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33화. >
경고 방송을 위해 특수제작된 PMC의 군용 짚차에 막 시동을 걸었을 때.
“회장님, 전화입니다.”
“누구요?”
“백부님이십니다.”
호석이 백부라 부르는 사람은 지구상에 한분 뿐이었다.
“예, 할아버지.”
-이 놈아! 사지육신 멀쩡하면 멀쩡하다고 보고부터 했어야지!
할아버지의 커다란 호통에 입꼬리가 스륵 올라간다.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따뜻한 마음이 느껴지기 때문.
“아, 경황이 없어서 연락을 놓쳤네요.”
-내가 전세기를 부를 뻔 했다 이놈아.
“하하하, 별 일 없습니다 할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진도 5.8에서 6.2사이라며, 그런데 별일이 없어? 그 정도면 제법 강진 아니더냐?
“SKY건설은 중국 건설사들처럼 일을 대충하지 않거든요.”
-확실한게냐?
“예.”
-흐음···
뭔가 석연찮다는 할아버지의 반응.
“왜 그러세요?”
-CNN에서 보도하는 그림은 별 일 아닌 게 아닌데?
“CNN에서 아이티 지진을 보도하고 있나요?”
-그래, 긴급 입수 된 화면이라면서 속보로 내보내고 있다.
“아아, 수도부근에 해외 언론사들이 아직 머물고 있었나 보네요.”
-수도는 얼어죽을 그 작은 나라에서.
너무 맞는 말이라 뭐라 반박할 게 없었다.
부르릉.
차량의 시동이 걸리고 마침, 내가 향하는 곳도 아이티의 수도 포르토프랭스 부근이었다. 가장 사람들이 밀집해 있는 공간이기 때문.
“어쨌든 제가 지금 좀 바쁩니다.”
-건물들이 원채 낮아서 다행이지, 그래도 무너지는 건물들이 제법 많더구나. 그런데도 멀쩡하다고?
“예,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내 똥생이들은 괜찮겠지?
“그럼요, 저보다 태양이 별이가 먼저죠.”
-그래, 조금만 다쳐도 네 놈을 바닥에 매다꽃을테니, 그리 알아라.
살벌한 협박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온다. 수화기 너머로 할아버지의 괄괄한 목소리가 새어나갔는지 호석 역시 피식 웃는다.
중요한 건, 마냥 웃을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 80을 바라보시는 할아버지지만 거짓말을 조금 보태서 나보다 더 체력이 좋으시다. 또, 육탄전에 아주 이골이 나신 노병이기 때문에 근력과 체력면에서 내가 우세하다고 해도 매번 대련 때마다 바닥에 누워 있는 건 나였으니까.
“털 끝 하나도 안 다칠테니 염려 마십쇼.”
-오냐··· 그보다 지원은 필요 없겠더냐? 특사들이 보내온 조약서는 잘 봤다. 뭐, 말이 조약서지 니네 나라 내놔라 하더구나, 을사늑약 서류가 이러할까?
“에헤이, 큰일 날 말씀을, 대한민국이 손해면 손해지 이득이 없는 내용입니다.”
-멀리 봐야지, 네 놈도 멀리 본 것이 아니더냐? 아메리카 본토까지 우리 군사력의 영향권에 들어오는 일이다.
역시 할아버지는 내 의중을 꿰뚫고 있었다.
북대서양 조약기구 일명 NATO.
그 중에 가장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미국과 가장 근접할 수 있으며, 미국보다는 먼 거리지만 어쨌든 영국과 지중해 등등, 해양 루트가 단축된다 할 수 있었다.
이 카리브해에 있는 아이티는 그래서 SKY에게도 대한민국에게도 중요한 것이다.
무역도 무역이지만, 군사적으로 특히 더.
NATO는 본래, 러시아를 견제하고자 만들어진 것이었고, 지금도 그 의미를 표방하고 있지만, 사실상 해당 조약기구에 먼저 가입한 서구 열강들의 리스크 나누기에 지나지않는 기구라 할 수 있었다.
상대적으로 국력이 부족한 나라들은 조금이나마 해당 기구에 가입해 ‘보호’를 받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테다.
그리고 그 핑계로 미국과 영국들은 공산주의가 러시아 땅을 벗어나지 못하게 막으려는 것이다. 러시아를 천천히 갉아 먹으며.
그것을 아는 러시아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은 상대였다. 과거 냉전시절, 천문학적인 예산을 투입해 러시아보다 먼저 달에 발을 디딘 우주사업만 보더라도 러시아를 얼마나 견제 하는 것인지 알 수 있는 부분.
