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철혈의 재벌-289화 (289/458)

< 제 289화. >

대한민국에서 열린 한, 미, 중, 러, 북의 정상회담.

그 마지막 날은 단체로 이런저런 협의를 하는 시간이었고, 각국의 정상들이 다시 한 데 모이는 자리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언론의 주목을 이끌어 냈다.

우리나라 언론 뿐 아니라 전 세계가 현 대한민국에서 열리는 오자 정상회담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각국의 정상들은 최대한 자연스럽고 위엄있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노력했다.

"어우야, 며칠 잠도 못잔 얼굴인데요?"

내 말에 대기하고 있던 할아버지가 픽 하고 웃어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김일정의 몰골이 말이 아니기 때문, 퀭하니 안으로 음푹 들어간 눈과, 코 까지 내려온 다크서클. 푸석푸석한 얼굴은 한 눈에도 그가 제대로 된 숙면을 취하지 못했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았다.

"생각보다 쫄보인 모양이구나."

"그러게요, 얼마나 무서웠으면 잠도 못잘까."

그나마 오늘은 김일정의 표정이 매우 좋아보였다. 이제 오자 회담의 끝이 다가오고 있으니, 평양으로 돌아갈 생각에 설레는가 보다.

"저 놈, 뭐 타고 가나요?"

"글쎄? 듣기로는 비행기와 차량, 두가지 모두를 준비한것 같더구나."

이동경로를 여러개 만든다는 것은, 자신을 공격하는 존재를 귀찮게 만들기 위함일테다. 물론 나는 놈이 이동하는 동안에 공격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1초라도 빨리 쉬고 싶을테니까, 차량으로 가겠네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할아버지.

"1초라도 빨리 쉬고 싶으면 비행기가 좋지 않겠더냐?"

"차를 좋게 꾸며 놨다면, 이동중에 편안하게 잘 수도 있죠?"

"아하, 그럴 듯 하구나."

"게다가 북한 놈들은 비행기 별로 안 좋아 할겁니다."

"왜?"

"옛날에 제 놈들이 저지른 일이 있잖아요?"

"아웅산 KAL기 폭발사건을 말하더냐?"

"뭐 그런거죠."

"하긴, 상공에서 터지면 거의 죽는다고 봐야지."

슬슬 주인공이나 다름없는 할아버지가 나서야 할 차례가 다가왔다. 단정하게 옷 매무새를 점검한 할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게 얘기할 게 있겠더냐, 하하호호 가식적인 웃음이나 흘리다 끝내겠지."

"예, 그렇겠죠."

"그래도 네놈 덕분에 원하는 것들을 조금은 가져올 수 있어서 제법 남는 장사였다."

다른 국가정상들과 무슨 대화를 나누셨는지 자세히 묻지 않았다. 결국 할아버지 일이고, 난 내게 필요한 것들만 챙기면 되는 것이다. 나머지는 할아버지가, 그리고 대한민국이 알아서 챙기겠거니 생각했다.

"그럼 다행이고요."

"특히나 부쉬가 많은걸 양보 해 주더구나."

"아 그래요?"

"아마도 조만간 대선이 있으니 그런게 아닐까 싶구나."

확실히 미국 대선이 성큼 코 앞으로 다가오고 있긴 했다. 부쉬가 한국에 우호적이라는 말, 그것은 다르게 해설 될 수 있었다. 나와 록펠러가에 잘 보이기 위함이라는 얘기다.

한동안 소홀하게 지냈다면 소홀하게 지낸 우리. 부쉬는 이제 다시 그 관계를 돈독하게 만들고 싶을 터 였다. 가진바 금력이 압도적으로 차이가 나니 결코 데비할아버지와 나를 멀리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놈이 뭘 그렇게 어깨에 힘을 주고 다녔을까요."

할아버지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천조국의 머리가 아니더냐, 힘줄만 하지."

"그건 또, 맞네요."

"이번 미국 대선에 끼어들 생각이더냐?"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

당장 북한과 중국 문제로도 충분히 골머리가 아프기 대문, 뭣 보다 아직 장인어른의 확답을 듣지 못했다. 또, 상대가 상대인지라 아직은 좀 어렵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부쉬는 제법 인기가 많은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물론 미국의 대통령들도 우리나라 대통령들 못지 않게 욕을 처먹긴 하지만 어쟀든.

"좀 더 보고, 결정하죠."

"오냐."

***

카메라가 있으니 억지로 억지로 표정을 관리하는 김일정. 그러나 피로를 숨길 순 없는지, 고개를 돌리거나 손으로 입을 가리고 연신 하품을 내뱉었다.

그는 1초라도 빨리 이 지긋지긋한 회담이 끝나길 바라고 바랐다.

