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20화. >
아침부터 얼마 자지 않고 움직였기 때문일까? 다시 눈을 떴을 땐, 한낯이었다.
“기상 하셨습니까.”
어느새 다가온 호석이 얼음장처럼 시원한 음료를 들고 있었다.
“몇시죠?”
“현지시각으로 오후 2시가 조금 넘었습니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음료를 들이켜는데 불쑥 호석이 전화기를 내민다.
“대통령님이십니다.”
호석이 존칭을 붙였다는 것은 전화를 건 상대가 할아버지란 뜻이었다.
아이티공화국의 대통령이나 미국의 대통령이었다면, ‘미국대통령입니다.’정도로 얘기했을테니까.
“예, 할아버지.”
-이놈아, 휴가차 간다는 놈이 무슨 일을 이렇게 크게 벌려?
고개를 갸웃거렸다.
“감시라도 붙여 놓으셨어요?”
-중국에서 PMC대원 200여명이 아이티 공화국으로 건너갔다. 국제 사회가 네놈의 PMC에 집중하고 있어.
“아 그래요?”
-모르긴 몰라도, 많은 시선이 네게 닿아 있을게다.
“국정원에게 보고 받으셨나보죠?”
-그래, 그 작은 나라에 군단 이상급의 병력을 운용하니 당연히 이목이 쏠리지.
할아버지의 말은 사실이었다.
세계적으로 SKY PMC의 전투력은 인정받고 있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해외 유수의 군대에게 의뢰금을 받고 의뢰를 수행하고 있을 우리 대원들.
그들은 모든 의뢰를 완벽하게 수행하기로 명성이 드높았으니 그런 PMC 대원들 200여명이 한번에 움직이는 것은 분명 경계가 될 법도 했다.
“여기에 훈련소 지으려고요, 앞으로 우리 PMC주둔지는 이쪽이 될 겁니다.”
-멕시코 놈들이 퍽이나 좋아하겠구나.
“북마리아나 제도가 제일 좋을 것 같긴 합니다만 거기는 미국이 꽉 잡고 있어서 딱히 메리트가 없네요.”
-부쉬가 들었으면 기겁할만한 소리를 잘도 하는구나.
“하하하, 설마요 환영할 것 같은데요? 수비병력 늘었다고.”
-흥, 그럴리가 미국놈이나 중국놈이나 일본놈이나. 세계 어디든 믿을 놈이 있더냐?
대한민국의 대통령다운 말씀이었다.
나 역시 공감하기 때문에 절로 웃음을 지었다.
“루시는 잘 있죠?”
-그건 네 놈이 직접 물어 봐.
“에헤이, 아침부터 까칠하시네.”
-됐고, 네 놈이 단순히 훈련소 만들겠다고 거기로 가진 않았을 것 아니냐, 중국에서도 하던 일이 있을텐데.
“후진다오가 알아서 해 줄겁니다. 중국은.”
-세상 믿을 놈이 없어 떼놈을 믿더냐.
인간불신이 대단하신 할아버지.
이해 못할 것은 아니었다. 중국인들의 악명이야 익히 들어왔잖은가.
“후진다오는 좀 달라요, 우리 교관들이 워낙 교육을 잘 시켜놔서.”
-흐음,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법이다.
“예, 주의하겠습니다.”
-그래서 아이티는 왜? 이유나 말하거라 계속 통화 길어지는구나 전화비도 다 돈이거늘.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돈은 썩어지게 많으신분이 몇푼 안되는 전화비를 걱정하신다.
“국민들 혈세 걱정해주시는거에요?”
-그래 이놈아! 이상한 말 하지말고 본론이나 말해, 이게 다 돈이야 돈.
아주 참 대통령이 되셨다.
“대한민국 영토나 늘려볼까 싶어서요, 한반도는 뭐 이미 먹었다고 보는게 맞을 것 같으니까.”
-······
수화기 너머 잠시 침묵이 유지된다.
“이게 다 국민들 혈세라면서요? 예?”
-이 놈이···
“아이티, 우리가 먹죠 할아버지.”
-지금 같은 시절에 식민지배? 말 같잖은 소리를 하고 있구나, 국제사회가 가만히 있겠더냐?
“당장 마카오, 홍콩도 식민지입니다만.”
-개념이 다르잖으냐! 개념이! 그리고 반환 역시 확정된 사안이고.
“반환 할 정부가 없다면요?”
-뭣?
“마카오나 홍콩은 ‘중국’이라는 거대한 정부가 있잖습니까.”
-그렇지?
“아이티에 정부가 없다면요? 도미니카 공화국이 달라고 할까요?”
-······
그럴리가 있나.
도미니카 공화국은 제 놈들 살기도 바쁘다.
어설프게 아이티 공화국을 먹어 봤자 ‘빈민늘리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다양한 해상자원과 지하자원이 약간이나마 탐날 순 있겠지만, 그렇게 대단한 이득으로 돌아오지는 않을 터 였다.
