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04화. >
아이티의 자연풍광을 즐기고 싶었지만, 장모님 록산나 여사와 마나님 루시가 극구 반대를 했다.
이유는 별 게 아니었다. 굳이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봉사활동을 하는 지역의 주민들에게 빈부격차를 느끼게 하지 않았으면 하는 좋음 마음 때문이었다.
바다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나로서는 아쉬웠다. 아이티의 바닷속은 어떨까 스킨스쿠버라도 할 생각이었는데 말이다.
두 분의 뜻이 좋으니 거절 할 수 없었고, 그럼 빨리 이동하자는 내 의견에 모두가 동의했다.
비행기에서 아이티의 아름다운 풍광을 바라보며 가벼운 칵테일을 즐기는 사이, 위스키 한 잔을 비운 장인어른이 물었다.
"그래, 뭐부터 하면 되겠는가?"
"상원부터 하시죠."
"상원? 6년 임기를 채워라?"
고개를 저었다.
당장 4년 뒤에 미국은 또 대선이 있지 않은가. 곧 다가오는 대선에서는 아마 부쉬가 유력할 것이다. 작업을 하기로 하면야 할 순 있겠지만 성급한 선택이다. 부쉬에게 얻어낼 것들을 충분히 얻어 낼 수 있고, 부쉬가 알아서 인망을 잃어가고 있으니 놔 둬도 충분하다.
또, 내 가족들이 한국과 미국의 양대 대통령이 되려 한다면 급하게 견제하려는 세력들이 나타날 수 있었다. 그러니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천년대계를 이루면 될 일이다.
"다음 대선으로 가시죠."
"2008년?"
"예."
"그때까지 입지를 다져야겠구만."
정치에 입문하기로 마음먹은 장인어른은, 그 순간부터 기도가 달라졌다. 할아버지와 데비 할아버지에게 느껴지던 그런 기도를 여태껏 숨기고 사느라 얼마나 답답했을까.
"예."
"명색이 장인이 되어서 사위의 도움만 받을 수는 없지, 걱정 마시게. 정 도움이 필요하면 따로 연락을 할테니, 여기 찰리 박 대표의 도움으로도 충분해."
"그렇습니까?"
자신만만한 얼굴의 장인이 말했다.
"돈이라면 나도 꽤 있지 않은가? 명망 역시 제법 두텁지."
"알겠습니다. 장인어른, 뜻대로 하시죠."
"그래. 게다가 자네가 골칫덩이 로스차일드를 치워 두었으니 일사천리로 진행 할 수 있네."
고개를 끄덕였다.
로스차일드가 가진 미국내의 영향력을 그대로 흡수한 록펠러 가는 현재 무시무시하게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데비 할아버지가 한국에서 내 아이들과 탱자탱자 놀고 있는 듯 보이지만, 밤이면 밤마다 전화를 붙잡고 열심히 움직이고 계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 열심히 움직이고 있다는 건 알고 있네."
"그러십니까."
"아들놈이 되어서 놀고 있을 순 없지, 한국에 가거든 꼭 전해 주시게, 아들이 기지개를 편다고."
말투부터 달라졌다.
본래 가벼운 분위기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동네 아저씨 같은 분위기셨던 장인어른.
벌써부터 상원의원, 미래의 대통령이 된 것 처럼 점잖고 젠틀하며, 혀 속에 칼을 숨겨 놓으셨다.
"예, 알겠습니다."
장인어른의 의지가 확고하니 당분간은 지켜봐도 충분할 것 같았다. 슬쩍 고개를 돌리니 찰리 박이 마치 걱정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준다.
기업 사냥꾼.
그들이 가진 저력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찰리 박은 그런 진흙탕 싸움에서 정점에 올랐던 인물이니 정치권의 알력, 이권 싸움에서도 자신의 장점을 옳게 사용할 수 있을테다.
나도, 내 처가 록펠러 가도.
돈은 썩어지게 많으니 가장 좋은 무기를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미국의 정치인들 중, 우리보다 총알이 든든한 놈들은 없다.
"먼저 쉬겠네, 오랜만에 푹신한 침대에서 자겠군."
"예, 쉬십시요 장인어른."
장인어른이 자리를 벗어나자 기다렸다는 듯 호석이 맞은편에 앉았다.
"중국에서 전화가 왔었다고 합니다."
"장저민이요?"
"예."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돼지가 마음이 급한 모양이네요."
"후진다오가 선동질에는 확실히 재능이 있어보입니다."
"그래요?"
