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철혈의 재벌-331화 (331/458)

< 제 331화. >

지진.

그래 분명 이 시기에 아이티에는 대지진이 왔고 뉴스에 떠들석하게 보도 되었던게 생각이 났다.

잊고 있었다기 보다는 경각심이 부족했다는 표현이 더 옳았다.

“시간은 얼마나 있다고 합니까?”

“30분 내외로 보고 있습니다.”

“촉박하네요.”

뚜벅뚜벅 걸음을 옮긴 호석이 지도의 한 부근을 가리키고는 말했다.

“이쪽, 우리 PMC의 훈련소 연병장이 가장 안전한 곳입니다. 회장님.”

“그래요?”

“예, 해발고도도 상대적으로 높고 내진설계가 완벽한 건물이 혹시모를 산사태를 막아 줄 것이며 이 높은 담장이 쓰나미 역시 일부분 막아줄 수 있을 것으로 확인됩니다.”

나는 분명 SKY건설의 최명규 대표에게 완벽한 내진 설계를 하라고 지시했었고, 최명규 대표는 그 부분을 꼼꼼하게 신경쓰고 SKY의 건물들을 지었던 모양.

호석의 설명에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바로 대피 하죠.”

“예, 회장님.”

“최대 수용인원이 얼마나 됩니까?”

“훈련소 부지의 최대 수용인원은 약 3만명입니다.”

“아, 많네요.”

“예, 애초에 약 5천명이상을 훈련시키기 위해 지어졌으니까요.”

고개를 돌려 루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떨리는 동공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루시, 걱정하지 말고, 우선 아이들이랑 급한 짐부터 챙겨, 5분. 5분이면 되겠지?”

“으, 응. 최대한 빠르게 움직일게.”

“그래, 나 믿지?”

“믿어.”

난 빙그레 웃으며 루시의 등을 어루만저 주고는 호석과 함께 바삐 걸음을 옮겼다.

“대피령은 내렸습니까?”

“SKY소재의 모든 공사장 및 사업장과 인근 마을까지 PMC대원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당장 피해를 당할 마을에 사는 모든 인원을 우리 훈련소에 수용할 순 없을거 아닙니까? 거리도 거리고.”

“예, 그렇습니다.”

“제기랄.”

자연재해.

이 언제 생길지 모를 지구의 위대함 앞에서 인간은 한 없이 초라해지고 있었다.

대지진.

이런 섬 나라에서는 필수적으로 해일을 동반할 수 밖에 없다. 그러니 해변가에 있는 사람들은 최대한 해발고도가 높은 내륙 깊숙한 곳으로 이동해야만 했다.

“SKY의 모든 건물들이 확실하게 내진 설계가 되었습니까?”

내 질문에 대답한 것은 호석이 아닌 최명규 대표였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헐레벌떡 나타난 그.

“예, 회장님 문제 없습니다.”

“우리가 건설한 학교 건물들 역시 마찬가지입니까?”

“시간을 들여서 공사하지 못해 건물의 안정성은 장담하기 어렵습니다만, 지반 만큼은 단단하게 만들어 놨습니다 회장님.”

“학교 운동장에 사람들을 수용하라는 얘기인가요?”

“예, 그렇습니다.”

나는 호석을 바라보았다.

말하지 않아도 내 의중을 파악했는지 호석이 입을 열었다.

“SKY건설이 참여한 ‘학교’등지의 운동장과 함께 해발고도가 높은 곳에 있는 SKY부지들로 아이티 시민들을 대피 시키겠습니다. 당장 해안가 근처의 마을들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예, 그쪽 먼저 생각하세요. 상대적으로 데미지가 클 수 밖에 없습니다.”

“예, 회장님.”

***

아이티의 분주한 움직임은 까마득하게 모르는 3인이 같은 자리에 모였다.

전 세계 언론 역시, 그들의 모임에 집중해야 했다.

세계 정세를 좌지우지 할 수 있는 패권 국가들의 정상이 한 자리에 모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러시아의 대통령 푸틴.

미국의 대통령 부쉬.

중국의 새로운 주석 후진다오.

그들의 모임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바빠서 전화도 하지 못했습니다. 책임감이 막중한 자리에 오른 만큼, 응원하겠습니다.”

부쉬의 말에 후진다오는 깡마른 몸으로도 당당하게 그의 앞에서 악수를 받았다.

부쉬도 덩치가 대단한 편은 아니었으나 후진다오가 워낙 마른 상태라 상대적으로 부쉬의 덩치가 커 보이는 효과가 있었다.

파라라락, 파라라락.

셔터가 요란하게 눌리고 둘이 마주보고 웃고 있는 장면이 전 세계에 생중계 되고 있었다.

