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42화. >
털썩.
한바탕 분노를 쏟아내고는 다시 자리에 앉은 푸틴.
그가 눈을 잠시 감았다 뜨는 것으로 분노를 삯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보좌관은 푸틴이 뭐라 지시사항을 얘기 할 때까지 그 자리에서 그대로 석상처럼 자리를 지켰다.
몇 분뒤 눈을 뜬 푸틴.
“저놈이··· 우리 연방의 요원이 맞아?”
보좌관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가 얼른 대답했다.
“예, 각하.”
“어째서 우리 요원이 저렇게 순순히 나불거리는 거지?”
푸틴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고도의 훈련을 거치는 이들이 요원으로 알고 있는데 이건 뭐, 애초에 타국에서 심어놓은 스파이가 아니라면 저렇게까지 술술 부는 게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예상컨데, 고물이나 약물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약물?”
“자백을 하게 만드는 약물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훈련을 받은 최정예 요원이라도 그 약을 맞으면 질문자의 질문에 성실하게 답변하죠, 거짓하나 없는 진실로. 물론 진실이 항상 사실인것은 아닙니다. 왜곡된 진실을 알고 있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푸틴이 한숨을 푹 내 쉬고는 어느새 비어버린 술잔에 보드카를 채운다.
“저놈 눈이 약물에 취한 눈이라고?”
스크린에 멈춰있는 영상.
그리고 그 속에 있는 똘망똘망하고 의지가 가득한 알렉산드로 알렉세이의 두 눈.
보좌관은 다시 한 번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가 보기에도 알렉세이 요원은 약물에 취해 있는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
“고문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꿀꺽, 꿀꺽.
독한 보드카를 연거푸 들이킨 푸틴이 술잔을 보좌관에게 던져버렸다.
유리잔이 날아옴에도 꼼짝도 하지 않은 보좌관은 이마로 유리잔을 받아낸다.
퍽, 쨍그랑.
조금씩 방울져 세어나오던 피가 어느새 그의 얼굴 반쪽을 물들일 때.
“네 눈에는 저 반질반질한 기름이 좔좔 흐르는 얼굴이 고문에 시달린 놈의 얼굴이야?”
뭐라 대답할 말이 없는 보좌관.
그가 보기에도 스크린속 알렉세이의 얼굴은 잘 먹고, 잘 자고 있어보였다.
고문이란 것은 하는 사람이나 당하는 사람이나 피로가 쌓이기 마련이다.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동반된다는 뜻.
자연스럽게 그런 일이 있다면 얼굴이 좋을 수가 없었다. 스크린속 알렉세이의 얼굴은 햇빛에 조금 그을려 붉게 탔지만, 그게 전부였다. 오히려 약간 거뭇해진 얼굴은 더욱 건강하게 보이는 효과를 자아내고 있었다.
푸틴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해? 변명할 꺼리가 없으면 빨리 움직여! 국제적인 망신을 당하고 싶지 않으면 정확한 전후사정 파악해서 가져오라고! 이 멍청한 새끼야!”
“예! 각하.”
보좌관은 흐르는 피도 닦을 생각을 하지 않고 빠르게 푸틴의 집무실을 벗어났다.
다시 스크린으로 고개를 돌린 푸틴.
“도대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러시아의 요원들은 쉽게 배신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게 아주 어릴때부터 정신교육을 시작하고 세뇌를 시키기 때문에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요원들이 태반이고 더욱 비밀스러운 임무를 담당하는 요원들의 경우 확실한 정신감정을 전문가들에게 받고 시작한다.
어지간한 고문에는 자백하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물론 아이티에 정보원 역할로 보낸 알렉세이라는 요원이 그렇게까지 대단한 요원은 아니었다. 굳이 급을 나누자면 최상위 특급요원과 최하위 3급 요원 중에서 알렉세이의 등급은 1~2급 요원이었다.
그래도 러시아에 몇 없는 인재라는 소리.