"예, 벌써 후진다오를 의지하는 중국인들이 수천이 넘었다고 합니다. 신장위구르 지역은 감히 한족들이 기를 펴고 있지 못하고요, 오히려 한족들까지 동조하고 있다고 하니, 슬슬 내륙 깊은 곳까지 뻗어 갈 것 같습니다."
고작 후진다오 한 명이 이룬 성과는 아니었다.
알게 모르게 PMC 대원들이 그의 주변에 섞여들어가 그가 선동을 할 때마다 사실에 기반을 둔 소문들을 슬쩍슬쩍 흘렸다.
없는 말이 아니니 장저민의 입장에서는 마음이 급할 수 밖에 없었다. 왕충헌이 긁어 모은 돈을 다시 한 번 털었으니 이제 장저민은 발동에 떨어진 불 정도가 아닌, 허벅지 대동맥에 사시미가 들어온 느낌일테다.
"생각보다 김은정이 좀 더디네요?"
"어제부터 본격적인 피의 숙청이 시작된 듯 합니다."
예상했지만 역시나.
김은정은 김은정이었다.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내가 알던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론 어리기에 미숙한 부분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결단력있게 밀어부치고 있었고, 위험부담은 있지만 어떻게 움직여야지 공고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는지를 아는 것 같았다.
"대원들 최대한 몸 사리라고 하시고, 김은정 측에는 먼저 연락을 넣어 보세요, 한 번 만나봐야 하지 않겠냐고."
"예, 회장님."
***
북한의 최고인민회의가 소집되었다.
지도부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의석을 하나둘 채워가는데 오늘따라 유독 빈자리들이 눈에 띄었다. 특히나 최고인민회의 최고 권력자인 위원들의 빈자리가 유독 많았다.
"동무, 어찌 위원 동무들이 없소?"
"소식 듣지 아니했소?"
"무슨 소식 말이오?"
슬쩍 주변의 눈치를 살핀 사내가 자신의 옆 자리에 앉은 이에게 아주 조용하게 속삭였다.
"최고사령관 동지가 별세 했다는 소문 말이오."
"뭐이 어드레? 흥, 말 같지도 않은 소립네다."
"어허, 리구연 동무도 안 나오고 있습네다."
"기것이 어떻다는 말씀입네까?"
"리구연 동무의 당숙이 최고인민회의 리구철 위원동무 아님메?"
"길티."
"어젯밤 리구철 위원 동무가 별세 했소."
눈을 크게 뜨는 사내.
"그게 사실임메?"
"리구연 동무가 아침에 연락을 취했소, 리구철 위원 동무의 집에서 총소리가 들렸다고."
파르르 눈을 떠는 사내가 자라처럼 목을 움츠렸다.
"기거이 사실이면..."
"맞소, 이제 세상이 변할 시기가 왔다는 뜻이 아니겠소?"
때마침, 최고인민회의장의 커다란 나무 문이 열리며 뚜벅뚜벅 걸어오는 사내.
그의 손에는 제법 커다란 상자 하나가 들려있었다.
"김은정 동무 아님메?"
별로 크게 얘기하지도 않았는데 김은정의 뒤에서 입장하던 호위총국장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
"혓바닥 조심하라 동무! 감히 최고사령관 동무의 존함을 입에 담디 말라."
최고사령관.
그것이 얘기하는 바는 하나였다.
장내의 모두가 토끼눈을 뜨고는 김은정을 바라보았다. 김은정은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최고인민회의 장 중앙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모두가 보이는 가장 상석.
북한의 통치자만이 앉을 수 있는 자리에 털썩 앉았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는 몇몇 군관들.
호위총국장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품에서 권총을 꺼내 들었다.
"앉으라우!"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입네다! 그 자리는 자랑스러운 최고사령관 동무의 자리임메!"
"기렇습네다! 우리 공화국에 변절의 마음을 품디 않는 이상 기 자리에 앉을 순 없습네다!"
김은정이 조용하게, 그러나 모두가 들을 수 있게 호위총국장을 불렀다.
"호위총국장 동무."
"말씀하시라요, 최고사령관 동무."
"그거 이리 줘보시라요."
호위총국장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손에 쥐고 있던 권총을 김은정에게 건넸다.
김은정은 총을 건네 받자 마자 팔을 들어 올리고는 방아쇠를 당겼다.
탕!
총소리가 울리고 장내에 있던 모두가 흠칫 몸을 떨었다.
"잘 들으라."
침을 꿀꺽 삼키며 장내의 모두가 김은정에게 주목했다.
"며칠 전, 최고인민회의가 끝나고 아바이 동무께서 별세 하셨다."
