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01화. >
왕충헌이 국무원들에게 서슬퍼런 경고를 날리고 고작 이틀.
이틀만에 왕충헌이 기거하는 넓은 부지의 사택의 창고는 꽉꽉 들어 찰 만큼 다양한 공예품이나 예술품들이 넘처나기 시작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재정부장 류칭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허허, 왕 수석 보좌, 잘 부탁합니다.”
“어휴, 이런건 안 가져 와도 되는데 말입니다.”
“어허, 그래서야 내 체면이 살지 않지요, 받아 두시지요.”
류칭이 내미는 커다란 황금 두꺼비를 들어올려보는 왕충헌.
묵직한 무게에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간다.
그리고는 류칭이 007 가방을 테이블에 올려 놓으며 말했다.
“벌써 많은 노인네들이 이곳을 오갔다는 걸 들었습니다.”
“험험, 거짓을 말하지는 않겠소.”
“그래요, 이해합니다. 그들 역시 살길을 모색하는 것이니 욕할수야 있겠소? 나 역시 살고자 하여 이곳에 왔으니 말이오.”
왕충헌은 류칭의 말을 대충 한귀로 흘리며 007 가방을 바라보고는 물었다.
“이것이 그대의 성의라 각하께 전하면 되겠소?”
“그것이면 충분하오, 이 안에 들어있는 것이라면. 이 류가의 충심을 장저민 주석께서 무시하지 않을 거외다.”
류칭이 호언장담을 하며 자신감을 드러내니 왕충헌이 혀를 날름 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류칭이 담당하고 있던 업무 자체가 국가재정부의 업무였다.
나라의 돈을 관리하는 곳이니 그가 몰래 뒤꽁무니로 쌓은 부가 적지 않다는 것은 당내 지도부 인사들 중 모르는 이가 없었다.
당장 왕충헌이 살고 있는 이 집도 규모가 대단하고 사용인들 역시 많지만, 류칭의 집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터.
그나마 왕충헌은 자신의 직급봐 또, 제 놈이 모시고 있는 장저민의 얼굴을 봐서 최대한 검소하게 보이려고 노력했기에 이 정도 수준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서 어떤 사치를 부렸을지 누구도 예상치 못할 것이다.
“좋소, 류 부장의 뜻은 내 똑똑히 전하리다.”
“그것이면 족하오. 지금 재정부에 각국에 공문을 보내 우리 대국의 운영비가 어디를 거쳐 어디로 갔는지 낱낱이 파헤치고 있으니 곧, 좋은 소식을 전해드리리다.”
“믿겠습니다.”
“감봉 3개월이라는 걸 경험하더니 다들 일을 열심히 하더이다. 분명 성과가 있을 게요.”
“쯧, 채찍을 휘둘러야만 말을 듣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가 아니겠소?”
“명심하겠소, 앞으로는 두번다시 운영비가 사라지는 일 따위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오.”
왕충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류칭이 살살 그의 눈치를 보며 운을 뗐다.
“그, 커험.”
“말씀 하세요, 어차피 여기는 우리 밖에 없지 않소?”
“이번 사태의 원흉은 역시, 국가안전부와 공공안전부가 아니겠소?”
왕충헌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공공안전부는 몰라도, 국가안전부의 고위직은 모두 그와 연관되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내가 왕 수석 보좌와 그들의 관계를 모르는 것은 아니나··· 자칫 보좌께 그 흉이 남을까 싶어 꺼내는 얘기입니다.”
“알아 들었소··· 안 그래도 다들 누가 책임을 저야 하는가에 대해서 말이 많소,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오. 내가 봤을때 각하께서 고를 책임자는, 그대는 아닐터이니.”
“왕 보좌만 믿겠소.”
“살펴 가시오.”
류칭이 자리에서 일어나 사라지고, 저 멀리 대문 밖으로 류칭의 차가 나가는 것을 확인한 왕충헌이 걸음을 옮겼다.
집안 내부, 게 중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으로 움직인 왕충헌의 손에는 금 두꺼비가 들어있는 케이스와 류칭이 넘긴 007가방이 들려 있었다.
커다란 문을 지키던 국가안전부 소속 군인이 그를 발견하고는 경례를 올린다.
“안으로 아무도 들이지 마, 그 누구도.”
“예! 보좌!”
문 앞에 서서는 아날로그식 비밀번호 키를 마주한 왕충헌.
힐끗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군인에게 눈치를 주자 군인은 얼른 고개를 돌려 정면을 주시한다.
딱딱딱.
총 12번의 버튼을 누르는 소리가 들리고. 이내 내부에서 ‘철컥’하는 잠금장치가 해제되는 소리가 들렸다.
“열어.”
군인은 군말없이 문을 열었고, 그 안으로 왕충헌이 들어갔다.
쿵.
문이 닫히며 조명이 켜지고 내부는 갖가지 골동품과 미술품, 현금과 보석등 없는 게 없었다. 정말 어마어마한 부를 과시하는 그런 창고였다.
미술품이나 골동품에는 특수한 처리를 했는지 투명한 유리통 안에 보관되어 있었다.
