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91화. >
미니 시가를 반쯤 태웠을 때.
공손한 걸음으로 최태수가 고개를 숙이며 비행기 안으로 들어왔다.
"오셨어요?"
"찾으셨습니까 회장님."
한때 대한민국을 주도하는 재계서열 4위 그룹의 총수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만큼 낮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그.
나에게 반도체와 에너지사를 넘기고 축소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재계서열 4위를 유지하는 저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1위는 부동의 SKY고 2위는 대현이다.
3위 GL과도 원래부터 덩치차이가 조금 있었지만, 나에게 몇개의 계열사를 넘기면서 향후 20년 넘게 3위의 자리는 넘보기도 어려울 터.
자연스레 공손한 모습이 납득은 되었다.
스윽, 시가통을 내밀어 권유했더니 작게 웃으며 손을 뻗는데 긴장한 티가 역력했다.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더이상 KS그룹에 원하는 건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다행이군요, 제가 넘긴 것들에 문제가 있나 싶었습니다."
고개를 저었다.
그는 계열사를 넘기면서 SKY에게 받은 현금으로 여러 계열사를 새롭게 정립했다.
게 중에 문화 산업 쪽으로 크게 투자 한 것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보며 그래도 재계서열의 꼭대기에 있던 사람이라 감각이 좋구나 싶었다.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앞으로 대한민국은 커다란 컨텐츠 파워를 갖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SKY역시 문화산업 쪽에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었다.
"아니면... 제가 SKY를 따라한다는 생각을 하실까 하여 걱정했습니다."
"SKY를 따라해요?"
"SKY의 계열사 중, 문화산업 쪽에도 투자를 진행하시는 것 같기에, 우리도 그쪽에 손을 뻗어 봤습니다."
숨기는 것 없이 솔직한 답변에 난 만족스러웠다.
꼬리를 숨긴 개는 두렵지 않은 법.
이제 그는 다시 SKY를 향해 이를 드러내지 않을 게 확실했다.
"패스트 팔로어 전략이군요."
"예, 그렇습니다."
"좋은 생각이세요, 영화산업에 뛰어들어 보십시오, 생각보다 좋은 캐시 카우가 될테니까."
최태수가 환한 표정으로 '예! 회장님!'하고 대답했다. 내가 어떤 힌트를 준다고 생각한 모양.
"한국항공 조양구 회장이랑 사이가 나쁘셨죠?"
"예... 그치가 유통회사로 커온 사람인데... KS가 축소되며 유통쪽에 영향력을 끼치기는 어렵더군요."
"유통이라... 조양구 회장 정보 좀 가진 것 있으십니까?"
최태수가 조심스럽게 시가에 불을 붙이고는 물었다.
"무엇 때문에 그러십니까?"
"이 여객기 보이십니까?"
"예, 아주 훌륭한 여객기군요, 이 곳이 퍼스트 클래스인가요?"
"그렇습니다. 앞으로 SKY 항공우주기술은 여객기 사업에도 진출 하려고요, 든든한 돈 줄이 있어야 천문학적인 연구비를 충당하지 않겠습니까?"
"록히드마틴사와 제휴를 맺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고잉사와도 제휴를 맺고 있죠."
"발판은 충분하군요."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아도 내 말을 척척 알아들으니 대화하기가 몹시 편했다.
"한국항공. 그게 갖고 싶으신 거군요."
"여차하면 그냥 SKY AIR의 규모를 확장 시켜버려도 될 일이긴 한데, 이왕이면 '국적기'를 따 내는게 보기도 좋지 않겠습니까."
고개를 주억거리는 최태수.
"가진바 자료를 모두 넘기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조양구 회장이 꼴 뵈기 싫었거든요."
"그렇겠죠, 그만 쏙 빠졌으니."
최태수의 눈밑살이 파르르 떨렸다.
나는 본보기로 KS그룹을 삼았다.
사실 KS그룹이 가장 탐이 나는 분야의 선두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그런 것도 있었다. 에너지와 반도체 부문에서 미래에 크게 성장하는 기업이었다. 그러니 최태수가 마련해 놓은 발판을 그저 삼켜버리기만 하면 미래에 크게 성장할 기업이 내것이 되는 것이었다.
해서,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
너무 날로 먹나 싶으니까.
"KS그룹이 요즘 많이 축소 되었다죠?"
"커험... 그렇습니다."
"한국항공 요리해서 가져오시겠어요? 그럼 유통은 내어드리죠, SKY LINE은 '개인유통'만 담당합니다. 알고 계시죠?"
