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48화. >
아침에 해변을 달리고. 점심에는 루시와 우희, 아산댁 아주머니와 몇몇 PMC대원들과 함께 아이티인들에게 무료식사를 배식하는 일이 내 일과의 전부였다.
오늘도 여느날과 다름없이 식판에 국을 퍼주는 일을 담당하다 내 곁에 다가온 호석을 마주 할 수 있었다.
“회장님, 여기 김교관이 회장님 자리를 대신 할 겁니다.”
나는 밝은 얼굴로 내 맞은편에 서 있는 아이티인에게 국을 퍼주고는 국자를 ‘김교관’이라 불린 PMC대원에게 양보했다.
“양은 이 만큼 푸는게 딱 적당하더라고요, 건더기로 은근히 싸움이 많이 나니까, 적적량 유지 해 주시고.”
“예, 회장님. 칼 같이 푸겠습니다.”
피식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들겨 주고는 힐끗 루시의 눈치를 살폈다. 루시가 멀리서 눈을 찡긋 하는게 보였다. 다녀오라는 신호를 예쁘게도 보여준다.
언제봐도 이쁘니, 이 놈에 콩깎지가 언제쯤 벗겨질까?
호석의 어깨를 부드럽게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마침 시가가 땡겼는데 나이스 타이밍.”
“하하, 가시죠.”
훈련소 연병장을 지나 약 3분을 걸었더니, 넓게 펼쳐진 새하얀 백사장을 뷰로 하는 나무그늘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곳에 만들어진 폐 타이어를 이용한 몇 개의 벤치.
털썩 자리에 앉으니 호석이 품에서 자연스럽게 작은 시가 두개를 꺼내 하나는 내게, 하나는 자신의 입에 가져간다.
“보고 할 일이 있나보죠?”
“예, 회장님.”
품에서 서류를 꺼내는 호석.
아이티에서는 귀한 A4용지 몇장이었다. 이 몇장도 이곳에서는 아주 귀하게 취급받는다. 어쨌든 바다건너 와야 하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곳에 진출한 공산품 기업들도 몇 없으니 콜라 따위도 엄청나게 귀한 취급을 받는다.
SKY LINE의 항공기가 이곳에 들르는 것 만으로도 ‘손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니 말 다 했다. 엊그제 SKY LINE대표가 ‘회장님··· 언제까지···’라고 얘기 했을 정도였다. 유가가 오를 때 마다. 그 손해가 크게 뛰니 SKY LINE대표의 뜻을 알 만 했다.
하지만 아직은 항공기로 운반해야 할 짐들이 많았다. 배로 오가기에는 아직은 시간이 부족한 상황.
“후우.”
시가가 쓰게 느껴진다.
액수로 따지자면 ‘엄청 크다.’라고 느껴지지 않지만, 헛돈이란 생각은 나 역시 하고 있으니까. 투자비용이지만 아웃풋이 그리 크지 않으니 말이다.
“하하, 회장님 아직 보고 드리지 않았습니다.”
“아, 예. 잠시 딴 생각을 하느라.”
“얼른 복귀하실 때가 된 모양입니다. 회장님 얼굴에 일하고 싶다라는 표정이 훤합니다.”
“그래요?”
“예, 회장님.”
픽 웃음이 흘러나온다.
SKY LINE의 대표가 징징거리니 어디 다른데서 돈을 벌어올까 머리가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던 차였다. 계속 곳간을 열 순 없으니, 곳간을 채워줄 다른 캐쉬뱅크가 필요한 것도 맞으니까.
“SKY 전자 신제품이라도 출시일을 앞당겨야 하나 싶어서 말이죠.”
“현재 기종도 활황인데 굳이 신제품 출시를 하십니까?”
“그렇죠? 이르긴 해요, 아직 뽑아먹을 게 남았으니까.”
세상은 모르겠지만, SKY 전자의 신규 휴대폰, 가전제품 등은 이미, 향후 5년은 기술적인 압도를 한 상태였다. 다만, 한번에 5년을 건너띈 기술을 보여주기 보다는 차근차근 풀어가는 것이었다.
아마 대부분의 기업들이 이와 같이 진행할테다. 지금 당장 신기술을 선보이면 당장은 열광해도 머지않아. 2년, 3년이내에 다른 기업들에게 따라잡혀 경쟁을 해야 하니까.