“최대한 빨리 처리해야겠지.”
미술품과 골동품을 아쉽다는 듯 둘러보던 왕충헌이 테이블 위에 자신이 가져온 007 가방을 올려 잠금장치를 풀었다.
“호오.”
열린 가방 안에는 채권이 가득 들어있었는데, 대부분이 미국 채권이었다.
약 4천 500만 불 정도의 금액. 어떻게 금액을 세탁하느냐에 따라 조금씩 변동은 있겠지만 큰 돈임에는 틀림 없었다.
“휘유, 역시 류칭이군.”
어림짐작으로 그가 가진 부의 삼분지 일은 내 놓았다고 생각하는 왕충헌.
이 정도면 충분히 장저민 주석이 만족할 만한 뇌물이 맞았다. 단일 인물에게 4500만 달러라면 그런 인물들 수십이 있으니, 어마어마한 액수가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다시 가방을 닫고 한쪽으로 옮기는데 그곳에는 비슷한 크기의 가방들이 수십개가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탐스럽다는 듯 가방들의 겉면을 슬쩍슬쩍 훑던 왕충헌이 요상하게 빛나는 눈을 하고는 읊조렸다.
“당신 밑에서 30년을 고생한 보답이외다···”
히죽 입꼬리를 들어올리고는 다시 왔던길을 걸어 창고의 문을 여는 왕충헌.
드르륵.
옆으로 열린 문으로 엄청나게 밝은 조명이 눈을 떼렸다.
“뭐야?”
잔뜩 인상을 찌푸리는 왕충헌.
그도 그럴게 강한 플래시 라이트가 왕충헌의 양 눈을 비추고 있기 때문이었다.
“오랜만이다?”
낯설지만 익숙한 언어.
그것은 한국어였다.
딸깍 소리와 함께 플래시 라이트가 꺼지고, 드러난 얼굴을 알아본 왕충헌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처, 천우진 회장?”
천우진은 히죽 웃으며 그의 배를 강하게 밀어찼다.
“컥!”
자연스럽게 왕충헌의 몸은 다시 창고 안으로 빨려들어가듯 사라졌다.
***
꿈뻑꿈뻑.
왕충헌이 열심히 눈을 꿈뻑이며 의식을 차리려 노력하고 있었다.
“정신이 좀 드나?”
놈이 알아 들을 수 있게 친히 중국어로 물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정신을 차렸는지 발광을 시작하는 왕충헌.
“사내 새끼가 왜 이렇게 허약하냐? 발차기 한방에 기절이라니 말이 돼?”
기절이라는 단어를 듣고 인상을 찌푸리는 왕충헌, 손을 들어 뒤통수를 만지고 싶은 모양인데 아쉽게도 난 놈을 묶어 놓았다.
“크윽, 머리가···”
밀어찼던 발차기에 재수업게 뒤로 날아가듯 넘어지면 바닥에 머리를 부딪혔나보다.
한 눈에 보아도 톡, 튀어나온 혹이 그의 고통을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이렇게 보니까 또 특별하다.”
“이게 무슨 짓이오! 천우진 회장!”
버럭 성질을 내는 놈.
나는 히죽 웃으며 놈에게 SKY전자가 자랑하는 PMP를 들이 밀었다.
“잘 봐.”
이어 PMP에서 동영상 하나를 재생시켰다.
-하악, 하악, 하악.
-그만··· 그만 둬 주세요···
동영상이 재생되면 재생 될수록 왕충헌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거 스피커 성능 너무 좋은거 아닙니까? 듣기만해도 빡치네.”
내 말에 호석 역시 공감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물론 얼굴을 가리고 있기에 나만 누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호석을 비롯한 모든 PMC대원들이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나만 홀로 창고 앞에서 복면을 벗었으니 왕충헌이 날 알아 본 것이다.
어차피 왕충헌은 누군가 창고 비밀번호를 볼까 CCTV같은 걸 설치하지 않았으니 상관없었다. 왕충헌이 내 얼굴을 봤어도 상관 없었다. 발각될 일이 없을 테니까.
“네, 네놈이었더냐! 감히 대국의 국가안전부를 털고, 대국의 예산을 털어간 놈이 네놈이었더냐!”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는 왕충헌.
호석이 친절하게 놈의 턱을 좌 우로 돌려주었다.
퍽, 퍽.
두대를 맞고 놈의 눈이 풀리는게 보였다.
“그만, 그만.”
고개를 꾸벅 숙인 호석이 뒤로 물러났다.
“왕가야, 좋게좋게 가자. 개겨 봤자 너만 피곤하다.”
“이러려고··· 이러려고 우리 대국에 공장을 세웠구나.”
픽 하고 웃음이 튀어 나왔다.
“아니, 그 공장들은 진짜 공장이야. 이번 일이랑은 아무런 관련이 없지.”
“내가 그 말을 믿을소냐!”
“믿든 안 믿든, 그건 네 자유고. 그러니까 왜 열심히 사업하고 있는 SKY를 건드려? 네 놈들이 뒤로 수작질만 하지 않았어도, 나도 딱히 네놈들을 건드리진 않았을 텐데.”
