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철혈의 재벌-305화 (305/458)

< 제 305화. >

굳은 얼굴로 수화기를 귓가에 가져간 김은정.

“전화 받았소.”

-연락이 없기에 먼저 해봤습니다.

익숙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내레 지금, 남조선과 소통할 시간이 없소.”

-에이, 김남정이고 김철정이고 그 사람들 세력 숙청하느라 바쁘다고 들었는데? 그 마저도 이제 다 정리가 되었고.

천우진의 말에 흠칫 놀라는 김은정.

북한 내부에서도 김은정의 움직임을 아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김남정과 김철정과 관련된 세력들이 숙청된 것은 사실이지만 최대한 은밀하게 진행했다 생각했기 때문.

“이거, 공화국에 변절자 새끼들이 많구만 기래.”

-미국이나 한국, 선진국의 정보부대들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바이 동무가 죽은 것을 제3국들도 알고 있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 보다 북한에 관심이 많은 나라들이 많지요.

“몰랐구만 기래···”

-뭐, 대충 북한이 정리가 된 것 같으니, 정상회담 한번 해야지 않겠습니까?

짧은 고민이 김은정의 뇌리에 스쳤다.

천우진은 현재 김남정을 보호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감금이 맞지만 그것을 김은정이 알 길은 없었다.

우선 당내 지도부에 ‘높은 자리’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며 당근을 내밀어 현재는 잡음이 없지만, 김남정이 등장하면 그것은 또 모를일이었다.

“내레, 선택권이 있소?”

완전히 꼬랑지를 밑으로 만 김은정의 말에 수화기너머 천우진이 날짜를 말해왔다.

-시기가 시기니까, 일주일 드리겠습니다?

“아바이 동무의 49제 정도는 치뤄야 하지 않소?”

-핑계 좋네요, 좋습니다. 2주로 하죠.

“아직 하루도 장례를 치르지 못했슴메.”

-김일정이 죽은지 2주가 훌쩍 지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벌써 가을입니다.

“커험···”

-당신이 걷던 숙청의 길이, 그를 길이던 길이라고 얘기하면 손가라질 할 사람은 없을 겂니다. 수라도를 걸어왔는데 미치지 않고서야.

“자세히도 알고 있소, 동무.”

-들리는 소문이 많아서요. 그럼 그렇게 알고, 끊겠습니다. 정확한 날짜는 딱 50일이 되는 날로 하면 되겠네요.

“후우··· 알았소, 최고인민회의에 얘기 하리다.”

전화를 끊지 않던 천우진이 짧은 침묵후에 말했다.

-그, 최고사령관이 된 것, 축하합니다.

“하. 내레 고맙다 해야하오?”

-장담컨데, 당신이 아낀다는 그 인민들에게 도움이되면 되었지 손해는 아닐겁니다.

“부디 그러길 빕네다.”

-그럼.

뚝.

망설임 없이 끊긴 전화.

친위대원에게 수화기를 건넨 김은정이 호위총국장을 바라보았다.

“내레, 변절자 아 새끼들을 치우고, 또 치웠다고 생각했는데··· 천우진 이 아새끼레 공화국 사정을 훤히 들여다 보고 있습니다 기래?”

호위총국장이 입술을 달싹였다.

뭐라 얘기해야 할지 망설이는 모습.

“당장 쳐 내라 얘기하진 않갔시요, 그러나. 공화국이 공화국 만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디.”

“명심하갔습네다.”

쯧, 하고 혀를찬 김은정이 말했다.

“조만간 남조선에 한 번 가야하니, 준비해주시야요.”

“예, 최고사령관 동무!”

휙 하니 몸을 돌려 다시 최고인민회의장으로 움직이는 김은정, 그의 곁으로 호위총국장이 바짝 따라 붙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호위총국장 리영철의 입장에서 김은정은 자신의 목숨을 구한 사람이었다. 또 북한의 지도자가 될 사람이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그러니 좋든 싫든, 우선은 김은정을 최우선으로 보호해야 했고, 어떻게든 북한의 모든 실권을 그가 쥐게 만들어야 했다.

