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철혈의 재벌-286화 (286/458)

< 제 286화. >

할아버지의 얼굴을 보니 '과연 이번에는 네 놈이 뭘 원할지 궁금하구나'하는 표정이었다.

"정상회담 좀 열어주세요."

"정상회담을 열어 달라?"

"한미중북러 정도면 좋을 것 같은데요?"

데비 할아버지가 놀란 표정으로 나와 할아버지를 번갈아 쳐다본다.

나를 빤히 바라보시던 할아버지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 놈이 또 의뭉을 떠는구나."

데비 할아버지는 무슨 뜻인지 풀어달라는 양 할아버지를 바라본다. 할아버지가 느긋하게 팔을 뻗어 툭툭 노트북을 건드리며 말했다.

"어차피 이거만 있으면 각국의 정상들은 굳이 내가 소집하지 않아도 모이지."

"아 그렇겠군, 한 번 움직여주는 것으로 이 정도 정보라면 훌륭하겠지."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 놈, 더 바라는 게 있구나."

"최대한 일정을 길게 잡아주세요, 예를 들자면 하루는 미국 대통령과, 하루는 중국 주석과, 하루는 러시아 대통령과 등등."

"각국의 정상들을 한국으로 불러들여서 뭔가 할 생각이구나."

어깨를 으쓱였다.

"자세하게 풀어서 말해 보거라, 네 놈 뜻을 알아야 제대로 움직일 게 아니냐?"

"각국의 정상들을 한국에 묶어 두면서, 김일정이를 살살 긁어 주세요, 언제 널 죽일지 모른다는 식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할아버지, 그리고 아까보다 더욱 크게 놀라는 데비 할아버지.

"북한의 독재자를 죽이겠다고?"

나는 입가로 손가락을 가져가며 데비 할아버지에게 싱긋 웃어보였다.

"쉿, 우리만의 비밀인걸로."

"허허, 내가 괜한 소리를 들었구나."

데비 할아버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알지 않아도 될 것을 알았다는 뜨악한 표정이다.

"우리땅에서 김일정이를 잡겠다는 소리더냐? 승낙 할 수 없다."

"에이, 제가 그러겠어요?"

"그러면?"

"그건 뭐, 두고 보시죠."

"흐음... 이 정보를 내가 각국의 정상들에게 얘기하면 장저민 그놈의 입장에서 국가안전부? 거길 털어먹은 게 한국이 되지 않더냐."

할아버지가 우려하는 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미국과 러시아에만 살짝 알려줘도 좋아 할걸요? 굳이 스파이 명단이 아니라 그 놈들이 하려던 비밀 정보만 슬쩍 언질을 줘도 뜨끔 할 겁니다. 그리고 정상회담이 성사되면 스파이 명단을 주겠다는 식으로 회유하는 거죠."

"일단은 적당한 미끼를 던져주어라?"

"예, 러시아와 미국이 움직인다고 하면, 중국도 엉덩이를 들썩일테고, 자연스럽게 김일정 그 돼지놈도 가만히 있기는 힘들겁니다."

할아버지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겠지... 김일정의 입장에서 제 놈만 빼 놓고 우리가 미국, 중국, 러시아와 친하게 지내는 꼴을 보고 싶진 않을테니까."

"예, 그렇죠."

할아버지가 곰곰이 생각하다 물었다.

"일본은 필요 없더냐?"

"어차피 미국 미만 잡 아닙니까?"

할아버지와 데비 할아버지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미만 잡? 그게 무슨 뜻이냐?"

데비 할아버지도 궁금한지 날 바라본다.

"미국 미만 잡놈이요."

"큽."

"파하하하, 그렇지. 잡놈이지, 아주 적절한 표현이구나."

"그럼 그렇게 하시는 걸로?"

"오냐, 네 놈이 뭘 꾸미는지는 모르겠지만, 재미는 있겠구나."

"그럼요, 각국의 정상들이 모여드는 대한민국. 제법 국가 이미지 홍보효과도 무시하지 못할겁니다."

"그렇겠지, 돈은 깨나 들겠지만."

"그 정도면 마케팅 비용으로도 싼 편입니다."

"알았다. 하지만 아무리 서둘러도 두달 쯤은 걸리겠구나, 자리를 함부로 비울 놈들이 아니니."

"예, 시간은 넉넉하니 괜찮습니다."

***

정치범수용소 그곳의 참상은 이루 말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과연, 일제 시절 일본인들이 독립투사들을 이렇게 괴롭혔을까 싶을 정도로.

