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44화. >
거창하게 세상을 집어 삼킨다고 했지만, 당장 다음날 우리가 달라지는 건 없었다.
하나하나, 차근차근.
그렇게 쌓여가고 먹고 삼키다 보면 어느새 세상을 삼키고 있을 것이라 확신하니까.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는데, 그렇다고 나와 호석이 죽음이 두려워 갑자기 변하려고 한다는 게 더 웃긴 일이다. 우리는 겨우 그런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아니니까. 걱정 조차 해본적이 없었다. 지난번 아이티에 지진이 왔을 때.
그때도 살고자 노력하려면 얼마든 살 수 있었다. 막말로 그냥 SKY에서 헬기 한대 보내오면 끝나는 일이니까. 헬기를 어디서 구하냐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을 수 있는데, 돈이 많다면 그런 것쯤이야 쉽게 구할 수 있었다.
게다가 공항에는 나의 전용기가 있었으니 헬기가 여의치 않으면 비행기를 띄우면 그만인 일이었다.
"오셨습니까?"
호석이 이마의 땀을 훔치며 나를 반긴다.
어느새 헬쓱하게 변한 알렉세이가 잔뜩 풀린 동공으로 날 바라본다.
오늘 예정된 일과를 치루고 있는 호석.
그것은 알렉세이가 입을 열 수 있도록 유도하는 일이었다. 고문이라면 고문인 일, 신체에는 무해할지 모르나 적어도 정신적으로는 매우 피폐해질것이다.
고통을 이루 말 할 수 없을테니까.
"진도 좀 나갔나요?"
고개를 젓는 호석.
내심 굳은 그의 얼굴에 뿌듯함이 느껴지는 듯 했다.
바로 어제 알렉세이를 내가 탐하고 있다는 것을 들었으니, 그 역시 알렉세이라는 인물이 가진 충성심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으리라.
"그럼 조금 더 고생 해 주시는걸로?"
품에서 당도가 높은 에너지 바를 꺼내 호석에게 건넸다. 호석은 고맙다는 듯 고개를 살짝 숙이며 그것을 받아들어 바로 포장지를 벗긴다.
이어서 다른 에너지 바 하나를 친절하게 포장을 벗겨 알렉세이의 입에 쑤셔 넣어 주었다.
"먹어, 먹어야 살지."
"크윽..."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지 않았었는지 알렉세이의 입은 한 없이 말라 있었다. 사막 한가운데 물 없이 서성인 사람처럼.
나트륨과 포도당이 적당히 섞인 에너지 음료를 입에 물려주자 미친듯이 들이키는 알렉세이,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고 있었던 모양.
어느새 에너지 바 하나를 끝낸 호석이 음료를 벌컥벌컥 들이키고는 목을 좌 우로 꺾는다.
"그럼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회장님."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알렉세이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마치 위로하듯.
"자, 힘 냅시다."
"크윽."
원망 가득한 눈으로 날 올려다 보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진심으로 알렉세이를 응원하고 있었다.
몸 곳곳의 임파선을 만지작 거리다 못해 쑤신다고 표현하는게 적절한 호석의 지압법은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을 동반하고 그런 고통을 버티고 버티며 흔들리는 충성심, 애국심을 굳건히 붙잡는 놈이라면 진심을 다 해 회유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드니까.
빤히 알렉세이와 눈을 마주치다 고개를 돌려 호석을 바라보았다.
"그럼 고생해주십시오, 대표님."
"예, 회장님. 일 보십시오."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하의 비밀스러운 그곳을 빠져나왔다.
호석은 내게 일을 보라 했지만 사실 내가 할 일이라는게 태양이와 별이를 돌보는 것 외에는 별 게 없었다.
할아버지는 며칠 안에 돌아오라 말씀하셨는데, 어쩌다 보니 알렉세이 놈을 위해서 이곳 아이티에 며칠은 더 머물러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이제 슬슬 카리브해의 아름답던 경치도 질리던 참이었다. 너무 편안하게 지냈다고 하는게 옳았다. 꼭, 루시와 아이들이 이곳에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우진!"
날카로운 루시의 음성.
잠시 내가 자리를 뜬 사이, 아이들이 울기라도 했던 모양.
"어어, 불렀어?"
"빨리와!"
칼 같은 명령에 가장의 권위는 땅에 떨어진다.
"어, 지금 가."
얼른, 바쁜 삶을 살아야 하나 보다.
***
알렉산드로 알렉세이의 피로와 고통에 시달리느라 헬쓱해진 얼굴과 달리, 푸틴은 예의 그 기름진 얼굴을 자랑하며 거만하게 러시아의 주요 인사들 앞에서 소리치고 있었다.
"며칠이 지나도록 해결책을 제시하는 놈들이 없어!"
