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12화. >
나와 루시의 방 앞.
우리집안 남자들 거의 모두가 그 앞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와 할아버지, 그리고 데비 할아버지는 물론, 호석과 철웅까지.
누구 하나 쉬이 입을 열어 뭔가를 얘기하지 않았다. 그만큼 모두가 초조하게 기다리고 했다고 보는게 옳다.
철컥.
문이 열리고 아산댁과 함께, SKY산하 병원의 산부인과 전문의가 모습을 드러낸다.
“회장님 축하드려요.”
의사의 말에 나를 비롯한 할아버지들, 그리고 호석과 철웅도 빙그레 미소를 띈다.
“임신인가요?”
“네, 회장님.”
할아버지가 부드럽게 등을 두들긴다.
“이제 네 놈의 어깨가 또 한번 무거워지겠구나.”
“아뇨, 오히려 좋은데요?”
“그러면 다행이고.”
“고생하셨습니다. 선생님.”
꾸벅 고개를 숙이니 머리를 길게 내려뜨린 의사가 황급히 허리를 숙인다.
“아닙니다. 회장님, 조만간 내방하시어서 자세한 검사를 받으시는게 좋을 것 같으셔요.”
“예, 그래야죠. 예약 잡아주시겠습니까?”
“네, 회장님.”
의사가 자리를 뜨고, 나는 당당하게 방 안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워있는 루시의 손을 잡았다.
루시가 한숨을 푹 내쉰다.
“에휴··· 우진이 아이티에 가자고 할 때 가는 게 아니었는데.”
“왜이래? 좋아 해 놓고.”
“씨잉··· 애기 낳기 힘들어.”
산통의 고통이란 어마어마하다는 걸 결코 모르지 않았다. 단순히 듣기만 한 것이 아니라, 루시가 그 고통을 이겨내는 과정 역시 태양이와 별이를 통해 충분히 보았으니 모를 수 없었다.
게다가 쌍둥이는 자연분만을 피하는 것이 대부분인데, 병원의 반대에도 루시는 완고하게 자연분만을 고집해 산모와 아이들 모두 위험할 뻔 했던 순간도 있었다.
물론, 병원에서는 모든 인원들을 총 동원해서라도 루시의 분만을 도왔지만, 어쨌든.
일반적인 출산보다 더 어려운 출산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얘기였다.
“이번엔 쌍둥이 아닐거야 루시.”
“그럼 우진을 죽일거야.”
서슴없이 툭 하고 뱉어내는 협박에 피식 웃음이 흘러나온다. 루시도 마냥 싫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뭐 먹고 싶어 루시?”
SKY항공우주기술의 로켓 발사 연회장에서도 제대로 먹지 못한 루시였다.
“아산댁 아주머니께 말씀드렸어.”
“그래?”
“응, 청국장에 계란말이. 이왕이면 깻잎이 들어간 계란말이.”
어느새 청국장과 한식의 매력에 푹 빠진 루시였다. 아산댁 아주머니의 음식이야 나도 인정하는 바이니 충분히 납득은 되었다.
“다른 건? 내가 뭐 사다줄 거 없을까?”
“음··· 모르겠는데?”
대충 시간이 지났다 생각했는지, 아니면 충분한 여유를 주었다 생각했는지 할아버지들과 호석, 철웅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스윽.
내 손을 쳐 내고, 루시의 손을 잡은 할아버지.
“우리 사랑스러운 며늘아기가 또 자랑스러운 일을 했구나.”
데비 할아버지는 고개를 ‘그럼!그럼!’하는 얼굴로 끄덕이며 손을 뻗어 루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축하드립니다. 아가씨.”
“축하드립니다. 아가씨.”
호석과 철웅의 절도 있는 축하까지.
루시가 픽 웃음을 흘린다.
나는 팍 자리에서 일어나 할아버지들과 철웅, 호석을 밀면서 말했다.
“자자, 나가세요, 나가. 우리 루시 편안하게 쉬어야 되니까.”
“이 놈이, 이제 막 들어왔어!”
“그래, 내 손녀딸 보겠다는데 누가 할애비를 말려?”
“어허, 태교에 안 좋습니다. 태교에!”
“뭐야? 이 놈이 뚫린입이라고!”
“겨기 계신 네 분, 거울 좀 보십시오 거울!”
내 말에 네 사람이 동시에 커다란 화장대 거울로 고개를 돌린다.
“음.”