알렉세이가 저 곳에 억류되었던, 포섭이 되었던. 어쨌든 푸틴의 입장에서는 도대체 어떻게 알았냐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러시아의 요원들의 신상을 낱낱이 파악하고 있는게 아니라면, 구호물품 전달자로 위장한 알렉세이가 잡혀있는 게 말이 되지 않으니까.
자연스럽게 과연 SKY나 대한민국이 어디까지 알고 있으며, 어디까지 대비했느냐를 알아야 운신의 폭이 결정되는 것이었다.
“고작 코딱지만한 나라가 날 방해한다고?”
홀로 코웃음을 치던 푸틴이 술병을 들어 술잔을 찾다가 자신이 던져버렸음을 깨닫고는 술병째 입으로 가져가 벌컥벌컥 마셔버렸다.
“크으, 미국도 아니고 흥.”
잔뜩 가소롭다는 것을 온 몸으로 표현해보지만 그의 동공은 조금 떨리고 있었다. 미국을 제외하고는 새로운 적의 등장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기 때문이었다.
***
호석이 건네는 위성전화기를 받아 들었다.
-이 놈아, 이건 또 뭐냐.
각국의 요원들의 자백이 담긴 영상을 전달 받은 할아버지의 전화였다.
“보시는 그대로죠.”
-하, 국제적인 무기가 될 수 있어. 제법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겠구나.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다르겠죠.”
-더 이상 아이티를 우리 자치령으로 만드는데 반대할 놈들은 없을게다.
“영상 잘 나왔죠?”
-그래, 고문의 흔적도 없고, 약물의 흔적도 없고. 신기하구나 억류되어 있어 보이기는 한다만 이 정도야 정보요원이라는데 이정도 억류는 세상이 다 인정할게다.
고개를 주억거렸다.
요원놈들은 확실히 손이 묶여 보이는 앵글로 촬영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몸에는 어떠한 해도 입히지 않았다. 물론, 윌리엄은 제외하고.
설령 윌리엄처럼 한쪽 눈이 밤탱이가 되어 있다해도 그 정도는 ‘진압과정’이라는 희대의 명분이 있으니 상관 없었다. 애초에 타국에서 정보원의 첩보활동이 국제법상 금지되어 있기 때문.
그러니까, 타국에서 정보원의 첩보활동이 발견되면 범죄자가 되는 것이기에 당연히 체포해도 상관이없었다. 그 과정에서 약간의 부상정도는 당연히 동반된다고 생각하는게 일반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촬영한 영상 속 정보요원들은 부상도 ‘없다’라고 표현하는게 맞을 정도다.
“그냥 잘 구슬렸죠 뭐.”
-자세하게 말 해 보거라, 신약이라도 개발을 한 것이냐? 훈련받은 놈들이 이렇게 순순히 불어? 난 이해하기 어렵구나.
슬쩍 호석을 바라봤다.
호석은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을 하고는 평온해 보이는 얼굴이다.
저런 얼굴로 잘도 그런말을 했더랬다.
‘인간의 몸은 참 특이합니다. 바깥에 부상은 보이지 않지만, 극악의 고통을 줄 수 있는 혈자리들이 있죠, 무협지의 점혈과는 좀 다릅니다. 근육자체를 마사지 하는 것이랄까요? 독소가 모이는 통로들이 있습니다. 인간의 근육에는, 그곳을 자극하면 극한의 고통을 맛볼 수 있죠.’
의자에 몸을 움직이지 못한채로 앉아있는 알렉세이의 몸에 호석의 손이 닿을때마다 알렉세이는 출산의 고통보다 더한 것을 느끼는지, 그 어떤 임산부보다 커다란 비명을 토해냈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악! 제발! 제바아아아아알!’
아직도 뇌리에 알렉세이의 처절한 절규가 메아리 치는 것 같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렇게 수십차례 호석의 손길이 알렉세이의 몸에 닿고, 닿을 때 마다. 놀랍게도 알렉세이의 혈색은 더욱 좋아진다는 것.
