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85화. >
다음날 아침.
정확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업무가 시작될 9시가 되자 마자 한통의 전화를 받을 수 있었다.
전날 밤, 새벽까지 좀 움직였더니 피곤했기에 전화를 거절하고 싶었지만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라 그러기가 애매했다.
-회장님!
"아, 강기태 본부장."
-회장님이 입금하신겁니까?
"예? 뭐요?"
-파나마 지부에... 3조 2천억이라니. 파나마가 흔들릴만한 현금입니다.
"에이, 또 뭘, 그 돈에 흔들려요 흔들리길."
-이만한 현금부자는 없을 것 같은데요.
"몇 바퀴 세탁하긴 했는데, 전문가들 아니라서 부족할거에요, 본부장이 알아서 마무리 해 주세요."
-아, 깨끗한 놈은 아닌가봅니다.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돈에 깨끗한게 어디있습니까? 다 더럽지."
-그건 맞죠.
"하여간 깨끗하게 빨래해서 본부장이 쓰기 편한 곳에 옮겨 놓으세요."
-호오, 마음대로 굴려도 되겠습니까?
"좋을대로."
-예.
"언제든 유보금 20퍼센트는 바로 쓸 수 있게 준비하는 거 잊지 마시고요."
-예, 20퍼센트는 바로 쓸 수 있게, 나머지는 3일 이내에 쓸 수 있게 항상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럼 됐습니다."
전화를 끊으려는데 그가 날 불렀다.
-아, 회장님.
"예."
-찰리가 요즘 부쩍 심심한 것 같았습니다.
"인수할 껀덕지가 없어서 심심하답니까?"
-하하, 예.
확실히 현재의 SKY는 더이상 다른 회사를 흡수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덩치가 커진 상태였다. 이제 내실을 다지고, 현재 가지고 있는 것들의 규모를 키우면 되는 일이다. 그것만 해도 SKY는 전 세계에 우뚝 설 수 있었다.
여태까지는 기반을 다지는 것이었고, 이제 다져진 기반을 더 크게 키우기만 하면 된다는 뜻.
"찰리 박이라..."
-적당한 임무 좀 주시죠? 빈둥거리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사실 저도 꼴뵈기 싫습니다.
"하하하, 그래요?"
-예.
"알겠습니다. 마침 괜찮은 일이 있을 것도 같으니까 전화 해보죠."
-예, 갑사합니다.
늦잠을 거나하게 자려고 했는데 강기태의 전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인다고 했는데 어느새 옆자리에 누워 있던 루시가 도끼눈을 뜨고는 날 바라보고 있었다.
"아, 깼어?"
"이 남자가 새벽에 들어온것도 모자라서 아침부터 육아에 지친 와이프를 깨워?"
피식.
루시의 앙탈이 귀여워보였다.
며칠 출장을 갈 것 처럼 말하고 금새 돌아 왔으니 오히려 그녀의 기분은 풀려 있었다.
하늘하늘하게 온 몸이 다 비치는 옷을 입은 여인들이 내 온 몸을 마구 건드리던 게 다시 떠오른다.
"오늘따라 귀엽다?"
내 말에 루시가 '으으'하는 표정을 지으며 '느끼해'를 연발했다.
이제는 한국인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한국적 표현력이 많이 늘어난 루시.
"안 되겠다."
"뭐가?"
"오늘 셋째 만들어야겠어."
"뭐?"
나는 거칠게 이불을 걷어내고는 루시를 덮쳤다.
"꺄아아악! 안 돼!"
"돼!"
***
루시가 피곤에 찌들어 자는 것을 확인하고는 목을 좌우로 꺾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깥으로 나가니 이미 해는 중천이었고, 데비 할아버지는 제법 더워진 초여름의 바람을 맞으며 신문을 읽고 계신다.
"엥? 한국 신문이네요?"
"아, 요즘 공부중이야."
"벌써 신문을 읽으실 만큼 어휘력이 되세요?"
"일단 눈에 때려 박는 거지, 이해는 그 다음이고."
피식, 데비 할아버지가 하시겠다는데 내가 말릴 필요는 없었다. 슬쩍 시계를 바라본 데비 할아버지가 말했다.
"수가 같이 점심을 하자던데?"
"아, 그래요?"
"이제 곧 올때가 됐지 아마?"
호랑이 같은 할아버지 답게, 정원을 뚜벅뚜벅 걸어오시는 게 보였다.
"간밤에 출장은 잘 다녀왔더냐?"
"예, 할아버지."
"시장하다. 밥이나 먹자."
밥이라는게 준비하는데도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할아버지가 잠깐 데비 할아버지와 이러쿵 저러쿵 대화를 나누는 사이, 나는 찰리 박에게 전화를 걸었다.
