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40화. >
자연스럽게 내 표정은 좋지 않았다.
안 좋은 소문이라는 건 지나가는 얘기겠지만 그 여파가 당장 아이티 인들에게 배식을 해주고 있는 루시와 우희에게 닿기 때문이었다.
호석역시 내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아는지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뭐 좀, 나왔나요?"
"소문의 출처는 알기 어렵습니다만, 아이티 전체에 퍼진 내용으로 봐서는 계획적으로 움직였다고 보여집니다."
"계획적이다?"
"예, 회장님."
"흐음..."
계획적으로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렸다.
차주에 아이티 전체에 전국민 투표가 예정되어 있었다. 대한민국 자치령에 대한 찬성과 반대, 간단한 투표였다. 물론 내용적으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지만, 투표 자체는 간단하다는 것.
그리고 여론 역시 대한민국의 자치령이 되는 것에 찬성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당장 삶의질이 달라지기 때문.
대한민국 내부에서는 대한민국이 선진국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전 세계적으로 봤을때 대한민국은 선진국이 맞았다.
빠르게 발전했고, 빠르게 성장 한 만큼, 여기저기 아픔이 많지만 국력 자체만 봤을때는 엄연히 전 세계 10위권에 머무는 대단한 국가가 맞았다.
국방력은 물론 경제적으로도 SKY가 크게 기여하고 있음을 부정할 순 없었다. 10위권 밖에 있던 대한민국을 10권 내부로 SKY가 밀어넣었다고 해도 과언이아니다.
"지금 아이티 정치인들이 그렇게 계획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이 됩니까?"
고개를 젓는 호석.
"마킹이 붙어 있었고, 감시자들의 보고에 의하면 정치인들의 이상한 움직임은 없었다고 합니다. 대부분 정치인들끼리 회담이 전부였습니다. 그것도 코드원이 움직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확연하게 줄어들었고요."
"그럼 아이티 내부의 인물이 아닌 외부의 인물이 움직인다는 얘기군요."
"예, 회장님. 지금 그렇게 파악하고 있습니다."
스륵, 입꼬리가 올라간다.
대충 어떤 놈들이 그런 것인지 알 것도 같았다. 확신은 아니지만 심증은 있는 그런 상태. 이제 물증이 필요한 상황이 되었다.
"흐음."
호석이 내 눈치를 살짝 살피더니 넌지시 묻는다.
"각국의 정보부 요원들이 의심됩니다. 회장님."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가 심증을 가지고 있는 상대도 놈들이기 때문.
"그렇죠,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역시 그렇습니까."
"그런데 이게 심증이라."
픽 웃음을 흘리는 호석.
"왜 웃으세요?"
호석이 밝은 얼굴로 말했다.
"물증이랄게 필요한 일입니까? 회장님."
그의 말 뜻을 제대로 이해했다.
"하긴, 여태까지 내가 좀, 막 움직였죠?"
"하하, 예."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던데, 그럼 하던대로 움직여 볼까요?"
"준비하겠습니다."
"그나저나, 각국에서 아주 난리가 나겠네요. 요원들 단체로 처리하면, 어쩌면 전세계적인 공적이 될지도 모르겠어요."
내 말뜻을 이해했는지 호석이 말했다.
"다치지 않게 깔끔하게 처리하겠습니다."
"예, 물증을 확보해야 하니까 그래야 각국에 할 말이 생기죠?"
"이해했습니다."
"일단 잡아서 어디 모아 놓으세요, 내가 직접 확인하죠."
"빠르게 움직이겠습니다."
"눈치가 귀신 같은 놈들입니다. 한방에 싹 쓸어오셔야해요."
"예. 대원들 출동시키겠습니다."
***
땀에 찌든 모습의 알렉세이.
러시아는 365일 더운 날씨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나라였다. 오히려 다른나라 사람들이 춥다고 느끼는게 당연하게 여겨지는 나라.
그렇기에 그에게 카리브해의 따뜻한 온도는 적응 불가와 같은 것이었다. 한 몇년은 지내야 그나마 적응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은 알렉세이.
목 언저리와 겨드랑이 등이 축축하게 젖어가는 불쾌감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헤이."
MI6의 요원 윌리엄이 불쑥 찾아왔다. 그의 손에는 독한 위스키가 들려있는데 그것 역시 별로 마시고 싶지 않았다.
"술은 됐어."
"오우, 웬일이야? 알렉세이가 술을 마다하고?"
"망할 아이티는 내게 너무 덥다고."
"크크큭, 그럴 수 있지."
윌리엄이 옆으로 매고 있던 라탄백에서 곱게 포장된 뭔가를 꺼낸다.
"짜잔."
황금을 줘도 별로 달갑지 않을 상황에 알렉세이는 신경도 쓰지 않고 품에서 다 젖은 담배곽을 꺼내 들었다.
"뭔데 그건."
보자기를 풀자 안에는 투명한 정 사각형의 물체가 들어 있었다.
"얼음?"
"맞았어."
"오우 쉣, 당장 내놔."
얼음은 대환영이었다.