2년, 3년은 연구기간으로 턱 없이 부족하다. 시행착오를 겪고 실험을 해야 하는 단계를 거쳐야만 완벽한 신기술이 탄생하는 것이었다.
물론 SKY는 실패가 적다.
미래에 성공했던 기술이 무엇인지, 미래의 인간이 바라는 니즈가 무엇인지는 내 머릿속에 들어있으니까.
어쨌든 그렇다고 당장 2020년도의 기술을 가져올 순 없는 것이다. 차근차근 순차적인 적용이 필요하다. 그게 가장 합리적으로 기업의 가치를 끌어올리고 곳간을 두둑하게 채우는 방법이니까.
“그래서 보고는 뭐에요?”
시가도 충분히 태웠겠다.
복잡한 머리도 대충은 정리를 했겠다.
이제 호석이 얼굴을 비친 이유를 알아야 했다. 며칠 푹 쉬라고 했음에도 굳이 내게 얼굴을 비췄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뜻.
“러시아에서 독거미에게 보고가 날아왔습니다.”
내 손에 들린 서류가 아마 독거미의 보고서인듯 보였다. A4용지에 저해상도 사진이 인쇄되어 있는 보고서.
샤락, 샤락.
넓은 교정.
교정이라 표현한 이유는 겉보기에는 마치 어떤 수용소나 교도소 처럼 보이는 광경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 많지 않은 인간의 머리들이 보인다. 확대 사진을 보니, 나이가 어려보이는 동양인들이 보인다.
아래 설명을 읽으니 어째서 러시아에서 온 보고에 동양인의 사진이 찍혀있는지 알 수 있었다.
“고려인 특전단?”
“예, 회장님. 보고서에도 적혀 있습니다만, 1951년에 창설되었다고 합니다.”
“한국전?”
“예, 그 이후에 한국이 제법 중요한 자리에 매김하지 않았습니까?”
“대리전의 땅이 되어버렸죠.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희생양.”
호석이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린다.
“그때 소련은 중국과 일본, 북한과 한국에 요원들을 침투시킬 요량으로 동양인 KGB를 만들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오호, 러시아 넓은 땅덩이에 분포한 우리 민족들을 이용해서 말이군요.”
“예, 해서 부대 이름이 고려인 특전단인 모양입니다. 물론, 이것을 아는 인물은 러시아에서도 아주 극소수인듯 보입니다.”
“어째서죠?”
“소련이 무너지고 러시아가 등장하면서 많은 부분의 정보가 소실되었다고 보입니다. 그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필요 없는 전력인 고려인 특전단은 아예 배제된 것으로 보입니다.”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호석의 보고는 설득력 있었다.
어디 높으신 분이 ‘동양인 훈련시켜!’하고 얘기했다가 그 놈이 죽으니 관심이 사라졌다는 얘기와 같다.
그러다 그 곳을 푸틴이 떠올린 것이고.
대충 어디를 위해 푸틴이 고려인 특전단을 쓰려하는 지 알 것 같았다.
“우리 때문에 잊혔던 부대를 부활시킨다?”
“그래 보입니다.”
“제법 정성을 들이네요?”
“아무래도 SKY와 대한민국의 위상이 작년과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 아닐까요? 곧 다가올 내년에는 더 할 테고요.”
맞는 말이었다.
2000년대에 들어선 대한민국은 전 세계가 놀랄 만큼의 발전을 이룩했다. 2002년 월드컵은 세계가 깜짝 놀랄 만큼의 대한민국 모습이 전세계에 생중계되지 않았던가.
높다란 빌딩 숲, 산이 어우러진 도시의 전경, 젊음이 활기찬 거리.
1997년 IMF를 맞은 나라가 맞는지 의심 될 정도로 엄청난 속도의 복도와 발전을 이룩한 나라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게다가 SKY가 등장했고.’
SKY라는 희대의 공룡기업이 IMF를타고 대한민국에 등장하면서부터는 또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것보다 더욱 빠르게 성장세를 키워가며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영향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이제는 ‘대한민국을 아시나요?’하고 질문을 하면 ‘아, SKY가 있는 나라?’라고 대답이 나올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게다가 나의 할아버지 천혁수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며 SKY=대한민국이라는 공식같은 것이 완성되었다고 떠드는 언론인들이 제법 많은 상황.
푸틴이 충분히 고려인 스파이들을 기용 할 만큼 영향력이 확대 되었다는 뜻이다.
“어쨌든, 그래서요?”
