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94화. >
한눈에 보아도 현재 김은정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두운 조명아래에서도 찌푸린 눈쌀과 힘을 준 눈을 보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테다.
"내가 반갑지 않은가 봅니다?"
내 말은 들은척도 하지 않은 김은정이 이재형을 쏘아보며 말했다.
"리재형 동무, 이케되면 우리는 변절자가 되는게요."
이재형을 리재형이라 부르니 참 어색하고 색다르게 들렸다.
이재형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김은정 동무께서 위하고 아끼는 공화국 인민들을 위해 쌀과 밀가루를 보낸 분입네다. 귀하디 않습네까?"
일이 이 지경까지 왔지만 아직도 '북한군' 연기를 하고 있는 이재형. 아직 내게서 '사실'을 밝히라는 명령이 없었기 때문이다.
"커험."
이재형의 말을 부정 할 순 없는지 민망한 기침을 내뱉는 김은정. 나와 비슷한 또래일텐데 어디서 본 건 있는지 노인네 같은 리액션이었다.
"기래... 동무레 용건이 뭐요?"
"새 정권을 잡고 싶다 들었습니다."
김은정이 부릅 눈을 크게 뜨고는 이재형과 나를 번갈아 쳐다본다.
"동무! 변절 했네?"
이재형이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배신을 했는지 안 했는지 그런게 중요합니까? 당신이 정권을 잡느냐 아니냐,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까? 이미 정권을 쥐기로 마음먹은 순간, 당신들 입장에서는 그, 변절자가 된 거 아니냐는 말입니다."
"아직 아바이 동무는 모를테니 변절자는 아이디."
"그것참 아쉽게 됐군요, 나도 눈이 있고 입이 있어서."
김은정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완벽하게 당했구만 기래."
이제 김은정은 정권을 잡지 못하면 '죽어야' 할 몸이 되었음이 분명해졌다.
"당신이 가진 병력으로 가능한 일입니까? 당신이 원하는 일이 말이죠."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김은정이 고개를 저었다.
그도 아는 것이다. 자신이 가진 세력으로 감히 김일정이라는 북한의 수장을 암살 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그러니 도움을 주겠다는 얘깁니다."
"어떻게 말이오."
"오면서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곳에는 우리 SKY PMC의 대원들이 매복해있습니다."
"그치들과 함께 북으로 넘어가라?"
고개를 끄덕이자 김은정이 제법 큰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 확성기에 대고 소리치지 그러오? 이 김은정이가 변절 했다고!"
"당신이 이곳에 오는걸 허락한 순간, 당신을 도운 모든 사람들이 변절자가 되는 겁니다. 그들로서도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아야죠."
"......"
"그들이 살 수 있는 방법은 하나입니다. 못본 척 하는 것. 실패하든 성공하든 리스크와 성과는 당신이 갖는 겁니다."
김은정이 그럴리 없다는 듯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세상천지, 장사치 말을 어이 믿소? 그러면, 그대가 갖는 리스크는 뭐고,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오?"
이제야 좀 대화가 제대로 될 것 같았다.
"리스크는 역시, 우리 소중한 대원들의 목숨이겠죠."
"부하들의 목숨?"
"부하가 아니라 동료입니다."
픽 웃는 김은정.
"과연 혓바닥은 장사치 답소."
어린놈이 노회한 정치인 흉내를 내니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당신 혓바닥도 만만찮은 것 같습니다만."
"얻는 것은 무엇이오?"
딸깍.
작은 플래시를 하나 켜고는 그에게 서류를 한장 보여줬다. 한국어로 적혀 있으니 읽기에는 문제가 없었다.
"유라시아 횡단철도?"
"이 사업을 하고자 합니다."
"남조선에서 우리 공화국까지 철도를 뚫겠다?"
"원래 뚫려있는 철도도 있습니다. 한국전 이후에 막혔지만."
고개를 주억거리는 김은정, 그도 철도의 존재는 알고 있는 모양.
"지금도 우리는 그걸 쓰고 있디."
"어쨌든, 그 길목에 북한이 있고, 나는 이 사업을 위해 북한과 우호적인 관계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래서 나를 돕소?"
"아는지 모르겠지만, 이미 당신의 아버지 김일정과 우리 SKY, 그리고 나의 가문 '천가'는 원수지간입니다."
잘 모르는지 힐끗 이재형을 바라보는 김은정.
"공화국 전사들을 투입해, 현 대통령이자 여기 있는 천우진 회장님의 할아바이를 암살하려다 실패 했습네다."