그리고 지금도 아이티 공화국은 도미니카 공화국에게 감히 이빨을 드러낼 수 없었다. 언제든 무 썰듯 썰려나갈 국력을 지닌 아이티니까.
한 마디로, 도미니카 공화국은 책임은 회피하고 이득만 취하는 자세를 고수할 것이란 게 내 생각이다. 실제로도 이미 그렇게 하고 있고 말이다.
-어떻게 먹잖게야?
할아버지의 얼굴이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것 같았다. 눈을 번들거리면서 대호같은 얼굴로 먹잇감을 바라보고 계실 것이다.
“국민 천만명 늘어나는 거 매력적이죠?”
-헛소리 그만하고 얘기나 해.
“괌이나 사이판.”
-자치령으로 만들자?
“어떠세요?”
-반발은?
“어디가요? 아이티가요? 아니면 한국이요?”
-우리 국민들이 반발을 할 리가 있더냐, 좋아 할 게다. 몇가지 우려되는 점만 해결해준다면.
“아마 경제적인 이유들이겠죠?”
-그렇지, 또 세금 문제도 있고.
역시 할아버지도 셈이 빠르다.
벌써 머릿속에 뭔가를 정리하고 계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럼 아이티의 반발을 우려하시나요?”
-그럴리가 있나. 무시하고 싶지는 않지만, 배운 놈들이라고 해 봐야 욕심많은 정치인놈들이겠지. 본래 아이티를 지배하던 기득권들이야 몇푼 쥐어주면 입을 닫겠지.
정확하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그 기득권 놈들에게 돈을 내줄 생각은 없었다. 그 부분이 할아버지와 내가 다른 부분이다.
할아버지의 방법 역시 효과적이지만, 장기적이지 못하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그래서 난 다른 방법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고.
“국제사회의 반발이 제일 걱정되시는 모양이에요?”
-그래.
“아이티 공화국의 국민들이 직접 대한민국을 원하게 만들면 됩니다. 아주 간단한 논리죠.”
-그게 되겠더냐?
“그러니까 열심히 해 봐야죠?”
-이 놈이 바깥에서 나돌고 싶어서 핑계를 만들고 있구나.
“아오, 아주 귀신이라니까.”
-콱! 루시에게 잘 하거라, 임신한 여인은 예민하니까.
“그러니까 아이티를 대한민국으로 만들면 얼마나 좋습니까? 치안도 안정되고 의료서비스도 가져오고 예? 할아버지도 휴가 때 이곳 카리브해의 해변에서 약주도 한잔씩 하시고.”
-좋은 소리만 하고 있구나, 비행기로 13시간이 넘어 이놈아!
할아버지의 말이 맞았다.
한반도를 기준 지구 반대편이라고 말해도 옳았다. 그 만큼 먼 거리를 비행해야 도착할 수 있는곳이 이곳 아이티였다.
분명한 것은 아이티 공화국이 대한민국의 자치령이 된다편 SKY그룹의 운신폭이 그만큼 넓어진다고 봐야 했다.
당장 한반도에서 향하는 유럽보다, 이곳에서 향하는 유럽이 가깝고 아프리카 역시 마찬가지로 이곳에서 향하는게 가까우며, 뱃길 역시 훨씬 가깝다.
과거 대항해시대에, 서구 열강이 아메리카 대륙을 지배했던 이유도 그것에 있다.
‘뱃길이 가깝다.’
그 말은 하늘길도 가깝다는 얘기였다.
태평양의 지배력을 늘리기위해 미국이 북마리아나제도를 가지고 있는 것 처럼, 대한민국이 아이티를 갖는다면 그게 시사하는 의미는 분명 달라진다.
할아버지 말씀처럼 국제사회의 반발 역시 만만치 않을 수 있었다.
헌데 그놈들이 어쩌겠는가? 아이티 공화국이 대한민국이 되고 싶다는데.
갖은 명분을 가져와 방해할 게 불보듯 훤하지만, 결국 아이티 공화국의 국민들이 원하는 바 대로 이뤄질게 분명하다. 아이티 공화국을 가져왔을때 유럽의 나라들이나 미국이 얻는 이득은 크지 않다.
대한민국이 가져왔을 때는 크다.
그게 맹점이었다.
다른 놈들에게는 ‘계륵’이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으니까. 대한민국의 이득이라기 보다는 SKY의 이득이라고 생각하는게 더 옳았다.
“생각해보세요, 유라시아 철도로 이어져서 뱃길로 아이티까지 여행. 캬~ 벌써부터 대한민국 국민들이 열광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세요?”
-헛 소리 그만하고, 구체적인 방안이나 제시 해.
“일단 아이티를 무정부 상태로 만들 생각입니다.”
-그 틈을 PMC가 파고들고?
“정확합니다.”
-그리고?
“아이티 사람들이 환장할만한 쇼를 해줘야겠죠.”