인권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 그곳은 우위에 선 자와 공포에 떠는 하찮은 인간만이 존재하는 그런 곳이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사람이 죽어나가지만 누구 하나 신경쓰는 이가 없는 별 세계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

김은정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오늘도 그의 손에 의해 치워진 시체가 한 구 있었기 때문, 그리고 언제나 그와 함께 동행하는 이재형의 무감각한 표정에 절로 내쉰 한숨이었다.

"동무... 어찌 이런데만 골라 오니?"

"인민들의 삶을 제대로 알고 싶다 하지 않으셨습네까?"

"이거이 진정 인민들의 삶이네? 변절자 아 새끼들 모아 놓은 곳 아이네?"

이재형이 뚫어져라 김은정을 바라보다 물었다.

"진정으로 그리 생각하십네까?"

"크흠..."

김은정도 알고 있었다.

정치범 수용소에는 꼭, 북조선인민공화국의 반역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김씨 일가의 숙적들의 일족이나 조금 거슬리는 사람들, 아니면 군부 세력에 의해 억울하게 끌려온 사람들.

먹고 살기가 팍팍해 탈북을 시도 하다 잡히는 사람 등, 수많가지 이유와 수많가지 사연을 가지고 이곳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여기 있는 모두가 변절자라 하시믄, 동무께서도 변절잡네다."

"가져다 붙이면 다 말이네?"

"아니라고 생각하십네까?"

"쯧, 이거나 옮기라."

이제는 시체를 '이거'라고 할 정도로 무감각해진 김은정. 그러나, 자신은 온실 속 화초처럼 성장해왔다는 것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세간의 평가가 박한 북한.

유학시절 김은정은 항상 자신을 깔보는 서양인들에게 당당하게 북한은 살기 좋은 곳이라 설파하고 다녔었더랬다.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런 독재로 피폐한 삶을 살아가는 게 아니라고 강력하게 얘기했었다.

그런 그가.

그 때의 자신의 혓바닥을 잘라버릴만큼 창피하다 느끼고 있었다.

서양인들이 손가락질 하던 북한보다. 그가 실상을 알게 된 북한은 더욱 처참하고, 더욱 살기 팍팍한 곳이었다.

이제 누군가 자신에게 북한에서 살만 하냐고 묻는다면 그는 대답할 자신이 없어졌다.

"후... 힘들구만 기래. 여기서도 벌써 두어달이 지났디?"

"예."

시체를 옮기고 털썩 주저앉은 김은정에게 이재형이 품에 있던 담배를 건넸다.

이 담배라는 것도 아무나 사서 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돈'이 필요했고, 이런 기호품에 돈을 쓸 수 있는 존재는 북한에 많지 않았다.

어쨌든 사치의 일종이니까.

"참... 이 려과담배가 귀한줄 모르고 살았디."

이재형이 입꼬리를 들어 올리고는 담배를 입에 무는 김은정에게 말했다.

"이제 돌아가실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김은정의 표정이 애매하게 변했다.

그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다시 찾는 것이 좋으면서도 인민들의 팍팍한 삶을 보고 있자니 죄책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동무."

"말씀하시라요."

"내레... 여차하면 여기 올지 모르갔구만."

삭막한 정치범 수용소를 둘러보는 김은정.

그의 말 뜻을 모르지 않으니 이재형은 피식 웃어버렸다.

"그러니 동무께서 세상을 바꿔야 하디 않갔습네까?"

"그거이 쉬우면 진즉에 했디."

"할 생각은 있으셨습네까?"

"커험..."

"아는 만큼 보이디 않습네까?"

"쯧, 동무는 기, 혓바닥이 총칼 보다 무섭구만 기래."

"동무께서 먼저 원하던 인민들의 삶 아입네까? 아셨으면 바꾸야디요."

"길티... 기런데 그거이 쉽디가 않구만."

이재형도 담배를 입에 물며 말했다.

"세력부터 일구시라요, 그래야 후계가 될 수 있으니."

"아바이 동무께서 지켜볼지 모르겠군."

"좋아 하실 겝니다. 직접 겪고 온 후계자가 없으니."

"동무 생각보다, 아바이 동무는 욕심이 많디."

"영조도 결국 왕의 자리에서 내려왔디요."

"죽어서 말이네?"

이재형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권력욕에 눈깔이 돈 영조는 아들도 듁였디요."

"길티..."

"준비 하갔습네다."

"기래... 가야디, 돌아가야디."