‘혈색이 좋아지는 것은 몸속의 독소가 제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확히는 마사지를 통해 독소가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신체가 빠르게 독소를 제거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게 정확합니다.’
‘일종의 스포츠 마사지 뭐, 그런 건가요?’
‘그렇습니다. 물론, 굳이 독소를 제거하지 않아도 될 부분을 건드리고 있고 또, 원래 이렇게 무식한 세기로 하지 않습니다.”
그때, 호석이 손에 들고 있단 지압봉은 확실히 무식해 보였다. 맨 손으로는 한계가 있고 고통을 주기에는 이것만큼 확실한 게 없다나? 연장들이 정리되어 있던 테이블의 톱이라던지 뺀치, 칼이나 토치등이 초라해 보일 만큼, 호석이 들고 있던 지압봉은 대단한 절대무기처럼 보일 정도였다.
“정 대표님이 새로운 고문법을 개발하셨더라고요, 신약은 아니지만 특효약정도는 될거 같습니다.”
-이 러시아 놈의 자백을 말하는 것 같구나.
“오, 어떻게 아셨어요?”
-이 놈만 눈깔에 희망이 가득 차 있거든.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었다.
“희망이요?”
-그래, 다른 놈들의 눈에는 불안감이 가득해, 제 놈들이 죽을수도 있다는 공포를 느끼고 있는 눈깔이지.
“러시아 놈은 다르다?”
-그래, 이 놈은 이제 내가 해방될 수 있구나 하는 희망이 가득해 공포라는 것은 찾아볼 수 없을만큼. 뭔가 약속을 했고 그 약속이 이행될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겠지. 어쩌면 편하게 죽을 수 있다는 희망일지도 모르고.
확실히.
할아버지는 귀신이다.
“역시 할아버지 눈치가 귀신이시네요, 돗자리를 깔았어야 했는데.”
-실 없는 소리는.
“하여간 뭐, 무기는 할아버지 재량껏 마음대로 쓰십시오.”
-네 허락 없이도 그럴 생각이었다.
“거, 칭찬 한 번 해주시면 될 걸 꼭 그렇게 반응하세요?”
-이놈이 이제 다 컸다고 할아버지한테 고개를 들이미느냐? 건방진 놈.
“거참 손주놈 잘 했다 어화둥둥 한번 해 주시는게 얼마나 어렵다고.”
-됐다. 어쨌든 이건 내가 잘 사용하마. 고생했다.
못내 고생했다 소리를 하시는 척 은근슬쩍 칭찬을 해주신다. 그 모습에 절로 픽 하고 웃음이 터져나온다.
-그나저나, 이제 거기 일도 마무리 된 듯 한데, 다시 넘어와야지? 꽤 오래 머물렀구나.
루시와 태양이, 별이를 보고 싶다는 말씀을 잘도 돌려 하신다.
“예, 가야죠. 이제 루시도 좀 쉬어야죠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 해도 임산부니까.”
-그래, 의료시설이 좋은 곳이 필요하지.
“SKY의 전문의료진이 항상 대기하고 있습니다만.”
-어허.
“크큭, 알겠습니다. 금방 갑니다. 하루 이틀 뒤에 출발할 것 같네요, 나머지는 대한민국 특사들이 알아서 하겠죠?”
-걱정하지 말거라, 그렇게 무능한 인물들이 아니니. 게중에는 천가 키즈 출신도 있느니라.
“아 그랬어요?”
-오냐, 얘기하지 않더냐?
“예, 별 말 없던데요.”
-그것부터가 된 놈이 아니더냐? 제 능력으로만 평가 받고자 하는 마음 말이다.
“그렇죠.”
흐뭇한 마음에 절로 입꼬리가 올려졌다.
천가키즈.
