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34화. >
호석의 명령에 멈춘 대원들. 민간인들을 위협하거나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걸 호석은 알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자연재해 상황이지만, 그래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대한민국은 아이티를 완전히 흡수한것이 아니니까.
피를 흘리고 먼지를 덮어 쓴 사람들이 애처롭게 장자크에게 매달린다. 장자크가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사람들을 뿌리쳐 차량으로 돌아와 창문을 노크한다.
"무슨일입니까?"
내 질문에 장자크가 미안한 얼굴로 날 바라본다.
"식량이 없다고 합니다."
차를 막아선 사람들.
그들 모두가 배고픔을 호소하고 있었다.
호석이 인상을 찌푸린다.
“그러니까 배고파서 우리를 잡았다?”
“예.”
배고픔.
배고픔에 시달리며 산 사람이 아니라면, 그것은 하찮게 여겨지는 법이었다. 호석이 쓰게 웃으며 날 힐끗 바라본다.
“살려고 그랬나보네요.”
장자크가 격하게 고개를 주억거린다.
나는 마이크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SKY와 대한민국이 오늘 밤부터 식량을 배급해준다고 얘기 하세요.”
호석이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본다.
장자크 역시 마찬가지.
“정말이십니까?”
“예, 금일 밤부터 곳곳을 돌아다니며 식량을 배급할테니까 믿으라고 하세요.”
장자크가 얼른 마이크를 잡고는 방송을 시작한다. 방송을 듣는 사람들이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 하는 모습.
“대한민국과 SKY는 반드시 약속을 지킨다고 전해주세요, 우리는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계속해서 대피 방송을 해야 하니까 길을 트라고도 하시고.”
이어지는 장자크의 말이 확성기를 통해 바깥으로 흘러나가자 사람들이 막고 있던 길을 비켜선다.
다시 차량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장자크는 전과 똑같이 대피 방송을 시작한다.
“우리가 보유한 식량이 얼마나 됩니까?”
호석이 흐뭇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이티에는 SKY식품이 있습니다 회장님.”
익히 알고 있는 사실.
그러나 잊고 있던 사실.
아이티 섬에서 식량자원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SKY식품. 그러면서도 대량재배를 위해 농사를 진행하던 중이었다. 당연히 식량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는 소리와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나는 그 정도 양에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천만명이 먹으면 얼마나 버팁니까?”
놀란 눈이 된 호석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묻는다.
“아이티의 모두를 먹여살리실 작정이십니까?”
“모두는 아니겠지만 대부분은 되겠죠.”
“허.”
장자크는 잠시 방송을 멈출 정도로 놀란 표정이 되어 있었다.
“우리 PMC의 창고에 5000명의 한달 식량이 비축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 비상시에 대비한 전투식량입니다.”
장자크가 조심스럽게 마이크를 끄고는 말했다.
“우리 아이티인들을 먹여 살리려면··· 최소한 50만명분의 음식은 있어야 할 겁니다.”
나와 호석이 놀라워 하며 장자크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분명한 ‘영어’였지만, 나와 호석의 대화는 한국어로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
“한국 말 할 줄 알았습니까?”
고개를 저으며 영어로 대답하는 장자크.
“한국사람들이랑 벌써 6개월 째 일하는 중입니다. 조금은 알아 듣습니다.”
언어적으로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현장일을 하면서 듣는 한국말이 그리 많지는 않을텐데, 우리 대화를 대충 유추할 수 있는 수준에 올랐다니 말이다.
“50만명 정도는 먹여 살려야 한다 했습니까?”
호석의 영어 질문에 장자크가 고개를 주억거린다.
“예, 많은 사람들이 먹을 것을 걱정하지만··· 특히나 소외된 사람들은 또 있습니다.”
들었냐는 듯 날 바라보는 호석.
아이티에 손을 뻗는 순간.
이미 식량 지급을 각오하고 있던 나로서는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SKY LINE의 화물선과 화물항공기로 따로 보급을 받으면 됩니다. 큰 일 아니에요. 무턱대고 계속 지원해주는 것도 아니고, 식량자원을 구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과정까지만입니다.”
“음, 한두푼이 아닐겁니다.”
조심스러운 호석의 말.
난 고개를 저었다. 소요 비용이 그렇게 크다고 생각되지 않기 때문.
“그 정도는 푼돈이니 괜찮습니다.”
호석이 뿌듯한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하지마라, 돕지마라, 헛돈이다 말로는 그리 하지만 그도 내심 아까전 차량을 막아서던 아이들이 보였던 모양이다. 사실, 개도국을 방문하면 흔히 있는 일이었다 남루한 옷을 입고 돈을 구걸하거나 먹을 것을 구걸 하는일이 말이다.
그러나 그런 삶과는 거리가 먼 국가에서 온 사람들은 당황하고 안쓰러워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그것을 이용해먹는 죽일놈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IT의 GDP를 바싹 끌어올릴 생각이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길어야 두어달만 지원 하면 될 겁니다. 자급자족이 가능케 만들면 되니까.”