“그래서 제가 좀 바쁩니다.”
-흠, 뭔가 또 꾸미는구나.
“위기속에 기회는 늘 있는 법이죠.”
-위기는 무슨, 멀쩡 하다 하지 않았더냐?
“예 멀쩡합니다.”
-어쨌든 알았다. 서둘러서 돌아 와. 외지에 너무 오래 머무는구나.
“이제 이 땅도 대한민국 땅입니다.”
-아직은 아니잖느냐?
“곧 입니다. 곧, 한달 뒤 투표때 결정 되겠죠.”
-흠, 그렇군. 뭐 필요한 것은 없더냐? 당장 지원이 필요할 듯 싶은데.
“전혀요, 이미 철저하게 대비했습니다.”
-그래?
“저 할아버지 손잡니다.”
-여전히 자신만만하구나.
“뭣하면 군인들이나 좀 보내 주십시오, 공병대가 좋겠군요.”
수화기 너머 피식 거리는 할아버지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 놈이 공짜로 인부들을 써 먹으려고?
“에헤이, 군인들 월급은 줘야죠.”
-싸게 부리겠다는 뜻이더냐?
“여기 아이티 인들이나 군인들 월급이나 그게 그겁니다.”
-음, 하긴 그렇겠구나.
실제로는 군인들의 월급이 더욱 싸다. 징병제의 어쩔 수 없는 장점이자 단점이랄까? 그러나 격오지근무, 파병등의 수당을 더 챙겨줘야 하니 이곳 아이티인들의 월 평균 월급 8만원 보다는 많이 들어간다.
“한국 군인들 주둔시설 만들어야하지 않겠습니까?”
-오호, 벌써 거기까지?
“이왕이면 SKY건설의 기술자들이 설계해주는대로 만드는게 좋을 겁니다. 아이티란 국가는 자연재해가 많으니까요.”
-그래?
“예, 자연재해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초기 투자비용은 들겠지만 오랫동안 롱런 하려면요.”
-이해했다. 군인들이라··· 곧 파병하마.
“예.”
위성전화를 호석에게 건네자 어느새 해안가 마을 주변에 다다른 차량.
힐끗, 차량에 동승하고 있는 아이티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이티 말은 할 줄 알죠?”
아이티는 불어와 아이티 크래올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 과거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았던 일 때문에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불어를 쓸 줄 알았다.
우리 한국의 어르신들이 아직도 일본어의 잔재를 아무렇지 않게 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유독 밝게 보이는 흰자위를 더욱 크게 보이게 만들더니 이내 픽 웃는 아이티인.
잔뜩 긴장한 모습이 역력하더니 농담 한마디에 긴장이 제법 풀린 모습이었다.
호석은 내 의중을 눈치챘는지 얼른 확성기 마이크를 그에게 건넨다.
마이크를 받아 들고는 날 빤히 바라보는 아이티인.
“이름이 뭡니까?”
“장자크입니다.”
호석이 첨언을 더 한다.
“우리 건설사에서 현장반장을 하는 사람입니다. 아이티인들과 원할한 소통의 창구 역할을 해주고 있습니다.”
“그럼 아이티 말은 무척 자연스럽겠네요.”
“자신있습니다. 불어도 유창하게 합니다.”
눈짓으로 마이크를 가리키고는 말했다.
“해일이 올 수 있으니 해안가에서 대피해 해발고도가 높은 곳으로 움직이라고 전하세요, 여진이 있을 수 있으니 당연히 건물이 있는 곳은 피하는게 좋을 겁니다. 뭔가 떨어지거나 무너질 수 있으니까.”
“이해했습니다.”
크래올어와 불어를 번갈아 가면서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는 장자크.
방탄유리 밖을 보니 먼지떼가 잔뜩 묻은 아이티인들이 바깥으로 나와 확성기 소리에 집중하는 게 보였다. 그러고는 뭔가 서두르는 듯한 행동을 보인다.
차량의 안내를 듣고 위험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계속 움직이세요, 해일이 올지 안 올지 모르지만, 해일이 오기전에 해안가를 돌고, 그다음이 내륙으로 들어갑니다.”
“예, 회장님.”
***
3자 정상회담이 끝난 밤.
푸틴은 CNN의 실시간 보도를 눈으로 보며 보좌관에게 물었다.
“국제 여론은 어떻지?”
“다른 나라의 재난 상황에 동정의 뜻을 표하고 있습니다.”
“당장 아이티에 필요한 게 무엇이라 생각하나?”