김은정과 함께 걸어가기로 한 이상.

김은정이 실권을 쥐지 못하면, 자신의 목숨은 물론, 가족들의 목숨까지 장담할 수 없었다. 지금 김은정이 정적들을 숙청하는 것 처럼. 자신도 누군가에게 숙청 당할 수 있기 때문.

“내레 말입네다.”

“말씀하시라요, 최고사령관 동무.”

“언제까지 남조선 아 새끼에게 끌려 다녀야겠슴메?”

리영철은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천우진의 손을 놓는다면 둘다 반드시 죽는다. 천우진에게는 김은정이 제 아비를 죽였다는 증거가 있을테니까.

“끌려 다니는 것이 아니라, 같이 간다 생각하시라요.”

“하, 빠져나올수 없단 소리구만 기래.”

“유일하게··· 증거는 남조선 천 동무에게 있디요.”

“호랑이 등에 올라탄 꼴이구만 기래.”

“인민들이 진심으로 최고사령관 동무에게 감탄하고 의지할 때. 그때만이 비로소 호랑이 등을 박차고 내려올 수 있을겝네다.”

“기렇소?”

“역사상 처음으로, 우리 공화국의 부흥기를 만들어주시라요.”

***

전화를 끊고 티라미수 라떼를 홀짝였다.

록펠러가의 셰프가 바리스타 자격증이 있다더니 그 맛이 매우 훌륭했다. 물론, 나는 개인적으로 티라미수 라떼는 ‘믹스커피’를 이용해 만든 것이 가장 입에 맞는다.

“회장님.”

호석의 낮은 부름에 시선을 그에게 옮겼다.

“장저민이 거듭, 연락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아, 거 노인네. 더럽게 징징 거리네.”

호석이 피식 입꼬리를 들어 올린다.

“회장님이 의도하신 상황 아니십니까?”

“아직 계산기를 덜 두들겨서요.”

“그러십니까?”

“후진다오를 시켜서 중국을 장악하느냐, 아니면 장저민한테 던진 채찍을 대가로, 뭔가를 받아 내느냐.”

“하하하, 회장님도 그런 것을 고민하십니까?”

나를 잘 아는 호석의 얼굴은 마치 ‘그럴일이 없을텐데?’하는 얼굴이다.

“예, 사실. 둘다 별로라서요.”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호석.

“역시,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내 의중을 알고 있는 듯 보이는 호석.

“후진다오는 잘 하고 있나보죠?”

“예, 그러니 장저민이 부담스러워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호위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어요?”

“비밀리에 PMC 정예 스무명이 따라붙고 있습니다. 보고에 따르면 슬슬, 공안부와 국가안전부가 나서고 있다고 합니다.”

“그럼 조만간 중국 당내에서도 입질이 있겠네요.”

“예, 후진다오가 사라지고 나서 욕심이 많던 장저민은 그의 사람들을 그대로 흡수했으니까요.”

탁.

찻잔을 내려놓고는 말했다.

“아직 시기가 공교로우니까, 조금더 일을 키웠으면 좋겠네요.”

“음, 후진다오에게 언질을 주겠습니다.”

“예, 장저민의 연락은 당분간 거절하는 것으로 하죠. 목마른 사슴, 아니 돼지가 갈증에 허덕이도록.”

“하하하, 예 알겠습니다 회장님. 아예 장저민의 연락은 모두 거절하라고 지시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였다.

후진다오를 이용해 중국을 먹는 것도. 장저민을 이용해 원하는 것을 뜯어오는 일도.

어떤 것을 선택해도 가능 할 것 같은 상황이지만, 아직은 눈치를 봐야 할 때였다.

부쉬가 대선 준비로 바쁠때. 대선 때문에 록펠러와 나의 눈치를 봐야 할 때.

그때가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뭔가 하나를 노린다면 부쉬의 눈치따위는 보지 않아도 좋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 없다.

