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39화. >
작은 날새들이 지저귀는 평화로운 아침.
나무창을 여니 파도가 눈부신 거품을 만들며 해안가 암석에 부딪히며 무지개를 만들고 있었다.
"캬."
보고만 있어도 마음 어딘가가 평화로워지는 그런 광경이다.
곤히 잠들어 있는 루시를 물끄러미 내려보다 이마에 조심스럽게 키스를 해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해변가로 나갔다.
모래는 곱지만 곳곳에 지진과 해일의 흔적이 아직도 가득한 해변, 덕분에 맨발로 뛸 수는 없고, 꼭 운동화를 착용해야 했다.
내가 대단한 훈련을 해야하는 사람도 아니므로 가벼운 러닝화를 착용하고는 아무도 없는 전세 낸 것 같은 그런 해변을 달려본다.
"후욱, 후욱."
이제 동이 튼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이지만 햇볕은 벌써부터 제 존재감을 드러내려는지 따가울 지경이다. 20분쯤 뛰었으니 아침 운동으로는 훌륭하다. 맨 바닥도 아닌 모래바닥은 그만큼 더 뛰기 힘든 법이니까, 아직 젊은 몸이라 그런지 활력이 돋는다.
"읏차."
적당하게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는 야자 나무에 망설임 없이 뛰어 올랐다. 이곳에 사는 주민들이 야자나무 이곳 저곳에 칼로 상처를 내 놓았다.
올라가서 코코넛을 따기 쉬우라고 만들어 놓은 장치. 원래라면 주변에 코코넛이 씨가 마른 경우가 많겠지만, 이곳은 어쨌거나 SKY의 사유지로서 관리되기에 주렁주렁 코코넛이 탐스럽게도 열려있었다.
올라가서 이놈 저놈을 흔들어 보다 제일 커다란 놈을 하나 빙긍빙글 돌려서 바닥에 떨궜다.
잘 떨어졌나 아래를 내려다 보는데 호석과 이재형이 보인다.
"코코넛 드실래요?"
호석이 히죽 웃으며 답했다.
"주신다면야 잘 먹겠습니다."
이어서 큼지막한 놈 두개를 더 떨구고는 그대로 나무에서 내려왔다.
"아침 일찍부터 오셨네요."
호석이 주섬주섬 코코넛을 주워서 껍질을 벗길 준비를 하고 있는 이재형의 어깨를 툭툭 두들긴다.
"이 친구는 이제 들어왔습니다."
"아하, 간밤부터 고생이 많았겠네요."
"아닙니다 회장님."
이재형에게서 코코넛을 하나 받아들어 군용대검을 적당히 고정시키고 코코넛을 내려 치며 물었다.
"가셨던 일은 잘 됐고요?"
이재형이 부드럽게 웃으며 '예'하고는 작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어느새 내 곁에서 나와 함께하는 사람이 되다니 참, 사람 일이라는 게 정말 어렵고 모를 일이다.
"몇 놈이나 처리했죠?"
"우선을 둘을 처리했습니다."
"누구누구요?"
"복지처장과 새롭게 국방부장이 된 놈을 처리했습니다."
"아, 새로 국방부장도 뽑았어요?"
"예, 알게 모르게 저들끼리 조용하게 처리 한 상태였습니다."
역시나.
쉽게 대한민국의 손에 아이티를 바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열심히들 살고 있네요. 따로 경고의 메시지라던가, 그런건 남겼나요?"
이재형이 고개를 저으며 코코넛의 겉껍질을 전부 찢어버리고 속껍질을 군용대검 끝으로 톡 하고는 까서 내게 준다.
까던 코코넛을 이재형에게 건네고 코코넛을 받아들었다.
꿀꺽, 꿀꺽.
"키야."
달리고 나서 먹는 푸릇푸릇하며 기름지고 고소한 코코넛 물. 과육의 단맛도 살짝 감도는 이 맛에 은근히 중독된다. 처음에는 마치 평양냉면을 처음 먹었던 때 처럼 이게 무슨 맛인가 싶었지만, 먹다보면 중독되는 맛이다.
"뒤지다 보면, 깨닫겠죠."
"예, 밤마다 한 두명씩 처리하겠습니다."
"명단에 올린 놈들은 모두 몇놈입니까?"
"총 19명으로 그들만 없다면 당장 중추가 무너질 겁니다."
"며칠 안 걸리겠네요."
"예, 회장님."
***
3일 뒤.
오늘따라 유독 PMC훈련소의 배급 줄이 적어 보였다. 아이티 사람들이 이제 배급을 떠나는 차량들을 믿기 때문일까?
"사람이 좀 적네요?"
호석이 고개를 주억거린다.
"예, 오늘 음식은 조금 남을수도 있겠습니다."
"이것 참, 별 일이 다 있네."
크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난 오늘도 국을 퍼 담는 일을 담당했다. 환경을 생각하기에 우리는 플라스틱 용기나 종이 용기가 아닌 순수 코코넛 용기를 포장용기로 선택하고 있었다. 보온성이 대단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환경을 생각한 그릇으로는 아주 훌륭했다.
