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11화. >
그래도 중화인민공화국의 부주석이라고 차디찬 감방이 아닌 제법 사람이 살 수 있는 공간에 머물고 있는 후진다오.
그는 불만이 전혀 없었다.
쇠창살이 그를 가로 막고 있었다 하더라도 불만을 느끼지 않았을지 모른다.
어디든, 그곳이 어디든. 사막의 SKY PMC의 훈련소보다는 환경이 나을테니까.
최소한 굶기지 않고, 물은 먹을 만큼 주는 곳이니까 말이다.
여유로운 얼굴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마치 도인처럼 눈을 감고 있던 후진다오가 인기척을 느꼈는지 눈을 떴다.
"음."
"접니다. 부주석 각하."
"아, 자네군."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조심 접근한 이는 장저민의 수석 보좌관이었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그렇지, 걱정하지 마시게."
"꺼내드릴 방법은 없어서 아쉽군요."
"아니야, 약속했던 것만 도와줘도 충분해."
"그리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슥.
후진다오의 침대 머리맡에 있는 테이블에 USB하나를 내려놓는 그.
"이게 명단인가?"
"예, 장저민이 내민 합의서에 수결한 자들의 명단입니다."
후진다오 역시 그 자리에 있었기에 대충은 알고 있었다.
"참여하지 않은 자가 있던가?"
"있습니다."
"허허, 대쪽 같은 자들이 있긴 있군."
"왕 수석 보좌를 장저민이 죽였다는 것 하나로... 과연 그를 옭아맬 수 있을까요?"
보좌관은 떨고 있었다.
이렇게 후진다오의 처형에 앞장서는 인물들의 면모가 심상치 않기 때문이었다.
"그분에 비하면 한낱 부나방에 지나지 않지."
"예? 그분이요?"
"그런 분이 계시네. 내가 자네를 언질 했으니, 슬슬 자네에게도 그분이 손을 뻗어주시겠지. 그러니 염려 마시게."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자네가 내게 원하던 것은 '돈'이 아니었던가?"
"맞습니다."
"그 돈을 줄 사람이 나타날 거라는 얘기야. 그리고 그 분이 진정한 이 중원의 천자시지."
보좌관은 그제야 자신이 이번에도 줄을 잘못 섰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무지 이 중화인민공화국에 제대로 된 사람이 없었다. 이런 지도부 밑에서 어찌 인민들이 태평성대를 누리며 살겠는가.
자신의 할아버지도 장제스를 따라 대만으로 갔으면 좀 좋은가 말이다. 그놈에 한족이 무엇인지 이상한 세뇌에 빠져서 결국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할 상황에 처한 자신의 신세가 한탄스러울 뿐이었다.
"돈만 보시게, 하나의 뜻을 세우기도 어려운 세상이야, 두개는 욕심이지. 우리 같은 종지 그릇들은 그 하나만 보고 살아야 해."
후진다오의 성인같은 말에 내심 어처구니가 없었으나, 공감되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닌지 보좌관이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부디, 강녕하시길."
USB를 다시 그에게 돌려주는 후진다오.
"가지고 계시게. 곧, 그것의 주인이 찾아오실테니."
"음... 예."
글쎄.
끈 떨어진 연이 된 후진다오를 살리기 위해 누군가 나타날까 싶은 보좌관은 대충 고개를 주억거리고 서둘러 후진다오가 감금되어 있는 곳을 벗어났다.
아직 제대로 된 대가를 받아내지 못했지만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자신에게 이롭다는 것을 깨달은 것.
"우선 베트남으로 가자."
그는 베트남에서 필리핀, 그리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여정을 선택했다.
그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본 것.
서둘러 자신의 집에 들어간 그가 바쁘게 짐을 싸기 시작했다. 집안에서 계속해서 '혼인'을 강요했지만 끝끝내 혼인하지 않은 자신을 칭찬하면서 말이다.
"동작그만."
뒤쪽에서 들려오는 서슬퍼런 경고에 덜컥 몸이 굳은 보좌관.
"모, 모든것을 말씀드리겠소."
"내가 누군줄 알고?"
"묻는 것에 성실히 대답할테니 목숨만은 살려 주시오."
"흠, 이런 자였나."
뒤통수에 들려온 마지막 언어.
그것은 한국어였다.
이재형이 팍 인상을 찌푸리고는 툭툭, 총구로 보좌관의 머리를 건드려서는 자리에 앉게 만들었다.
-전화 받았습니다.
"회장님, 코드 원입니다."
-아, 그래요.
"보좌관을 사로잡았습니다만... 믿을 수 없는 자로 보입니다."