“예, 회장님.”
“그래서 SKY식품은 식량을 얼마나 보관하고 있습니까?”
“코코넛과 옥수수, 사탕수수, 밀과 감자, 카사바, 열대과일등을 보관하고 있을 겁니다. 원래 매입했던 부지들을 싹 걷어내면서도 식량들이 나왔으니까요.”
코코넛은 나도 봐서 안다.
정말 창고 가득 코코넛 산이 쌓여 있었기에 어마어마한 양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코코넛은 어디까지나 급할때 식수용 정도로 생각해야 한다. 몇가지 과정을 거쳐야 그럴듯한 식량이 되는 것이다.
“일단 뱉은말은 지켜야 하니, PMC 창고에 있는 비상식량부터 차량에 적재하도록 하세요, 그리고 이런 방송차를 몇대 더 만드세요, 조악해도 상관없습니다.”
“대피한 사람들이 방송을 듣고 배급을 받으러 올 수 있게 만들라는 말씀이시군요.”
“예, 방송은 여기 장자크 반장의 목소리를 녹음해서 연속재생 하면 되겠네요, 고물장수처럼.”
“하하, 알겠습니다 회장님. 바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노력만 한 다면, 이 자연이 살아 숨쉬는 아이티에서 식량에 허덕이다 죽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배움이 부족하고 노력이 부족해 굶어죽는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물론 여러가지 이해관계와 이권관계가 엮여 있을테니, 함부로 어류자원을 캘 수 없고, 함부로 나무에 열린 과일들을 딸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법 보다는 주먹이 가까운 곳이었으니, 상대적 약자들은 언제나 등한시 되었을 테니까.
“어류자원도 확보할 수 있는 방안이 있나 검토해보세요, 필요하다면 그것도 끌어다 써야죠.”
섬나라의 이점을 굳이 썩힐 필요가 없었으니, 해상자원 역시 이용하는 것이 옳았다.
“예,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해일의 전조는 아직 별 얘기가 없나요?”
“예, 회장님.”
“일단 진행하세요.”
***
긴급 구호 물품 이라는 명목하에, 전 세계 이곳저곳에서 아이티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었다. 얼마전 언론에서 집중조명 했기 때문에 알려진 것도 있었지만, 사실 대부분의 국가는 대한민국과 SKY를 견제하기 위해 도움을 위장한 정보원 파견이 목적이라 할 수 있었다.
SKY건설은 급하게 움직여 공항을 확장시키고 선착장을 확장시키는데 전념했다. 아직은 대한민국의 자치령이 아니지만, 훗날 자치령이 되면 대가를 톡톡히 받아낼 생각이었을 터.
한 마디로, 현재는 무료봉사나 진배없는 짓을 아이티인들에게 임금을 줘가면서도 진행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화물을 싣고 러시아에서부터 날아온 알렉세이가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비행기에서 내린다.
“염병할 화물선, 더럽게 흔들리네.”
골이 아픈지 관자놀이 부근을 꾹꾹 지압하며 주변을 훑는 그. 과연 이곳이 재난상황을 겪었다는 아이티란 곳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붐비는 공항을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그.
프랑스, 영국, UN, 이스라엘, 미국, 독일, 캐나다 그 밖의 기타 등등 여러 국가들의 국적 화물기가 보인다.
“쯧.”
푸틴에게 특명을 받고 날아온 알렉세이는 대충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있었다. 심지어 몇몇은 아는 얼굴도 보였다. 정보요원,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비밀스러운 임무를 처리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세상이 아무리 넓다 해도 아는 사람들은 꼭 마주치게 되는 법이었다.
저기 영국 MI6에서 비밀리에 아이티로 보낸 윌리엄이 그랬다.
알렉세이가 그를 알 듯, 그 역시 알렉세이를 알았다.
“오, 이게 누구야, 알렉세이잖아?”
“오랜만이다 윌리엄.”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는 그들.
“너도 나랑 같은 일?”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알렉세이.
“알렉세이, 우리 정보를 교류하는 건 어때? 어차피 SKY와 대한민국에 대한 감시가 목적일 거 아냐?”
“글쎄다 너 같은 놈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
윌리엄이 능글맞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콕콕 알렉세이를 가르킨다.
“여기 있네, 나 믿는 놈.”
알렉세이가 피식 웃음을 흘리자 품에서 미니어처 위스키 몇 병을 꺼내 알렉세이에게 건넨다.
“딜?”
“콜.”
고작 미니어처 위스키 몇병에 넘어간 것 처럼 보이는 알렉세이. 피식 웃으며 자신도 하나의 위스키 미니어처의 뚜껑을 열고는 열심히 화물을 내리고, 그 화물을 품목별로 정리하고 있는 사람들을 구경한다.
“보통 빈국들은 체계가 엉망인데, 여기는 특이하네 안 그래?”