“먹는 것, 입는 것, 거주하는 곳. 인간에게 꼭 필요한 3요소 아니겠습니까?”
“그 셋 중 하나를 골라라? 식량은 좀 그렇군, 우리 군도 여유가 넘치는 건 아니니."
오래전부터 식량문제 때문에 항상 발칸반도 인근을 사수하려던 러시아였다. 그 부근에 최대의 식량생산지라 할 수 있는 우크라이나가 붙어있기 때문.
유럽의 곡창지대라 부를 정도로 풍부한 식량자원, 농사짓기 좋은 땅. 그것 때문에 러시아는 기를 쓰고 우크라이나와 관련된 일에 달려드는 것이었다.
척박한 러시아의 땅에는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공간이 한정적이었다. 국토 면적은 세계 최고지만 식량 생산지는 그렇지 않기 때문, 물론 해상자원은 풍부한 편이지만 사람이 밥만 먹고 살 순 없잖은가? 반찬도 먹어야지.
어쨌든, 식량 문제는 러시아로서 예민할 수 밖에 없으니, 식량지원을 하긴 어렵다는 얘기였다.
"가장 가시적인것은 식량이라고 판단됩니다."
"으음."
보좌관의 말이 설득력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푸틴으로서는 고민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비용소요는 얼마나 될거라고 예상하지?"
"선전비용이고 지원 수준이기 때문에 UN이나 세계구호기구들과 비슷한 수준이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음, 그럼 그렇게 하지."
"예, 준비해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어지간하면, 최소 비용으로 처리할 수 있게 하고, 가급적이면 인력을 투입시키는 방향으로 진행시켜."
"예, 각하. 의료진을 비롯해 군인들을 구조대원으로 위장해 보내겠습니다."
"좋아."
***
해안가 인근의 마을 전부가 안정한 장소로 대피한 것을 확인한 나는 손목을 들어 시계를 확인했다.
소요된 시간은 약 2시간 가량이었다. 천천히 움직이며 확성기로 방송을 했는데 해안가 마을을 전부 순회하였다는 것은 그만큼 아이티라는 국가가 작다는 방증.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차량은 도심지에 진입했다.
"확실히, 이쪽이 더 심각하군요."
고개를 주억거리는 호석.
해안가 인근의 마을들은 타국의 재벌들이 만든 리조트나 호텔등지만 피해를 입고 다른 마을들은 상대적으로 큰 피해를 입지 않은 상태였다.
아이러니 하게도 돈이 없어서 거의 판잣집 수준의 건축물이었기에 무너졌다 하더라도 재산피해만 있을뿐 인명피해는 적은 것이다.
물론 재산피해 역시 몇푼 되지 않는 돈이었다. 곰팡이가 쓸고 다 썩어가는 목재로 지은 무허가 판자촌이 얼마나 하겠는가.
그러나 도심지는 달랐다. 그래도 도심지고, 수도와 가까울 수록 상대적 부촌이라서 그런지 토벽을 세우고 벽돌, 시멘트를 사용한 건물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 건물들은 붕괴하면서 인명피해를 내고 있었다.
"피해규모 추정치는 나왔습니까?"
"사상자 5만명 미만, 재산 피해액 약 7000억원 수준으로 보고 있습니다."
"정확하지는 않고요?"
"넉넉하게 고려했다하니 실제로는 이것보다 더 타이트 할 것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도심지에서 울고불고, 피를 흘리며 망연자실하게 거리에 나 앉은 사람들을 스쳐가는 우리 차량.
장자크는 열심히 마이크에 같은 내용을 반복해 외치고 있었다. 사람들은 망연자실 한 얼굴을 하다가도 일어나 돌무더기, 시멘트 덩어리를 치워 짐을 챙기고는 길을 떠난다.
방송을 듣고 재차 찾아올 여진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적어도 하루 정도는 대피해 있는 것이 좋을 터.
끼이익.
도로환경이 좋을 수 없기에 당연히 차량은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완전히 멈춰서기에 고개는 자연스럽게 전방으로 옮겨졌다.
"뭡니까?"
"길을 막아 섰습니다."
확실히 창 밖에는 머리에 피를 흘리는 여인이 애처롭게 우리 차량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호석을 바라보니 그가 장자크를 툭툭 두들기며 여인을 가리켰다.
"알아봐주시겠습니까?"
"아, 예."
장자크가 차량에서 내리자 주변에 있던 아이티 인들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흠칫 놀란 PMC대원 몇이 총기를 만지작 거린다.
"정지!"
< 제 333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