***

-역사상 유례없는 대한민국, 미국, 러시아, 중국, 북한. 이렇게 5개국 정상회담이 열리는 서울. 많은 환영인파들이 각국의 정상들을 보기위해......

각 언론사가 시끄럽게 떠들만큼.

특별한 일이 대한민국의 뜨거운 여름을 반기고 있었다.

대한민국이 이렇게 국제 사회에 크게 대두되는 것도 오랜만이기도 했지만, 우리의 영향력이 세계에 넓게 퍼지는 일이기도 했다. 나의 할아버지 천혁수 대통령의 지지율이 상승하는 것은 덤이었다.

그 어떤 대통령도 하지 못한 일을 할아버지가 성사시켰으니 한국의 위상을 드높였다며 칭송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후르릅."

집무실에서 할아버지와 나는 따뜻한 차를 들이켜고 있었다.

"네 놈이 말한대로 됐구나, 자세한 계획을 읊어 보거라."

"에헤이, 안 알려 줄거 아시면서."

"쯧, 여기서 죽일 건 아닌데 경고를 하라니... 잔뜩 대비 할 게 아니더냐?"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가 바라는 것이 그것이었다.

잔뜩 긴장하고 잔뜩 쫄아있기를 바랐다.

"후우... 참 녀석, 네 놈이랑 얘기를 하면 참 답답해."

"그래서 재밌잖아요? 짜릿하고."

"짜릿하기는 개뿔."

바깥이 소란스러운게 느껴졌다.

"이제 온 모양이구나, 가자. 얼마나 대단한 놈들인지 지켜보러."

"예."

보통 각국의 정상들이 방문하면 공항에서 마중을 나오던게 대한민국이었다.

먼저 고개를 숙인다는 얘기였으나, 이번 만큼은 달랐다. 미국, 러시아는 바라는 게 있는 만큼 기분은 나쁘지만 참을테다.

국민들은 크게 주목하지 않겠지만, 알게 모르게 알력싸움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았다. 현재, 나와 할아버지. SKY와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각국, 강대국의 정상들에게 고개숙이지 않는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청와대의 입구 정도는 나가주었다.

그래도 국제적인 예의가 있으니까.

"반갑습니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부쉬가 반갑게 우리를 맞이했다.

사실 그와는 애초부터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으니 그의 표정이 다른 정상들에 비해 가장 편안하게 보였다. 할아버지가 그를 꼬실때도 별로 어렵지 않았다고 하니, 아직은 그 역시 우리에게 바라는 것들이 많은 것 같았다.

물론 내가 록펠러가의 사위라는게 큰 힘으로 작용하고 있을테다. SKY의 수장이라는 것도.

"반갑소, 푸틴이오."

짧고 간결한, 불곰국 다운 인사.

"장저민이외다."

역시나 가장 건방진 인사를 날리는 돼지놈.

그 사이 살이 조금 빠진것도 같은 게, 철수가 한 일 때문에 여간 골머리를 썪고 있나보다.

자연스럽게 마지막은 김일정이었다.

얼굴 잔뜩 불편함을 매달고 있었다.

각국의 정상들에게 밀려 인사 마저 가장 늦게 해야하는 자신의 처지에 짜증이났겠지.

방구석에서나 여포지 바깥에 나가면 찬밥신세를 모면하기 어려운 북한의 실상이다.

"아실테니 인사는 생략합세다."

건방진 말투다.

그리고 그건 할아버지도 마찬가지로 느꼈을테다.

악수도 나누지 않은 할아버지가 고갯짓도 하지 않고, 장저민과 악수 후 등을 돌려버렸다.

다른 국가의 정상들이 '픽'하고 웃어버리고 김일정의 얼굴은 붉게 닳아오른다.

"들어가시죠, 차를 준비 했습니다."

할아버지의 말에 모두의 걸음이 옮겨지고, 여기까지만 촬영이 허가 되었기에 언론인들은 바깥으로 물러났다. 그들의 카메라에는 잔뜩 똥을 씹고 있을 김일정의 사진이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을테다.

할아버지가 친히 문을 열고 정상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이 정도 서비스는 상관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

마지막으로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김일정을 차갑게 바라보는 할아버지.

"모가지가 뻣뻣하면, 오래 살기 힘들지."

"내레 제대로 들은 거이 맞소?"

"아직 젊은데 벌써 귀가 먹었나?"

노골적인 도발에 김일정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것처럼 붉어졌다.

< 제 286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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