알렉세이 역시 잭 다니엘 미니어처름 음미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게 말이야, 작다 못해 코딱지 만한 나라의 공항 크기도 매우 놀랍고 말이야.”
“계속 확장 공사와 활주로 정비 공사를 진행하고 있는 모양이던데? 저기 봐봐, 밤낮 없이 공사를 진행하는 모양이야. 라이트까지 완벽하게 구비가 되었군.”
“이런 나라에 우리가 지원을 하는게 맞긴 한 거야? 잘 돌아가고 있는 것 같은데?”
“뭐, 그것도 이번 달이 끝이 아니겠어? 앞으로는 대한민국의 자치령이 된다잖아?”
윌리엄의 말에 알렉세이는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공사 책임자들이 하나같이 동양인들이군.”
알렉세이의 말에 윌리엄이 그걸 이제 알았냐는 듯 픽 웃으며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킨다. 중장비들 마다 작은 깃발을 하나씩 꽃고 있는데 그곳에는 SKY의 엠블럼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기 때문.
“다 SKY가 주도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거잖아.”
“음, 그렇군.”
“쟤네가 무료로 공사를 하고 있다더라, 이번 재난상황 때문에 갑자기 공항이 넓어질 필요가 있었다나 봐.”
“기업이 무료로 일을 돕는다고?”
“SKY가 제법 좋은일 많이 하는 기업으로 유명하다고 친구, 하여간 임무 말고도 국제정세에 좀 관심을 가지라고.”
“난 각하께 헌신하는 군인이다. 임무외에는 관심이 없다.”
미친놈같은 소리를 하는 알렉세이 덕분에 윌리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계속 위스키를 홀짝였다.
“그나저나 공항 꼬라지만 보더라도 식량 따위는 별로 필요가 없을 것 같기도 한데 말이야. 러시아는 뭘 가져왔어?”
“우리도 식량을 가져왔다.”
“아이티놈들 배 터지겠구만, 저쪽 독일이랑 프랑스도 식량위주라고 하던 것 같던데.”
“흠, 윗선의 생각이 대부분 비슷했던 모양이군.”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알렉세이와 윌리엄의 근처로 누군가 다가왔다.
“반갑습니다. 우리는 혁명단이라는 의병단체에서 나왔습니다.”
능숙한 영어로 대답하는 흑인을 빤히 바라보던 윌리엄이 짝 박수를 치며 말했다.
“어! 말포이!”
“그렇습니다. 제가 혁명단 부단주 말포이입니다.”
“이야, TV스타를 여기서 보네.”
“감사합니다. 저기 모든 국가의 책임자들이 모여 있는데 함께 저쪽으로 가서 회의를 진행하시겠습니까?”
“아, 그러죠.”
윌리엄은 황급히 위스키 빈병들을 어디로 들어가는 지 모를 품 속에 쳐 박는다.
공항 관제탑 바로 아래에 쳐져 있는 천막들, 얼핏 보면 군인들의 야전 캠프 같은 비주얼을 자랑하고 있었다.
알렉세이는 ‘호오’하며 감탄을 하면서 그 텐트들 사이를 걸어, 지휘부로 보이는 가장 큰 텐트 앞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말포이가 사라지고 윌리엄과 알렉세이가 당당히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각국의 화물 책임자들이 가득한 공간.
저렇게 많은 인물들이 한 공간에 있다면 시끄러울 법도 한데, 어째서인지 모두들 자리에 앉아 가장 상석에 앉은 사내만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알렉세이 역시 사내가 누군지는 익히 알고 있었다. 지겹도록 임무 숙지를 하며 다각도, 다양한 표정을 보며 얼굴을 익힌 SKY그룹의 최고경영자 천우진이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왔으면 앉으세요, 바로 시작할테니.”
털썩 빈자리에 앉은 알렉세이와 윌리엄.
“자, 그럼 대충 전부가 모인 것 같네요?”
윌리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아직 몇몇 국가에서는 안 온 것 같은데요? 미국, 스위스도 그렇고, 터키도 그렇고.”
천우진이 히죽 입꼬리를 들어 올리고는 얘기했다.
“아니요, 여기 계신 분들만 오시라 했습니다. 다른 국가의 사람들은 상관 없어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들.
“여기 있는 분들은 국제법상, 타국에서 스파이 활동을 금지하고 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겠죠?”
순식간에 놀란표정이 된 그들. 이내 너털 웃음을 터트리는 인물들이 곳곳에서 등장했다.
알렉세이는 표정을 굳히고는 가만히 주변을 살폈다. 그러고보니 윌리엄을 포함해 몇몇 아는 얼굴들이 보인다.
“새끼들이, 귀엽네.”
알 수 없는 한국말을 지껄인 천우진을 올려다 보는데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그의 두눈을 확인한 알렉세이.
“아.”
당장이라도 자신을 집어 삼킬 것 같은 천우진의 두 눈에 저도 모르게 탄성을 토해낸 그. 어째서인지 온몸에 솜털이 곤두서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있었다.
< 제 334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