“커험.”
“쩝.”
“쯧.”
가지각색의 반응들이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한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들의 모습은 누가 봐도 조폭 보스와 마피아 보스가 분명하니까.
“풉.”
루시가 참지 못하고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어디가서도 한 자리씩 하는 남자들이 거울을 보고 절망을 하는 꼴이란 제법 재미있으니까.
“파하하하.”
“크크크크.”
“회장님이 갈 수록 입담이 느십니다.”
“저는 얼마전 제 와이프가 했던 말이 떠올라서 제법 아팠습니다.”
***
모두가 잠든 새벽.
나는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가.”
루시가 눈도 뜨지 않고 묻는다.
“음? 안 잤어?”
“우진이 움직여서 깼어.”
“미안미안, 처리 할 일이 있어서.”
“우진 너무 바쁜 것 같아. 윗 사람이 너무 바쁘게 움직이면 아랫사람들이 힘들데.”
“하하하, 그래?”
“응, 우리 할아버지도 그러시던 걸?”
나도 모르게 루시의 이마에 뽀뽀를 해주고는 그녀의 볼을 쓰다듬었다.
“아직은 바빠야지, 우리 젊으니까?”
“이, 일 중독자!”
“유라시아 건만 제대로 처리하고, 우리 휴가 가자. 애들도 다 데리고.”
“젠틀 천이 또 삐치시겠네.”
“어쩔 수 없지, 대통령이니까.”
막 일어서려는 내 손을 잡은 루시가 특유의 맑은 눈으로 날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우진, 나는 지금 이대로도 행복하고 좋아.”
“응?”
“지금보다 더 많이 가진다고, 지금보다 없다고, 내가 불행하지도 않고, 더 행복하지도 않아. 솔직히 우린 너무 많이 가진 사람들이잖아?”
“그렇지.”
“그러니까, 우진도 너무 욕심내지 마. 가진것에 만족하고 행복할줄도 알아야지.”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루시가 제대로 모르는 것이 있었다.
“루시 말이 맞아. 언제 그렇게 깊은 생각을 했을까?”
“나 어린애 아니거든?”
다시 침대에 누워 루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내가 많이 가지려는게 욕심처럼 보였나보네?”
“아니야?”
“음,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
“그래?”
“응, 나는 단순히 돈을 많이 갖기 위해서 움직이는 게 아니야 루시.”
“그러면?”
“아이티를 보면서 어땠어?”
“안타까웠지?”
아마 루시가 저런 생각을 갖게 된 것에는 아이티에서 그 며칠이 꽤 중하게 작용했을테다. 루시도 이제는 아이들의 엄마가 되었다.
우리 태양이와 별이, 그리고 뱃속에 있는 새로운 생명까지 그녀에게 보살핌을 받아야 할 소중한 아이들이다.
헌데, 아이티는 어땠는가.
제대로 끼니를 때우지 못하는 아이들은 어떻고, 아이가 아이를 낳아 키우는 광경은 또 어떻고.
모성애라는 것은 꼭 제 아이를 통해서만 발현되는 게 아니니까. 루시는 그런 아이들을 한 없이 안타깝게 볼 수 밖에 없었다.
물론 겉으로는 해맑게 웃어주며 대했지만.
“아이티의 부자들은, 권력자들은 어떨까?”
“떵떵 거리며 살겠지, 어디나 빈익빈 부익부는 있을 수 밖에 없으니까.”
“맞아, 그게 기득권이라는 놈들이고.”
“응.”
“나는 그런 기득권들을 치우고 싶은거야, 누구나 공평한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나라고 빈익빈 부익부를 뿌리뽑을 순 없겠지, 그건 신도 불가능 할 것 같으니까.”
“그렇구나. 공평한 기회···”
“그래, 아이티에서 자라던 그 아이들이 피를 토하고 뼈를 깎는 고통을 이겨내는 노력을 한다면 언제든 제 2, 제 3의 천우진이 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
루시가 픽 웃으며 가슴을 툭 쳤다.
“무슨, 경쟁자는 다 박살낼거면서.”
실실 웃었다.
루시는 날 너무 잘 아니까.
“감히 SKY는 넘보면 안되지.”
“가, 가서 일 하고 와. 우리 아이들이 공평한 세상에서 살 수 있게.”
“그래, 세상 사람들이 우리 아이들이 좋은 자리에 올랐다고 손가락질 하지 않게, 내가 좋은 세상을 만들어 볼게.”
