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87화. >
입구에서 할아버지의 말을 듣고 웃음을 터트릴뻔 했다. 김일정의 얼굴을 보니 잔뜩 자존심이 상한 얼굴이다.
뭐라 말을 하려고 입을 달싹이는 사이 할아버지는 쌩하니 먼저 방 안으로 들어갔다. 김일정이 덜컥 굳은채로 문 앞에서 입술을 깨물고 있는데 나 역시 그 사이를 뚫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커험."
잠시 후 뒤통수에서 헛기침 소리와 함께 김일정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뭐 특별한 방은 아니고 청와대 내부의 접객실이었다. 그래도 타국에서 손님이 왔으니 차 정도는 대접해줄 수 있지 않겠는가.
어쨌든 김일정을 마지막으로 장내에 모인 각국의 정상들. 서로서로 친분이 두텁다고 얘기하긴 어려웠으나 서로가 서로에게 관심이 많다보니 어색하다고 보긴 어려웠다.
"오늘은 얼굴만 먼저 트고, 내일부터는 따로 한분씩 뵐 계획입니다. 그 사이, 다른 분들도 또, 서로서로 대화를 나눠보시는 게 좋을 듯 하군요."
할아버지의 말에 러시아와 미국의 대통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전에 언질이 있었을테니 이해하는 모양. 그러나 중국의 주석 장저민과 김일정은 처음 듣는 얘기에 인상을 찌푸렸다.
"일정을 넉넉하게 잡은 것도 그것이니 여러분들의 양해를 바랍니다."
거의 통보에 가까운 할아버지의 말에도 미국과 러시아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들은 할아버지에게 얻어가야 할 정보가 있으니 이 정도는 감수 할 수 있는 듯 보였다.
"걱정하지 마시오, 내일이 미국이고 모레는 우리겠지요?"
푸틴의 말에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우방국인 미국을 가장 먼저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피식 웃은 푸틴이 고개를 끄덕이며 장저민에게 말했다.
"오랜만에 우리는 술이나 한 잔 합시다."
잠시 기분이 나빴던 장저민은 이내 허허롭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인의 마음으로 친히 기다리리다."
다른 정상들이 승낙의 뜻을 표하니 김일정은 어쩔 수 없이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금일은 시간도 늦고, 비행 스케쥴로 피곤하실테니 편히 쉬시다가 저녁에 만찬장에서 뵙지요."
청와대 답게.
빈객들이 와 쉴 수 있는 공간들이 당연히 마련되어 있었다. 물론, 각국의 정상들은 굳이 청와대에서 '잠'을 청하지는 않았다. 국가 안보의 큰 구멍이 뚫릴 수도 있는게 그들의 '목숨'이니 당연한 처사였다.
알아서 호텔을 잡았을 것이고 미리 경호원들이 포진되어 있을 터 였다. 덕분에 SKY호텔 최상층 펜트하우스가 공실을 벗어 날 수 있었으니 내게도 이득이었다. 소소하지만.
"그럼 쉬시다가 저녁에 뵙지요."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저녁 만찬장은 청와대에서 열렸다.
오랜만에 청와대 요리사들이 바삐 움직였고, SKY호텔에서도 셰프들이 파견을 나왔더랬다.
물론, 아산댁 역시 빠질 수 없었다. 할아버지와 나의 기준에서는 아산댁이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요리사니까.
손님을 대접하는데 소홀해서야 되겠는가, 이게 다 국가의 이미지가 될테니까. 좋은 음식을 먹었을 때와 나쁜 음식을 먹었을 때 사람의 심리 상태가 다르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널리 퍼져있는 사실이니, 우리 역시 좋은 음식을 먹여야 했다.
결국은 우리가 원하는 것들을 취하기 위해서라도.
거울 앞에서 옷 매무새를 점검하고 있는 할아버지가 거울에 비친 날 바라보며 물었다.
"경고만 하면 되겠더냐?"
"예, 저번에 구멍 두개를 내 줬는데, 이번에는 머리통이 될수도 있다는 식이면 충분할 것 같네요."
할아버지가 입꼬리를 씨익 들어 올렸다.
"감히 우리에게 총질을 해대고 아직까지 숨이 붙어있으니, 마땅히 고통받아야지."
뭐가 그리 좋으신지 표정이 싱글벙글이다.