윌리엄은 알렉세이의 숙소에 자주 찾아왔는지 익숙하다는 듯 움직여 술잔에 얼음을 대충 깨부숴 넣고는 위스키를 따랐다.
알렉세이가 허겁지겁 한 잔을 들이켜고 두번째 잔을 받는다.
"알렉세이 네 작전이 제법 먹히는 것 같던데? 이제는 여덟살짜리 꼬맹이들도 SKY를 욕하는 것 같더군."
"겨우 그 정도가 한계인거지."
"크큭, 그래도 엿은 먹였잖아? 어쩌면 차주에 있을 투표에서 많은 국민들이 반대할수도 있다고?"
"51퍼센트만 넘어도 자치령이 되는건 확정 아니겠는가?"
"노노, 49퍼센트의 반대라면 타국이 개입할 명분이 되지."
"글쎄, 그렇게까지 기적적일까? SKY가 하루에 쏟아붓는 돈이 얼만데."
"아이티의 멍청한 개, 돼지들이 알리가 있나."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알렉세이.
"왜, 내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나?"
"우리 연방이었다면 네 놈 모가지가 돌아갔을 거야."
"크큭, 아쉽게도 나는 대영제국 출신이라."
"제국은 얼어죽을."
"소비에트연방이 망한지도 오래라고?"
"씁. 그 얘길 왜 꺼내?"
"크큭."
독한 술을 들이켜고 미간을 찌푸리던 윌리엄이 슬쩍 알렉세이에게 묻는다.
"이제 발을 빼야 하지 않을까?"
어깨를 으쓱이는 알렉세이.
"급하게 움직일 필요 있나? 어차피 우리가 움직였다고 생각하지 않을텐데, 기껏해야 정치인 놈들 몇이 움직였다 생각하겠지, 급한 건 그놈들이니까."
진득하게 입꼬리를 들어올린 윌리엄.
"그런 것 까지 생각했나? 가끔 보면 네가 과연 러시아 사람이 맞을까싶어."
"모욕인가?"
"워워, 그럴리가 있나. 친구 아닌가 친구."
"친구는 얼어죽을."
"크크큭, 어쨌든 이제 SKY가 움직일테니까 몸을 사리라고, 미간에 구멍뚫리고 싶진 않잖아?"
"미친놈들도 아니고 아무런 명분없이 총질을 할까?"
윌리엄이 피식 웃는다.
"이친구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군."
"뭘?"
"SKY는 국가가 아니야, 기업이지."
"그런데?"
"러시아의 기업들과 다르게 제 놈들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짓이든 하는게 기업들의 생리라고."
"네 놈들이나 미국의 방산업체들이 개도국에서 학살을 벌이는 것과 비슷한 얘기인가?"
"영국이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원리는 맞아."
"그래서 SKY가 우리 정보원들을 다 죽인다? 너와 나를 비롯해 이곳에 온 모두를?"
"여차하면 그런짓도 할 수 있다는 얘기지, 여기에 당장 미국의 정보원들이 투입되지 않은 이유도 생각해봐야 할 거야."
알렉세이가 히죽 웃었다.
"우리 연방은 무조건 복수를 할 걸?"
"SKY는 별로 쫄리지 않을 걸? SKY입장에서 러시아는 매력적인 판매처가 아니거든."
알렉세이가 날카롭게 윌리엄을 쏘아본다.
"도대체가 내 속을 긁으면 뭐라도 얻나? MI6의 국장이 지시한 일이야? 러시아 요원놈 이성을 잃게 만들라고?"
"크크크크큭, 자네가 이런 반응이니까 재밌어서 그렇지."
"미친놈."
"자자, 알았으니까 술이나 마시자고, 안주는 뭐 없나? 빈속이라 속이 쓰린데."
"그냥 처먹어, 이 정도는 물이지."
"오, 역시 불곰국."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알렉세이가 돌연 뒤쪽으로 술잔을 던졌다.
퍽, 쨍그랑.
벽이 아니라 사람의 몸뚱이에 부딪혀 깨지는 유리잔.
"뭐야!"
화들짝 놀란 윌리엄이 떨어지는 전기 삼단봉을 피했다. 그래도 요원이라고 제법 날랜 움직임을 보인다.
어느새 알렉세이의 집 안에 SKY PMC의 대원들이 완전무장을 한 채로 진입해 있었다.
"이 미친 새끼들이! 눈에 뵈는 게 없어?"
대원들은 철컥 소리를 내며 소총을 장전하고 들어올린다. 벼락처럼 화를 낼 때는 언제고 윌리엄은 히죽 웃으며 양 팔을 높게 들어올린다.
"항복, 난 항복."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알렉세이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대원중 소총을 들어올리지 않은 이에게 묻는다.
"이게 무슨 일이지?"
"회장님 명령이시다, 네 놈들 모두 제압 후 이송."
"SKY라는 기업이 감히 대 러시아연방의 특수요원을 체포 및 감금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데?"
고개를 끄덕이는 대원.
이내 품에서 SKY항공우주기술이 개발, 제작한 권총을 꺼내더니 알렉세이의 미간을 조준한다.
"반항시 사살, 그것이 회장님 명령이다."