-상관없습니다. 적절할 때 써먹을 수만 있으면 되니까.
"흠, 아무래도 곁에서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예, 회장님. 일은 어떻게 진행해야겠습니까?"
-후진다오에게 따로 언질은 줬는데, 아직은 시기가 이릅니다. 조금더 일이 커지길 기다렸다가 한 번에 몰아붙입시다. 그래야 뒷맛이 깔끔하니까.
"명심하겠습니다."
-따로 연락을 하겠습니다.
"예, 회장님."
보좌관은 침을 꿀꺽 삼키며 전화를 끊은 이재형을 바라보았다. 이제 그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완벽하게 알게 된 그.
"후, 후진다오 부주석께서 말씀하신 분이십니까?"
"그래."
"처, 천자가... 한국인이라니..."
말도 안 된다는 얼굴.
"신분세탁은 물론, 안전한 곳 까지 책임진다. 너는 맡은 바 역할만 제대로 수행 해."
"알겠습니다."
"네 놈이 가진 장저민의 약점이 무엇이지?"
"장저민 주석이 왕충헌 수석 보좌를 살해한 증거입니다."
"별 거 아니었군."
눈을 부릅 뜬 보좌관.
그러나 이내 고개를 주억거린다.
확실히 장저민 정도의 자리에 앉은 사람은 얼마든지 '살인'따위는 무마 할 힘이 있을테니까.
증거 조작은 물론, 증인들 역시 조작하기 쉬울테다. 누가 감히 장저민 주석에게 반기를 들겠는가. 현재 이 나라의 모든 지도부가 장저민의 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허면, 도대체 이 한국인은 어떻게 장저민을 요리하려는 것일까? 그런 의문이 머릿속에 가득한 보좌관이었다. 물론 이재형은 보좌관에게 '해답'을 알려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
SKY항공우주기술의 위성이 발사 되는 날.
해외 유수의 언론들은 물론이고 대한민국의 언론들도 취재열기가 뜨거웠다.
그러나 그런 기자들의 취재열기보다 뜨거운 열기를 내뿜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어떻게든 내게 잘 보이기 위해 노력하려는 전경련의 사람들이었다.
"하하, 천 회장님 감축드립니다."
"이야, 우리나라도 이제 선진국아니겠습니까? 이게 다 SKY 덕분이지요!"
"눈물이 나올 정도로 참 대단한 일을 해내셨습니다."
갖가지 아부들을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뒤쪽에 대현그룹과 GL그룹, KS그룹의 회장들이 내게 아부를 하는 인사들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들 역시, 예의상 얼굴을 비추러 왔으나 저런 낯 간지러운 소리는 할 수 없는 모양이다.
"회장님들도 오셨군요."
내가 앞에서 갖가지 아부를 하는 인사들을 싹 무시하고 그들에게 다가가니 뒤쪽에 있던 나머지 전경련 인사들은 아쉬움을 뒤로 하고 사라질 수 밖에.
"좋은 날에 축하는 해야지요."
정상영의 말에 나머지 두 회장들도 고개를 주억거린다.
"전경련에서 유라시아 횡단철도 이권 때문에 욕심들이 나는 모양입니다."
샴페인을 홀짝이며 한 내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다.
"어찌 욕심이 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덩어리가 큰데."
최태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분께만 먼저 말씀드리지만, 내가 선정하는게 아닙니다. 공정한 입찰 과정을 거칠 것이니, 공정하게 경쟁에 임해주세요."
세 회장의 얼굴에 화색이 돋는다.
그도 그럴게 총알이 가장 많은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다른 그룹들이 출혈을 감수하고 낮은 가격을 제시한다면 당연히 그 곳이 입찰 할 수 있을테다.
아마 세 회장은 내가 혹, 그들이 덩치를 키우는게 부담스럽다 느낄 수 있으니 배제하진 않을까 예상했던 모양이다.
"그러니 회장님들도 편하게 임하시면 됩니다. 굳이 이런 자리까지 부러 오실 필요는 없지요."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회장님."
정상영이 살짝 고개를 숙여보였다.
다른 둘도 마찬가지.
"다, 대한민국 잘 되자고 하는 일 아니겠습니까?"
물론 내 말은 어디까지나 허례라는 걸 아는 셋이지만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의를 표한다. 아마 이 자리에서는 기분이 좋아 유야무야 넘어가겠지만, 돌아가서는 서로 뒤통수를 칠 준비들을 할 것이다.
어떻게든 유라시아 횡단철도 사업에 한 발 걸쳐야 앞으로 많은 이권들을 거머쥘 수 있을테니까.