말이라도 알아 들을 수 있으면 좋은데, 김일정이 알아 들을 수 있는 말은, 한국말과 영어가 전부였다. 중국어도, 러시아어도 제대로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그렇기에 더욱 졸음이 쏟아졌다.

또, 별로 혹 하고 빠져드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도대체 유라시아 횡단철도 얘기가 계속 들리는데, 우리가 대가리에 총을 맞은 것도 아이고, 남조선 아 새끼들이랑 협의 할 이유가 있네?"

통역사겸, 보좌관 역할을 하고 있던 여인이 김일정의 말에 영혼없의 동의를 표한다.

"맞습네다 최고사령관 동무."

"장저민 주석도 너무 하는구만 기래, 유라시아 횡단철도에 너무 빠져들었어, 저기 다 저저, 남조선 대통령의 마수가 아니갔네?"

"저도 길케 생각 하고 있습네다."

"우리가 저걸 받아들이면, 당장 인민들의 삶은 나아지는 것 같아도. 곧 온 평양에 변절자가 들끓게 될 것이야."

"그렇습네까?"

"길티, 미제 승냥이들의 자본은 기래서 무서운게지."

졸음을 떨치고자 떠들어 본 김일정이지만, 그와 보좌관의 대화 속에서, 현 김일정이 얼마나 독재에 진심인자가 드러나는 부분이었다.

말로는 제법 그럴듯한 포장을 덧 씌웠지만, 결국은 자본력이 늘어난 북한의 인민들이 '변절'할 까 무서운 것이었다.

또, 자신을 위협하고, 며칠간 자신을 힘들게 만들었던 SKY와 대한민국의 대통령 천혁수가 좋아하는 꼴을 보기 싫기에 강경하게 거부 한 것도 있었다.

장저민 주석이 따로 찾아와 술자리를 마련해 그를 설득하려는 시도도 있었으나 칼 같이 거부 했으니, 현재 김일정이 대한민국과 SKY에 가진 반감을 대충이나 말 수 있는 대목이었다.

자연스럽게 장저민이 김일정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다. 원래도 '소국'이라고 무시를 일삼았는데, 이제는 자신에게 반기까지 들어 올렸으니 김일정이 곱게 보이면 그게 더 이상했다.

"저저... 자본에 눈이 돌아서이, 쯧... 남정이 당분간 중국 나가지 못하게 하라."

"예, 최고사령관 동무."

"아새끼... 중국을 믿고 너무 설티디 못하게 하고."

자신의 보좌관이 그런 일을 담당하는 사람이 아니란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김일정은 제대로 된 사고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뒤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호위총국장이 결국 김일정의 곁으로 가 작게 소곤거렸다.

"최고사령관 동무. 박영옥 보좌는 기런일음 담당치 않습네다."

"음? 아... 길티."

"첫째 도련님께는 따로 언질을 하겠습네다."

"기래, 호위총국장이 수고 하라."

"예!"

허리를 세우고 다시 뒤로 돌아가려는 호위총국장의 팔을 붙잡은 김일정.

"돌아가는 길은, 차로 하자우."

"알갔습네다."

"티 나게 준비 하디 말고, 조용히."

"명심하갔습네다."

"먼저 준비하라, 자리가 끝나면 바로 떠야갔어."

"예, 최고사령관 동무."

***

거의 죽은듯이 차에서 잠을 자고 있던 김일정이 감히 자신의 몸을 흔드는 손길에 불쾌한 표정으로 눈을 떴다.

"최고사령관 동무, 도착했습네다."

호위총국장의 손길에 짜증이 버럭 솟아났지만 꾹 눌러 참은 김일정이 스르륵 자리에서 일어났다. 특별하게 개조된 벤츠 스프린터 차량은 안락하기 그지 없어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게다가 김일정이 대자로 뻗어 잠을 자니 운전수 역시 알아서 거의 기어가듯 운전을 했고, 덕분에 세시간도 걸리지 않을 거리는 제법 오랜시간이 걸려 도착했다.

철컥.

차 문이 열리고 김일정이 내렸다.

주석궁이 아닌 사택으로 향했기에 주변에 그를 환영하는 인파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비밀스럽게 이동했다는 방증.

"벌써 해가 졌구만 기래."

"예, 조금 쉬셨습네까?"

"기래... 기래도 더 쉬어야 갔어, 이거 뭐 꼴이 많이 아니구만 기래."

"편안하게 쉬실 수 있도록 언질을 주었습네다."

"기래? 예, 평양 시내에 도착해서 연락을 했으니... 아직 준비는 부족하지 싶습네다."

호위총국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김일정.

자신의 행보가 비밀리에 움직이고 있었으니, 남조선에서는 밝힐 수 없었을 테다.

개성공단을 지나서도 안심 할 수 없으니 평양에 진입한 이후에 연통을 넣은 모양.

그리고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저 멀리에서 몇 대의 차량이 이곳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뭐이네?"

