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28화. >
화약냄새가 채 사라지지 않은 아이티 공화국의 국방부 건물 마당.
그곳에 마련된 원탁에 하나둘 적당한 자리를 잡고선 착석하는 인물들.
자연스럽게 나와 호석, 대한민국 특사들이 한쪽에 몰려 앉았고, 아이티 공화국 행정부 인사들과 경찰 인사들이 앉았으며 남은 자리에 혁명단주 호세와 부단주 말포이가 자리를 잡았다.
모두 자리에 앉자마자 나는 호세를 바라보며 물었다.
"혁명단이 바라는 게 무엇입니까?"
"저런 폭도들과 대화를 나누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치안국장의 말은 깔끔하게 무시해주었다.
나 뿐만 아니라 아이티 행정부에서 나온 인사들 역시 그를 무시하고 있었다.
원래 무시 받는 포지션이었다는 게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혁명단주 호세가 입술을 달싹거린다.
저 놈도 글러 먹었구나 싶었다.
"부단주인 제가 얘기해도 되겠습니까?"
"해보세요."
말포이가 자리에 일어선다.
언론인들의 카메라가 잘 보이는 자리까지 걸어나가서는 잔뜩 고양된 얼굴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우리는,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고, 범죄의 늪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가난과 범죄?"
"예. 우리는 굶주리지 않기 위해 범죄에 손을 데야 합니다. 굶주리지 않기 위해 어린아이들은 펜과 책을 놓고 낫과 농기구를 듭니다."
말포이의 두 눈에 습기가 가득 차오른다.
"그렇게 성장한 아이는 자연스럽게 갱단이 되고 범죄자가 됩니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자라지 못한 아이들은 '범죄'가 어째서 나쁜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늘 주변에 '범죄'가 있으니 당연하게 여기고 멋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제 나이쯤이 되면... 그러니까 못해도 30대, 40대가 되고 나서야 범죄가 나쁜 거라는 걸 깨우칩니다."
"제 놈이 멍청하다는 걸 만천하에 뻔뻔스럽게도 얘기하는 군."
치안국장의 말에 행정부 인사들이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누가 단무지 아니랄까봐 전세계 언론의 취재진들이 있는 곳에서 아무렇게나 막 뱉어내고 있었다. 놈은 자신의 행동이 정말 못 배워먹은 행동이라는 자각조차 없는 듯 했다.
지능이 딸리면 눈치라도 있어야 할텐데 놈에게는 눈치라는 것 역시 없는 모양.
"교육이 필요하다는 얘깁니까?"
내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말포이.
"교육도, 배가 불러야 가능한 일입니다. 당장 가정에 일손이 부족하고, 식량이 없습니다. 그런상황에 연필과 공책? 당장 팔아서 빵과 쌀과 바꿔야 할 물건일 뿐입니다."
"굶주림이 가장 큰 문제다?"
"그렇습니다. 여태껏 아이티의 정치인들은 제 놈들 배만 불렸지 국민들에게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군사정권이 들어서도 마찬가지요 민주정권이라 허울뿐인 정권이 들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해서, 우리 혁명단은! 이번에야 말로 국민의!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그런 정권이 들어서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 입니다."
아주 정치인 나셨다.
이쪽으로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해도 과언이 아닐테다. 벌써 그의 말에 감화된 취재진 몇이 보일정도이니 말 다했다.
아이티 행정부 주요인사들 몇도 고개를 주억거린다. 그들 역시 '굶주림'이란 문제를 익히 알고 있는 모양이다.
"아이티 공화국의 행정부는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 공화국은 국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고 있으나, 지리적 한계와 교육의 한계, 여타 여러가지 문제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
한참 말을 이어나가는데 말포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런 놈들이 살이 그렇게 쪘나? 네 놈들 아랫도리도 보이지 않을 만큼 처먹었나!"
행정부 인사들이 입을 닫았다.
말포이는 삐쩍 골았다.
누가 봐도 '멸치'라고 말 할 정도로 깡 마른 몸에 볼 살 역시 깊이 패여 있는 외관이었다.
그러나 그의 말처럼 치안국장과 아이티 행정부 인사들의 몰골은 차원이 달랐다.
누가 봐도 잘 먹고 잘 지낸 때깔과 몸매였다. 오히려 운동과는 거리가 먼 체형이랄까?