버럭 소리를 지르는 푸틴. 잔뜩 어깨를 움츠린 러시아란 국가의 대들보들. 바깥에서는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는 사람들이지만 감히 푸틴의 절대 권력 앞에서는 한 없이 순한 양들이었다.
푸틴의 눈은 자연스럽게 국제정세에 가장 빠르게 대처를 해야 할, 외무부 장관 세르게이 라프포프를 바라보았다.
"세르게이."
"예, 각하."
"다른 국가들은 어때? 소문으로는 우리 요원만 붙잡힌게 아닌 것 같은데?"
뭐 들은 얘기가 전혀 없기에 세르게이는 입술을 달싹였다.
팍 인상을 찌푸리는 푸틴.
"자네도 들은 게 없다?"
"죄송합니다."
"외무부 장관이라는 놈이 국제정세에 이렇게 어두워서야 되겠는가?"
"면목 없습니다. 아무래도 정보요원들이 관련된 일이기에 국가기관들이 함구를 하고 있는 형국이라..."
자연스럽게 푸틴의 고개가 정보총국장 바딘 바카틴을 째려보았다. 과거 KGB의 후신인 정보총국.
"들리는 소문 없어?"
푸틴의 그 새하얀 얼굴이 어느새 붉게 변해있는 상태, 여기서 뭐라도 얘기하지 않으면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일어날 터.
바딘은 망설이다 눈을 질끈 감고는 입을 열었다.
"듣기로는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미국 쪽에서는 UN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을 5개국에서 6개국으로 확대시키며, 대한민국을 승격 시킬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합니다."
"그 코딱지 만한 나라를 상임이사국? 하!"
"어차피 어떤 일이던 상임이사국 5개국 중, 하나의 국가만 반대해도 이뤄지지 않을 일입니다. 각하."
"우리가 반대하면 별 수 없다?"
"예, 그렇습니다. 영국과 프랑스, 미국도 그 점을 알기 때문에 그저 대한민국에 인사치례를 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우리가 반대 할테니까 일단 뱉고 보자?"
"예, 그렇습니다."
푸틴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당연히 그가 대한민국이라는 민주주의 국가를 상임이사국에 포함시켜 가뜩이나 자리를 잃어가는 공산주의 국가의 입지를 줄일 필요가 없을테니까.
"잔대가리들을 굴렸군."
"비겁한 놈들이 하는짓이 다 그렇고 그렇지 않겠습니까?"
"쯧쯧, 대한민국의 정보력은 어떻게 평가하나?"
"연초에 각하께서 전달해주신, 중국측 정보요원들의 스파이 활동에 대한 보고서와 우리 정보총국에도 심어진 스파이에 대한 정보는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그 정보를 내가 대한민국에서 가져왔고."
"예, 그렇습니다. 그것으로 미뤄 보아... 제법 대단한 정보력을 갖춘 국가라 봐도 좋습니다."
"우리 정보총국은 모르는 스파이 명단을 쥐고 있던 대한민국의 정보부가, 제법 대단한 정도다?"
바딘이 자존심이 상하는지 입술을 강하게 짓 씹는다.
"앞으로 두 번은 없을 일이라 자신합니다."
푸틴이 딱, 딱, 딱, 테이블을 두들겼다.
"고려인들... 많지?"
바딘이 잠시 놀란 얼굴을 하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러시아에서 고려인들을 중요하게 쓰지 않기 때문이었다. 고려인들은 핍박과 억압을 받으며 높은 위치에 오를 수 없었다. 서구권 대부분의 나라의 주요 인사들이 모두 백인이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대한민국의 영향력이 90년대 이후, 폭발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고려인 정보요원 개발에 힘 쓰기로 했던걸로 기억하는데?"
바딘이 인상을 찌푸렸다.
과거, 분명 저런 계획이 있었다. 그러나 정보총국장의 자리를 자신이 가져 오면서는 보고조차 제대로 받지 않던 사업이었다.
이제와서 갑자기 물어본다 한들 대답할 수 있을리 없었다.
"관심 밖의 일이었나?"
"면목없습니다. 각하."
"1950년대 이후, 고려인들에 대한 개발에 착수하려 했던 우리야, 자네라도 신경 써. 앞으로 대한민국이 제법 뜨거운 감자에 오를테니."
"예, 각하."
"고려인 첩보원들에 대한 예산이 매년 조금씩 나가고 있던 것으로 알고 있으니, 내일까지 그 부분 보고서 올려, 직접 확인하지."
"예!"
다시 고개를 돌린 푸틴이 외무부 장관 세르게이를 바라보았다.
"세르게이."
"예, 각하."
"영국, 미국, 프랑스. 연락돌려서 실제로도 UN안보리 상임이사국에 대한 루머가 사실인지 알아 봐, 그걸로 딜을 친게 맞는지."
"예, 바로 움직이겠습니다."
"너도 내일까지 보고 해."
"예!"
할 말이 끝났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푸틴.