‘욕심이 많구나.’

어디선가 할아버지가 내게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맞다.

나는 둘 다 취할 생각이다.

마음이 급해 아무거나 생각없이 덥석덥석 내줄 장저민에게 뜯어낼 것을 한계치까지 뜯어내고.

내게 충성을 다한다는 후진다오를 국가 수석으로 세워 중국의 흑막이 되볼까도 싶다. 물론 자리에 오른 후진다오가 뒷구녕으로 뭘 할지는 모르지만, 그건 나중 일이니 걱정은 하지 말자.

“허니~”

마침 찻잔이 다 비워졌는데 루시가 날 부른다.

“오.”

루시를 보고 감탄하는 날 본 호석이 흐뭇하게 웃는다.

“흠, 조만간 셋째 소식이라도 있으시겠습니다?”

“어허.”

“편히 쉬십시오. 회장님.”

“예.”

***

슥, 슥.

장인어른의 어깨에 묻어있는 먼지들을 털어냈다.

“고맙네.”

“아닙니다.”

“이거 원, 긴장하지 않으려 해도 조금은 떨리는 군.”

“그러실 수 있습니다.”

“하하하, 한 두번 본 사이도 아닌데 이상하게 떨려.”

확실히 장인어른은 부쉬와 꽤 많은 만남을 가지셨었다. 허나 그때는, 장인어른이 정계에 뜻이 없을 때였고, 지금은 정계에 뜻이 생긴 상태.

아마 다음 대선에서 부쉬가 장인어른의 라이벌이 될 지도 모른다. 원래라면 흑인 대통령이 등장해야 하겠지만. 내가 나서서 그렇게 되지 않게 만들거니까.

“편안하게 하세요, 장인어른. 우리는 부쉬의 아랫사람이 아니니, 너무 윗 사람처럼만 하지 않으시면 충분합니다.”

“그렇지, 우린 아랫사람이 아니지.”

부쉬가 굳이 록펠러가에 연락한 이유.

그곳에 내가 있기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곧 다가올 대선에 역시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빅 카드 중, 가장 큰 카드에 먼저 연락을 취했을 뿐일테니까.

“자 들어가시죠.”

“그러자.”

데비 할아버지와 처음, 부쉬를 만났던 그 레스토랑으로 나와 장인어른은 당당히 걸어 들어갔다.

레스토랑 내부는 한산했다. 곳곳에 식사를 하는 테이블이 보였으나 나는 한눈에 그들이 손님으로 위장한 대통령 경호 일행이라는 것을 알아 챌 수 있었다.

SKY PMC를 늘 곁에 두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눈치가 늘었다.

부쉬 입장에서도 현 미국의 최고 부자라고 할 수 있는 록펠러 가를 만난다는 소문은 좋지 않다고 판단한 듯 보였다.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 이런 부분에서 철저하구나 싶다.

“오랜만입니다. 데이비드 주니어. 그리고 우진.”

나를 친숙하게 부른다.

확실히 오랜만이기는 했다.

중국과 북한의 일에만 몰두 했으니까, 미국에게 뭐 따로 얻고자 하는게 당장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앉으시지요.”

부쉬가 손수 의자를 빼내어 장인어른을 앉힌다.

사람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는데는 선수라고 보인다.

“고맙습니다.”

“하하, 아닙니다. 나의 최고 후원자인 두분이 아니겠습니까?”

한껏 낮은 자세를 취하고 있지만 이글거리는 부쉬의 눈은 언제라도 뒤통수를 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눈이다.

나는 딱히 부쉬가 의자를 빼주길 기다리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여기 오랜만이네요?”

내 말에 부쉬가 작게 웃는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곳에서 미스터 록펠러와 우진과의 술자리가 기억에 납니다. 그날 참 즐거웠지요?”

“아니라고는 못하겠는데요? 사실 다음날 잘 기억이 나지 않아서 무슨 얘기를 했는진 모르겠네요.”