그릇을 조심스럽게 받아든 특유의 똘망똘망한 눈이 예쁜 여자 아이 조에.
예쁜이름 처럼 정말 예쁜 아이였다. 아이의 눈을 보고 있자면 나까지 순수해질 것 같은 그런 눈.
경제력은 쥐뿔도 없으면서 어째서인지 출산율은 높은 나라 아이티. 그런 그들을 욕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저, 이런 천사같은 아이들이 안타까운 환경에서 자라는 것이 조금은 마음 쓰일 뿐.
"우진."
아이가 나의 이름을 부른다.
영어가 서툰 아이기에 이름과 드문드문 단어들만 말할 수 있는 상태. 나는 최대한 친절한 표정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왜 불러 조에?"
"아저씨 나쁜 사람?"
"음? 내가 나쁜 사람이래? 누가? 아임 낫 배드 가이."
"노노, 아저씨 나쁜 사람! 하늘이 싫어하는 사람."
대충 의미는 알겠는데 정확히 이해했냐하면 그건 아니었다. 어린아이가 하는 단순한 툴툴거림으로 생각 할 수도 있겠지만, 요 며칠간 봐왔던 조에가 어떤 아이인지 알고 있기에 갑자기 내가 나쁘다고 하는 이유가 몹시 궁금했다.
"자예스?"
"네, 회장님."
아이티인이면서도 유창한 영어를 할 줄 아는 교사출신의 SKY의 인재가 된 인물을 호출했다.
"통역좀 해줄래요?"
"네."
"조에, 내가 왜 나쁜 사람이야? 하늘이 싫어하는 사람? 그건 무슨 의미고?"
조에의 말을 한참을 듣던 자예스가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얼핏 화가 난 듯 보이기까지 했다.
"음... 회장님께서 불운을 몰고 다니고... 그 불운 때문에 아이티에 지진이 일어났으며, 반군이 준동해 양민들을 학살한다 합니다... 회장님이 악마의 자식이라고..."
"푸핫."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눈썹을 꿈틀거리며 과장되게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조에에게 양손을 벌리며 와락 조에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히끅!"
잔뜩 놀란 조에가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날 바라본다.
"이래도 아저씨가 악마의 자식처럼 보여?"
자예스가 얼른 통역을 해주자 도리도리 고개를 젓는 조에.
"아저씨는 하늘이 버린 자식이 아니라, 하늘이 내린 자식이야 조에. 악마가 왜 조에에게 매일 맛있는 음식을 주겠어? 안 그래?"
"으음."
"아저씨 믿어도 돼, 아저씨랑 대한민국이 아이티에 함께하면, 우리 조에는 더 이상 밥 걱정 하지 않아도 될 거야, 약속."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고개를 갸웃거리는 조에.
나는 아이의 여린 손을 잡아 새끼손가락을 잡아 내 새끼손가락에 걸었다.
"약속이라는 거야, 반드시 지켜야 하는."
"약속?"
"그래, 약속. 조에랑 아저씨랑 약속할까? 앞으로 조에가 행복할 수 있게, 아이티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게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정말?"
"그럼, 정말이지."
"우웅... 약속한거야?"
"그럼~"
나는 웃으며 조에의 새끼손가락을 내 새끼손가락으로 꼭 쥐고는 몇번 흔들다 놓아주었다. 그리곤 아이가 들고 있는 도시락을 다시 점검 해 주고는 손을 흔들어 주었다.
조에는 '악마의 자식'이라고 한 게 미안했는지 나를 힐끗힐끗 쳐다보다 고개를 푹 숙이고는 그 앙증맞은 다리로 도도도 달려간다.
그 모습에 마음 한켠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저런 아이들에게 행복을 주는게 맞다.
"헛소리를 지껄이는 주둥이는 찢어버려야 맞고."
"예?"
통역을 해 줬던 자예스가 한국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웃으며 자예스의 등을 툭툭 두들겨 주고는 멀리 보라색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호석을 바라보았다.
눈치껏 앞치마를 벗은 호석이 조용히 내게 다가온다.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조사 좀 해 보세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조에 알죠?"
"그럼요, 그 귀여운 아이를 어떻게 잊겠습니까? 아까도 몰래 소세지 두개를 더 챙겨줬는걸요."
"조에가 저 보고 악마의 자식이라고 하더군요, 자연재해와 내란을 몰고 다니는."
팍 인상을 찌푸리는 호석.
"혹시 정치인들이 흘리는 헛소문일까요?"
"그러니까 조사가 필요하겠죠?"
"바로 움직이도록 하겠습니다."
***
SKY의 로고가 그려진 나무 식기로 열심히 SKY가 만든 도시락을 먹으면서 입을 놀리기 바쁜 사람들.
"그 얘기 들었어?"
"무슨 얘기?"
"아니 글쎄, 얼마 전 부터 사람이 죽어나가고 있데."