그가 좌중을 쓱 둘러보다 입을 열었다.
"쓸모없는 것들."
신랄한 비판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지만 누구하나 얼굴을 붉히거나 울컥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그저 '내가 죄인이오'하는 얼굴로 반성의 태도를 보일 뿐.
이 것만 보더라도 현재 러시아에서 푸틴의 위상이 얼만큼인지를 알 수 있는 것이었다.
***
금발의 푸른눈이 대부분인 모스크바의 한 술집.
"크하하하하."
호쾌한 남성의 웃음소리에 절로 이목이 집중된다.
특이하게 그 사내는 금발의 푸른눈의 러시아인이 아닌 검은 머리를 가진 한국인이었다.
"조용히 좀 웃어요!"
"으따, 재밌는디 우째 그라요?"
"으이구, 민폐라니까!"
"흐흐, 저것들 우리 혜미씨가 예쁘니까 처다 보는 것 아니요?"
"쉿, 쉿!"
독거미가 검지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가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호탕하게 웃던 사내, 김장원은 여전히 커다란 목청을 자랑하고 있었다.
"한국 말, 그것도 사투리를 못 알아 들으니께, 편히 말씀 하쇼잉."
김장원의 이어진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독거미.
"알아보니까, 정보총국에서 고려인들을 대상으로 한 요원 훈련소가 따로 있더군요."
"잉, 그렇소? 백인우월주의에 쩌든 러시아 놈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믿기지 않는디?"
"말이 훈련소지 그냥 고려인 고아들 모아 놓고 학대하는 곳이었어요."
사진을 몇장 꺼내 김장원에게 보여주는 독거미.
"잉, 며칠 야밤에 도둑 괭이 처럼 나가더라니, 요 사진 찍으러 다녔소? 아따 위험하게, 나헌티 말을 허제."
"됐거든요? 그 목청 때문에 다 걸려요."
"흐흐, 여그도 나으 친구들이 솔찮이 있소잉... 제법 무서운 놈들이라 이런 사진쯤이야 쉽게 찍어 오지라?"
"PMC 정보부의 일을 약쟁이들한테 맡길 순 없어요, 회장님이 아시면 얼마나 실망하시겠어요?"
김장원이 실실 웃었다.
"아따 우리 혜미씨가 회장님 생각하는 맴이 솔찮이 대단허요? 그란디, 우리 회장님은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시 하는 사람이오, 과정이 쪼까 껄쩍지근혀도 결과가 좋으면 만사 오케이라 이거지요."
"그 과정에서 대원들이라도 상하면, 가만 있으시지 않을걸요?"
"흐흐, 고것은 결과가 좋지 않은 것잉게 당연하지요?"
"그게 또, 그렇게 되나요?"
자연스럽게 티키타카를 주고 받는 둘.
어느새 마카오에서 데면데면 하던 둘은 죽이 제법 잘 맞는 커플이 되어 있었다.
"그랴서 더더욱 위험하니께, 우리 고급인력인 혜미씨 말고, 나가 맡아서 처리 하겄소."
독거미가 내밀었던 사진들은 천천히 뜯어보던 김장원이 지도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그요? 그 훈련소?"
"네, 맞아요. 여기에 우리쪽 사람을 몇 심으면 회장님이 말씀하신 일 처리하기가 쉬울 것 같은데, 어떠세요?"
김장원이 씨익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언더커버 그딴 것은 쪼까 껄쩍지근 해불고... 여그 아그들 고아들이라고 허셨소?"
"네, 대부분 고아들로 이뤄진 훈련소에요, 따로 월급은 당연히 없고, 거의 세뇌교육이 이뤄지는 곳이죠, 보기에는 교육이라기 보다는 학대에 가까웠지만."
"흐흐, 뭐 고것은 나가 알아서 하겄소, 고아들 생리는 나가 잘 알제."
"딥하게 들어 갈 필요는 없어요, 어디까지나 우리는 러시아의 움직임이 어떤 것인지,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 등을 보고하는 게 주 임무니까."
"아따 걱정을 붙들어 매쇼. 나가 잘 할라니까."
"흐음."
독거미가 걱정된다는 얼굴을 하고는 김장원을 빤히 바라봤다. 마카오에서 일 처리 하는 것을 두 눈으로 보지 않았던가. 그러니 자연스럽게 신경이 쓰이는 것이었다. 그의 무대뽀식 일 처리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보고에 의하면 마카오를 주릅잡던 흑사회 놈들이 괴멸했다는 보고를 받았던 독거미.
"몸 조심 하세요."
"아따 혜미씨가 이 놈 걱정을 다 해주시고잉, 흐흐."
응큼하게 웃으며 독거미의 어깨에 팔을 감아오는 김장원. 독거미도 못내 싫지는 않은지 조용히 보드카를 홀짝였다.
< 제 344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