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99화. >
서로 기분좋게 농담을 주고 받다 보니 어느새 찻잔이 반절이나 줄어 들었다.
이쯤 되었으면 이제 일 얘기를 해야 할 때.
“자, 그래서. 이제 보따리를 풀어 보시죠 회장님.”
내 말에 최태수가 부드럽게 웃으며 서류가방을 열어 누런 서류봉투를 꺼내 내밀었다.
“이야.”
서류 첫장을 넘기자마자 내 입에서 탄성이 튀어나왔다.
“준비 열심히 하셨네요.”
칭찬에 최태수가 히죽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회장님께서 적극적으로 지원을 해 주시는데, 이 놈이 놀수야 있습니까? 먼지 한톨도 남김없이 긁어왔습니다.”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최태수의 호언장담처럼, 정말 먼지 한톨까지 긁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보자, 조양구 회장 회사 날로 먹고 있네요.”
“그렇습니다. 한 장이나 지원해주신게 무색할 만큼··· 작은거 한장으로도 충분하지 싶을 정도 입니다.”
“우리나라는 참 신기해요? 개뿔도 가진 것 없는데 이렇게 덩치 큰 회사의 경영권을 가질 수 있고 말이죠.”
최태수 역시 찔리는게 있는지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이러니 기득권, 기득권 하는거 아니겠습니까? 주위 인맥으로 돌아가는 세상이지요.”
“이건 뭐, 봉선화도 아니고 손대면 톡 하고 터질 것 같네요.”
최태수가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최종 보고차 방문 한 것입니다.”
“예, 터트리시려고요?”
“예, 깨끗하게 긁어 모았으니, 이제 청소기로 빨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는 완벽해보였다.
조양구 회장이 아무리 발버둥 처도, 최태수 회장이 이빨 다 빠진 호랑이가 되었다고 해도, 현 대한민국 재계서열 4위의 공룡이고, 내가 지원해준 총알도 두둑한 상태니 질 수 없는 싸움이었다.
“항공사, 예쁘게 포장해서 가져오겠습니다.”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최태수가 한쪽 입꼬리를 들어올리고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3일, 3일이면 됩니다.”
“그렇게 하세요, 남은 알짜배기들은 가져가셔도 상관 없습니다. 나는 애초에 여객 사업만 할 생각이었으니까.”
“감사합니다 회장님.”
조양구 회장이 가진 유통 사업 망.
게 중에 비행기를 통한 여객사업과 화물사업이 가장 큰 덩치를 차지하고, 그것을 내놓으라 하고 있는 것이지만 어쨌든 KS그룹 입장에서 절대 손해가 아니었다.
총알까지 직접 쥐어주고 수고비까지 통 크게 떼주니 말이다.
최태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회장님의 조언에 따라, 영화 배급사를 만들어볼까 합니다.”
“해외 영화들도 수입 하시고요?”
“예, 회장님. 수입수출까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걸 왜 내게 허락받습니까?”
눈치를 살살 살피는게 허락을 요구하고 있었다.
“하하··· 아무래도 회장님께서 엔터 업계와 문화산업 전반에 관심이 있으신것 같아서 말씀드립니다.”
지금 최태수는 내가 ‘영화’만큼은 자신에게 내 줄수 없느냐 부탁하고 있는 것이었다.
장사치의 꼭대기 그룹 총수가 아니랄까 봐 뻔뻔하기 그지 없는 모습.
“지분 투자 개념으로 가죠 그럼.”
눈을 크게 뜨는 최태수.
그가 걱정하는게 무엇인지 알것 같았다.
“지분 33퍼센트, 현 경영자에게 절대우호적인 계약으로 해드리죠.”
“아.”
자신이 걱정하는 것 까지 내가 선수쳐서 얘기하니 안도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래도 지분 33퍼센트가 아쉬운지 입맛을 다신다.
찻잔에 남은 티라미수 라떼를 단숨에 비워내고는 품에서 시가를 꺼냈다.
“나 양아치 아닙니다. 최 회장님, 약속은 지켜요.”
“아, 실례했습니다 회장님··· 이 필부가, 걱정이 많았습니다.”
“원래 배급사를 만들 생각이었는데, 최 회장님이 직접 하시겠다니 지분만 먹겠다는 얘깁니다.”
“예,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헐리우드쪽에 발을 넓혀 놓는게 좋을 겁니다.”
최태수가 슬쩍 지포라이터에 손을 뻗어 불을 붙여주며 말했다.
“혹, 회장님께서 소유하고 계신 엔터사의 배우들이 출연하는 영화에서 우리 배급사를 먼저 생각해주실 의향이 있으신지요.”
엔터사업.
이것은 할아버지가 사채시장의 거부로 계실 때 부터 진행하던 것이었다.
돈과 연예인.
이것을 뗄레야 뗄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나보다.