“사진은 따로 찍지 못했지만, 얼마 전 대규모 경호단과 고위관료의 차량으로 보이는 세단이 고려인 특전단을 방문했다고 합니다.”
“보진 못했지만 푸틴이다?”
“예, 회장님.”
“푸틴이 고려인들을 데리고 수작질을 벌이려 한다?”
“독거미의 예상은 그렇습니다.”
고개를 끄덕였다.
독거미의 추론은 정확도가 떨어지는 예측이 아니란 건 알고 있었다. 그녀는 충분히 경우의 수를 제거 하고 거의 100퍼센트 확률로 ‘푸틴’을 찍은 것일테다.
“보고서 속, 사진에는 러시아 정보총국의 바딘 국장이 찍혀있었습니다.”
“음, 그렇군요.”
“김장원 사장이 따로 조사를 해 본 결과 많은 아이들을 새롭게 특전단 훈련소로 보낸 것 같았습니다.”
“아하, 인원을 늘린다?”
“예, 그것은 곧 지원을 받는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잊혔던 부대에 절대자가 다시 러브콜을 보낸다라.”
뭐가 되었던 푸틴이 현재 노리는 것은 대한민국과 북한 쪽일 가능성이 높았다.
사실 북한도 거의 배제를 하는게 맞다면 남은 것은 대한민국과 우리 SKY 뿐.
그리고 이곳 아이티 역시 푸틴의 약점이 될 수 있는 알렉세이가 남아 있으니 그의 시선이 이곳에 닿아있다고 보는게 맞을 터.
“그 특전단이라는 곳, 전투력은 어떨까요?”
“고도의 훈련을 받았다고 한 들, 어린아이들입니다.”
“그래요?”
“물론, 어린아이들이기에 일반 특수부대는 상상하지도 못할 작전을 펼칠 가능성도 있습니다만, 그런 것도 고려했을 때, PMC 정예 7팀 정도면 충분히 상대가 가능하지 않을까 보고 있습니다.”
“호오, 후하게 처주시네요?”
“러시아지 않습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러시아 놈들은 어떻게 교육받는지 모르지만, 하여간 대단한 놈들이었다. 스페츠나츠 KGB들과 같이 하여간 악명이 높은 놈들이 많다는 건 그 만큼 대단한 놈들이라는 뜻이니 호석이 그들에게 후한 점수를 주는 것도 이해 못할 건 없었다.
SKY PMC는 0팀부터 10팀까지 최정예 대원들로 이루어진 팀이 있었다. 당연히 숫자가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대원들이 가지고 있는 경험과 실력이 높아진다. 절대적인 수치다라고 얘기할 순 없지만 PMC내부에서는 누구나 인정하고 존경할 수 있는 대원들이 0팀에 가까이 근접해 있었다.
그 중, 정예 7팀은 대부분 707, UDT 출신 대원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실전 경험이 아주 풍부한 대원들이었다. 0팀은 내 담당 경호를 맡고 있고 1팀은 가족들의 담당경호를 맡는다. 그렇기에 2팀부터는 외부 용병으로 활동을 하는데 2팀부터 10팀까지 의뢰 달성률은 100퍼센트였다.
“알렉세이 방에 있나요?”
“예, 회장님. 아마 쉬고 있을 겁니다. 때마다 식사만 배급해주고 있습니다.”
“그놈 얼굴 좀 봐야겠네요.”
“예.”
태우던 시가를 대충 비벼 끄고는 그늘 아래 마련된 쓰레기통에 넣었다. 호석과 함께 PMC훈련소의 연병장을 가로 질러 지하로 내려가다 물었다.
“여기는 스페츠나츠가 처들어 오면 뚫리나요?”
불쑥 물어본 질문에 호석이 빙그레 입꼬리를 들어올린다.
“스페츠나츠의 병력규모는 대략 1만5천여명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야 사단에서 군단급 병력 규모네요?”
“그렇습니다. 실제 전투력은 군단급 병력 5개 정도는 씹어 먹는다고 봐야 합니다.”
“그렇군요.”
“스페츠나츠 전체가 들어오지 않는 이상 뚫릴 일은 없다고 장담합니다.”
“오, 스페츠나츠 너무 무시하는 것 아니세요?”
호석이 고개를 저었다.
“놈들이 항공지원과 해상지원을 받아서 온다면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라 순수 백병전이라는 가정하에, 놈들 전체가 달려들어야 할 겁니다. 어찌되었던, 우리는 수성을 하는 입장이고, 놈들은 공성을 하는 입장이지 않습니까?”