"에이, 우리나라에서 사람 죽어나가는 게 하루 이틀 일이야?"
"어허, 이 사람 참. 우리나라에서 사람 죽을 때는 몇 가지 정해진 게 있었잖은가?"
"그게 뭔데?"
"굶어죽거나, 경찰에 잡혀 죽거나, 갱단에 잡혀 죽거나."
"그랬지."
"그런데 이번에는 글쎄 암살이라고 하더군."
나이가 제법 있어 보이는 사내의 말에 주변에서 도시락을 먹던 사람들도 집중하기 시작했다.
"듣기로는 SKY가 우리 아이티를 지배하려고 수작을 부리는거라고 하던데? 암살 당하는 사람들 모두가 원래 아이티의 고위공직자들이라는구만."
"잘 됐네, 그 놈들은 죽어도 싸."
"어허, 이사람. 아이티가 다시 식민지배를 당할지도 모를 일이야! SKY의 그 천우진이라는 사람이 히틀러 저리가라 하는 악마라는 소문이 있어."
"에이, 사람이 어떻게 악마야? 이렇게 도시락도 나눠주는데?"
주변 사람들이 '맞아맞아'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이게 다 악마의 속삭임인 거지, 자 봐봐, SKY가 오고 지진이 왔지? SKY가 오고 반란이 일어나서 내전이 발생했고, 거기서 죽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줄이나 알아?"
"SKY가 와서 굶어죽을 사람들을 살린게 더 많을 것 같은데?"
불쑥 들려온 목소리에 대화를 나누던 사내들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SKY에 고용된 자예스가 물끄러미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회장님이 너희들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음식을 나눠주고 계신다. 그런데 뒤에서 이런 모함을 해?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내 이종사촌인 나딘 네 놈이!"
신랄하게 천우진을 욕하던 사내의 멱살을 움켜쥔 자예스.
"켁켁, 이, 이거 놔!"
"이 은혜도 모르는 원숭이 같은 놈! 이러니 우리 흑인들이 노예로 부림이나 당하는 것이다!"
"이익, 네 놈은 달라? SKY에 딱 달라붙어 있는 주제에!"
"덕분에 네 어머니, 네 아버지도 삼시세끼 밥을 드시지, 내가 벌어오는 돈으로 말이야. 너는 밥만 축내며 여기서 은혜도 모르는 짓거리를 일삼고 있고."
"은혜는 무슨 은혜? 이게 다 악마의 속삭임이라니까!"
"악마는 너 같은 놈들이 악마야!"
퍽.
자예스의 주먹이 나딘이란 사내의 얼굴에 닿았다.
"쳤어?"
자예스는 나딘을 깔끔하게 무시하고는 이쪽에 집중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잘 들어!"
목이 찢어져라 지른 소리에 사람들이 숟가락질을 멈추고 자예스를 빤히 바라본다.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줄 알아. 지금 당신들이 그래! SKY가 대가 없이 우리에게 보내주는 이 호의를 우리가 권리라고 생각하면 당장 내일 아침에라도 보급이 끊길 수 있어! 알아 들어?"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이 없었다.
"악마? 내 눈에 SKY의 천우진 회장님은 천사야! 하루에 우리 아이티에 그분이 쏟아붓는 금액이 얼마인지나 알아?"
바닥에 쓰러진 나딘을 날카롭게 쏘아보는 자예스.
"얼마인지 아냐고!"
"내가 그딴 걸 어떻게 알아?"
"작년에 네가 돈벌이가 좋은 일을 하고 왔다며 월급으로 얼마를 받아왔지?"
나딘이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당당하게 외쳤다.
"280불!"
다시 고개를 들어올린 자예스가 사람들을 둘러보며 외쳤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월급으로 280불을 받아본 사람이 있나?"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SKY그룹의 천우진 회장님이 우리 아이티 국민들을 위해 하루에 얼마를 쓰고 있으실 것 같아? 나딘. 그냥 생각나는대로 지껄여 봐, 그 멍청한 머리로."
"이익, 몰라, 1만불? 10만불?"
"네가 맛있게 씹고 뜯던 그 도시락이 자그마치 2달러 짜리지."
사람들이 자신들이 들고 있던 도시락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런데 SKY그룹 천우진 회장님은 그 2달러짜리 도시락을 하루에 3끼 꼬박꼬박 돌리고 있지. 자그마치 300만명분을 말이야. 그 멍청한 대가리로 계산이 되나?"
"... 처, 천팔백만 달러?"
"그리고 그 식량을 무료로 나눠주는 일에 우리나라 사람들을 고용해서 인부로 부리지, 하루에 약 30불의 임금을 주면서 2100명을."
"......"
싸늘하게 주변을 훑는 자예스.
"다시 한 번, 감히 SKY그룹의 천우진 회장님을 안 좋게 거론한다면 그 잘난 주둥이를 내가 반드시 찢어주지, 명심해 나 자예스, 한 때는 아이티와 멕시코, 미국을 오가던 갱단이었다는 걸."
< 제 339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