"푸틴과 장저민과는 무슨 대화를 주요 쟁점으로 삼아야겠더냐?"
"유라시아 횡단철도죠, 시베리아 횡단철도랑 연결되면 더 좋고."
"호오, 푸틴 입장에서도 쌍수를 들고 환영할 사업이겠구나."
"예, 어떻게믄 뭐 하나 걸쳐서 뽑아먹으려 들겁니다."
"순순히 내줄 수야 있나."
굳이 할아버지가 아니더라도, 내가 나서서 푸틴과 장저민을 방해 할 것이다. 유라시아 횡단 철도, 나아가 아프리카와 동남아 지역까지 뻗어나갈 육로 유통 라인은 반드시 SKY LINE이 독점을 해야 하니까.
그렇게만 된다면 SKY야 말로 전 세계적으로 폭 넓은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대한민국의 영향력은 높아지고, 미국의 영향력은 줄어든다.
물론, 중국 역시 영향력이 확대 될 수 있는 소지가 있으니 그 부분을 컨트롤하는 게 중요했다.
그것도 다 생각이 있으니 우선은 북한에 집중해보자.
"중국, 러시아보다 일단은 북한이 먼저입니다."
"그래, 알았다. 가지."
할아버지의 말에 비서실장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할아버지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본래부터 정치인이었던 비서실장은 천가키즈 출신이었다.
정재계에 폭넓게 배치되어 있는 천가키즈의 활약이 눈부신 상황, 당장 전화 몇통이면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었다. 20년 대계로 시작했던 천가키즈 계획이 피부에 와닿기 시작한 시점이란 뜻이다.
할아버지가 오늘 만찬장의 주인공이나 다름 없으니 나는 조금 늦은 입장을 계획했다. 모두가 각국의 정상들에게 집중하고 있을 때, 소리 소문 없이 말이다.
덕분에 이렇게 시가를 태울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
"좋~타."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탄성에 호석이 피식 웃음을 지으며 옆 자리에 앉는다.
"코드원에게 보고를 받았습니다."
계속하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김은정과 함께 평양으로 복귀중이라는 보고였습니다."
"김은정은 어떻답니까?"
"혼란스러운 상태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보이는 정황들이 있었고요."
"그렇겠죠, 제 놈이 알던 북한과 북한의 실상은 큰 차이가 있었을테니까."
"예, 하루가 멀다하고 시체가 쌓이고 있는 형국입니다. 몇몇 마을에서는 위생의 문제로 전염병도 있다고 합니다."
"에휴."
실제로 보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 참상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얘기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듣기로는 시체들을 한데 모아 불을 피워 태워버린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그런 곳은 굳이 보지 않아도 끔찍할 것이라는 예상 정도는 가능했다.
"이제 뭐, 거의 다 왔군요, 당초 예상보다 조금 더 빠를 수 있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호석.
원래는 김은정을 회유하는데 2년 정도를 계획했었다. 그러나 코드원이 김은정과 함께 하기 시작한지 겨우 6개월 여 만에 회유 직전의 상황까지 도달 했으니 조금 더 앞당겨도 좋을 것으로 보였다.
장저민 역시 유라시아 철도에 눈이 멀어 우리에게 호응해주고 있으니 일은 빨라도 상관이 없을 것 같았다.
***
한편, 같은시각.
천우진의 할아버지이자 대한민국 대통령은 만찬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언론사의 카메라가 바쁘게 그의 모습을 찍었고, 천혁수는 편안한. 그러면서도 카리스마 넘치는 웃음을 지으며 한명, 한명. 만찬장을 찾아온 빈객들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말 그대로 정중한 인사지 없어보인다거나 자신을 낮춘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덕분에 그 모습을 생중계로 보고 있던 국민들은 저들도 모르게 대한민국의 위상에 뿌듯한 마음을 품고 있어고, 천혁수의 지지율은 끝을 모르고 올라가고 있었다. 역사상 유례없는 정상 회담을 이뤄낸 것도 모자라, 역사상 유례없이 높은 지지율을 보이고 있었다.
한명, 한명 인사를 하다 보니 어느새 천혁수의 앞에 김일정이 서 있었다.
"밥은 입에 맞소?"
"팽양에서 먹는 것 만 못하디요."
