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88화. >
만찬장을 벗어나 자신의 숙소로 돌아온 김일정은 거칠게 걸음을 옮기고는 옷을 찢듯이 벗어 수행원에게 던져 버리고는 욕실로 들어갔다.
사전에 먼저 얘기를 해 놓았기에 욕조 안에는 적당한 온도와 향기로운 물이 받아져 있는 상태.
“후우.”
욕조에 몸을 담구니 붉게 달아오른 그의 얼굴이 물 온도 때문인지 아니면 분노 때문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철컥.
문이 열리고 처음 김일정의 옷을 받아 들었던 여성 수행원이 하늘하늘 하게 다 비치는 옷을 입고는 욕실로 들어왔다.
“나가라.”
평소라면 히죽 입꼬리를 들어올리며 그녀의 손을 거절하지 않을 김일정이 날카롭게 쏘아붙이자 당황한 표정을 짓는 수행원.
“술이나 내 오라.”
“예, 예.”
잔뜩 당황한 여성은 황급히 욕실을 벗어났다가 이윽고 얼음잔에 위스키를 따라서 가져왔다.
손을 뻗어 위스키 잔을 받아든 김일정이 막 입가로 가져가다가 덜컥 멈추었다.
‘네 머리통에 구멍이 나는게, 내일일지. 오늘일지, 아니면 모레일지. 궁금하지 않아?’
천혁수의 말이 머릿속에 떠오른 김일정이 위스키잔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잔을 여성 수행원에게 내밀더니 말했다.
“마셔보라.”
“알갔습네다!”
황급히 술잔을 들어 벌컥벌컥 마시는 여인.
독이 들었나 맛이나 보라고 했던 얘기였는데 눈치없이 단숨에 잔을 비우는 여인을 보고는 한숨을 푹 내쉬는 김일정.
“쯧, 됐으니 나가보라!”
거칠게 소리를 지르고는 가슴까지 욕조 안에 집어 넣는다.
“후우···”
크게 심호흡 해보지만 별로 달라질 건 없었다.
“내레··· 꼴이 말이 아니구만.”
혼잣말을 뱉어내며 자신의 현재에 짜증만 치솟는 김일정.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어깨 흉터를 만져본다.
24시간 삼엄한 경비 속에서 삶을 영위하던 그에게 한국행은 위험부담이 컸다. 그날도 어김없이 단잠을 자다 불에 데인듯한 고통을 받지 않았던가.
바깥의 친위대가 멀쩡히 존재했음에도 쥐도 새도 모르게 들어와 자신의 몸에 장난이라도 치듯 구멍 두개를 내고는 사라진 정체불명의 사내들.
이제는 그 정체가 대충은 파악 되었으나, 언제고 그들이 자신을 찾아올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선례가 있으니 절로 긴장 되는지 어깨의 흉터를 만지던 김일정의 손이 부르르 떨린다.
“후우···”
이마고 구렛나루고 할 것 없이 땀이 흐를 정도로 욕조에 몸을 담궜던 김일정이 일어나 대충 가운을 걸치고는 욕실 바깥으로 나갔다.
드르륵, 욕실 문을 열고 나왔는데 욕실앞을 지키고 있는 친위대가 보이지 않았다.
“호위총국장!”
버럭 소리를 지른 김일정.
그 소리에 빠르게 다가오는 호위총국장의 다리를 그대로 걷어차는 그.
“윽!”
“왜 앞에 아무도 없니?”
“죄송합네다. 심기가 어지러우신 것 같아 치웠습네다.”
“내레 누누이 주의주지 않았네? 남조선 아새끼들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철저히 하라고.”
“마, 맞습네다.”
“똑바로 하라!”
“예! 최고사령관 동무.”
한숨을 푹 내쉬고는 소파에 몸을 파묻고는 손을 뻗어 그 여성 수행원에게 말하는 김일정.
“동무레 마셨던 거, 그거 내오라.”
“예!”
서둘러 위스키를 가져온 수행원.
김일정은 턱짓을 까닥이며 말했다.
“조금만 마셔보라.”
수행원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별 의심없이 위스키로 입술을 적신다.
“내려 놓으라.”
김일정의 앞에 위스키를 내려 놓고는 고개를 숙이고 공손하게 서 있는 수행원.
3분, 5분, 10분.
10분이 지나도 수행원의 자세에 변함이 없었고, 혈색도 별반 달라진게 없었다.
그 사이 녹아든 얼음 때문에 밍밍하게 변했을 위스키지만 김일정은 그제야 안심을 하고는 위스키를 한 모금 입안에 머금었다.
잠시 고민하는 얼굴을 하다가 꿀꺽 삼키고는 한동안 자신의 몸을 관조했다.
“이기··· 사람사는 일이 아니구만 기래.”
“예? 최고사령관동무, 다시 말씀 해주시갔습네까?”
긴장하고 있던 호위총국장의 질문에 고개를 저은 김일정.
“경계나 똑바로 서라, 배치는 다시 확인 했네?”
“문제 없습네다! 쥐새끼 한 마리도 통과할 수 없습네다.”