-돈을 퍼붓겠다는 소리를 멋지게도 하는구나.
“아이, 할아버지는 너무 드라이해.”
-쓸 데 없는 영어 쓰지 말고, 그래서 아이티 국민이 대한민국을 원하게 만들자?
“예, 애초부터 SKY와 록펠러 재단에 우호적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겠지··· 데비가 자식 교육은 참 잘했으니.
“그럼 진행하는 걸로?”
-이미 결정까지 다 해 놓고 이제와서 무슨 허락? 망할 놈.
할아버지의 말이 맞다.
나 역시 이미 결정을 한 상태였다.
그리고 할아버지 역시 그 셈이 빠른 머리로 벌써 계산기를 두들겨보셨을테다.
그러고는 확실히 이득이라는 것, 이점이라는 것을 이해하셨을 터.
군사적으로도 아이티를 우리가 흡수한다면 아주 중요한 군사요충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더 넓게 보면, 도미니카 공화국의 입장에서는 두려울지언정 경제적으로도 이득이라는 걸 알 수 있을것이다.
-그리 알고 있으마, 잡음 없이 진행해야 할 게다. 각국의 정보부가 아이티에 시선을 모을테니.
“흠, 그럼 어그로 핑퐁이라도 해야 할까요?”
-이상한 소리를 하는구나, 어그로 핑퐁?
“시선을 다른데로 돌리겠다는 얘깁니다.”
-쯧쯧, 시정잡배같은 정치인들이 하던 짓거리?
신랄한 비판에 ‘픽’ 웃음이 세어 나온다.
“그만큼 효과적이니까요, 아마 관심을 돌리지 않고는 못 배길 걸요?”
-네 놈이 알아서 하거라, 나도 이득만 가져 갈테니.
“며칠내로 아이티를 무정부 상태로 만들테니까, 그때 성명문 발표 해주세요, 아주 유감이며 아이티를 위해 최선을 다해 돕겠다는 식으로.”
-파병까지 하란 소리로 들린다만.
“그래주시면 더 좋고요.”
-돈이 썩어 나느냐?
“사실 우리 PMC로도 충분합니다.”
-개인화기로는 한계가 명확하지.
“다른 나라에서 쳐들어올것도 아니고 아이티 내부에서는 그정도면 충분합니다.”
-그건 또, 그렇구나.
“여차하면 부쉬한테 전투기 몇대 빌리죠 뭐.”
-파핫, 이놈이 친구한테 만원 빌려달라는 것 처럼 얘기하는구나.
“부쉬한테 아직, 우리가 끗발이 좀 있거든요.”
-오냐, 편한대로 하거라. 이만 끊자. 돈이 얼만지 쯧.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할아버지는 전화를 끊으셨다.
“하여간 성격 급하셔가지고.”
내 혼잣말에 호석이 부드럽게 웃으며 전화기를 받아든다.
“하하, 그래서 대통령님이 아직 정정하신 것 아니겠습니까?”
“두번 정정하셨다가는 여기까지 헤엄쳐 오실 기세던데요.”
“큽, 지금도 그러실 수 있을지도.”
“읏차.”
자리에서 일머나 암막 커튼을 걷었다.
유리창이 아닌 나무창을 열어젖히자 푸른 하늘과 초록빛 바다가 날 반긴다.
“관광사업을 개발해야겠어요, 여기는.”
“건설사가 좋다고 달려들겁니다.”
“확실히.”
아이티를 나 혼자 먹을 순 없다.
그랬다가는 온갖 비난의 화살이 내게 쏟아질테니까.
하지만 커다란 이익을 챙겨갈 수 있는 방법들은 많았다.
“부지 매입, 박차를 가하세요.”
호석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정부를 무너뜨리고 진행하는게 더 저렴할겁니다.”
맞는 말이었다.
“그럼 너무 티나니까, 미리미리 진행하시는 걸로.”
“해변 위주로 하겠습니다.”
“그냥 닥치는대로 다 사세요.”
“호오, 돈으로 나라 하나를 삼키겠군요.”
호석이 재미난다는 표정을 숨기지 못한다.
“이런게 진정한 플렉스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나라를 사는 부호의 플렉스라.”
“몇몇 부호들이 슬슬 아이티에 손을 뻗기 시작할겁니다. 주변의 무인도를 사려고 들지도 모르죠.”
“알아서 컷트 시키겠습니다.”
“예, 살 수 있다면 최대한 사세요, 합법적으로 문제 소지 없도록.”
“예, 회장님. 최명규 사장에게 따로 지시를 하겠습니다.”
고개를 저었다.
“SKY이름으로 말고, 천가의 이름으로 구입하세요.”
“예, 루시 아가씨와 회장님 자제분들의 명의로 사도록 하겠습니다.”
“예. 그리고 북한의 돼지에게 전화를 좀 했으면 싶네요.”
“바로 연결하겠습니다.”
< 제 320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