피식 웃어버린 천혁수가 젓가락을 뻗어 가자미 무침을 한입 크게 넣고 씹는다.
"많이 먹어 두시는게 좋을 겁니다."
무슨 뜻이냐는 듯 천혁수를 바라보는 김일정.
천혁수가 친절하게 젓가락으로 가자미 무침을 집어 김일정의 접시에 내려 놓는다.
가자미 한 점에 미나리 두 개를 올려 놓으며 말을 잇는 천혁수.
"나는 아직 내 몸에 뚫린 두개의 구멍을 잊지 못하지."
그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깨달은 김일정이 인상을 찌푸렸다. 묘하게 가자미의 아래와 위쪽에 놓여져 있는 미나리 쪼가리가 허벅지와 어깨를 가리키는 것 같았다.
"게다가... 이 무침을 만든 아이가 크게 다쳤지, 여인의 몸에 나선 안 될 상처가 났어."
"지금 나를 협박 하는 것이오?"
"그냥 알려드리는 거요, 저번에는 허벅지와 어깨에 난 구멍으로 만족했지만, 이번에는 이왕이면... 그 주둥이를 크게 뚫어버리고 싶거든, 머리통이나."
흠칫 놀란 김일정이 천혁수를 바라보았다.
심증은 있었지만 물증은 없었기에 그는 자신의 몸에 상처를 입힌 놈들이 누군지 확정 지을 수 없었다.
덕분에 암살의 위협을 느끼며 칩거 생활을 보내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었다. 그 좋아하던 여자와 술을 도외시 한지 6개월이 다되어가고 있었다.
"당신 이었소?"
"흉터는 잘 아물었나?"
이제는 완전히 반말을 내뱉는 천혁수.
그들의 주변에서는 둘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누구도 접근하고 있지 않기에 천혁수는 세간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 판단한 모양.
"내레 가만히 있을 것 같소?"
피식 웃은 천혁수가 시뻘건 가자미 무침을 입안 가득 집어 넣으며 우악스럽게 씹었다.
"가만 있지 않으면?"
"오늘부터 밤잠을 설칠게요."
"크큭."
누가 봐도 비웃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표정으로 음식을 씹어 삼킨 천혁수가 김일정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다시 북한으로 돌아갈 자신은 있고?"
"뭐라?"
"네 머리통에 구멍이 나는게, 내일일지. 오늘일지, 아니면 모레일지. 궁금하지 않아?"
"이, 이!"
할 말이 끝났는지 김일정을 지나쳐 부쉬에게 향하는 천혁수. 곳곳의 카메라들과 각국의 인사들이 있기에 언성을 높히지 않은 김일정은 자리에 굳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떨리는 그의 동공이 현재 그가 애써 무시하고 있으나 '공포'라는 것을 느끼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
김은정이 평양에 있는 김일정 사택 중 하나에 대충 배낭을 집어 던지고는 풀썩 침대에 엎어졌다.
"후아, 살갔구만 기래. 미제 침대는 다르긴 달라."
딱딱한 바닥에서 수개월을 지내다보니 침대가 천국처럼 느껴지는 모양이다.
"아바이 동무는 남조선에 내려갔다고?"
"그렇습네다 동무."
"흐음, 요즘 통 외부 일정을 자제하시는 것 같더라니... 그래도 정상회담은 참석 하시는구만 기래."
"공화국 입장에서 빠지기 어려운 자리가 아닙네까?"
이재형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김은정이 누워 있다가 상체를 세우며 이재형을 바라보았다.
"리재형 동무."
"예, 말씀하시라요."
"동무레 나한테 결뎡하라 했디?"
"그랬습네다."
"결뎡 했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김은정을 바라보는 이재형.
"내레 이... 미제 침대에 누워보니 말이야."
"예, 말씀하시라요."
"우리 인민들도... 편하게 살았으면 좋갔어."
이재형이 드르륵 의자를 끌어와 김은정의 앞에 마주 앉으며 물었다.
"아주 험난한 길이 될 겝니다. 당장에라도 썩어지고 싶을 만큼."
"각오 해야디 않간? 지금 이 시간에도 공화국의 인민들은 썩어가고 있잖네?"
이재형이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길타면... 알갔습네다. 그 뜻의 시작까지 얼마 걸리디 않을 것임메."
< 제 287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