다시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보는 김은정.
"동무레... 복수가 하고 싶은 것은 아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김은정이 말한 복수.
분명 그것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나와 '복수'라는 단어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그런 것인가 보다.
"부정하지 않죠."
이미 아비의 죽음을 확정지었는지, 아니면 정권을 향한 욕심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김은정은 김일정의 죽음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그 PMC 대원이라는 전사들... 용병들 아입네까?"
"그렇게 생각해도 좋습니다."
"그럼 내가 대가를 줘야 하지 않소?"
"대가는 유라시아 철도에 대한 사업권 보장. 그거면 충분합니다."
나를 빤히 바라보는 김은정.
"과연 동무가 원하는 거이 그거 하날지 모르갔구만 기래."
당연히 아니었다.
한 나라의 정상을 죽이는 일이었다. 복수고 사업권이고 간에, 리스크가 큰 행동이라는 것은 틀림 없었다. 만약 실패한다면 제 2의 한국전을 각오해야 할 일이었다.
가까스로 전쟁을 막더라도 SKY는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할 터였다.
국제적인 이미지는 물론, 당장 중국의 장저민이 '오호라'하며 SKY의 공장들을 무단점령하고는 명분으로 내가 시도한 김일정 암살을 거들먹 거릴 터 였다. 다른 국가들 역시 마찬가지, 어떠한 방식으로든 반드시 태클을 걸어올 게 불보듯 뻔했다.
그러니, 실패해서는 안되었다.
"아직은 그렇습니다. 물론 북한의 값싼 노동력 역시 내 입장에서는 큰 이득이 되겠죠."
"우리 인민들을 푼돈에 부리겠다는 얘기오?"
"북한의 주민들에게는 큰 돈일 겁니다. 또, SKY와 함께 일을 하는 노동자에게는 하루 세 끼의 식사가 제공되죠."
"커험... 인민들이 개떼처럼 달려들갔구만 기래."
한탄이 섞인 혼잣말에 어깨를 으쓱여주었다.
"38선만 걷어내도, 북한은 결코 손해보는 게 없습니다."
"말은 번지르르 하오만, 우리 사상이 흔들리지 않습네까?"
"중국도 미국의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전 세계는 지금 '자본주의'가 당연시 여겨지고 있는 세상이죠, 그게 아니면 도태되기 마련입니다."
"길티..."
"지금 당신의 아버지 김일정이 핵 실험에 성공해 핵무장을 갖춘다고 해도, 역시 북한은 도태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벌써 수십년을 '핵무기'에만 쏟아부은 나라가 자본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까?"
"그만, 그만... 그만 듣고 싶소."
김은정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너무 팩트로 조졌더니 멘탈이 흔들리는 모양.
채찍을 많이 내리친 것 같으니 품에서 당근을 꺼내 건넸다.
"시가입니다. 쿠바산 최고급 시가죠, 아직 해가 뜨려면 시간은 있으니, 천천히 태워 봅시다."
그에게도 시가를 하나 주고, 나도 시가를 하나 입에 물었다.
그리고는 털썩 흙바닥에 주저 앉아, 툭툭 옆 자리를 두들겼다.
"앉읍시다. 목 아프니."
김은정은 별 말 없이 내 옆자리에 앉았고, 대원들은 환기를 위해 비트의 출입구를 살짝 열었다. 불빛이 세어 나가면 안 되기에 크게 개방할 순 없었다.
시가 불이야 워낙 작으니 이 땅 속을 뚫고 바깥으로 나갈일도 별로 없을 터 였다.
이미 이재형에게 김은정은 북한의 속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지만, 나는 짐짓 모르는 척 물었다.
"당신이 아는 북한은 어떻습니까?"
"... 망조가 들었소."
"이미 전 세계가 알고 있는 사실이군요."
"그렇소?"
"우리나라는 8살 부터 북한은 '살기 힘든 나라'라는 걸 배웁니다."
"......"
툭, 교과서 하나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이번년도 신입생 교과서입니다. 여기 보면 북한의 사진들과 함께, 실상이 약간이나마 적혀있죠."
"......"
김은정이 어두운 불빛 아래 말 없이 교과서를 정독했다. 아무래도 내 작전이 먹혀들고 있는 것 같았다.
흔들리고 있을 그의 멘탈이란 호수에 작은 돌 하나를 던져 파문을 일으키면 될 일.
"후우..."
길게 시가 연기를 내뿜는 김은정.
"소문이겠지만, 북한은 인육도 먹는다고 하더군요."