“흥. 그래야디··· 그래야 동무가 썩어지는 일이 없을기야.”
호위총국장은 억울했다.
도무지 김일정의 심기가 어지러운 이유를 알 수가 없기 때문.
그저 묵묵하고 공손하게 자세를 유지할 뿐이었다.
***
만찬장에서 가식적인 얼굴을 하고 있는 일은 제법 힘든 일이었다. 할아버지 역시 거칠게 넥타이를 풀어 헤치며 셔츠의 단추를 몇개 풀어 헤치신다.
나 역시 답답한 정장을 느슨하게 풀고는 할아버지의 맞은 편에 앉았다.
“김일정 어땠어요?”
“표정 보지 않았더냐?”
“예, 청와대 셰프들이 똥이라도 내 왔데요?”
말 같지도 않은 농담에 픽 웃어버린 할아버지.
“며칠은 잠을 설칠게다. 눈깔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게 겁 먹은 개새끼 꼴이였지.”
노골적인 신랄한 욕설.
그만큼 할아버지 역시 김일정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방증이었다.
그도 그럴게 놈 때문에 억지로 몸에 구멍까지 내지 않으셨던가. 물론, 아산댁을 상하게 한 것이 가장 큰 이유일테다.
마침 아산댁이 나와 할아버지가 앉아 있는 집무실로 야참을 내 왔다. 만찬장에서 제대로 된 식사를 했을리 만무하니 특별히 신경을 써주는 모양.
“가벼운 전이랑 막걸리에요 어르신, 특별히 직접 담근 술입니다.”
“호오, 그래.”
아산댁 아주머니의 솜씨야 일품이라는 걸 모르지 않으니 나도 입맛없이 텁텁했던 입에 침이 고이는 걸 느꼈다.
먹기 좋은 크기로 부쳐진 전을 한입 가득 넣어 씹고는 엄지를 척 들어 올렸다.
내 모습에 아산댁 아주머니가 곱게 입가를 가리고는 웃음 지으신다.
저런분의 손에 북한의 훈련받은 공작원들 수 명이 명을 달리했다 생각하니 참 신기하단 생각이 들었으나, 상념을 떨쳐냈다. 별로 좋은 일도 아니고 굳이 말을 꺼내봐야 좋을 게 없었다.
“김일정이를 봤지?”
할아버지의 질문에 다소곳 하게 자리에 앉은 아산댁 아주머니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우진이가 놈을 죽일 모양이더구나.”
아산댁 아주머니가 화들짝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본다.
“어머, 괜찮으시겠어요 회장님?”
그녀가 우려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도 마찬가지일 터.
“한국에서 처리하진 않을 겁니다.”
이 부분에서 할아버지도 놀란 얼굴을 되었고, 아산댁 역시 놀란 얼굴이 되었다.
“그럼 어디서 일을 처리할 셈이더냐?”
“잔뜩 쫄아서 웅크린 놈이. 제 집에가서 방심했을때. 그때가 적기가 아닐까요?”
“너무 위험한 생각이세요 회장님.”
“이미 계획은 진행중입니다.”
‘흐음’하고 생각에 잠기셨던 할아버지가 막걸리 한모금을 마시고는 고개를 끄덕이신다.
“그래서 네 놈이 김일정에게 경고와 협박을 하라고 했구나.”
“예, 하루가 멀다하고 여자와 술을 찾는 놈입니다. 독재가 가져오는 달콤한 권세를 마음껏 누리고 있는 놈이죠, 그놈에게 한국에서 5일은 제법 힘든 여정일겁니다. 답답할테죠.”
“여자도 못 믿고, 제 놈의 친위대도 못 믿고?”
어깨를 으쓱였다.
코드원, 그러니까 이재형에게 듣기로는 친위대에 물갈이가 있었다고 들었다. 그 만큼 현 친위대원들의 촘촘한 그물망을 비집고 들어갔던 SKY PMC를 잔뜩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뚫려버린 친위대원들의 보호막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고.
제 목숨을 이 세상 어떤 것보다 귀중하게 생각 할 놈이 공격받은 자라처럼 목을 움츠리는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예, 그러니 제 집에 가서는 안심을 할 겁니다.”
“개새끼도 제 집에서는 삼할을 먹고 들어간다 하니, 설득력 있는 얘기구나.”
“암살 위협에 시달린다. 홀로 생각하겠지요.”
“대비를 해야겠구나.”
할아버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김일정이 사라지고 며칠일지 몇달일지 모를 북한의 권력구도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는 대한민국이었다.
“통일까지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난 고개를 저었다.
통일은 답이 아니었다. 우선, 만약 통일이 이루어진다면 대한민국으로서는 손해 볼 게 많았다. 물론, 미래의 미래까지 생각한다면 여러모로 통일되는 것이 이득인 것은 맞았다.
그러나 강대국과 약소국 사이를 유지하며 북한을 신하의 나라로 만든다면 이득이 더 크지, 손해 볼 것은 크지 않았다.
그러니 내가 원하는 것은 그것이다. 완벽한 주종의 관계.
