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철혈의 재벌-292화 (292/458)

< 제 292화. >

쾅쾅.

"아바이 동무! 아바이 동무!"

큰 목소리로 사택의 문을 두들겨 보지만 나오는 것은 김일정이 아닌 친위대원들 뿐이었다.

"비키라, 오늘은 내 반드시 아바이 동무를 뵈야갔어."

"최고사령관 동무께서는 아무도 들이지 말라 하셨습네다. 목청 높혀 불러도 들리지 않습네다."

"그럼 동무가 아바이 동무에게 말을 전해 달라."

"죄송합네다. 허가 받지 않은 인원은 내부까지 들어갈 수 없습네다."

"내레 성가스럽기만 하다 이기네?"

하루가 멀다하고 찾아오니 당연히 김일정의 입장에서 김은정이 보기 좋을리 없었다. 와서 하는 말이라고는 '인민을 위해', '인민들을 위해'따위만 주저리니 그런 것들은 김일정의 관심 밖이었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하나.

북한의 핵무장이었다.

이왕이면 ICBM기술까지 확보한 핵무장.

그래야 미국 본토 까지 타격이 가능하고, 그것에 위협을 느낀 미국에게 무언갈 뜯어 낼 수 있을것이라고 보는 것.

이재형이 막 문을 두들기려는 김은정의 어깨를 조심히 감쌌다.

"이제 그만 하시지요 동무."

"동무레 기억 나지 않네? 우리가 있던 곳에서 하릴없이 썩어가는 인민들이?"

"어찌 그것을 잊습네까..."

"그런데도 날 말려야 하갔네?"

"별 수 없습네다. 뜻이 완고하지 않습네까?"

"크윽... 아바이 동무는 정녕..."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김은정.

그리고 그런 김은정을 조심히 뜯어내는 이재형.

이내 김은정도 발걸음을 돌려 힘 없이 차량에 올랐다.

"음, 동무께서 들으면 좋아 할 만한 소식이 있습네다."

김은정이 그럴리 없다는 얼굴로 이재형을 바라보았다.

"무었이네?"

"인민들이 잠시나마... 배고픔을 잊을 수 있는, 그런 일입네다."

"그게 뭐이네?"

"남조선에서 친교의 의미로 '쌀'과 '밀가루'를 보내 준다 합네다."

팍 인상을 찌푸리는 김은정.

"하..."

이재형은 무미건조한 얼굴로 말했다.

"자존심이 밥을 먹여주지 않습네다."

"......"

"지금 우리 공화국은... 남조선보다 경제력이 나쁘디요."

"듣기론 남조선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들었디. 오히려 나쁘다 들었는데?"

"그건 다... 옛 말입네다. 유학시절에 소식을 듣지 아니했습네까?"

"헛 소리로 생각했디."

이재형은 고개를 저었다.

"남조선은 굶어 죽는 사람이 없습네다. 평균 임금이 월 2000달러 수준이디요."

입을 떡 벌리는 김은정.

북한에서 2000달러라는 돈은 매우 큰 돈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참이네?"

"그렇습네다."

"그럼... 지금 우리 공화국에서 가르치는 것이..."

"날조 됐습네다. 전쟁이후의 남조선의 상황을 얘기하는 것이디요, 그것도 과장해서."

"하!"

"쌀과 밀가루를 우리에게 보내도, 별 문제가 없다는 소리군."

"그렇습네다. 게다가 남조선에서 나는 쌀과 밀가루가 아니고, 제 3국에서 들여온 쌀과 밀가루를 보내준다면, 가격은 더 내려가디요."

"우리 공화국은 퇴보하는데, 남조선은 진보하고 있다라..."

이재형은 김은정의 고심에 따로 첨언을 하지 않았다. 그가 알아서 생각하고, 그가 알아서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기칸데, 우리 공화국은 '핵'실험에 매진하고 있구만."

"안 좋은 소식도 있습네다."

이재형의 말에 크게 한숨을 내쉬는 김은정.

"뭐이네?"

"최고사령관 동무께서... 핵실험에 매진하라 하셨다 합네다. 아마도, 남조선에서 열린 회담에서 좋지 못한 결과를 얻었나 봅네다."

"또 핵실험? 그거 한 번에 우리 공화국 인민들 수천, 수만이 죽어나가!"

열을 내보지만 김은정,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입술을 달싹이는 김은정.

무엇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보였다.

이재형은 대충 그것이 무슨 말인 줄 알았으나, 보채지 않았다. 곧, 때가 다가오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

김은정 역시, 차마 입 밖으로 말을 내뱉지 못하고는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

며칠간 푹 쉬었던 김일정은 살이 포동포동 오른 모습으로 최고인민회의에 참석했다.