김은정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같은 한반도에서 같은 역사를 가지고 있으니 인육을 먹는다는 건 상상 할 수도 없는 일이란 걸 그 역시 알고 있는 것이다.
"어떤 썩어질 놈들이 그러오?"
"어땠습니까? 당신이 보기엔, 굶어 죽느니 뭐라도 먹으려는 인민들도 있을법 하지 않던가요?"
"기딴 소리 지껄린 놈을 직쌀을 내주고 싶디만... 꼭 아니라고 할 수 없는 내 입을 찢어버리고 싶구만 기래..."
자조적인 말에 나는 이제 마무리를 지을 때가 되었음을 느꼈다.
"기회는 오늘, 그리고 이 순간 뿐입니다."
"......"
"다음은 없습니다. 나와 PMC 대원들은 이대로 돌아갈테니까. 유라시아 횡단 철도 사업은 중국과 러시아를 통해서 진행하면 될 일입니다. 이미 우리나라에서 열린 5자 정상회담에서 세부 사항들에 대한 논의를 주고 받았죠, 작은 협의들만 남은 상태라는 얘깁니다."
중국과 러시아까지 들먹이니 김은정의 떨리는 동공에서 동요를 읽을 수 있었다.
"길쿠만... 중국과 러시아에게 돌아가느니, 한민족에게 돌려주고 싶은 것이요?"
기회를 잡아야겠다는 욕심에, 그의 눈에는 내가 좋은 놈으로 보이는 모양.
김은정의 말이 꼭 아니라고 할 순 없지만 꼭 맞다고도 할 수 없었다. 대한민국이 성장하기 위해서 '북한'이란 존재는 필요하지만 대체제가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인구와 영토 확장 면에서, 그리고 문화 면에서 당연히 북한이 쉽게 적응 할 수 있을 터였다. 언어도 같지 않은가? '사투리'정도로 취급해도 될 정도로.
"그렇다고 해둡시다."
"어차피 내레 여기 오는 순간, 이미 정해진 결과가 아니갔소... 시간을 보내봐야 달라디는 것은 없디."
"대원들은 아주 빠르고 은밀하게 일을 처리 할 겁니다. 당신이 해줄 것은, 우리 대원들의 '퇴로 확보'입니다."
"이해했소, 그 약속은 반드시 지키갔소."
흙바닥에서 엉덩이를 떼려는 김은정의 어깨를 눌러 다시 앉히고는 말했다.
"우리 대원들은 소중한 동료고 내 가족입니다. 그들의 퇴로가 제대로 확보되지 않는다면, 당신의 아버지 다음은 당신일겁니다."
"... 뱉은 말은 지키오. 그러고자 나도 목숨을 걸지 않았소?"
고개를 끄덕여 주고 그의 어깨를 잡은 손을 놓았다.
잠시 나를 내려다보던 김은정이 비트를 빠져나가고, 이재형은 돌아서서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그를 따라 바깥으로 나갔다.
"후, 후. 알파 작전, 진행."
-치익, 확인.
호석이 무전을 끝내고는 내 곁에 앉았다.
"잘 마무리가 된 것 같아 다행입니다."
"그렇게 보였어요?"
"김은정도 살 길을 찾는 것 아니겠습니까? 인민들을 위한다는 그 마음도 있고요."
난 고개를 저었다.
전 삶, 그러니까 원래 있었어야 할 미래의 김은정은 결코 '인민'을 생각하는 놈은 아니었다.
역대 김씨 일가 놈들이 그랬던 것 처럼, 제 놈들을 등따숩고 배부르게 해주는 것에만 관심이 많았던 놈들이었다.
"아직도 정치인을 믿으세요?"
호석이 피식 웃었다.
"김은정이 '정치인'씩이나 되는 놈입니까? 아직 새파란 애송이가 아닙니까?"
"나랑 비슷한 또래입니다만."
"회장님은 예외로 하시죠."
픽 웃으며 말했다.
물론 호석의 말 처럼, 아직은 젊기에 사상과 이상으로 움직일 수도 있었다. 그 혈기에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달리는 야생마처럼 말이다.
그러나, 목적을 이루었을 때.
화장실 가기 전과 다녀온 뒤가 다른 사람들의 마음처럼, 김은정도 그러지 말란 법은 없었다.
"베타 작전도 당연히 준비 시키세요."
호석이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건, 정말 위험 할 겁니다."
"그러니까 일단 준비만 합시다. 어떻게 될지는 지켜봐야죠."
"... 알겠습니다."
< 제 294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