물론 그때와 지금은 경영방법이 크게 달라졌고, 사채업자가 쩐주라는 인식과 SKY그룹이 쩐주라는 인식이 다르기에, 대한민국 엔터 사업은 단숨에 SKY가 장악해버렸다.
미래에는 중국이 이곳을 치고 들어와 거대 자본으로 마음껏 휘둘렀지만, 이제는 그게 불가능해졌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감히 SKY에게 금력으로 덤빌 놈들은 많지 않을테니까.
미래를 알아서 선견지명으로 엔터사업을 픽했다기 보다는 원래 있던 것을 발전시킨 형태였다. 결과적으로는 미래 지식을 이용한 꼴이 맞긴 맞았다.
“당연한 것 아닙니까? 윈윈이지요.”
“그럼 그렇게 진행하겠습니다 회장님.”
고개를 끄덕이다 말했다.
“아, 지분은 내 이름이 아니라 내 여동생의 이름으로 부탁드리죠.”
“허허, 벌써 가족을 챙기시다니··· 부럽습니다.”
“그간 여동생한테 이렇다 할 선물을 해주지 못했네요, 생각해보니까 이것저것 바빠서.”
“가족을 생각하시는 회장님의 그 마음에 감탄해서, 지분에 대한 비용은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이때가 기회다 하고 선수를 쳐 오는 최태수.
자신의 경영권을 공고히 하려는 수작이라는 것을 알지만 묵인하기로 했다.
한 번 뱉은말을 다시 주워담을 정도로 나는 양아치가 아니었다. 영화 산업이 그 정도 규모라고 보지도 않았다.
어차피 나는 단순한 영화 산업이 아니라 더 넓은 틀의 플랫폼 산업, 그러니까 미래에 유행할 OTT산업에 더 관심이 많았다.
이미 마이튜브라는 명실공히 세계 최고의 동영상 플랫폼을 가지고 있으니, 발전시켜 OTT산업의 장을 여는 것도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또, 그것을 ‘독점’적으로 가져오는 것 역시 어렵지 않을거라 생각했다.
양질의 컨텐츠를 쏟아낸다면 어마어마한 자금력을 동원한다면 신규 진입하는 다른 플랫폼들을 죽이기란 식은 죽 먹기일테다.
“그렇다면야 여동생이 참 기뻐할겁니다.”
“예, 회장님.”
“그럼 지분이랑 이런건 다음 보따리를 가져오실때 구경하는 걸로 하죠.”
“예!”
최태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사라졌다.
오늘 할 일이 모두 끝났다.
몇가지 중요한 일이 있긴 한데, 오늘 처리할 내용들은 아니었고, 전문가들이 필요한 일이기에 나는 그저 감시감독정도의 역할이라 굳이 참관하지 않았다.
“SKY 인공위성 2호, 발사 준비 잘 진행되고 있죠?”
호석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 오늘 오전 보고에도 문제없이 진행중이며, 계획에 차질이 없다면 가을이 오기전에 발사 할 것이라 얘기했습니다.”
“좋네요, 장인어른은 어디 계세요?”
“지금 아이티에 계신 것으로 파악 되었습니다.”
“아이티라··· 거기도 제법 좋은 휴양지죠?”
“아름답죠, 문명이 서울만큼 발달하지 않았으니까요.”
“휴가나 가볼까요? 가족여행 느낌으로, 어차피 김은정이 자리 잡으려면 시간이 좀 걸릴테니까.”
“준비하겠습니다.”
“예.”
***
장저민의 보좌관 왕충헌이 머리에 피를 흘리며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이 자라 같은 새끼야!”
어지간해서 쌍욕을 입에 담지 않는 장저민이 보란듯이 마구 쌍욕을 퍼붓고 있었다.
“면목없습니다 각하.”
왕충헌은 제 딴에 억울했지만 별 수 없었다.
보좌관이라는 자리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지만 어쨌든 결국, 제 놈이 모시던 사람의 감정변화에 취약할 수 밖에 없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여기저기 돈을 달라는 얘기가 미친듯이 빗발쳐!”
왕충헌이 까드득 이를 짓씹고는 말했다.
“제가 따끔하게 처리하겠습니다.”
“따끔하게 처리를 해?”
“제 놈들이 잘못해서 잃은 운영비입니다. 허술한 보안체계를 뜯어내고 혹독하게 굴리도록 하겠습니다.”
“어떻게?”
“운영비를 잃어버린 기관에 감봉을 실시하고 관련된 책임자의 목을 날리겠습니다.”
지금 왕충헌이 말하는 ‘목을 날린다’라는 워딩은 단순히 직위를 해제하고, 퇴직을 시키겠다는 얘기가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장저민이 더 잘 알고 있었다.
“범인은? 범인은!”
“··· 사방으로 찾고 있으나, 아무래도 공화국 내부의 일은 아닌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벌써 한 달이 다 되가는데, 고작 한 다는 얘기가 끄딴 것 밖에 없어!”
“면목 없습니다 각하.”