"알아보갔습네다."

김일정이 잔뜩 짜증난 얼굴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니코틴의 힘으로 잠시나마 남아있는 피로를 이겨볼까하는 심산.

탁.

차량에서 내린 인물은 별로 반갑지 않은 얼굴이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특히나.

"아바이 동무!"

"아 새끼레, 뭐 한다고 여기 왔네?"

"아바이 동무가 오셨다는 소식에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 왔디요."

무엇이 그리 반가운지 환하게 웃고 있는 김은정의 얼굴에 울컥 짜증이 치솟는 김일정이지만 차마 뭐라 할 순 없었다.

싫든 좋든, 제 가 낳은 핏줄이 아니던가.

"쯧, 내레 오늘은 피곤하이, 다음에 얘기하자우."

김은정은 서운한 티가 역력한 얼굴로 말했다.

"아바이 동무, 내레 어디를 다녀 왔는지 모르십네까?"

김일정이 힐끗 김은정의 곁에 서 있는 이재형을 바라보고는 다시 시선을 돌려 김은정에게 말했다.

"보고는 들었디."

"기런데... 아바이 동무는, 잠이 더 중합네까?"

"후우... 내레 남조선에서 놀다 왔간? 격무에 시달리니 피곤하다는데, 꼭 지금 공치사를 해야 속이 깨깠하갔네?"

순식간에 부자 상봉의 자리가 불편하게 변했다. 호위총국장 역시 이재형에게 눈짓을 보내며 김은정을 치우라 얘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눈치가 빠른 친위대원이었던 이재형은 딴청을 피우며 모른척 하기 시작했다.

"아바이 동무! 내레 공치사를 원했습네까? 그저 고생했다 한 마디만 해주셨어도 충분했습네다. 내는 고저... 인민들의 팍팍한 삶이 어땠는지,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올바른 지도자의 덕목이 무엇인디를 대화 하고자 했을 뿐인데..."

"기리니까! 지금 기딴게 중한게 아니라! 내레 피곤하다 하디 않간? 내는 놀고 왔네?"

참다 못한 김일정이 버럭 소리를 질러버렸다. 서슬퍼런 기세가 김은정에게 닿았다.

그러나 김은정은 아랑곳 하지 않고 김일정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잠을자지 못한게중요합네까? 지금 이 시간에도 수많은인민들이 굶어죽고 있시야요! 잠 그거 며칠 자지 않는다고 듁디 않습네다!"

오히려 더 강하게 자신의 주장을 설파하니 놀란것은 김일정이었다.

보통, 자신이 이렇게 호통을 치면 아들 놈들은 기도 펴지 못하고 고개를 수그렸었다. 그런데 김은정, 그것도 가장 어린 막내놈이 고개를 빳빳히 쳐들고는 자신에게 대드는 꼴을 보자니 묘하게 SKY의 천우진이 겹쳐보이는 듯 느껴졌다.

쫘악.

"아새끼레... 지금 애비에게 설교하니? 내레 그거를 몰라?"

호위총국장이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결국 참지 못한 김일정의 손이 김은정의 따귀를 세차게 때려 버린 것.

그제서야 이재형이 김은정의 양 어깨를 잡아 뒤로 살짝 빼며 말했다.

"죄송합네다 최고 사령관 동무, 아오지도, 정치범 수용소도... 만만찮은 곳이라 정신이 없었나 봅네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김일정.

"아바이 동무, 여태껏 이러셨습네까?"

"그만하라 하디 않간!"

호위총국장이 김일정과 김은정 사이에 끼어들어 김은정에게 말했다.

"막내 데련님, 오널은 날이 아임둥. 내일 다시 시간은 갖는게 어떻겠습네까?"

"내레 말하디 않았네? 우리 공화국의 인민들에게는 1분 1초가 중해! 기런데 피곤해서 정무를 못 본다는게 말이가! 방구가!"

호위총국장이 거의 죽일듯 이재형을 쏘아보았다.

이재형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거의 강제로 김은정을 끌고가듯 뒤로 움직였다.

김일정은 그 꼴도 보기 싫다는 듯 담배만 뻑뻑 피우고 있었다.

"아바이 동무! 아바이 동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김일정이 사택으로 발을 옮기며 혼잣말을 읊조렸다.

"배우란 것은 안 배워 오고. 이상한 물만 들어 왔구만 기래."

"아직 혈기가 넘치니 그라신게 아이겠습네까?"

"쯧쯧, 인민들이 썩어지는게 하루 이틀이 아니것만..."

호위총국장은 김일정의 뒤통수를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방금 김일정의 말은 정말이지 최고사령관에 어울리는 말이 아니었기 때문.

그러나 김일정은 피곤한 나머지 그런 것들을 신경쓰지 못했다.

< 제 289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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