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93화. >
띠딕, 띠디딕, 띠딕, 띠띠띠딕.
북한과 한국을 오가는 통신은 매우 위험했다. 자칫 걸리기라도 하면 바로 이재형도 끔찍하다 생각하는 정치범 수용소라던지, 아오지 탄광이라던지 하는 곳으로 끌려갈게 불보듯 뻔했다.
해서, 이재형은 북한에서 중국, 중국에서 러시아, 다시 러시아에서 중국, 그다음 최종 한국으로 움직이는 연락망을 만들었고, 그것으로 부족해 모스부호를 이용했으며, 그 모스부호 조차 '암호'로 이루어진 형태를 띄고 있었다.
이렇듯 복잡한 체계를 가지고 있기에 명령 하달과 보고 내용이 시간을 두고 전달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받은 모스부호를 통해 암호로 해독하니.
[ 안전을 최우선 할 것. 원하는 어떤 것이든 지원 하겠다. ]
이재형은 암호문에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드디어... 인정을 받나."
그가 모시는, 그의 원수를 처리한 천우진 회장은 '가족'이나 '동료'에게는 한 없이 친절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적'이 되거나 '남'이 된다면 그 처럼 무섭고 차가운 사람이 없었다. 곁에 있을때는 그 누구보다 든든한 존재이지만, 그의 곁에 설 수 없다면 먼저 손을 쓰거나 도망가야 할 정도로 차가웠다.
북극이나 남극의 얼음보다. 차디찬 강철보다 차갑고 냉철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자신을 걱정해주는 것 같은 말을 하니, 애정이라고는 한푼도 느껴지지 않을 텍스트로 이루어진 암호문에 이재형이 감동한 것이었다.
"후우... 안전이라."
과연, 그가 진심으로 따를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한 천우진의 요구를 들어줄 수 있을지 확답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곳 북한에 김일정의 얼굴없는 친위대원으로 위장해 진입하면서 사실, 거의 '생'을 포기 한 것이나 다름이 없던 이재형.
슬쩍 고개를 들어 다른 대원들을 보았다.
코드 원 부터 코드 세븐까지.
총 7명의 SKY PMC대원들이 막중한 사명감을 가지고 북한에 침투했다. 사전에 공부도 부족했기에 북한말을 학습하기 위해 미친듯 듣고, 말하기를 함께 했던 사내들이었다.
"안전을 최우선 하라고 하시는군."
대원들이 피식, 피식.
웃음을 흘렸다.
"고작 일곱이... 수령 동지 모가지를 따는 일입네다. 안전이라, 애시당초 그런 것 생각에 없었지비."
부러 과장되게 사투리를 쓰는 대원 덕분에 간헐적으로 터져나왔던 웃음은 더욱 진득하게 흘러나왔다.
"넌 진짜 사투리가 늘질 않는다."
"아오, 누가 아니래. 그래도 다행인게 말 별로 안 해도 되는 보직이라 다행이다. 원래부터 말 없는 캐릭터로 인식되서 다행이지."
언제 발각되어 잘못될지, 언제 발각 돼 명을 달리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대원들은 여유가 넘쳐 보였다. 애초부터 '각오'를 다지고 왔기 때문.
띠딕, 띠디디디딕, 띠띠띠.
농담 따먹기를 하는 도중, 다시 한 번 암호문이 도착했다.
[ 하늘이 김은정을 직접 보겠다고 하신다. 금일 자정 101GP CH 033 092. ]
암호를 해독한 이재형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던 대원들 모두 놀란 얼굴이 되었다.
GP란 GUARD POST의 약자로, DMZ라 불리는 비무장지대 내부의 군사요충지를 말했다. 군사분계선 이남 2km지점에 GOP가 있다면, 그 내부. 그러니까 군사분계선과 가장 근접한 '전진기지' 혹은 '감시초소'정도로 불리는 곳이었다.
"회장님께서... 진심인 모양입니다. 코드원."
대원의 말에 이재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개성공단에서 보는 방법도 있었을테지만 굳이 GP를 택했다는 건, 역시. 지원을 고려하고 계신 것 같군."
"쯧, 우선 해당 좌표까지 김은정을 데리고 가는 것 부터가 난관입니다."
"아무래도, 호위총국장을 만나봐야겠어."
"음, 그가 움직여 줄까요?"
"현 인민무력부장은 아첨꾼이야. 놈이 알게 되면 무조건 정보가 세."