-회장님!
"하하, 누가 보면 한 몇년 이별한 사이 같네요."
-거의 비슷한 것 아닙니까? 요즘 통 연락이 없으셔서 사표를 내야되나 했습니다.
"강기태 본부장이 박 대표님 한량처럼 놀고 먹는다고 잔소리를 하더군요."
-커험, 부정하기 힘든 얘기군요.
확실히 의미없는 출퇴근을 반복했나보다.
"많이 심심하시다고?"
-후우... 일 좀 주십시오, 아주 죽을맛입니다.
"기업 사냥꾼 하시던 분이신데, 다른 사냥도 자신 있으실까 모르겠네요."
-뭐가 되었든 가만히 있는 것 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봉사도 좀 할 줄 아세요?"
-봉사요?
"예."
-뭐 때문에 그러시는지...
"우리 장인어른께 훌륭한 보좌관이 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
보지 않았지만 찰리박이 고개를 갸우뚱 거리는 모습이 그려졌다.
"뭐, 자세한 얘기는 만나서 하는 걸로? 오랜만에 강 본부장이랑 해서 도다리에 소주나 한잔 합시다."
-좋죠.
"저녁에 적당한 곳에 예약하겠습니다."
-예, 회장님 이따 뵙겠습니다."
***
오랜만에 할아버지와 같이 먹는 식사였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고 하던가.
어느새 루시가 부시시한 몰골은 없어지고 예쁘장한 손주 며느리가 되어 식탁에 앉아 있었다.
"수! 보고 싶었어요."
그녀의 애교에 무뚝뚝하기 그지 없던 할아버지의 얼굴이 스르륵 풀린다.
"하하, 그러냐? 아이들과 같이 놀러 오래도."
"에이, 나랏일 하시는데 태양이 별이가 좀 유별나야죠."
"우리 나라의 기둥들이 아니냐, 다들 이해 할 게다."
"가끔 쑤가 와서 아이들 사랑해주시는 것 만으로도 전 만족해요."
"녀석, 오기 귀찮은 것은 아니고?"
"그럴리가요?"
도우미 아주머니가 할아버지의 품에 태양이를 안긴다.
"어이쿠, 많이 무거워졌구나. 제법 살이 올랐어."
밥 먹을 생각은 하지 않으시고 아이들을 보느라 시간을 다 쓸 것 같은 할아버지.
따로 할아버지와 할 얘기도 있고 하니, 나는 서둘러 수저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얼른 식사부터 하시죠? 태양이랑 별이도 밥 먹을 시간입니다."
"쯧."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날 한번 째려보시지만 이내 수저를 들어 올리신다.
단란한 식사가 끝나고 방바닥에서 태양이와 별이를 등에 업고 기어다니는 대한민국 대통령.
그러나 그 모습을 어색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하부! 하부!"
할아버지의 등을 두들기며 외치는 별이의 말에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그것은 할아버지도 마찬가지.
벌떡 상체를 세우려다가 황급히 바닥에 납작 엎드리시고는 날 바라보며 말했다.
"방금 별이가 날 부른게냐?"
"그런 것 같은데요?"
"오냐, 별이야. 내가 네 하부다 하부야!"
곧 눈물이라도 한 방울 떨어뜨리실 것 같은 얼굴이다.
"하부지, 하부지."
이어서 태양이도 별이와 비슷한 발음으로 할아버지를 외쳤다.
"오냐, 내 똥생이들, 할아버지 여기 있다."
정확히는 증조 할아버지가 맞겠지만 뭐 어쨌거나 할아버지가 감동의 눈물을 떨어뜨리며 바닥에 엎드려있자니 이건 뭐, 내가 청나라 황제라도 된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인조고.
물론 인조가 감동의 눈물을 흘리진 않았겠지, 울화의 눈물이었을 터.
삼전도의 치욕, 삼궤구고두례 등등.
하여간 감동적인 장면을 보고 있자니 생각이 자꾸만 딴 곳으로 흐른다. 본능적으로 이런 자리가 어색한가 보다.
"커험,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구나."
태양이와 별이를 꼭 껴 안고 하는 말에 루시가 할아버지를 뒤에서 안으며 말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우리 아이들 시집, 장가 갈때도 살아 계셔야죠."
"그래?"
"네~ 제가 우진이 말고 우리 수가 신부입장 하게 만들게요!"
"호오, 그건 쫌 끌리는구나."
"그러니까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오냐, 그래! 이 하부가! 하부지가! 우리 귀여운 똥생이들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줘야지!"
짝.
나는 손뼉을 마주쳐 크게 소리를 내고는 말했다.
"자자, 드라마는 그만들 찍으시고, 이제 태양이 별이 낮잠 잘 시간입니다."