최태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물었다.
"그럼 나머지는 주시겠다는?"
"어차피 SKY LINE은 내수시장이 목표가 아닙니다."
"그렇죠."
"내수시장 정도의 규모는 SKY에게 크게 이득이 되지 않아요."
"감사합니다 회장님!"
"요리만 맛깔나게 내 오세요."
"명심하겠습니다."
고개를 돌려 호석을 바라보았다.
"1개 정도는 지원 해 주세요."
호석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백부님께서 좋아 하실 겁니다."
"별 수 있나요, 손자가 할아버지 말 들어야지."
최태수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대통령과 무슨 얘기를 했는지 궁금한 모양.
별 게 아니었다. '모든걸 독식하지 말라'는 말을 들어주었을 뿐이었다.
할아버지가 걱정하시는 것은 SKY가 대한민국 원툴이 되면, SKY가 힘들때 대한민국이 힘들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SKY가 없어도 원할하게 내수시장이 돌아가길 바라시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진짜 대통령 다 되셨다니까."
내 혼잣말에 호석은 흐뭇하게 웃고, 최태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1개라 하심은..."
"KS자금줄 마른걸로 알고 있습니다."
민망한지 최태수가 시가를 뻑뻑 태웠다.
"중국에서 이자를 두둑하게 받아서요, KS가 움직이는데 숨통 좀 틔우시라고 지원해주겠다는 얘깁니다."
"그럼 1개면... 천억입니까?"
"에이, 우리 회장님 배포 많이 작아지셨다."
호석이 웃으며 최태수 회장에게 말했다.
"'개'라는 단위는 '조'입니다. 회장님."
"1, 1조?"
"무이자 20년 상환으로 내주세요."
내가 쐐기를 박자 최태수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고개를 숙였다.
1조라는 현금.
커다란 공룡에게는 별것 아닌 것 같지만, IMF에 50억이 없어서 도산한 공룡들이 넘쳐난다.
그만큼 한번에 들어오는 현금은 가치가 어마어마하다는 소리다. 특히나 시장규모가 작은 대한민국에서는 더더욱.
"한국항공만 요리해서 가져오세요, SKY 스타일 아시죠?"
"예! 알다마다요, 썩은 것들만 도려내고, 직원들은 일자리 보장."
"예, 그걸로."
"명심하겠습니다."
"한국항공 가져오는데 좀 남으면 다른데 쓰셔도 됩니다."
"예!"
싱글벙글 좋은 표정이 된 최태수가 돈을 어디다 써야할지 상상이라도 하는 듯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갑시다. 도곡동."
"예, 회장님."
***
도곡동 SKY PMC 정보부 본관.
비밀스러운 곳이기에 이곳에 이런 기관이 있다고 생각하는 인물들은 없었다. 언제나 건물을 볼때면 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보부 요원들은 이런 건물이 좋은 모양이다.
물론, 내부는 겉 모습과 다르게 엄청나게 미래지향적이라는게 다르다면 다르다.
꾸벅, 꾸벅 졸고 있는 듯 보이는 경비들 부터 연기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급이다.
어쨌든.
"독거미 없으니까 허전하네."
"하하하, 마카오에서 좋은 시간 보내고 있습니다."
할아버지의 수행을 철웅이 할 순 없으니, 요즘은 이 정보부를 철웅이 맡아서 관리하고 있었다. 독거미의 빈자리를 더 높은 사람이 와서 채운 꼴이다.
"마카오 진행상황 보고는 받고 있으시죠?"
"예, 회장님 문제 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3개월 이내에 건설사 투입 예정입니다."
"좋네요, 거기도 한번 보러 가야겠어요."
"사막에서 좋은 소식이 들릴때쯤 가시면 될 것 같습니다."
"오, 그거 좋네요."
호로록, 헤이즐럿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시고는 이제 본격적인 회의를 시작해볼까 싶었다.
"코드원의 상세 보고 받았습니다."
철웅은 호석에게 사전에 언질을 받았는지 빠르게 북한의 상황에 대한 요약서류를 건넸다.
"현재 김남정의 세력이 많이 축소된 상황입니다. 원래라면 당 지도부에서 김남정을 보고 많은 지원을 해 줬으나, 얼마 전부터 뚝 끊긴 상태입니다."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장저민에게 언질을 주었으니 아마 중국측에서도 어떤 리액션이 있었을 터.
"다음 차남은 뭐, 원래부터 후계구도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상태였습니다."
"달라진건 김남정의 영향력과 김은정의 영향력이라는 소리네요."
