안하무인 태도를 그냥 넘길수는 없습니다! 시작은 이곳 아이티였지만, 다음은 어디일지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러시아의 푸틴이 대가리에 총을 맞지 않는 이상 미국에게 수작질을 걸진 않을 것이었다. 미 상원의원은 그것을 알지만 자신을 영웅처럼 포장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내년에 선거가 있으시다죠?”
“커험.”
그는 임기가 거의 끝나가는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외부 활동도 많이하고, 어떻게든 다시 표심을 얻고 싶은 것이었다.
“우리는 제법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의 장인어른께서도 민주당 소속이 아닙니까?”
“커험, 그렇습니까?”
“경쟁지역도 다른데 서로 얼굴 붉힐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렇군요, 이거 참, 시가향이 좋습니다.”
“이번 아이티의 자치령 선거때도 잘 부탁드립니다.”
“세상 그 어떤 선거보다 공정하게 진행 될 것입니다.”
“그것 참 다행이군요.”
세상 그 어떤 권력싸움도.
혀와 돈이 전부인 법이었다.
내겐 혀를 살 수 있는 돈도 충분했고 말이다.
“마저 즐기다 오십시오 이곳에서 별을 보며 태우는 시가는 아름다우니까.”
“과연, 그런 것 같습니다.”
“나는 잠시 저곳 연병장을 좀 정리해야겠습니다.”
“그러시지요, 너무 늦지 않게 오십시오. 샴페인이 다 사라질지도 모르니.”
“하하, 알겠습니다.”
다시 연병장으로 돌아오니, 어느새 장내는 정리되어 관계가 없는 사람들은 모두 만찬장으로 돌아간 상태, 이곳에는 우리 PMC대원들과 고려인 특전단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망연자실하게 모든것을 잃은 듯 보이는 알렉세이에게 다가갔다.
“내기는 내가 이긴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지?”
힘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그.
“국가가 먼저 너를 배신 한 것 같은데, 아직도 충성심은 그대로인가?”
“푸틴이 날 버렸지, 조국이 날 버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죽는 순간에도 우리 연방의 자랑스러운 전사이고 싶습니다.”
툭툭.
그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정말 멋진 애국심이었다.
“러시아의 실상에 대해 알고 있나?”
와락 인상을 구기는 알렉세이.
어찌하여 모를까? 지금의 러시아는 구석구석 썩어 문들어지고 있다는 것을. 공산주의의 폐해는 이루 말 할 수 없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는 그였다.
푸틴은 권력욕에 의해 그의 정권이 계속되고 있었고 그것을 유지 하기 위해 썩어가는 행정부를 러시아의 지식인이라면 모를 수 없었다.
손가락으로 치료를 받고 있는 고려인 특전단을 가리켰다.
“저 아이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같은 인종이 아니라 러시아인처럼 보이지 않는가?”
“저들 역시, 국가에 충성을 다하는 자랑스러운 전사들입니다.”
“다행이군, 저기 저 아이는 아직 미성년자라는데 당신 생각은 어때?”
“······”
“저런 말도 안 되는 비 상식적인 일이 일상인 러시아가 과연 제대로 돌아간다 할 수 있을까?”
“과도기일 뿐입니다.”
“그 과도기를 나와 같이 일찍 끝내보는 것은 어떤가?”
알렉세이가 놀란 얼굴로 날 바라본다.
“대한민국이 러시아를 손에 넣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누가 봐도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이나 다름 없었으니까. 그러나 애초에 나는 대한민국으로 러시아를 삼킬 생각이 없었다.
“그럴리가 있나? 나는 대한민국으로 러시아를 삼킬 생각이 없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알렉세이.
“우리 SKY가, 나의 SKY가 러시아를 삼키게 만들거야.”
알렉세이가 입을 크게 벌렸다.
날 마치 미친놈 바라보듯 보고 있었다.
나는 씨익 입꼬리를 들어 올리고는 말했다.
“나와 내기 하나 하겠나?”
“무슨?”
“SKY가 러시아를 삼키는지 못 삼키는지 말이야.”
< 제 353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