기계처럼 얘기하는 대원의 목소리에 윌리엄이 부들부들 떨리는 입꼬리를 하고는 알렉세이에게 눈짓한다.
"이봐, 일단 내 목숨이 제일 소중한 법이야, 애국도 살아있을때나 할 수 있는 거라고."
"쯧."
알렉세이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손을 들어 올린다.
"항복."
***
내 기분을 위로해주는 것일까? 하늘에서는 구슬프게 비가 내린다. 열대성 스콜일테지만 어쨌든.
사실 크게 기분나쁠 건 없었다. 언제나 내가 하는 행동이 남에게 칭찬받기를 바란다면 욕심이겠지. 나 스스로 떳떳하다 얘기 할 수 없었다. 내 손에 많은 피가 묻었고, 많은 이들이 복수를 꿈꾸며 살고 있을지 모른다.
물론, 혹시라도 복수를 꿈꾸는 놈들이 있을까봐 가능한 한, 확실하게 일 처리를 해 왔다. 세상에서 지워버리면 복수 자체도 불가능 할 테니까.
어쨌든, 빗 소리가 크니 바깥에 큰 소리가 새어나갈 염려는 없을 것 같았다. 물론, PMC의 비밀 벙커 부근이기에 이곳까지 다른 사람들이 들어올 일은 없었다. 바깥에서 각종 첨단장비로 감시하고 있을 대원들이 휴가라도 가지 않는 이상.
끼이이익.
철문이 열리고 내부로 들어가니 퀘퀘한 땅 속 냄새가 불쾌하게 느껴진다. 환기 장치 들이 제대로 설치되어 있을테지만, 비가와서 그런지 땅속 특유의 꿉꿉함은 지워지지 않았다.
"휘이익."
휘파람으로 봄비를 부르며 걸어가니 공손하게 무릎을 꿇고 손을 뒤로 묶은 각국의 정보국 요원들이 보인다.
나를 확인한 그들은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내가 말 했던 것 같은데?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을라고."
이번에도 한국말이었다.
"영어로 말 해 주시오!"
어느 국가의 요원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의 요구사항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자, 밤은 기니까. 어느 놈부터 시작을 해야 할까?"
혼자 신난 사람처럼, 각종 무기들이 정갈하게 놓인 테이블에서 한참 무기를 골랐다.
"오, 이건 뭐에요?"
"의료용 집게입니다 회장님."
"그래요?"
"예, 백부님께서는 그것으로 보통, 손톱이나 발톱, 가능하다면 치아등을 뽑으셨습니다."
몇몇 요원놈들이 움찔 거리는 게 보였다.
"말 하겠소! 내가 말 하겠소! 고문하지 않아도 바로 말 하겠소! 무엇이든 물어보시오!"
나는 집게를 들고 뒤돌아서서는 요원들을 빙 둘러 보았다. 방금 소리친 요원의 말은 깔끔히 무시하고는 한국말로 물었다.
"한국말로 말 할 수 있는 사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이것 봐, 각국의 정보부 요원이라는 놈들도 배우지 않는 언어라니... 할아버지한테 더 분발하시라고 전해주세요 대표님."
"예, 회장님."
"자~ 그럼 어느 놈을 고를까요."
집게가 가리키는 놈들이 하나 둘 어깨를 움츠린다.
이내 나를 느끼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놈에게서 집게가 멈춘다.
"너로 하자. 눈깔 마음에 안 든다."
"말 하게쑵미다?"
"위, 윌리엄?"
그런 놈을 놀란 얼굴로 바라보는 옆에 놈.
나는 옆에 놈을 신경쓰지 않고 한국말을 한 놈에게 물었다. 놈의 이름이 윌리엄인 모양.
"한국말 할 줄 알았네?"
"조금 합니다. 자세한거 잘 모름뉘다."
"오, 좋아좋아. 옆에는 친구?"
"모르는 사람 입니다."
"네 이름 알던데?"
"가명입니다."
"그렇군."
"모든 걸 말 하겠숨미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아냐, 천천히 얘기해."
"네? 왜 그럽니까?"
"너 눈깔이 마음에 안 들더라."
나는 빠른 걸음으로 놈에게 다가가 머리카락을 움켜쥐고는 그대로 집게를 벌려 놈의 오른쪽 눈을 찝었다. 눈 알을 찝을 수 있는 크기가 아니기에 놈의 속 눈썹이 그대로 눈꺼풀과 함께 찝혔다.
"끄윽, 왜, 왜 이럽미까!"
이내 망설임 없이 오른손을 확 잡아 당겼다.
집게에 뭉텅이로 놈의 속눈썹이 뽑혀온다.
"으, 아프겠다."
"크흑..."
놈은 작은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처박는다.
"말 하면 살고 말 안 하면 고통속에 죽는거야. 자, 시작."
몇몇 놈들이 각자의 나라 언어로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한다. 우리 대원들은 놈들이 하는 말들을 열심히 카메라에 담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는 처음 윌리엄이란 느끼한 놈을 불렀던 요원놈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놈만 유일하게 입을 봉하고 있으니까.
< 제 340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