“무, 무슨 수작질을 말 하는가!”
아직도 고개가 빳빳한게 이 놈 역시, 윗대가리의 삶을 너무 오래 살아서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먹어 봐야 아는 놈이 된 모양.
“일단 좀, 교육좀 받자. 대화 할 준비가 전혀 되질 않았어 너는.”
한걸음 뒤로 물러나니, PMC 대원들이 날 스쳐지나가 놈에게 다가갔다.
“뭐, 뭐야! 내가 누군줄 알아! 이 자식들, 네놈들의 모가지를 끄아아아아아악!”
워낙 훌륭하게 지어진 창고라 방음의 문제는 없었다. 설령, 방음에 문제가 있다고 해도 이곳에 오기전, 정확히는 왕충헌이 이 창고에 들어간 순간 이 집에 있는 모든 인물을 잠재웠기에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
잠재웠단 얘기는 죽였다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잠재웠다는 뜻이었다.
내가 왕충헌에게 깊은 원한까진 있는게 아니니, 굳이 그의 가족들까지 건드릴 필요는 없었다. 물론, 어차피 그들의 운명은 정해진 것 같지만.
약 10분여가 지나고, 왕충헌의 눈빛이 서서히 죽어가는 것을 느꼈다. 열 손가락, 열 발가락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얘기할 준비가 됐나?”
하도 소리를 질러서 기진맥진한 얼굴로 날 바라보는 왕충헌. 아직도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연장들이 늘어선 테이블에서 적당한 연장을 뭘 고를까 이것저것 들어보며 말했다.
“사람 몸에는 참 뽑을 게 많아. 지금 뽑힌 손톱과 발톱 말고도, 수백개가 넘는 뼈와 안구, 하나쯤 빼도 괜찮은 콩팥 같은 것들이 있지.”
덜덜덜 몸을 떠는 놈이 이내 고개를 푹 숙인다.
“대, 대화를 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확실히 전과 다르게 매우 공손해진 말투였다.
“그래 이제 좀, 마음에 드네.”
“가, 감사합니다.”
뭐가 감사하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중요한건 그런게 아니니 나는 질문을 시작했다.
“네 놈이 살길을 모색한다는 소식에 내가 열 일정 마다하고 바로 여기로 날아왔잖아, 그러니까 잘 하자?”
“예! 회장님.”
누가보면 SKY의 직원이라도 되는 것 처럼 아주 충직한 사람이 된 왕충헌.
겨우 손발톱에 이 지경이라니, 애초에 충심이라는 게 없던 놈일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처음 두개 손톱을 뺏을때 ‘말할게, 말할게!’라고 외쳤지만 난 대원들을 말리지 않았다.
PMC를 툭툭 두들기며 말했다.
“토끼는 굴을 여러개 파 놓는다는 얘기 알아?”
“아, 알고 있습니다.”
“그럼 얘기가 쉽겠네, 나머지 굴, 어디있냐?”
왕충헌의 동공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확실히 뭔가 있긴 있는 모양.
“어, 어떤···”
“일단 왼쪽 눈 부터 뽑는걸로 하자.”
“이, 있습니다! 있어요!”
그러니까.
이런 욕심이 많고 야망이 넘치는 놈들은 항상 최선의 차선, 차선의 차선을 두는 법이다.
전삶에 봐왔던 기득권들은 다들 그렇게 살았으니까.
호석에게 고갯짓 하자 호석이 수첩을 꺼내서는 왕충헌이 불러주는 목록과 위치들을 기록했다.
그러고는 빠르게 어디론가 무전을 날린다.
-5분 이내에 보고드리겠습니다.
-3분 이내에 보고드리겠습니다.
-거리가 있어 7분 소요됩니다.
속속 호석의 무전기가 울리는게 들렸다.
잠시 보고를 기다리는 사이, 내게 시가 하나를 내미는 호석.
난 고개를 저었다. 끽해야 10분 정도의 시간이 남았는데 시가를 물기엔 아까웠다.
“역시, 회장님이 재미있다고 말씀하시면 이렇게 큰일이 일어납니다.”
“에이, 본인도 재밌어 하셨으면서.”
“저 놈이 말한 것들을 다 챙기고 나서는 어떻게 할까요?”
피식 웃으며 주변을 훑었다.
미술품, 골동품, 귀금속, 현금화 가능한 채권들부터 현금까지.
“용돈도 두둑히 챙겼겠다. 나중에 장가놈 눈물콧물 쏟아낼 약점도 얻었겠다. 너무 나만 얻어가니까 미안하잖아요?”
“예? 회장님이요?”
호석이 그럴리 없다는 듯 고개를 젓는다.
“아오, 대표님은 날 너무 잘 알아.”
호석이 픽 웃으며 대답했다.
“음, 그럼 이 놈은 그 PMP와 함께, 장가 놈에게 예쁘게 포장해서 던지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세요, 감히 내 SKY를 건드리려던 놈인데, 좋게 마무리 해선 안 되죠.”
“예, 알겠습니다 회장님.”
< 제 301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