“그게 쉬울까? 인간은 질투의 화신인데.”
“그러니까 내가, 그리고 할아버지들이, 루시의 아버님 내 장인어른이. 그리고 루시도, 열심히 살아야지 누구라도 우리를 욕할 수 없게.”
“설교는 그만해, 또복이가 힘들데.”
루시가 제 배를 통통 두들긴다.
어느새 태명을 또복이로 확정했나보다.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들었어?”
“아산댁 아주머니가 또 복을 불러 오라고, 또복이로 하자셨어.”
“좋네. 또복이.”
“응, 다녀와~”
“응, 또 복을 불러 오러 갈게.”
루시가 졸린 듯 스륵 눈을 감고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나왔다.
생각지도 못하게 루시와의 대화로 인해 제법 깊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아이들과 루시가 있는 방과 가장 멀리 떨어져있는 곳으로 가 시가를 입에 물었다.
문득.
머릿속에 처음 회귀했을 때 다짐했던 것이 떠올랐다. 회귀 이후 단 한번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고, 방금 루시와 대화를 하면서도 알 수 있었다.
나는 확고한 목표를 가지고 이곳까지 달려왔구나 하고.
“처음엔 좀 만용같았는데 말이지.”
정말 그랬었다.
삼현을 부수고,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없게 만든 세상을 부숴버리고 싶었다. 누구에게나 노력하면 올라갈 수 있는 나무를 만들고 싶었다.
그 공평하지않은 불공정 사회에서 나는 하나의 부품이 되어 움직일 뿐이었으니까, 언제든지 대체 가능한 그냥 그저 그런 부품이 말이다.
한국의 기득권을 뿌리 뽑았냐?
그렇진 않았다.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은 변화하고 있었다. 당장 할아버지가 많은 법안들을 바꿔가고 계시니까.
내 목표에 끝이 보인다.
한국의 기득권들이 재벌들과 국개의원등이라면, 전 세계적 기득권들은 미국과 중국, 러시아와 유럽 정도라 할 수 있겠지. 어쩌면 일본도 거기에 살짝 낄 수도 있을테고.
이제 세계의 기득권들도 슬슬 무너뜨릴 때가 되었다.
기득권들이 감히 자신들의 권력을 남용 할 수 없도록 압도적인 존재가 그 위에 군림해야 한다.
그것이 내가 생각한 해결책이고 궁극의 목표다.
나는 그것을 위해 걷고 또 걷는다.
그것은 변함이 없다.
“고민이 많아 보이십니다.”
어느새 다가온 호석의 말.
“그냥, 생각 좀 했습니다.”
“고민은 끝나셨습니까?”
“언제나 그렇죠? 생각만 한다고 변하는 게 있던가요, 움직여야지.”
“그렇죠.”
“후진다오에게 코드원이 명단을 받았다죠?”
“예, 회장님.”
“그럼 이제 준비 한 거 터뜨려도 되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변명을 할 수 없게 전 세계적으로 알리세요.”
“예, 회장님. 마이튜브의 동시접속자와 이용자수가 또 크게 증가하겠습니다.”
호석의 말에 픽 웃음이 흘러나왔다.
“철수가 좋아 하겠네요, 제 놈 지분이 제법 있으니까.”
“하하하, 또 다른 일 없냐고 묻더군요.”
“철수는 키보드 두들기고 있는게 어울려요, 그냥 두세요.”
“예, 회장님.”
호석이 잠시 어디론가 문자를 전송하고는 내게 서류를 건넨다.
“마카오, 벌써 처리 됐네요?”
“예, 회장님이 다녀오셨으니 일 처리가 빨라야하지 않겠습니까?”
“좋네요, 김장원 사장이랑 독거미는 서운하겠지만.”
“안 그래도 한국에 들어와서 계속 휴가를 쓰고 있습니다.”
픽 웃음이 터져 나왔다.
늦바람이 무섭다더니, 늦은 연애가 좋긴 한가 보다.
“러시아.”
“예?”
“그 둘, 러시아로 보내세요. 여행겸, 동향파악이랄까?”
호석이 씨익 입꼬리를 들어올린다.
“이거··· 한 사람의 손에 공산당이 모두 멸망하는 건 아닌가 싶군요.”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요, 내가 꼭 공산당을 싫어해서일까요?”
“예?”
“진행시키세요.”
“하하, 알겠습니다.”
< 제 312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