우리 천가가 직접 투자하고 지원해 만들어낸 다양한 인재들을 일컫는다. 물론 내가 ‘천가키즈’라는 명칭을 만들어내지 않았다면 등장하지 않았을 구성원이다. 원래는 할아버지의 지원을 받아 교육받고 공부하던 사람들이 검찰, 경찰, 정치, 경제 전반에 걸쳐 골고루 뿌려져 있으니까.
그런 그들 모두가 천가키즈라 명명을 당했을 뿐이었다.
어쨌든, 그런 상황이라면 내게 인사를 해 오거나 친근하게 접근 할 수도 있을터였다. 나 역시 그가 먼저 다가와 ‘천가키즈입니다.’ 한다면 호의를 가지고 대했을테다.
그러나 특사들 중 누구도 내게 친근하게 접근하는 사람은 없었다. 천가키즈가 아닌 사람들은 내가 어려워서 그럴 수도 있었을테고, 천가키즈인 사람은 상대적으로 어려움이 덜했을테지만 굳이 인맥을 활용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특사들 믿고 와도 된다. 보고 받기로 이미 그곳에서 SKY와 대한민국의 위상이 하늘을 찌를 듯 높다하니 더 이상 네 놈이라는 고급 인력은 필요 없을 듯 하구나.
“오, 그래도 이제 손자놈 고급 인력 취급 해주시네요?”
-겉보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알고보면 네놈처럼 세상 한량이 따로 없지.
“에헤이, 저 처럼 일 열심히 하는 청년도 보기 드물거든요?”
-헛소리 작작하고 서둘러서 와. UN안보리에 상임이사국에 대해서 얘기가 바쁘게 오가고 있으니.
듣던 중 놀라운 소식이었다.
“대한민국을 상임이사국으로 미시겠다고요? 너무 이른 판단 아닐까요?”
-내가 하고 싶다더냐? 다른 놈들이 알아서 그렇게 하는게 어떻냐고 얘기 하고 있으니 그냥 못 이기는 척 ‘험험, 그래도 됩니까?’하는 것이지.
“이야, 무슨일이래? 상임이사국을 6개로 확대시킨다니.”
-일본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히고 있다. 감히 제놈들보다 국력이 약한 대한민국이 상임이사국이 될 순 없다면서 말이지.
“그렇죠, 놈들은 매번 제 놈들도 상임이사국이 되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이니까.”
-어쨌든 미국과 중국은 OK를 한 상황이고, 프랑스는 반대를 하다가 이번에 OK를 했단다. 아마도 그 첩보원의 죽음이 크겠지, 더 이상 일을 키우지 말자는 그런 태도로 보인다.
저런 논리라면 곧, 영국도 오케이를 해 줄 가능성이 높았다.
“남은건 러시아 하나 뿐이네요?”
-그래. 그리고 인도와 일본. 독일과 브라질은 입에 개거품을 물며 반대를 하고 있고. 물론 공식적으로 어떠한 것도 언론에 흘러들어가지 않았으니, 일부 국가 주요인사들만 아는 사항들이다.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긴, 공식적인 뉴스를 들었다면 내가 몰랐을 리 없었다. 이런 중요한 문제는 빠짐없이 체크해서 보고하는 PMC의 정보부도 있으니까 내가 놓쳤을 리 없다는 뜻.
아마 국가 정상급 인사들끼리 조용히 대화가 오고가고 있을 단계이기 때문이리라.
“브라질은 뭐, 무시해도 되고. 독일은 이번 협작질로 영국이나 프랑스처럼 조용히 하고 있을테고, 남은건 인도, 일본 정도네요?”
-그렇지. 일본이야 뭐 대한민국이 뭘 한다면 늘 입에 거품을 무는 놈들이니 상관없다만, 인도가 골치 아플 수 있겠구나.
“우선 알겠습니다. UN안보리 상임이사국이라 참 감회가 새롭네.”
< 제 342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