일어서서 목소리를 높이던 군관들이 털썩 자리에 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릴 만큼 그들에게 김은정의 말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내레 며칠간 바쁘게 움딕이며 아바이 동무를 그렇게 만든 변절자 아새끼들을 처단 했고, 그들의 수괴를 잡았디."
"잘 하셨습네다!"
"변절자가 누구입네까!"
여기저기 언성이 터져나오고 김은정은 다시 총을 한 발 쏘았다.
"닥치고 들으라!"
붉어진 얼굴로 입을 닫은 사람들.
김은정이 자신이 들고 왔던 상자를 툭툭 두들기며 말했다.
"여기, 수괴의 모가지를 가져 왔디."
호위총국장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상자를 열어 수괴의 '목'이 장내에 드러났다.
"이, 이런."
"허헛."
모두가 화들짝 놀란 모습으로 김은정을 바라보았다.
수급의 주인이 그의 작은 형, 김철정이었기 때문이었다.
"미, 믿을 수 없소 동무! 어찌 아들이 아바이 동무를..."
"그대들이 믿든 안 믿든, 이미 일어난 일이고, 호위총국장이 철저하게 조사를 했음이디."
"그럴수가..."
막 입을 열던 사내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김은정.
탕!
"큭."
"계속 지껄여 보라, 대갈통을 날려주갔어."
어깨에 총상을 입은 사내는 말을 잇지 못했다. 김은정의 눈빛이 정말 자신의 머리통을 향해 방아쇠를 당길 것 같기 때문이었다.
"내레 지금 기분이 좋지 않디, 누가 변절자고, 변절자가 아닌지 분간이 되디 않아, 호위총국장이 밤낮없이 움딕이고 있디만, 아직 공화국에 변절자가 넘쳐나고 있디."
아무렇지 않게 총질을 해대는 김은정에게 감히 반기를 들어 올리는 인물은 없었다.
이미 김은정은 입김이 센 위원들을 모두 처리한 상태이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벌써, 수 많은 공화국의 기둥들이 세상에서 썩어졌디, 더 이상 피를 흘려선 아니 돼. 인민들을 위해, 우리 최고 인민회의가 굳건히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말이디."
"자세하게 말씀해주시라요, 아직 사태 파악이 되지 않으니."
슬쩍 호위총국장을 바라보는 김은정.
호위총국장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전 최고사령관 동무를 시해한 수괴는 장남 김남정 동무와 차남 김철정 동무로 밝혀졌소, 그 변절자들은 최고사령관 동무의 권력을 탐했고, 중국의 힘을 등에 업으려 했디."
모두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김남정은 가만히 있어도 승계서열 1위의 후계자였다. 그런 그가 굳이 이런 도박수를 둘 일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을 모를 김은정이 아니었다.
"길케 되어서, 최고인민회의에 기둥들이 사라졌디, 내레 여기에서 새 기둥들을 뽑고자 최고인민회의를 소집했소."
흠칫, 서로의 눈치를 살피는 북한의 지도부.
힐끗, 힐끗.
"내레 최고 사령관 동무를 위해 충성을 다하겠습네다!"
"공화국 전사의 명예를 걸고, 목숨을 다 하는 그날까디 인민을 생각 하겠습네다."
어느 나라던.
욕심에 눈이 먼 인간들은 참 다루기 쉬운 존재였다.
"우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법으로, 투표를 하갔으니, 다들 준비 하시라요."
""예! 최고 사령관 동무.""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호위총국장의 곁으로 군관 하나가 다가왔다.
그가 인상을 찌푸리더니 김은정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입네까 동무."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아주 작게 얘기하는 호위총국장.
"남조선에서 연락이 왔다 합네다."
"시간을 주디 않는구만 기래."
김은정은 씁쓸하게 보고를 위해 나타난 군관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내레 직접 가갔어."
"예! 최고사령관동무."
김은정은 분한 마음을 숨길 수 없는지 테이블을 세게 내려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막, 최고인민회의에서 정한 북한의 통치자가 되려던 참이었다. 누구의 입김도 닿지 않게 홀로 그 자리에 오르고 당장 시끄럽고 위험안 그 자리를 공고하게 만들어야 할 때였다.
그러나 천우진의 연락은 김은정의 입장에서 피할 수 없었다.
남조선이 당장 전쟁이라도 걸어오면 필패였다. 오체분시 되듯 흩어진 북한의 군권은 아직 그에게 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썩어져도 부족할 놈."
"참으셔야 합네다."
호위총국장이 김은정을 조용히 타일렀다.
김은정은 어금니가 부서져라 씹고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제 304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