이어서 기다란 리무진 차량이 도착하고 마치 레드카펫을 밟는 배우처럼 푸틴이 멋들어진 정장을 입고는 당당하게 걸음을 옮겼다.

세 사람이 언론의 카메라 앞에서 활짝 웃음을 보여주고는 그대로 내부로 들어가 정찬을 시작했다.

카메라가 있기에 대단한 대화들을 주고 받지는 않고 시시콜콜한 스몰토크와 현재 국제정세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동시통역자들이 포함되어 있기에 대화의 흐름역시 매끄럽지는 않았다. 언론에 비치는 모습에서 자국의 언어가 아닌 영어로 대화를 나눈다면 필시 말이 나오기 때문에 그들은 영어를 할 줄 알면서도 억지로 본인들 국가의 언어를 사용해야 했다.

푸틴이 가장 먼저 포크를 내려 놓고, 후진다오가 젓가락을 내렸다. 부쉬는 애초에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았는지 거의 손을 데지 않은 상황.

“자, 후식은 조용하게 먹읍시다.”

푸틴의 말을 들은 후진다오와 부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들의 뜻을 알아들은 언론인들 역시 아무런 반항 없이 빠르게 철수하기 시작하고, 테이블이 치워지는 동안 그들은 발코니에 나가 각자 태우고자 하는 연초들을 입에 물었다.

부쉬 역시 시가를 입에 문 상태.

셋이 발코니에 나와 시가등을 태우는 모습 역시 전 세계에 생중계 되고 있었다. 물론 멀리서 찍었기에 그들의 이목구비까지 확실하게 구분되지는 않았다. 그저 느낌상 누구겠구나 알 수 있는 정도.

카메라가 없어지고, 수행원들이 당연하게도 도청장치도 확인을 했을테니 편하게 입을 여는 푸틴.

“오랜만입니다. 미스터 부쉬, 미스터 후진다오.”

러시아 사람들 특유의 둔탁한 영어 발음. 그러나 못 알아 들을 정도의 영어가 아니기에 부쉬 역시 마주 웃음을 보이며 답했다.

“그러게요, 오랜만에 웃으면서 얼굴을 봅니다.”

푸틴이 빙그레 웃으며 허연 연기를 내뿜고는 후진다오를 바라보았다.

“다시 볼 수 있어 다행입니다.”

후진다오 역시 유창한 영어로 대답한다.

“하하, 주석께서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참 안타깝다 생각했는데, 다시 나타나 이렇게 주석의 자리에 올랐으니 얼마나 다행인 일입니까?”

입에 침 한방울 바르지 않고 입을 터는 푸틴.

후진다오는 예의상 뱉은 그의 말을 전혀 개의치 않고 말했다.

“운이 좋았지요, 천자를 만났으니.”

푸틴과 부쉬는 후진다오의 말을 알아듣기는 어려웠다. ‘천자’라는 단어는 중국어로 말했으니까. 분명 영어로는 표현이 어렵긴 했다.

“좋은 인연을 만났다는 겁니까?”

부쉬의 질문에 후진다오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신이 내려주신 운명이 아니겠습니까.”

도통 알 수 없는 답변을 내놓는 후진다오.

어깨를 으쓱인 푸틴이 ‘그건 그렇고’하는 표정으로 말을 뱉었다.

“아이티 공화국이 참 시끄럽습니다. 뭐, 거의 대한민국이 식민지배를 하겠다고 공표하지 않았습니까?”

부쉬가 한쪽 눈썹을 살짝 씰룩이고는 답했다.

“글쎄요 식민 지배라기 보다는 아이티의 빈민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오, 우방국이라고 챙기는 것입니까? 요즘 세상에 대항해시대도 아니고 식민지화라니. 하긴, 미국도 북마리아나제도를 완벽하게 편입시켰지요?”

“커험.”

후진다오가 불쑥 끼어들었다.

“홍콩도 마카오도 있습니다만?”

“그렇지, 거기도 있었군요.”

“물론 반환받기로 약속이 되었습니다.”

“그거야 중국이 큰 나라가 되어서 그렇지 않겠습니까?”

힘이 있으니 가능한 일이다라는 말을 돌려서 얘기하는 러시아. 그렇다고 중국을 추켜세우는 것은 아니란 걸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말 속에는 대한민국이 ‘식민지배’를 할 정도로 힘이 있냐는 말이 포함되어 있었다.

“눈에 보이는 크기가 전부가 아니지요.”

후진다오의 말에 부쉬가 고개를 슬쩍 돌리고는 허연 연기를 내뿜는다. 어쩐지 그 연기에 웃음이 담겨있는 느낌.