"예, 그러나 김은정의 영향력은 이제 막 커져가고 있는 상태니까 이렇다 저렇다 얘기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그 부분을 만져 줘야 된단 소리네요?"
"그게 가장 베스트 시나리오가 될 것 같습니다."
"좋네요, 그래서 계획은요?"
철웅이 스륵, 위성사진 하나를 보여주었다.
"CIA 쪽에서 가지고 있던 위성사진을, 국정원이 인계 받았고, 자연스럽게 우리쪽에도 들어 왔습니다."
"아직 우리쪽 위성은 이쪽을 함부로 촬영할 수 없나보죠?"
"아무래도 미국의 눈치를 봐야하니..."
철웅의 말투에서 진득한 아쉬움이 묻어나왔다.
최근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한 SKY항공우주기술이다.
처음 발사한 인공위성은 GPS가 주 임무고, 그 다음이 통신이었다. 곧 2차, 3차. 최대 10차 인공위성까지 발사 예정중이니 앞으로는 전 세계 어느 곳이든 인공위성 사진을 찍을 수 있을테다.
물론, 많은 걸림돌들이 있지만 그것을 키우기 위해서는 SKY가 덩치가 커져야 했다.
"미국이라... 뭐 그부분은 차차 해결하기로 하고, 그래서 여기거 뭔데요?"
툭툭 사진을 건드리며 물으니 철웅이 말을 이었다.
"이곳은 북한의 핵실험을 위한 곳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아, 핵실험."
"그런데요?"
"김일정이 북한으로 복귀하고 나서, 이쪽에 많은 차량들의 출입이 발견되었다는 보고입니다."
대충 알 것 같았다.
김일정 역시 이번 정상회담에서 미국, 러시아, 중국의 정상들과 만남을 가졌을테고, 어떤 요구사항들을 말했을 테다.
제 놈들이 하는게 갖잖은 협박질이니 그 덩치 큰 놈들이 쫄았을리 없었다.
"뜻대로 되지 않으니 핵무장으로 위협하겠다? 중국과 러시아는 북한이 핵을 갖는게 큰 부담은 아니고?"
"예, 그러나 국제사회적인 문제로 도움을 주진 않을 것입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북한은 있든 없든 사실 크게 느껴지는 놈들은 아닐테니까요."
서럽지만 맞는 말이었다.
이미 경제적으로 파탄을 넘어선 북한이다.
개발도상국이라 불리는 동남아와 비교해서도 크게 처진다. 사람이 살기 팍팍한 나라라는 뜻.
또한, 워낙 폐쇄적이기에 그들의 치안 상황도 제대로 알 순 없었다. 다만, 소문에 의하면 치안 상황도 매우 나쁠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다.
코드원의 보고도 그렇고, 들리는 소문도 그러니까.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는 나지 않을테니까.
"결국엔 우리랑 미국을 위협하겠다는 거네요, 중국과 러시아에게는 '우리도 핵 있으니까 영원히 같은편 하자?'하고 꼬리를 흔드는 거고."
"그렇게 예상하고 있습니다."
"핵실험, 저거 돈 많이 들죠?"
철웅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북한은 돈이 없잖아요?"
"예."
"근데 또 저기에 돈 지랄을 하고 있다?"
"북한의 시민들이 굶어죽어갈 겁니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어째서 철웅이 이 위성사진을 내밀었는지도 알 것 같았다.
"이걸 떡밥으로 쓰잔 말이네요, 백 대표님 말씀은?"
"역시 회장님, 척하면 척이십니다."
"떡밥만 던지면 손해니까, 정 대표님께도 얘기했습니다만, 적당한 미끼도 던져 주세요, '식량지원'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으로."
"제 아비는 인민들이 굶어 죽던 말던 신경쓰지 않고, 권력에만 욕심이 가득한데, 비난만 하는 남조선에서는 인민들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는 생각을 심어주시라는 말씀 이군요."
"그거죠. 아마 김은정의 마음이 살랑살랑 봄날의 개나리처럼 흔들릴겁니다."
"하하, 알겠습니다.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고개를 돌려 호석을 바라보았다.
"SKY 인베스트먼트의 이름으로 후원금도 내세요, 할아버지도 좋아하시겠네."
호석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중국에서 두둑하게 챙겨온 이자를 쓰자는 말씀이군요."
"아휴, 우리 대표님들 이제 내가 무슨 말만해도 척하면 척이네, 아주 훌륭합니다."
"하하하하."
< 제 291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