"나중에 SKY LINE의 유라시아 횡단철도 유통 사업에 회장님들께서 해주신 오늘의 축하, 잊지 않겠습니다."
셋이 빙그레 입꼬리를 들어올리는 걸 확인한 나는 천천히 자리를 옮겨 할아버지에게 다가갔다.
할아버지 역시 주변을 모두 물리신 상태.
"로켓 발사는, 가족들이랑 봐야 제맛이지, 안 그렇더냐?"
"그럼요."
할아버지 품에 안긴 태양이가 내게 오겠다고 양팔을 파닥거린다.
"오냐오냐, 내새끼."
태양이를 안아 들고는 두어번 얼러주니, 옆에서 할아버지의 잔뜩 섭섭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쯧, 손주 놈 키워봐야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더니, 네 놈을 보자마자 안기겠다고 성화구나."
"하하, 제가 손주고, 태양이는 증손주에요 할아버지."
"그거나, 그거나 이놈아!"
"어머, 젠틀 천~ 아이들 놀라요~"
루시의 애교에 '큼, 큼'하고 헛기침을 한 할아버지가 이번에는 별이를 안아들고서는 나를 흘낏 쳐다보신다.
"좌우지간 아들 놈보다는 역시 딸내미가 최고지, 암."
"어허, 아이들 다 들어요 할아버지. 이제 말끼도 다 알아 듣는데."
"커험, 그래 내가 주책이었구나."
순순히 인정하는 모습에 가족들의 웃음꽃이 피어오른다.
"쑤."
데비 할아버지의 부름에 고개를 돌린 할아버지.
"왜 그러나."
"이제 슬슬, 돌아 가볼까 하네."
"흠, 워싱턴으로?"
"그래, 아들놈이 주지사로 바쁘게 움직이겠다 하니, 나 역시 바빠져야 하지 않겠는가?"
"태양이와 별이가 섭섭하겠군."
"하하, 자네는 아니고?"
"쩝. 그걸 굳이 말로 해야 아는가?"
할아버지가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본다.
"주니어의 주지사 선거는 문제가 없겠더냐?"
"어휴, 장인어른이 얼마나 자신감이 넘치시는데요? 딴 사람이 되셨다니까요?"
루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묻는다.
"대디가? 정말?"
"그래, 나도 놀랐어."
쓱, 데비 할아버지를 바라보고는 말을 이었다.
"록펠러 핏줄이 어디 가는 건 아닌 모양이더군요."
흐뭇하게 입가에 호선을 그리는 데비 할아버지.
"그래야지, 누구 아들인데."
할아버지가 한 손으로 데비 할아버지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드디어 과거의 설움을 걷어낼 기회가 생기겠구만 그래."
데비 할아버지가 눈을 번들거리시며 말했다.
"그렇지, 독과점 법이라는 해괴한 짓거리로 한순간에 우리 가문을 농락했었지."
"그때와 지금은 달라졌으니, 걱정 마시게. 그때는 록펠러 가문이 홀로였다면, 이제는 자네 곁에 우리 든든한 천가가 있지 않은가?"
"그렇지, 그때는 우리 조부께서 홀로 싸우셨지만, 이제는 내게도 동료들이 생겼어."
"그래, 그러니 믿으시게. 내 손주놈이 좀 잘났는가?"
데비 할아버지가 흐뭇하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그렇지, 내 손녀 사위가 제법 잘났지."
루시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다가 팔꿈치로 쿡 내 옆구리를 찌른다.
"좋아? 입이 귀에 걸렸어 우진."
"하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조부님이 날 칭찬하잖아?"
"뭐야."
픽 하고 웃으면서도 볼은 발그레 하게 변한다.
손을 뻗어 카나페 하나를 집어 루시의 입가로 가져갔다.
"아."
입을 벌리던 루시가 카나페가 가까워지자 돌연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린다.
"웁."
그리고선 헛구역질.
할아버지, 데비 할아버지, 나와 루시.
서로서로가 눈을 마주친다.
"설마?"
그때.
-5, 4, 3, 2, 1 발사!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발사되는 로켓.
그 장면을 바라보며 우리는 모두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이 놈아, 이번에도 설마 쌍둥이더냐?"
"글쎄요."
"하하, 가족이 더 생기겠구나."
"그러니까요."
"천가는 탄탄대로일테니 지금만 같아라."
할아버지는 꼭, 소원을 비시는 것 같았다.
"지금만 같으면 되나요? 아직 세상에 먹을게 너무 많은데."
"그래서 네 놈이 많이 낳는구나. 나눠 먹으려고."
"하하하하하."
< 제 311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