주 내용은 한국에서 보내온 쌀과 밀가루 및, 몇몇 구호품 목록이었다.

"얼마나 보낸다고 했소?"

김일정의 질문에 예산위원회의 위원 하나가 벌떡 일어나 보고를 했다.

"남조선 쌀 10만톤, 외국산 쌀 30만톤, 밀가루 40만톤 입네다. 기타 가전제품도 남조선의 SKY전자라는 곳에서 보내온다 합네다."

김일정이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물었다.

"달러로 환산 하면 얼마네?"

"약 2억 7천만 달러 입네다."

곳곳에서 '오!'하는 놀란 탄성이 들려왔다.

김일정이 눈썹을 올렸다 내리며 기분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남조선 아 새끼들... 무슨 생각을 하는데 돈을 함부로 쓰네?"

예산위원회 위원이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김일정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게 다, 최고위원장 동무께서 정상회담에서 좋은 말씀을 해주셔서 기렇지 않겠습네까?"

그의 아부가 싫지 않았는지 김일정이 헤벌쭉 입꼬리를 찢으며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

"당장 필요한 물자 말해보라."

김일정의 말이 떨어지자 마자, 여기저기 쌀과 식량이 필요하다며 목소리를 높히는 최고인민회의의 위원들.

김일정은 다시 기분이 나빠졌는지 팍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당장 죽디 않을 만큼만 말하라우! 내가 그대들 살찌우겠다고 했니? 딱 필요한 만큼만!"

서슬퍼런 일침에 다시 장내에 눈치싸움이 시작되었고, 그 꼴을 보기 싫었는지 김일정이 아예 못을 박아버렸다.

"반절은 내가 꼭 써야 할 곳에 쓸테니, 나머지는 알아서 가져가라."

곳곳에서 불만 섞인 한숨이 들려왔지만 누구 하나 따지는 이는 없었다. 그들은 서슬퍼런 김일정의 분노를 받아 권세를 버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누구도 굶어죽어가는 인민들을 위하는 인물은 없는 듯 보였다. 모두가 하나 같이 제 힘을 더 키울 생각만 하고 있었다.

이런 자리에서 생견 나서지 않던 호위총국장이 조심히 김일정에게 물었다.

"최고사령관 동무."

보통 최고인민회의에서는 최고위원장이라 부르지만, 사령관 동무라 칭하는 호위총국장.

"뭐이네?"

"그 반절... 게중에 1할만 내주시면 안 되갔습네까?"

한쪽 눈썹을 들어올린 김일정.

회의에 참석한 모든 위원들이 놀란 얼굴로 호위총국장을 바라보았다.

"내레 잘못 들었네?"

"아입네다... 그, 김은정 동무가 사흘 밤낮을 찾아오지 않았습네까?"

"내레 지금 어린아이 놀이에 돈을 쓰라 이 말이네? 기딴 썩어빠진 생각으로, 무슨 혁명을 해!"

"마음이 좋디 않습네까?"

쾅.

김일정이 자신의 앞에 있던 마이크를 내던졌다. 제법 멀리 있었기에 호위총국장에게까지 날아가진 않았으나, 그 언저리에 마이크가 부딪히며 듣기 싫은 소리를 냈다.

"그런 썩어빠진 마음으로는 공화국의 미래가 없어! 헛소리 집어치우라! 동무레 그 자리에 너무 오래 앉아 있었구만 기래!"

"......"

미친듯 화를 내는 김일정을 말릴 수 있는 인물은 아무도 없었다. 인민무력부장 현해철이 있었다면 특유의 말솜씨로 분위기를 무마했겠지만, 이미 그는 세상에서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리고 그때를 기억하는 노회한 위원들은 입맛을 다시며 안타까움에 고개를 저었다.

김일정은 그런건 신경쓰지 않는 다는 듯 모두를 둘러보며 외쳤다.

"혁명뎍으로 생각하라! 혁명뎍으로! 당장 굶어 죽는 인민들이 있어도, 우리가 힘이 없으면! 공화국에 미래는 없디! 핵무장! 대륙간탄도미사일! 그것만이! 이 공화국에 혁명을 가져다 줄 것이야!"

제 사상을 설파하고는 그대로 회의장을 빠져 나가는 김일정.

그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몇몇 위원들이 호위총국장에게 싫은 소리를 뱉는다.

"뭐한다고 건드리십네까? 동무레 명줄이 여러갭네까?"

"닥치라우."

"후우, 이제는 우리가 김은정 동무의 눈치까지 봐야 하는 겁네까? 적당히 하시라요 동무!"

"닥치라우, 동무들 그 주둥이, 썩어지고 싶디 않거든."