후진다오의 말 역시 푸틴이 뱉었던 말 처럼 여러가지 뜻을 담고 있었다.

땅 덩이가 크다고 힘이 세지는 않다는 말과 함께, 내실도 봐야하지 않느냐는 말.

“그렇지요 언제나 상대적인 것들이지요.”

부쉬가 보탠 말까지.

러시아가 땅이 크다고 가장 강한 패권국가는 아니며, 대한민국이 땅이 작다고 약한 국가가 아니라는 말을 포함하고 있는 부쉬와 후진다오의 말이었다.

“그렇습니까?”

푸틴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공격을 웃어 넘긴다.

“이번 아이티 공화국 사태에 대하여 우리 러시아는 세계 평화를 위해서 21세기에 식민지배에 관해서는 찬성하기가 어렵소만, 미스터 부쉬와 후진다오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제는 노골적으로 묻고 있었다.

러시아는 아이티가 대한민국의 자치령이 되는 것을 방해하겠다 선전포고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글쎄요, 식민지배라고는 생각이 되지 않아서 말리고 말고 할 것도 없을 것 같습니다만, 게다가 아주 ‘민주적’으로 아이티 공화국의 국민들을 대상으로 투표까지 진행 할 것이라고 하니, 우리가 나서서 반대하고 말 것도 없지 않겠습니까?”

유난히 ‘민주적’이라는 말을 강조하는 부쉬.

‘나는 너희들과 다르게 진보된 사회 체재를 가지고 있다.’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것과 같았다.

겉으로만 ‘민주적’인 것을 표방하는 러시아와 대놓고 반민주적인 중국을 비판하는 의도가 명백했다.

“큰 나라가 작은 나라에 관용을 베푸는 것은 군자에게는 당연한 일이겠지요.”

이어진 후진다오의 짧은 말.

많은 중국인들이 제법 오만하게 얘기하는 편이니 어색할 것은 없었지만, 그 안에는 ‘대한민국’을 두둔하고 있었다.

푸틴이 부쉬와 후진다오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어째서인지 두 분께서 대한민국을 두둔한다고 느껴지는데, 기분탓입니까?”

부쉬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국제정세에 그렇게 편협해서야 하겠습니까? 옹호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방관한다고 생각하는게 더 옳겠습니다.”

부쉬의 말이 끝나자마자 후진다오가 입을 열었다.

“위로는 북한에 막혀있고, 아래로는 일본에 막혀있으니 대한민국 입장에서 활로를 찾는 게 그리 어색한 일도 아닐 것으로 보이는 군요.”

후진다오는 마치 대국으로서 소국에 관용을 베푸는 것이다라는 것처럼 얘기하고 있었다.

돌려 얘기했지만 결국 미국과 중국은 대한민국의 손을 들어주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푸틴의 기분이 좋을리 없었다.

“흠, 그렇군요, 언제나 추위에 떠는 우리는 참 외롭습니다. 여인들이 느끼는 외로움이 이런 것일까요? 여인들의 분노와 질투는 때로는 세상을 바꾸기도 하지요.”

‘우리’라는 말은 부쉬와 후진다오가 포함되지 않음을 자리에 모두가 알 수 있었다. 러시아는 ‘또 혼자니?’하고 묻고 있는 것이었다.

또한, ‘여인의 질투’같은 단어를 사용함으로서 ‘나 기분 상했거든?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니까 알아서 해라.’ 하고 협박도 잊지 않는다.

기분이 나쁠법도 하지만 부쉬는 여유로운 얼굴로 말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 미국이 끼어들 일은 없을 것입니다.”

“상관하지 않겠다?”

“세계 평화를 수호하는 미국이지만, 일의 경중은 있는 법 아닙니까?”

푸틴이 만족스럽다는 듯 씨익 입꼬리를 들어 올린다.

‘네가 아이티에서 무슨 수작을 부리던 우리는 신경쓰지 않을게, 하지만 세계 평화를 수호하는 미국이야. 알아서 줄타기 잘 하자?’하는 부쉬의 의중을 정확하게 캐치한 푸틴.

일만 키우지 않는다면 미국은 방관자 입장을 취하겠다는 것. 고개를 돌린 푸틴이 후진다오를 바라보았다. 후진다오는 여유 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강 건너 불 구경은 재미가 있는 법이지요. 내 집만 타지 않으면 될 일 아닙니까?”

푸틴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간다.

가장 껄끄럽다 할 수 있는 둘이 방관하겠다는 입장이기 때문.

“자, 디저트 준비가 끝난 것 같으니 당을 좀 채워볼까요?”

그렇게 셋은 발코니를 벗어나 다시 마련된 디저트 테이블에 앉았다.

< 제 331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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