“파하하, 나도 그랬습니다.”

크게 웃은 부쉬가 장인어른을 바라본다.

“어떻게 오늘, 우리 데이비즈 주니어도 같이 필름이 끊길 때까지, 달려 볼까요?”

“술이라면 나도 곧잘 하는데. 자신 있스십니까? 미스터 프레지던트.”

“오오, 역시 록펠러의 사내들이라 이겁니까? 나도 말 술로 유명한 부쉬가의 사내입니다.”

혀는 부드럽고 밝게 굴러가지만.

눈은 전혀 그렇지 않은 둘.

그 기 싸움을 보는 것도 재미있겠지만 시간이라는 게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지니, 나는 본론을 툭 꺼냈다.

“미스터 프레지던트.”

“말씀하세요, 우진.”

“우린 대선에 관심 없습니다.”

부쉬가 장인어른을 슬쩍 쳐다본다.

장인어른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대가 날 경계할까 싶어 내 사위게 하는 말인 듯 하군요.”

“아하하, 설마 제가 록펠러가를 경계하겠습니까? 나의 영원한 파트너로 생각하고 있는데요.”

이제는 서로의 눈도 슬슬 부드러워 지고 있었다.

그러나 부쉬의 경계심은 완전히 사그라들지 않았다. 미국 정계와 사교계에 ‘록펠러가가 드디어 정치에 발을 들인다.’라는 소문이 흘러나온다는 것은 여기있는 모두가 알고 있는 일이니까.

“참 소문이라는게 멀리멀리 퍼져나갑니다. 그렇지 않나요 미스터 프레지던트?”

“그렇지요 우진, 그래서 우리들은 항상 행동을 조심해야 합니다. 조금만 삐끗해도 의도를 눈치챈 승냥이들이 마구 입을 놀리니까요.”

그 소문은 너희가 만든것이 아니냐는 말이었다.

사실이니 부정할 필요는 없었다.

정계에 뜻을 두기 시작한 이상, 감히 록펠러가가 가릴 것은 없었다. 하겠다면 하는 것이다. 그게 천가의 방식이고, 천가의 사돈이 된 록펠러가의 방식인 것이다.

“저번 대선에, 우리 록펠러 가와 천 가는 아무런 사심없이 프레지던트를 도왔습니다.”

부쉬가 살짝 눈쌀을 찌푸리지만 이내 순순이 인정했다.

“그랬지요.”

“이번에는 적절한 보상을 좀 받아볼까 싶습니다.”

“보상이요?”

또르륵 눈을 굴리는 부쉬.

장인어른 고개를 주억거리다 입을 열었다.

“이제 막 입문하는 초보가 프레지던트에게 비비는 것은 어불성설이니 너무 경계하지 마시지요?”

“아하하, 결국 소문은 사실이 되었군요.”

“나는 대통령보다는, 주지사가 되고 싶더군요.”

“주지사?”

내가 장인어른을 거들었다.

“마침 워싱턴주의 주지사 선거가 대선과 비슷한 시기에 있지 않습니까?”

부쉬도, 장인어른도.

그리고 나도.

셋 모두 입꼬리를 길게 들어 올렸다.

“이것 참, 공교롭게도 그렇군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나는 손을 들어 웨이터를 호출했다.

“오늘 진탕 마실 생각이니, 가지고 있는 술 모두 내오시는게 좋을 것 같군요.”

웨이터가 싱글벙글 ‘예!’하고 빠르게 물러난다.

“자, 그럼 이제 기분좋게 마실까요? 장인어른? 미스터 프레지던트?”

“이거 우리 셋의 의견이 합치하니 벨트도 풀러야겠습니다. 영 답답해서.”

부쉬는 벨트를 풀고.

장인어른은 보타이를 풀었다.

와인이 채워져 있던 잔을 들어올리고는 내가 선창했다.

“프레지던트의 재임을, 장인어른의 주지사 선거를 위하여~”

< 제 305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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