호위총국장의 입에서 거친말이 튀어나왔다. 현재 그의 심기가 진정으로 불편하다는 뜻. 현해철 인민무력부장이 있을때는 서열 3위였던 그.

현해철이 사라졌으니 이제는 호위총국장이 서열2위라 해도 좋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을 것이란 걸 다른 위원들은 깨달았다.

곧, 호위총국장 역시 현해철처럼 사라질 것이라 확신하는 모양.

"후우..."

크게 한숨을 뱉은 현해철이 자신의 보좌관에게 물었다.

"김은정 동무, 어디계시네?"

"사택에 계신 것으로 확인됩네다."

"연통 하라, 내가 갈테니."

"예! 동무."

***

쿵!

테이블을 내려친 김은정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남조선에서 보내는 물자를 달러로 바꿔 핵실험용 물자를 사겠다고? 그거이 참입네까?"

호위총국장이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레... 동무의 뜻을 이루도록 돕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음메... 면목 없이야요."

"인민들은... 아바이 동무는 대체..."

호위총국장은 할 말이 끝났다는 듯 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은정 동무."

"말하시요, 호위총국장 동무."

"내레... 곧 썩어질 것 같으니 하는 말입네다."

"귀 씻고 듣겠소."

"부디... 지금 그 마음, 변티 말고 인민들을 위한 위원장이 되어 주십시오."

김은정이 부들부들 양 손을 꽉 쥐었다.

"어찌 그런 말을 합네까?"

"최고 사령관 동무께 반대 의사를 들었으니, 오래 살기는 틀렸습네다."

"길티 않소, 호위총국장과 보낸 세월이 있지 않습네까?"

고개를 젓는 호위총국장.

"현해철 부장도... 길케 갔습네다."

아랫입술을 깨무는 김은정.

그가 아는 최고인민회의의 위원 중, 가장 뛰어나고 가장 올곧은 인물이 현해철이었다.

그러나 그가 유학을 끝내고 돌아온 북한에는 더이상 현해철이 존재하지 않았다.

임무에 실패했다는 이유로, 약속이란 이유로, 책임이라는 이유로, 김일정이 현해철의 목숨을 취했기 때문이었다.

"......"

씁쓸한 얼굴로 떠나는 호위총국장에게 어떤 위로도 하지 못한 김은정은 아랫입술을 어찌나 세게 깨물었는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리재형 동무."

"말씀하시라요."

"내레... 그, 패륜. 그것을 해야갔소."

고개를 푹 숙이고 떨어지는 핏물을 보고 있는 김은정.

이재형이 스륵, 입꼬리를 들어올리고는 답했다.

"알갔습네다."

"얼마나 걸리갔소?"

"길디 않습네다."

"길디 않다라..."

"김은정 동무께서는... 호위총국장의 말만 명심해 주시라요."

"인민들을 위한 마음을 잊디 말라?"

"예, 동무."

"우리 공화국에 지금보다 더 나쁜 상황이 있소?"

모든걸 체념한 듯한 말에 이재형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김은정의 말 처럼, 북한은 이미 나빠질대로 나빠져 있는 상황이었다.

"뜻대로 될 겝니다."

"남조선에서 보낼 구호품이 도착하기 전에 부탁하오."

"예, 동무."

***

야심한 시각.

방문 바깥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번쩍 눈을 떴다.

고개를 돌리니 아직 루시는 한밤중이었다. 시선을 옮겨 시계를 확인하니, 시간은 새벽 2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이 시간에 내 방 앞에 서 있을 사람은 한 사람 뿐이었다.

사용인들은 10시 이후에 내 방 근처를 돌아다니지 않는다. 그것은 일종의 규칙 같은 것이었다. 또한, 훈련을 받은 여인들이기에 절대로 인기척을 내지 않았다.

루시가 깨지 않게 조심히 침대에서 빠져나와 깨끔발을 하고는 최대한 조용히 문 밖으로 나갔다.

"늦은시간에 죄송합니다. 회장님."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문 앞에는 호석이 서 있었다.

난 정신을 차리기 위해 목을 이리저리 돌리고 스트레칭을 하며 앞장서서 걸었다.

잠깐을 걸어 발코니에 도착해서는 호석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죠?"

"코드원에게 기다리던 소식이 왔습니다."

씨익 입꼬리가 올라갔다.

"드디어 골칫덩이 북한도 끝이네요."

"예, 회장님."

"지원을 아끼지 마세요, 목숨을 내놓고 있는 이재형입니다."

"예, 우리 대원의 목숨. 소중히 여기겠습니다."

"그렇죠, 우리 대원."

< 제 292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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