주종의 관계까지 되지 않더라도 북한을 내 입맛대로 조종할 수 있으면 된다.
“통일은 아니다라.”
“일단 유라시아 철도를 움직이며 북한을 좀 부유하게 만들어줘야 합니다. 그게 아닌 상황에서 덜컥 통일이 되어버리면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죠.”
“일단은 경제기반을 만들어줘야 한다?”
“예, 대한민국은 그쪽에 투자하는 방식으로 천천히 잠식해 나가면 됩니다. IMF를 이용하던 미국놈들처럼.”
할아버지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게 하는게 네 놈에게는 이득이겠구나.”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할아버지 임기 내에 ‘통일’이라는 업적 역시 만들어 드릴테니 너무 노하시진 마시죠?”
할아버지가 아산댁을 바라보며 내게 손가락질 했다.
“저 놈 보시게 아산댁, 이 늙은이를 수십년 부리겠다고 벌써 엄포를 놓는구만.”
“호호호, 그러신 것 치고는 어르신 표정이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요?”
“내가? 흥, 어림도 없지.”
“에이, 저런 효자도 없지요 어르신.”
아산댁이 나를 옹호하니 할아버지가 눈쌀을 찌푸리며 날 째려본다.
“이 놈이 어느틈에 아산댁까지 꼬셨더냐.”
“에이, 꼬시다뇨 맞는 말만 하시는구만.”
“쯧쯧, 호랑이가 집을 비웠더니 여우가 왕 노릇을 하는구나.”
“어허, 참. 여우라뇨 용이라고 그렇게 말씀을 드렸는데.”
“이 놈이 또 자만은, 쯧. 제대로 된 계획이나 말해 보거라. 도대체 어떻게 김일정이를 처리하겠다는 것이더냐? 그리고 그 사후과정은 어떻게 진행 할 것이고?”
뒤쪽에서 철웅과 따로 떨어져 있던 호석을 바라보자 가까이 다가온 그가 살짝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말했다.
“도청장치는 없습니다. 이 방은 깨끗합니다.”
할아버지가 눈썹을 꿈틀거리신다.
“이 놈이, 이 방에서도 그런것을 신경 썼더냐?”
“에이, 대통령 경호 한다고 지나치게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있을까봐 그랬죠.”
“쯧, 됐고. 듣고 싶은 보따리나 풀어 보거라.”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코드원. 그러니까 이재형이 김일정의 친위대로 위장해 북한에 침투한 건 아시죠?”
“그래, 내가 보내주었던 북한의 정보를 이용했다지?”
“예, 친위대는 이름과 얼굴이 알려지지 않는다는 빈틈을 파고 들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사투리’라는게 하루 아침에 되는게 아닐진데.”
“그 부분은 이재형이 알아서 했나보죠.”
“혼자만 보냈더냐?”
고개를 저었다.
이재형 혼자 처리하기에는 일이 어려울 수 있었다.
“총 넷을 보냈습니다.”
“넷이라··· 외로운 싸움들을 하고 있겠구나.”
“슬슬, 끝이 보이니 그들도 열심히 하고 있을 겁니다.”
“계속 해 보거라.”
막걸리로 목을 축이고는 긴 얘기를 시작했다.
“하늘이 도왔는지, 아니면 그들이 일을 열심히 했는지. 김일정의 다음 후계구도에서 밀려나 있던 삼남 김은정이라는 인물에게 코드원이 접촉할 수 있었습니다.”
“그 어린 놈? 그 놈을 다음 정상으로 올리겠다?”
“예, 어리기에 순수하고, 어리기에 진취적이죠. 똑똑하기도 하고 아직은 북한의 독재 사상에 찌들지 않았습니다.”
“글쎄, 별 게 다 조기교육을 하니··· 또, 핏줄이란 건 쉽게 숨길 수 있는게 아니지.”
할아버지의 말이 크게 틀리지 않았다.
“그래서 코드원이 고생을 좀 했습니다. 김은정 그 놈에게 북한의 실상과 인민이라 부르는 북한의 국민들의 팍팍한 삶을 타파하고 싶다는 신념을 심어주기 위해서요.”
“호오··· 제법 준비를 했구나.”
“그리고 오늘, 김은정이 확답을 했다고 합니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고.”
“그래? 제 아비를 밀어내고 그 자리에 앉겠다 했단 말이더냐?”
“아비가 죽으면 별 수 있습니까? 형이라고 둘 있는 놈들이 개판인데.”
“쉽게 생각하는구나.”
고개를 저었다.
“어렵게 생각하면 어려운 것이고, 쉽게 생각하면 쉬운 법입니다.”
“파하하하하, 이제는 네가 나를 가르치는구나.”
“제가 가는 길은 쉬울 겁니다. 남들에겐 어려워보일지 몰라도.”
“남들은 불가능하게 생각하겠지, 지금 네가 이룬 것들만 보아도··· 충분히.”
“앞으로 이룰걸 생각하면 거의 신격화 하겠네요.”
“피식, 네 놈이 김일정의 후계더냐?”
“오우야, 무슨 그런 농담을.”
< 제 288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