"그렇겠죠, 현해철의 빈자리를 혓바닥으로 꿰찬 놈이니까."
"도움을 줄 사람은 호위총국장밖에 없어."
"노인네들 몇도 따라줄지 모릅니다."
각 대원들은 김일정이 한국에서 어깨와 허벅지에 부상을 입은 것 때문에 친위대 요직에서 밀려나 다른 지도부들을 감시 및 보호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북한 고위층의 지배구도와 알력싸움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노인네'라 불린 인물들은, 김일정의 아비이자 한국전의 원인이라 할 수 있는 김성일 시대부터 요직에 배치되었던 인물들을 일컬었다.
그들 역시 '세습'되는 권력구도에 불만이 많은 사람들이라는 뜻이었다. 또한, 그들이 뭉친다면 김일정을 일부 견제할 수 있을만큼 큰 힘을 가진 인물들이기도 했다.
"쯧, 복잡하게 얽힌 핏줄 문제로 쉽지 않을겁니다."
"김은정의 외가쪽 인물은 어떻습니까? 마침 여기 101GP가 김은정의 외가쪽 인물이 담당하는 곳입니다."
이재형이 '아'하는 탄성을 뱉었다.
철두철미하고 정확한 예측을 하는 게 자신이 모시는 천우진이었다.
그가 굳이 101GP를 선택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회장님 역시, 김은정의 핏줄을 이용하라고 하시는 것 같군."
"역시 그렇습니까?"
이재형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내가, 김은정과 얘기를 하지."
"예."
"식스와 세븐은 김일정의 동태를 살펴, 언제든... 알지?"
"예."
***
똑똑.
노크소리와 함께 이재형이 김은정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밤 사이 고민이 깊었는지 김은정의 얼굴은 거무죽죽하게 죽어 있었다.
이재형의 얼굴을 보고 흠칫 놀라는 김은정.
"이, 일은 끝났네?"
이재형은 고개를 저었다.
"쉬운 일이 아닙네다."
"길티... 기렇겠지..."
아쉬우면서도 다행이라는 애매한 표정.
"아직, 동무의 인민들을 위한 마음은 틀림이 없습네까?"
"각오를 하디 않았네, 가시밭길도 혁명적으로 걸어 가디."
떨리는 음성으로도 제 각오를 강하게 어필하는 김은정.
"그렇다면, 만나뵐 분이 계십네다."
"만나뵐 분?"
"기렇습네다."
"그게 뉘기야?"
"만나시면 아실겝니다."
"으음..."
잠시 고민에 잠긴 김은정.
"시간이 많디 않습네다. 동무께서 원하던 그 시간까지 말입네다."
"길티... 그래, 만나 보갔어."
"과정이 좀 필요합네다."
팍 인상을 찌푸리는 김은정.
"무슨 과정?"
"고희용 여사님의 종백부께 부탁을 해야 합네다. 그분이 관리하는 38선 부근까지 가야 함메."
김은정이 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또 오지로 가야 한다고?"
"할 말 없습네다."
"후... 기래, 어디 끝까지 가 보디."
예상외로 답변은 쉽게 흘러 나왔다.
그만큼 김은정 역시 끝까지 갈 생각이라는 방증이었다.
***
덜덜덜.
크게 떨리는 차량.
군용트럭들이 으레 그렇겠지란 생각으로 비무장지대의 도로를 달렸다.
작은 차량위에 기관총을 거치하고 서 있는 저 군인이 제일 힘들겠거니 생각했다.
"GP는 원래 민간인 출입이 제한된 곳입니다. 비밀 엄수를 부탁드립니다."
707특임대의 말에 호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쪽지 하나를 건넸다.
"여기, 이곳 좌표로 부탁합니다. 도착후에 군인들은 모두 물러주세요, 따로 지시가 있을 때 까지."
"예, 선배님."
호석은 그를 모르지만, 군인은 호석을 알고 있는 모양.
애초에 우리의 목적지는 GP가 아니었다.
GP에는 징집병, 그러니까 일반병들이 경계근무를 서고 있을 만큼, 비밀 유지부분에서 문제가 많았다. 해서, 우리가 선택한것은 수색정찰로에 있는 작은 철책 부근이었다.
물론, 사전에 우리쪽, 그러니까 군사분계선 이남의 지뢰는 제가 한 상태였다. 북쪽은 북쪽이 알아서 할 일.