"당장 이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국민들을 위해 다방면에서 노력을 한다고? 그런 놈들의 몸매와 저 바깥에서 행여나 총탄이 자신의 집으로 들어오지 않을까 몸을 떨고 있는 국민들의 몸매를 비교해보십시오! 내 말이 틀렸습니까! 뼈 빠지게 일해서 하루 한 끼를 떼우기도 어려운게 아이티의 국민들입니다! 그런데 저 놈들은 그런 이들에게 세금을 떼고 제 놈들의 배를 불리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이여! UN이여! NATO여! 미국이여! 부디 아이티 공화국의 국민들을 생각해 움직여 주십시오! 우리에게, 우리 혁명단에게 힘을 실어 주십시오!"
나도 모르게 양 손이 올라갈 뻔 했다.
박수를 치기 위해 말이다.
그 만큼 언론 카메라들을 향해 내뱉은 말포이의 언변은 제법이었다. 유치한 얘기지만 바로 직설적으로 '몸매'라는 예시까지 들고 있으니 절로 설득되는 느낌이었다.
"타고난 놈 같네요, 저 놈을 꼭대기에 앉히면 편하겠어요, 눈치도 제법인 것 같고."
"예, 회장님. 그런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의 특사로 온 사람들 역시 내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부단주."
"말씀하십시오."
"대한민국이 어떻게 도와줬으면 좋겠습니까?"
"제대로 된 정부를 옹립할 수 있도록 우리를 지원해주시기를 간청드립니다."
"미친 무식한 갱단 새끼가 못하는 말이 없군!"
이번에도 치안국장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리고 그의 지나친 언사에 여기저기 셔터를 누르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온다. 행정부 인사들도 표정이 좋진 못하지만 그래도 입을 열어 제 생각을 입밖으로 뱉어내진 않는다. 그들은 언론의 카메라가 무서운 존재라는 것을 아는 모양.
치안국장을 한 번 쏘아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행정부 인사들을 바라보았다.
"저들의 요구, 들어줄 마음이 있습니까?"
"혁명단의 요구를 받아들이라는 얘깁니까?"
난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지 않는다면 내전은 불 보듯 뻔한 일 아니겠습니까? 이미 진행중이라고 봐야 옳고요."
"후우... 내전이라니..."
현 아이티의 정부 역시 평화의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아이티는 끊임없이 부정부패와 싸우고 있는 것이다. 여러번 정권이 교체되기도 했고.
"이보시오! 분명 서거한 대통령께 의뢰를 받았다 하지 않았소! 아이티 국민들을 위협하는 무장단체 토벌을!"
치안국장의 외침에 다시 한번 취재진이 바쁘게 셔터를 누른다. 그들로서는 전혀 처음듣는 소식일테니 당연한 일.
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그런 의뢰를 받았죠. SKY PMC는 이곳 아이티에서 합법적인 군사작전을 펼쳐도 무방하다는 허가와 함께 말입니다."
행정부 인사들이 침을 꼴깍 삼킨다. 대한민국의 특사들은 기회를 노리는 맹수처럼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치안국장의 말을 다시 빌리자면, '국민들을 위협하는 무장단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소! 저 갱단들이 국민들을 위협하는 무장단체가 아니라면 무엇이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여러분?"
행정부 인사들이 진심이냐는 듯 치안국장을 바라본다. 지금 돌아가는 꼴을 보고도 저런 말을 당당하게 내뱉을 수 있다는게 놀라운 모양.
행정부 인사들은 오랜시간동안 정치에 몸을 담궈놓은 사람들 답게 현재 돌아가는 국제 여론은 혁명단의 손을 들어줄 확률이 높다는 걸 아는 것이다.
"내 눈에는 치안국이 '그' 무장 단체로 보입니다만."
"뭐요?"
"국민들을 위협하는 무장단체는 혁명단이 아니라 치안국으로 보인다는 소립니다."
"우리는 국가의 인가를 받은 공무원입니다!"
치안국장의 말은 무시하고 행정부 인사들을 바라보았다.
"내 마음은 자꾸만 혁명단 쪽으로 기우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흠칫 놀라는 행정부 인사들.
눈치가 빠른 사람들 답게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선택을 강요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었다.
"으음... 그들의 요구조건을 최대한 수용적으로 검토하는 게 우선이고, 우선은 새로운 지도자를 먼저 뽑아야 정부가 안정되고..."
"헛소리! 이미 부정부패에 찌든 아이티 정부를 우리는 믿을 수 없습니다!"