“공성은 수성의 삼배수가 필요하다? 기본 전략이네요?”
“예, 회장님.”
“그 말씀은 우리 대원들 하나하나의 능력이 스페츠나츠에 뒤지지 않는다는 말씀?”
호석이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린다.
“대한민국의 특수부대원들은 과거, 전투 경험이 아주 풍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겠죠, 한국전, 월남, 아프간, 이라크까지 뭐 경험이 없을래야 없을 수 없겠죠.”
“예, 하지만 과거부터 대한민국은 항상 장비가 부족했습니다.”
“첨단 무기를 소지 할 순 없었다?”
“나라가 가난했으니까요.”
난 순순히 인정했다. 호석이 얘기하는 것은 팩트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니 인정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언제나 미군 특수부대, UN군 소속의 특수부대, 타국의 특수부대에게 결코 밀리지 않는 성적을 보여줬습니다.”
“그런가요?”
“예, 가끔은 해외에서도 대한민국 특수부대의 훈련법을 배우고자 ‘교류’신청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우리나라 군이 인정을 받고 있다?”
“첨단장비를 이용한 작전은 몰라도, 특수부대의 기본 소양이라 할 수 있는 백병전과 인명구출, 대테러진압작전 등은 전 세계에서 인정을 받는 수준이라는 얘기입니다.”
피식 웃음이 흘러나온다.
“그리고 그런 대원들이 우리 PMC 대원들이고요?”
호석이 씨익 이빨을 드러내며 웃는다.
“예, 단순히 특수부대 출신이 아니라, 그 부대에서도 최고라고 평가 받는 출신의 대원들이 즐비합니다. 물론 성격들이 모나서 상관을 들이박은 놈들이 제법 많습니다만.”
쩝, 하고 입맛을 다시는 호석을 보니 웃음이 터져나왔다.
“하하하, 우리 PMC와서는 안 그렇잖아요?”
“대우가 다르지 않습니까? 게다가 성깔 더러운 놈들도 제 선배들에게는 깍듯한 법입니다.”
그리고 그 선배의 정점에는 호석과 철웅이 있을터.
“어쨌든 이해했습니다. 왜 스페츠나츠 전체가 쳐들어와야 하는지.”
“예.”
웃고 떠드는 사이 어느새 알렉세이의 방 앞에 도착한 우리.
끼이이익.
철문이 열리고 침대에 누워있던 알렉세이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다.
“쉬어, 쉬어. 편하게 들어 편하게. 긴장하지 말고.”
긴장하지 말라 말했지만 알렉세이의 눈은 뒤쪽의 호석을 보고는 세차게 흔들린다.
드르르륵.
적당히 의자를 끌어와 앉으며 알렉세이에게 앉으라고 턱짓을 해 주었다.
마지못해 앉은 알렉세이.
“러시아에서 친구들을 보냈나봐.”
알렉세이의 동공이 확장되는 게 보였다.
좋은 것을 발견했거나 생각할 때 신체가 일으키는 반응이었다.
“아마도 네 놈 때문이겠지?”
“드디어···”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대답이었다.
이제서야 손을 쓰느냐는 서러움과, 아직 국가가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는 희망 등.
“글쎄, 그렇게 희망찬 상황일지는 모르겠는데?”
“예?”
“우리한테는 어떠한 말도 없는 것을 보면, 아마도 비밀스러운 형태의 작전으로 진행하겠지.”
“으음.”
“아마도 몰래 잠입하려 한 것 같은데 말이야.”
눈을 크게 뜨는 알렉세이.
“비밀 작전인데, 어떻게?”
우리가 러시아의 비밀 작전을 어떻게 알았냐는 질문이었다.
“우리도 눈과 귀가 제법 밝아서 말이야.”
“······”
나는 빙그레 입꼬리를 들어올리고는 말했다.
“나는 놈들의 작전이 시작 될 타이밍에 맞춰서 이곳을 비워 볼 작정이야.”
“예?”
알렉세이가 아니라 뒤쪽에 있던 호석이 놀라서 반문했다. 알렉세이 역시 자신이 들은게 맞는 것인지 내 말을 곱씹는 얼굴이 되었다.
“이곳을 비워 둘 겁니다.”
호석도, 알렉세이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 되었다. 나는 홀로 히죽 입꼬리를 들어올리며 웃었다. 생각만 해도 재미있으니까.
< 제 348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