할아버지가 눈쌀을 찌푸리며 날 째려보았다.
'꼭 지금 그래야겠더냐?'
'벌써 2시입니다.'
"커험."
도우미들이 어색하게 웃으며 아이들을 데리고 가고, 루시도 서둘러 아이들을 재우기 위해 윗층으로 떠났다. 거실에는 나와 할아버지, 그리고 데비 할아버지가 덩그러니 남았다.
"아이들이 잘 때가 아니면 시가를 태우기가 어렵지, 한대 태우시겠나?"
데비 할아버지의 말에 할아버지가 나를 째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셋은 바깥으로 나갔다. 그것도 정원 가장 구석진 곳으로.
"왜 그렇게 나와 아이들을 못 갈라 놓아서 안달이냐?"
"에헤이, 무슨 말씀을 또 그렇게 하십니까?"
"아니면?"
"다, 드릴 말이 있어서 그렇죠."
"해 보아라, 별 것 아니면 오랜만에 체력단련실 구경이나 하고 가야겠구나."
오우야.
아주 서릿발 날리는 경고였다.
물론, 내가 힘을 쓰자면야 할아버지가 기진맥진 할 정도로 만들 자신은 있으나, 손주된 입장으로서 그러면 되겠는가.
물론 전심전력을 다 해도 내가 오할의 확률로 질테다. 할아버지는 나이에 맞는 노련한 경험으로 힘의 분배가 대단하니까.
지하 경제를 호령하던 산군이시다. 얕잡아 봤다가는 된통 당하는 수가 있었다.
"다행이 그럴 일은 없을걸요? 할아버지가 보면 아주 만족할 만한 놈이라."
"보따리를 풀어 보아라. 구경이나 해 보자."
내가 호언장담을 하니 솔깃하신 모양이다.
데비 할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시가를 입에 무시니, 나도 입이 근질거렸으나, 차마 할아버지들 앞에서 시가를 무는 만행을 저지르진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유교의 나라 아니던가.
"쩝."
손을 뻗어 신호를 보내니 어느새 나타난 호석이 작은 테이블 위에 노트북을 올려 놓았다.
"무엇이냐?"
"보시죠."
데비 할아버지에게도 숨길 게 없으니 나는 두분에게 노트북 화면을 돌렸다.
"중국인들 신상 명세서 같은데..."
데비 할아버지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중국 국가안전부, 그러니까 우리나라로 치면 국정원, 미국은 CIA쯤이 되겠네요, 거기 요원들 신상입니다."
할아버지와 데비 할아버지가 날 바라보며 눈으로 묻는다.
'이게 뭐?'
'그래서?'
"여기 있는 사람들은 전 세계 각지에 퍼져있는 스파이들이라는 얘기입니다. 미국은 물론, 한국에도 심어져 있는 놈들이란 얘기죠."
할아버지가 와락 표정을 구겼고 데비 할아버지는 신기하다는 듯 신상명세를 바라보았다.
"호오, 요긴하게 쓸 수 있겠는데."
"떼 놈들이랑 붙어 먹는 놈들을 잡을 수 있겠구나."
"그렇죠?"
데비 할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동시에 물었다.
"어디서 가져 왔더냐?"
"어디서 구했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자를 받으려는데 좋아 보이길래 주워왔습니다."
"중국에서 가져왔다는 소리구나."
"그렇죠."
"흐음... 각국에 요긴하게 팔아도 될 것이고, 외교적으로 압박을 해도 될 것이고... 허허, 참. 좋은 무기구나."
할아버지가 손을 뻗어 USB로 가져가신다.
스르륵.
나는 할아버지의 손에서 노트북을 내 쪽으로 끌어오며 말했다.
"에헤이, 아실만한 분이 왜 이러실까?"
눈썹을 꿈틀 거리는 할아버지.
"공짜는 아니다?"
"친구하고도 공과 사는 제대로 구분하라 하셨던게 할아버지 같은데요."
"내가 네 놈과 친구더냐."
"친구보다 더 각별한 사이니까 공과 사는 제대로 구분을 해야겠죠?"
"독한 놈."
"독한 놈이 잘 사는 법입니다."
데비 할아버지가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피식 웃으시고는 말했다.
"우리 손녀 사위 잘한다."
할아버지가 철썩 데비 할아버지의 허벅지를 때렸다.
"이 사람, 이러긴가?"
"하하하, 우진이 맞는 말을 하지 않는가?"
"자네도 보따리를 몽땅 털려봐야 정신을 차리지."
"아직 내 보따리는 별로 탐이 나지 않는 모양이야."
"그것도 금방일세, 금방."
다시 내게 고개를 돌린 할아버지가 말했다.
"그래, 원하는게 무엇이더냐?"
< 제 285화. > 끝