차량이 멈추고, 나와 호석을 비롯한 PMC의 대원들 수십이 우르르 내렸다.
"여기서부터 수색로를 따라 2km지점이 말씀하신 좌표입니다. 철책의 작은 쪽문이 3번째 나타나면, 그곳 부근입니다."
호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원들에게 눈짓하자 대원들은 빠르게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나와 호석, 그리고 몇몇의 대원은 가장 뒤에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선두에 선 대원들이 위험요소를 모두 제거하고 나갈 것이었다.
"이야, 여긴 자연이 완전히 살아 있는데요? 아마존 가도 이런 느낌인가?"
호석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아마존은 열대 우림이 살아 있으니, 이런 느낌은 아닐 겁니다."
"여긴 또, 산이랑은 다르네요. 어마어마한데?"
진짜 그랬다. 주변에 동물들의 인기척이 느껴질 정도로 자연이 깨끗하다는 방증.
저 위 하늘을 수 놓는 독수리들의 활공도 대단했다.
"독수리가 생각보다 위용은 좀 떨어지네요."
"하하하, 저 놈들 무슨 사람처럼 밤에는 앉아서 잠을 잡니다."
"오, 그래요?"
"예, 전장에서 근무하는 군인들은 자주 접하는 놈들이죠."
"신기하네요."
도란도란 얘기를 하다보니, 직선거리 2km는 금방이었다. 호석이 별 말 없는 것으로 보아, '쪽문'이라 불린 철책의 작은 문 주변으로 이미 PMC대원들이 매복을 끝낸 것 같았다.
그 매복이 얼마나 감쪽같은지, 나는 이곳에 우리 대원들이 있는지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약속시간까지 제법 많이 남았습니다 회장님."
"그러네요, 자정인데 아직 해가 떠 있으니까."
"통문 출입절차 때문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밤에 이동하게 된다면, 북측에서 우리 차량들의 불빛을 관측 할테니까요."
그렇다는데 내가 뭐라 할 말은 없었다.
"저쪽에 비트가 있습니다. 가시죠."
호석에 안내를 따라 '항아리 비트'라고 불려지는 땅 속으로 들어가니 제법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아마 이곳도 PMC 대원들이나 군인들이 공 들여 만들어 놨겠다 싶었다.
"여기서 한 숨 주무시죠, 경계는 철저하게 서고 있으니."
봄이 지나고 여름이 왔기에 땡볕 아래에서 걸음을 옮기는 건 제법 더운 일이었다. 비트 안에 들어오니 서늘한 흙의 감촉이 오히려 시원하게 느껴졌다.
호석이 옆구리에 매고 있던 작은 아이스 박스에서 음료를 꺼내 건넸다.
"오, 역시 센스!"
"하하, 각 팀마다 아이스 박스 하나씩 있으니, 대원들 걱정마시고 드시죠."
평소에 이 시간에 잠 잘일이 없으니 잠은 오지 않았고, 나는 대원들의 '군대'이야기를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언제 눈을 감았는지 모르겠으나, 호석이 날 깨우는 소리에 눈을 떴다.
"약속시간이 됐습니다. 회장님."
"아, 잠들었나보네요."
"대원들도 번갈아 휴식을 취했으니 괜찮습니다."
"나가면 되나요?"
호석이 고개를 저었다.
"김은정과 코드원을, 이곳 비트로 데려 올 겁니다. 바깥은 아무래도 감시의 위험이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호석과 대원 하나가 바깥으로 나가고, 비트의 좁은 입구 아래, 대원 두 명이 서슬퍼런 기세로 경계를 서기 시작했다.
대원 하나는 군용 대검을 뽑았고, 다른 대원 하나는 그 옆에서 권총을 뽑았다.
그리고 잠시 후, 부스럭 거리는 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낙하하자, 대원들이 모든 조명장치를 소등했다.
순식간에 어둠이 찾아오고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소리로 대충 누군가가 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탁, 탁, 탁.
대원들이 그들의 몸을 수색하는 게 느껴졌다.
서서히 어둠에 적응하는 눈이 얼핏 이재형과 김은정의 형체를 알아보는 것도 같을 때, 다시 '탁!' 밝지 않은 조명이 켜지며 비트 안에 사람들을 식별 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반갑습니다. 천우진이라고 합니다."
"내레... 만나야 하는 사람이 SKY그룹의 수장일진 몰랐소."
나와 김은정의 첫 만남이었다.
< 제 293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