말포이의 강력한 외침에 잠자코 이게 무슨상황인가 하고 듣고만 있던 혁명단주 호세 역시 크게 외쳤다.
"옳습니다! 이 놈들을 믿느니 차라리 말포이 부단주가 대통령이라는 소리가 더 설득력 있지!"
"옳소!"
"옳소!"
"더러운 정치인 놈들 믿을 수 없다!"
갱단.
그러니까 혁명단원들의 외침 뿐 아니라 취재진들 뒤로 구경을 온 시민들 역시 한 목소리로 말포이와 호세의 말에 동조를 하고 있었다.
모든 게 말포이가 감정에 호소했던 연설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이 멍청한 새끼들이 이게 어디라고 끼어들어!"
치안국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피식, 피식 웃음이 흘러나올 상황이지만 애써서 참았다. 당장 저 멍청한 놈의 죽통을 후려버리고 싶지만 그 역시 참아야 했다.
어쨌든 지금 이 협상 테이블은 빠르게 전파를 타고 전 세계 언론사로 전달되고 있을테니 말이다.
물론 지금 이 테이블이 생중계 되고 있는지는 아직 알 길이 없었다.
"경찰 새끼들이 뻑하면 강간해, 추행해, 무전취식에 네놈들이 혁명단보다 더 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어!"
얼굴이 보이지 않는 한 여인의 외침에 치안국장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다.
"누구야! 누가 우리를 모함해!"
"디룩, 디룩 살 찐 거 봐, 우리 소피아는 하루가 다르게 뼈만 앙상하게 말라가는데, 저런 놈들이 하는 정치 믿을 수 없다!"
"다 죽여버려라!"
광기.
삽시간이 장내에 광기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행정부 인사들은 물론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던 치안국장이 입을 담을 정도로 언제 총탄이 난무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 되었다.
"자자, 조용들 하세요."
손수 일어나 아이티 시민들과 혁명단원들을 만류했다. '죽여라! 죽여라!'를 외치던 시민들이 삽시간에 입을 닫고 내게 집중한다.
근 2달여 동안, 그리고 오랜 세월동안 록펠러 재단과 SKY재단이 아이티 사람들에게 어떤 존재인지가 증명되는 순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들은 아이티 정부와 경찰, 군부를 믿지 못하지만.
나와 SKY, 록펠러 재단은 믿고 있는 것이다.
이때가 기회라고 생각했을까 돌연 말포이가 목청껏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여러분! 혁명단원들! 그리고 우리 국민들! 지금의 아이티는 누가 먹여 살리고 있습니까! 세계적인 글로벌 기업 SKY와 록펠러 재단이 아닙니까!"
"옳소!"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굶주림을 해결 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은 단순한 쌀 한 줌, 빵 한조각이 아닙니다! 돈! 그리고 일자리! 마지막 교육! 굶주림의 원인이 되는 모든 것을 여기 SKY그룹의 회장님이 해결해주시고 계십니다!"
"맞습니다!"
"저 멍청하고 돼지같이 제놈들만 살찌운 정치인들과 경찰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인 겁니다! 우리는 SKY에게 세금 한 푼 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일자리를 얻었고, 의료시설을 얻었으며, 교육시설을 얻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무엇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살 길을 열어준 게 누굽니까!"
"SKY!"
"우리를 살 찌우는 게 누구입니까!"
"SKY!"
또 다른 광기가 몰아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슬그머니 도망가고 싶을 만큼.
어디선가 이 기분을 느껴본적이 있었다.
머릿속에 문득 후진다오가 생각난다.
"광신도?"
툭 튀어나온 혼잣말에 호석이 가까스로 웃음을 참는게 보인다.
"제 놈들만 배불리는 정부를 믿지말고, 차라리 새 정부로 SKY를 옹립합시다 여러분!"
말포이의 외침에 장내의 모두가 환호성을 내뱉는다.
""옳소!""
환호성을 내뱉는 인물들 중엔 심지어 치안국, 그러니까 경찰들도 있을 정도였다. 어느 집단이나 말단의 대우는 별로 좋지 않은 모양.
말포이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는 한국식으로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부디, 우리 아이티 공화국을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촤라라락 촤라라락.
취재진이 바쁘게 셔터를 누른다.
그들의 카메라에는 내 앞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많은 아이티의 국민들이 보일 것이다.
나라를 바치라는 나의 명령을, 아이티의 갱단이 아주 훌륭하게 이행하는 순간이었다.
< 제 328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