“제기랄··· 국가 정보 기관이 이렇게 허술하다니, 누구에게 맡겨 일을 할까?”
“제대로 개혁 시키겠습니다.”
“쇠 잃고 외양간을 고치는 겪이군.”
왕충헌은 지금 장저민이 저렇게 뿔이난 이유를 알고 있었다.
머리를 굴리고 굴려 그의 머리에 난 뿔을 다시 집어 넣을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이마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한쪽 입고리를 들어 올린 왕충헌.
왕충헌을 바라보고 있지 않는 장저민이었지만, 그의 기세가 바뀐것을 눈치챘는지 고개를 돌렸다.
“왜? 뭐? 좋은 생각이라도 떠올랐나?”
“운영비를 잃어버린 쓸모 없는 놈들.”
“그 놈들 뭐?”
“모가지를 지키고 싶다면, 뭐라도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장저민은 왕충헌의 사악한 미소를 보았다.
그리고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지로억지로 내리고는 말했다.
“커험, 그렇군.”
“제 살 길을 제놈들이 찾겠다는데 대국의 천자이신 각하께서 관용을 베품이 옳을 줄 아룁니다.”
어디 황제라도 알현하듯 하는 왕충헌의 말에 장저민이 못내 어쩔 수 없다는 듯,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 어쩔 수 없지··· 무릇 지배자는 너른 이해심과 관용을 가져야 하니 말이야.”
“역시 천자이십니다.”
“커험. 그럼 그렇게 진행 해.”
“예! 각하!”
다시 기분이 좋아진 장저민.
자신의 곳간이 싹다 털렸다가 다시 채워지게 생겼으니 절로 목소리가 부드러워진다.
“그러고보니, SKY전자에서 가져온 그 USB. 반도체 설계도라고 했던가?”
“예, 각하.”
“그 부분에서 왜 보고가 없지?”
왕충헌은 산 넘어 산이라고 느꼈다.
어떤 미친 해커놈들이 중국을 통째로 털어먹은 것도 해결하지 못했는데, 망할 돈을 먹는 하마같은 연구원놈들은 반도체 하나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약속했던 한달이 다 되었지만 아직 이렇다할 성과는 없이, 돈은 돈대로 처먹고 있는 상황.
이걸 고지 곧대로 보고했다가는 이마만 깨지는 게 아니라 눈깔도 하나 뽑힐 것 같았다.
장저민이 이성을 잃으면 못할 게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왕충헌이었다.
“면목 없지만, 이번 해킹사태에 연구비역시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이런! 역시 그랬나?”
“후우··· 면목 없습니다 각하.”
“쯧쯧, 아니야··· 자네가 어찌 할 수 없던 일이었지. 연구비만 충당 되면 다시 진행되겠지? 그 반도체만 완성 되면, 이제 운영비 따위로 걱정할 필요가 없잖은가?”
“그, 그렇습니다.”
장저민이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 연구원 놈들··· 제법 부를 쌓은 놈들이더군.”
왕충헌의 눈밑살이 파르르 떨렸다.
장저민이 하는 얘기가 무엇인지 이해한 것이었다.
“우리가 대 인민들을 위한 사업에, 너무 당근만 주었나 싶기도 하구만.”
이제 발을 뺄 수도 없는 왕충헌.
지금 장저민의 말은, ‘악역은 네가 해라.’였다.
“예, 각하. 각하의 고심을 고려하고 고려하여, 진행하겠습니다.”
“그래··· 언제나 왕가 자네에게 내가 참 고맙다네.”
퍽이나 왕충헌을 생각하는 듯 얘기하는 장저민.
왕충헌 역시 장저민의 말이 허울뿐이란 것을 알지만 부정하지는 않았다.
열 개중 아홉개를 장저민이 먹으면, 게 중 하나는 자신의 몫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장저민이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왕충헌의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닦는다.
“이런··· 내가 또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내 사람을 헤하였으니··· 참, 천자의 길은 멀고도 멀었네.”
왕충헌은 절로 어금니에 힘이 들어감을 느꼈으나 격하게 고개를 털며 두 손으로 공손히 손수건을 받아 들고는 이마의 피를 훔쳤다.
“아닙니다. 각하, 다 제가 못난 탓 아니겠습니까.”
“자네만 믿네.”
“예!”
“일 보시게, 바쁠터이니.”
왕충헌이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주석실을 벗어났다.
철컥.
문이 닫히고 왕충헌의 입꼬리가 싸늘하게 올라갔다.
“이번에는··· 삼할은 가져가야겠습니다. 각하.”
중국의 정보부가 털리고, 국가 운영비가 통째로 털리며 왕충헌이 보관하고 있던 다양한 정보들 역시 털렸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그곳에는 장저민의 약점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이 들어 있었고, 그것이 털린 지금. 언제라도 자신의 목이 달아날 수 있음을 아는 왕충헌.
그는, 살 길을 위해 많은 돈이 필요했다.
< 제 299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